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구미 금오산 2011.3.17 목

benel_jt 2011. 3. 19. 00:14

 

산행일시 : 2011.3.17 목 10:40-16:00 (5시간 20분)

 

10:40 금오산 주차장 도착, 체조
10:45 산행 시작,
10:47-10:53 채미정 탐방
11:10-케이블카(800m 밖에 안되지만, 탐방 시간과 체력 조절을 위해 선택)
11:18 케이블카에서 대혜문과 대혜폭포를 내려다봄
11:34 도선굴
11:42 대혜폭포
12:00 할딱고개(바로 아래 성안으로 통하는 이정표가 있는데...)
12:04 [정상, 약사암 1.7km]
12:18 [정상, 약사암 1.4km]
12:21 [정상, 약사암 1.3km, 폭포에서 0.8km]
12:38 [정상, 약사암 0.9km, 성안 0.8km, 마애석불 0.6km] 그런데 마애석불길은 눈이 쌓여 있어 포기했다.
12:40 철전주, 점심식사
13:09 [정상 0.8km, 폭포에서 1.3km]
13:28 정상부, 폭포에서 2.0km, 정상보다 약사암을 먼저 탐방
13:30 정상 50m, 약사암 쪽으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고 덤으로 붙인 안내판이 하나 있는데..
13:45까지 약사암에서 종각, 주변 조망, 스님과 담화
13:47 약사암에서 석문으로 오르며 바위에 새긴 글 城將 鄭鎭行 좌측에는 작은 다른 글씨가 희미하다.
13:51 정상 금오산 현월봉 해발 976m, 폭포에서 2.1km
14:03 남쪽으로 돌아 약사암에서 보이던 탑을 찾음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든 넓은 헬기장을 경유함
14:09 성안, 칼다봉 방향 이정표를  따름
14:19 삼거리 이정표, [정상에서 0.4km, 칼다봉 1.9km, 금오동천(화살표만 있고 거리는 없음, 처음에 금오동학으로 착각)
14:24 금오산성중수송공비
14:26 금오정(샘은 있으나 안내가 없음)
14:31 삼거리 이정표 [정상에서 0.6km, 칼다봉 1.7km, 폭포 1.9km, 자연환경연수원까지는 4km]
15:20 폭포
15:30 대혜문
15:35 금오동학金烏洞壑
16:00 주차장

 

 

 

 

 

이 지도는 1진의 개념도이며, 우리는 금오정에서부터 대혜골을 따라 대혜폭포로 하산했다. 하산 구간에 약 100m마다 있는 구미소방서의 긴급구조를 위한 이정표가 있어 물을 건너면서 길이 헛갈릴 때 길잡이가 된 적도 있다.

 

 

 

 

금오산 정상석, 현월봉..달을 매달아 놓은 산..

 

 

주차장에서 보는 금오산의 모습

 

금오산도립공원의 홈페이지는  구동 속도가 느리지만 주옥같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어 빌어 왔다.


금오산의 별칭들

1. 남숭산(南嵩山) - 중국의 오악(五嶽)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다.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숭산(嵩山)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남숭산이라 명명하였고,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되었다.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는데, 그 왕자는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해져 호국불교의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였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000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말하는 것은 이처럼 그 위용(偉容)과 품격이 비범한 데서 기인되었다고 여겨진다.
2. 소금강(小金剛)과 수양산(首陽山)
금오산은 암석으로 골짜기마다 남성적인 기상이 넘치는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힘과 기백(氣魄)이 서려 있고,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옛 선현(先賢)들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렀다.
또한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이야기와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의 충절을 기려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곡군 숭산리의 순국의사(殉國義士)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선비들이 다 사모하는 수양산 기슭에다 내 시신을 묻어다오" 라고 유언(遺言)을 할 정도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수양산으로도 통용(通用)되어 왔다고 전한다.
3. 필봉(筆峯)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上峯)이 흡사 붓끝 같다고 해서 필봉(筆峯)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해서인지 선산지방에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문인(文人), 달사(達士), 명필(名筆)이 대(代)를 끊이지 않았다.
조선조 성종(成宗)때의 문신 성현(成俔)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材 半在 嶺南이요 嶺南人材 半在 善山)"라 하였고, 그 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그와 같이 언급되었으니 이는 모두 금오산 정기(精氣)의 영험(靈驗)이라는 평가도 있다.
4. 귀봉(貴峯) 거인산(巨人山)
구미시 인동 방면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하여 귀인과 대작(大爵)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귀인이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貴峯)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또한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같다고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5. 노적봉(露積峯)
김천방면에서 보면
부잣집 노적가리 같다고 해서 노적봉(露積峯)이라 하였는데 실제로 옛부터 이 지방에는 큰 부자(富者)가 많았다.
6. 적봉(賊峯) 등 그 외의 별칭
김천시 개령면 방면에서 보면
큰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적봉(賊峯)이라 하였으며,
성주군 방면에서 보면
여인네가 산발한 모습 같다고 해서 음봉(淫峯)이라 하였다. 이런 많은 별칭들은 금오산의 위용(威容)과 준엄(峻嚴)한 자태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애정이 담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금까마귀 대신에 헬리콥터가 낮게 정상에 비행하다가 헬리포터에 살며시 내렸다 간다.

