樂山

산청 오부면의 바랑산-소룡산 2011.11.12 토

benel_jt 2011. 11. 13. 12:57

산청 오부면의 바랑산-소룡산

2011.11.12 토 부산토요
바랑산 소룡산
산청군 오부면 소재

10:50 신촌리 주차장
11:00 산행 시작
12:00 이정표[예동마을 0.6km, 바랑산 1.4km] 거창군 지역이다.
12:30 바랑산 정상, 이정표[소룡산3.3km, 신촌 2.6km]
13:06 정상에서 중식 후 출발
13:14  갈림길 이정표[천지사, 왕촌]
13:21 갈림길 이정표[소룡산2.4km, 바랑산0.9km, 천지사 0.5km]
13:30 큰재인 듯 하나 이정표가 없다.
13:32 이정표 [바랑산 1.6km, 폭포,독촉주차장 0.6km]
13:38 큰재, 이정표[바랑산1.7km, 소룡산1.7km]
13:54 새이덤을 곁에서 옆으로 조망
13:59 이정표 [새이덤 20m]
14:05 소룡산 앞의 따뜻한 남향 봉우리에서 30분 정도 휴식,
다시 잠간 새이덤을 밟고 되돌아 나옴(늘바람님의 강력한 권유가 있어)
사실 이곳이 오늘 산행의 백미라고 해야겠다.
14:37-42 소룡산 정상
14:43 헬기장
14:56 이정표[소룡산0.9km,강섭산1.8km] 오휴가 아닌 거창군 신원면으로 하산한 셈이다.
15:04 이정표[소룡산0.7km,강섭산2.8km]
16:02 대현마을 임도
16:11 오부면 대현마을회관, 회관 앞에 버스 이동, 승차 후에 생초의 매운탕집으로..

 

마을회관 앞길을 따라

 

 

도라지 밭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길에 엎드리면 주워 올 정도로 흩어져 있다.

대열이 흩어지지 않고 천천히 함께 가는데 감동..

부상자 구호 하는 동안은 전원 휴식

임도가 제법 길었지만 아무도...

예동마을에서 오른다면 힘이 적게 들 것 같은데...

거창군이 세운 안내판, 진양기맥 종주...

저 아래 보이는 게 예동마을인데 길이 완만하다.

 

 

 

 

솔잎이 깔리고

 

낙엽이 길을 덮어

 

큰재

 

세이덤으로 오르는 급경사로

세이덤, 상여바위라는 말

세이덤 조망바위에 서서

세이덤을 바라본다.

 

 

 

 

세이덤에 올라 동쪽 능선에 보이는 바위군, 송곳바위..

 

 

세이덤에 서서

소룡산 정상

 

 

 

생초의 식당 앞에서 보는 필봉과 왕산

 

 

※바랑산의 유래: 옛날 고려시대쯤에 신촌마을 뒤에 절이 있어(지금도 절터가 있음) 스님이 바랑을(지금의 배낭)메고 왕촌 뒷산(지금의 바랑산)을 넘어 다녔다고 해서 생긴 유래(왕촌뒷산에는 암자가 지금도 있음-천지사)-홍용수 옮김
http://cafe.daum.net/obu/ZnQ/31?docid=16z7|ZnQ|31|20020801182834&q=%BF%C0%C8%DE%20%B8%B6%C0%BB%20%C0%AF%B7%A1

오부면의 마을 유래

오휴와 까마귀
남양 홍씨의 조상이 산청읍 장재에서 살다가 임진왜란때 산중으로 피신하던 중에 흰 까마귀가 막대기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뒤따라갔던 바 지금의 홍굴(洪窟) 앞 바위에 앉으므로 그 아래에 자리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오휴(烏休)라고 하였다 한다. 이 홍굴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 왕촌과 돛대바위
이 마을은 왕씨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왕촌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1㎞쯤 되는 곳에 은선암(隱仙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왕씨들의 전성기에 그들의 압력으로 할 수 없이 하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때 승려들이 분을 풀기 위해 돛대바위를 없애버렸는데 그 이후로 왕촌의 운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이 절이 하동 쌍계사의 모사(母寺)라고 한다.

♣ 신촌과 말티고개
신촌에서 북쪽으로 2㎞ 지점에 '은선암'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던 중에 차황면과 경계를 이루는 대현 뒷산에서 짐을 실은 질마가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여 이 고개를 '질매재'라 하였고, 그 말이 진주 근처의 고개에서 죽었다고 하여 '말티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 신기의 약수샘
옛날 이 마을 앞 2㎞ 지점에 '중바위'가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중을 학대한다고 중들이 그 바위를 없애 버리자 마을이 한때 패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뒷산으로 약 1㎞ 지점에는 풍병도 완치된다는 약수샘이 있었다. 이 샘은 이제는 상수도로 끌어와서 마을 주민들의 생활용수로 쓰이고 있다.

♣ 옥가답과 팥죽배미(오전)
현 학교의 터에는 옥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 샘물이 하도 많아서 그 물로 농사를 짓는 논을 '옥가답'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어느 해 가뭄이 극심하여 기근으로 고생할 때 팥죽 몇 그릇만 얻어먹고 논을 주었다는 두 마지기의 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를 알지는 못한다고 한다.

♣ 중촌(中村-가운데 마을)
부곡골의 중앙이라 하여 '가운데 땀'이란 뜻으로 중촌이라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오른편에 있는 매봉재 밑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변씨들이 모여 살았다고 구전하고 있다. 요즘도 기와 조각과 부엌자리가 그 곳에서 발견된다.

대현(大峴-높은 고개 밑의 마을)
고려 말기에 밀양 박씨의 고자대감이 정착하여 고제기(高梯基)라 하였다. 그 후에 진양 강씨가 피난차 입주하였는데 이조말엔 '권밀양 화주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뒷산에는 임진왜란 때 강씨가 피난하였다고 하여 '강굴'이라고 이름 붙여진 동굴이 있다.
차황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고제현(高梯峴)이라고 한다.

♣ 내평
원래의 이름은 아전(芽田)이라고 했고, 마을 뒷산은 성인산과 송의산이 자리잡고 있다.

♣ 양촌리
양촌리는 양촌과 음촌을 합한 마을로서, 원래의 지명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잠자는 소'의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하여 '면우리(眠牛里)'라 하였다. 주민들의 성격도 마치 온화한 암소같이 온순하고 부지런하다.

♣ 내곡리
이조 초기에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왕씨들 가운데 한 무리가 지금의 내곡에 터를 잡고 살면서 '안골'이라고 칭한 이후로 이곳을 한자말을 써서 '내곡'이라고 부르고 있다.

♣ 금곡
이조 고종때까지도 금(金)을 파내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원래 뒷편쪽 500m 지점에 자리잡았던 것이나 소년상(喪)이 많이 발생하여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 방곡리
이 마을은 원래 '주변의 경치가 꽃같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방실'이라고 불리던 것을 행정구역 개편시 한자의 음을 따서 '방곡'이라고 하였으며, 먼저 생긴 마을을 '원방곡', 뒤에 생긴 마을을 '중방곡'이라 하였다.

♣ 일물리
이 마을 형국이 마치 초승달과 같다 하여 월늑(月肋)이라고 했는데 이조 말기에 어느 현감이 월(月)자를 파자(破字)하여 '일물(一勿)'이라고 한 이후로 그것이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 중매와 선양동
중매는 중매나무(中梅木)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선양동은 예산에 동네 입구에 '성황당'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