금오산...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안에 금까마귀가 산다고 믿었고 그 금까마귀는 발이 셋달린 삼족조(三足鳥)로 기이한 형상의 까마귀이나 태양의 핵이요 상징으로, 태양은 원시시대부터 인류의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 어느 민족이던 원시종교의 형태로 신앙의 자체라 믿었으며 그 태양안에서도 핵이요 정기(精氣)인 금까마귀는 우리 인류의 절대적인 존재였었다.

고려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고,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하여 호국불교로 포교와 국정의 자문에 임하도록 했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970년 6월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온 국민의 자연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전설들

 

금오산은 원래 대본산(大本山)이었다.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며 나는 새를 따라왔더니 이 금오산에 와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내어 날아왔다고 하여 금오산(金烏山)이 되었다고 한다.
(유영칠, 남·64세, 칠곡 북삼면 숭산)

옛날에 천지개벽이 나서 온 세상이 물이 잠겼을 때 산이 거무(거미)만큼 남았다고 해서 구미 금오산이 되고, 개와(기와) 만큼 남았다고 해서 성주 개아산(가야산)이 되었다고 한다. (배양환, 남·75세, 칠곡 북삼면 금곡)
금오산은 천지개벽 때 전부 바다가 되었는데 산봉우리가 까마귀 머리만큼 남아서 금오산이 되었다고 한다. (박세록, 남·74세 구미시 원평동)

천지가 개벽 할 때 금(金)만큼 남아서 금오산이라 짓고 바우남산 (금오산의 남쪽의 영암산(鈴岩 山)을 가리킨다. 한자 뜻대로 하면 방울암산이 정확하겠으나 현지에서는 바울암산, 바우남산 바우암산 등으로 불린다)이라 했다.

천지개벽 때 배를 맨 금오산의 꼴뚜바위
"꼴뚜바위라고 거 돌맹이가 요시 꼭 꼴두바위식으로 돼가 있지, 거 선착장에 가소 보면 뭐야 배줄에 거든거 군함 같은 거 거 고런 형으로 바위가 있지 요, 그래서 그걸 꼴뚜바위라 카지요. 그걸 인자 어떤 분이 우리가 전에 들은 애긴데 옛날에 거 뭐 몇 천년 전에 했는지 모르지만 천지개벽할 적에 요게 그 물바다가 돼가지고 거기서 배를 맸다는 전설이 있지요." (유영칠, 남·64세, 칠곡 북삼면 숭산)

천지개벽 때 배를 맨 바우남산의 쇠말뚝
"바우남산 만댕이 저기 쇠말뚝이 하나 꼽히가 있는데 예전에는 그 따가 줄을 매가주고 말이지, 천지개복할 때 마마 물이 입빠이 돼가주고, 거이 거따가 배를 매가주고 사람이 인제 안 떠니러가고, 그 따가 시말뚝에 거어 달아 맺히가주 그래 살았던 모양이랴." (이방주, 남·68, 김천시 남면 부상리)

남매혼(男妹婚)으로 태어난 ㅇ씨(氏)의시조 (始祖)
" 김천시 남면 오수라고 있는데 그 때 큰 물이 져서 인종은 거덜나고, ㅇ씨가 오누 ㅇ씨거든. 오누만 남아가주고 있다가 고게 갈쑨이라 카는데.... 가 있으니 너하고 나하고는 배필 겉으만 살고. 양봉에 가서 불을 낳았거든. 불을 놔가주고 연기가 합하거들랑 암만 형제간이라도 살고 히이지거들랑 안 살자. 참 양봉에 가서 불을 노이께 연기가 합수했어. 그래 ㅇ씨가, ㅇ가라고 이카마 오누 ㅇ가거든. 오누의 몸에 인제 손이 퍼져가주고... ." (신ㅇㅇ, 남·76, 남면 월명1리[섶밭])

 

주원장(朱元璋)
금오산에서 태어난 주천자
내 금오산 애기 하문 하께요. 예전에 예전에 저어 주천자가 오데서 났노 하마 금오산서 났어요. 그 이제 터들머리 총각이 금오산으로 올라가미 약사절 밑으로 올라가민 낫으로 풀을 쳐올라 간께로, 그 약사절 앞에 대사가 이래 내리다 본께로, 큰 구리이 (구렁이)가 쑥 나와가주울를를 물라고 한께, 대사가 ' 총각 총각, 자네 머리 밑에 치리다 보게` 칸 께로, 온통 석가래 겉은 구리가...
이 총각아 낫츠로 목안지를 축 친게 고만 목안지가 툭 끊어지거든요. 목안지가 끊기자 인제 파랑새 한마리 날라 나오는 게라요, 구리이 속에서. 그래 인제 대사가 저놈의 새가 어데로 가는고 싶어 자꾸 이래 본 께로,... 인제 중이 따라가지요 그래 인제 시바테이(쇠바탕:금릉군 남면 오봉2리 우장(牛場)을 가리킨다) 너머로 거리 넘어와서 덤바우(금오 산 북쪽에 위치한 선기동 소재의 마을임) 모지라 왔지요.
고짜 들가운데 영감 할마이가 서쑥밭을 매다가 ... 인자 점섬밥을 먹고... 곤한게, 그늘 밑에서 누웠다 본께로 고 파랑새가 고리 쑥 드거거든요. 그래 영감이 할마이가 우째... 자다가 보이 인제 동품을 한 게라, ...그래 인자 대사가 갔어요.
몇 달 후에 애기가 생기 나오거들랑 절로 보내 달라고 이래 그카고... 영감 할마이 .... 및 달 거슬 라가 주고 어린앨 논께로 이 어린애가 나자 마자 핑상 윈손을 피질 않고 만날 윈손을 이래가주고 있는 기라요.
그래 서당에 학생 아이들이 한날은 낮잠을 자는데 선생님이 가만히 이 얼라 손바닥을 펴 본께로 하늘 천짜, 천자(天字)가 쓰여가 저절로 이래. 그래 야가 한쉼자고 일나디이 그래, `선생님, 내 손 피이 봤지요' 이카는 기라요. 그래 피이 봤다 칸게, `선생님 나한테 죽어야 됩니다.' 그래 고만 선생님 쥑이고 이 아이가 대국으로 가가 주천자 가 돼 갔었답니다. 이런 말이 있대요, 금오산에서.' (장지환, 남·82, 원평동)

 

설화들

 

금오산에 쇠말뚝을 박은 왜인
 
옛날에 왜놈이 침범했을 때 중국으로 청병을 가지고 이여송을 데리고 와서 왜놈을 물리쳤지만은.... 이여송이 볼 적에 한국에 여기는 마 아주 전부 정기가 마 대단하누 돼가지고 사람이 너무 많이 난다 해서 맥을 많이 잘랐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중략(中略))
그랬는가 하면은 그 때 어른들에게서 들은 소린데 거기는 가보면 지금 반다시 칼을 대가지고 내리 쪼삿는 거 같이 완전히 표가 난다. .. 그카고 나서 이여송 장군이 한국 명기를 끊었는가 하 하면은 왜놈들은 말은 즉 측량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점이라 카면서 상망대에 말뚝을 박았지마는 사실상 그 말목은 한국의 명기를 없애기 위해서 주름있는 데만 시말뚝을 뚜드려 박아서... 금오산 어디 박아 났다 캐요. 금오산에 박은 건 왜놈이지. (이상원, 남·66 금곡리)

 

선산에 다사배출을 질투하여 단맥한 이여송경북 선산은 산천이 맑고 아름답기 때문에 "한국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의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한다. 사실 그 속담대로 예로부터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신이 이 곳을 지나다가 한국에 이러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술사에게 명하여 병졸로 하여금 선산읍 뒤에 있는 산맥을 끊고, 그 위에 숯불을 태워 달구어 큰 쇠못을 박아 넣어서 그 왕기(旺氣)를 눌렀다. 그로부터 이 곳에서 인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 (八道總論))

 

개인묘 쓸 수 없는 금오산

"금오산 꼭대기, 바우가 용우뜸인데 그 곳 미(묘)를 쓰면 1년간 비가 안와. 날이 가물면 거게 누기 미 섰다고 우우 모아가서 그 미 파내고 기우제를 지냈어." (길인석,남·69 강진)

 

"가뭄이 들면 문탐한다. 그래 알아보면 금오산에 누가 산소 써서 그렇다꼬. 모여서 파로 가지. 주인을 알면 캐내라고, 우리가 못 살게 되니.. 임자가 없을 때는 그냥 파 내떤지는 거지." (김종수, 남·69 갈항)

 

  

 

 

 

 

 

풍수가 알아본 박정희"오태가면 인동장씨가 많이 안 삽니까? 인동장씨네가 많이 사는데 `장씨가' 그러면 영남 부자 입니다. 영남 부잔데 서울까지 가도 남의 땅을 별로 보행을 안 밟고 간다 하는 그런 부잔데, 하도 여기 사람이 안 나서, 빛을 못 내서, 국풍을 데려다가 즉 말하자면 육관대사카나 그런 사람이지요, 국풍을 데려다가 오태 지리를 봤답니다.
상구 밟아서 금오산 쪽을 밟아 오다가 상모동에 고 한 곳에 와가지고 산끈뜨기 소쿠리 같이 요리 돼 있는 집을 가르면서, `이 터를 사라, 이 터만 사면은 사람나는 데다.' 그래 그 집이 누 집인지 모르이께네 저 백씨네들 산지기네 집이라 카더라. 그래서 거 주인한테 이야기를 하고 집을 사기로 하고 약속을 다했는데 해거름에 학생이 하나 책보를 둘러메고 떨렁떨렁 온다 캐요. 들어오는데 거기서 어른이, 이거는 뭐 최근의 이야깁니다.
그래 ` 야 야, 이 집을 팔기로 했다'니까 `절대 못 팝니다. 이 집은 절대 못팝니다.' 그러카면서 아이는 삽작 바깥으로 나가는데 거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라 풍수가, 국풍하는 말,`아이고 안 된다. 사 봤자 헛일이다. 이 터에는 하매 사람이 났다. 아이구 늦었다.'그 사람이 바로 박정희랍니다." (이상원 남·65, 금곡)

 

 

 

오수작탈형인 박정희의 집터"이렇게 보면은 구미가 오수작탈로 박대통령이 까마귀가 까치집을 뺏어 앉는 형상이 돼 있거든. 까치부리까지 다 있습니다. 여기 상중에 가면 오태는 까마귀 태중, 거어는 금오산에 있으면서 금오산이 안 보이고 낙동강가에 있으면서 낙동강이 안 보입니다. 들어가는 입구가 좁은데 들어가면 아늑한 게 자궁 같애요. 오태(烏胎), 까마귀의 태중이라.
그래 박정희 대통령집을 보면 까마귀가 까치집을 뺏어 내려 앉은 형국이라. 본래 맷새가 집을 지이면 버꾸기가 알을 낳아가지고 살고 까치집 지이놓으면 까마귀가, 까마귀는 집을 안 짓습니다.
그래서 박대통령집이 고 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나라를 뺏는 거거든요. 혁명을 해가주고.. 고 상모에서 보면, 고오 건너 보면 산쪽으로 가면 까치가 막 돌아서가지고 짖는 형상이라."
(성수스님, 僊鳳寺 주지)


[出處 : 金烏山 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대혜문과 금오산성 

 

 

하산길에 본 대혜문 

 

정상 아래 약사암의 문이 되는 통로는 자연적인 성문이다. 

 

약사암에서 오르다 보니 계단 끝나는 부분에 성을 지키는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城將 鄭鎭行 그 좌측에도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금오산성

금오산성은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성지(古城址)이다. 조선 중종시대(中宗朝)의 기록에 의하면 금오산은 고려 때에는 남숭산이라 불리었고, 선산부의 남쪽 43리에 위치하여 서쪽은 개령 동쪽은 인동, 북쪽은 부(府)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금오산성은 석축의 둘레가 7644자(尺), 높이가 7자이고, 그 절반 이상이 암벽으로 이루어져 몹시 험준하고 고려말에 선산, 개령, 인동, 성주 등의 많은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았으며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수비했다고 하니 고려말에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성안"의 동쪽 사면에 있는 송공비, 다른 지역의 비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는데 입구를 열어 뒷부분까지도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 이걸 찾으려고 성안에 들어갔다.

 

 

 입구 케이블카 승강장 앞의 금오산성사적비

 

 한글 가로쓰기로 되어 있어 아이들도 읽기에 편하게 되어 있다.

 

후손이 후원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

성안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이 비석은 산의 경사면을 깎아 평탄한 부지를 조성하고 사방에 1∼2단의 석축을 쌓아 세운 것이다.
부지의 크기는 420cm×510cm 이며, 비석은 부지의 가운데에 북향으로 서 있는데 장방형의 비석받침에 팔작지붕형의 碑蓋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높이가 150cm, 폭이 62cm이며 두께는 26cm로 碑身의 앞뒤에 모두 23행 643字가새겨져 있으며, 글씨는 題額만 전서로 하고 나머지는 행서(行書)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내용상 고종 5년(1868)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의 내용은 " 고종 5년에 承旨 李容直이 城에 올라 그 성의 허물어진 상황을 대원군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대원군이 修築을 명하였고, 백성들도 감동하여 修築에 참여 하였으며, 그 결과 성의 길이가 3,370보이고 누각이 모두 100餘間이 되었다 " 는 것이다. "이 비석은 通政大夫前行工曹參議 朴文鉉이 撰하고 朝奉大夫前注書 李能華가 썼다" 라고 되어있다.

 

유교문화

삼국시대 건국초부터 중국대륙의 여러 왕조와 빈번히 접촉하였으니 고구려는 한, 위, 북조 및 수, 당, 등의 문화를 받아들여 학술, 종교, 미술, 공예 등의 진보가 대단했고 영양왕 11년(600년)에 벌써 한자로 사기를 기록했고 백제도 근초고왕(346-374) 말년에 박사 고흥이 서기를 지었다.
또한 신라도 22대 지증왕(500-513) 23대 법흥왕(514-539) 때 이미 대륙의 문물을 그대로 따랐으며 젊은 학도와 승려를 수, 당에 유학시켜 크게 꽃을 피웠다. 그중에서도 설총과 최치원이 크게 두드러진 분이다.
고려에 들어와 성종(982-997)은 신라의 설총을 홍유후로 추봉하고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봉하여 문묘에 배향하니 우리나라 유자들의 문묘배향이 처음이었다. 중기에는 최충이 사학을 일으켜 크게 융성하더니 숙종(1096-1105)과 예종(1106-1122)에 이르러 관학이 진흥되고 과거제도가 시작되어 젊은 학도의 등용문이 열려 더욱 크게 융성하였고 안유는 충렬왕 16년(1290) 연경에서 신간 주자서를 읽고 작심연구하고 손수 베끼고 공자의 초상화를 묘사하여 왔다.
고려말에 이르러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가 회헌 안유의 송학을 이어 양촌 권근에 이어졌고 이고장 출신 야은 길재는 이색 포은 양촌등의 연원을 같이 조선조 사림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호를 야은이라 했는데 금오산아래 살았다해서 금오산인이라고도 한다.
양촌과는 한 살 차이였지만 스승으로 모셨고 양촌이 타계하자 3년 심상을 입었다.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과거 동문수학한 의로 태상박사로 추천했으나 야은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킬 수 있도록 부탁했다.
야은은 향리에 돌아와 사숙을 열고 지방 학도를 기르되 실천방면의 학문을 중히 여겨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앞세우고 사람의 언행이 낮에 착오가 나는 것은 밤에 존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고 밤이면 정좌하여 밤중이 되어야 자리에 들고 혹은 이불을 덮고 앉아서 밤을 세우기도 했다. 새벽에 닭이 울면 관대를 갖추고 정장하여 사당과 선성에 먼저 예를 올렸고 상장과 제사에는 오로지 주자가례 만을 따랐다.

 

그는 조선의 뼈대와 정신의 지주로서 확고하게 구축한 공로가 있고 그의 학맥을 사학의 연원을 열어 사림의 고도한 풍도를 이루었다.
그의 문도로는 예천 사람 조용과 역시 예천 사람 윤상이 있고 선인으로 강호 김숙자는 12세때 야은에게 배우고 뒷날 별동 윤상에게 주역을 배웠다. 벼슬이 성균관사예에 이르렀고 그의 학문은 아들 점필재 김종직에게 전해졌고 점필재는 문도가 매우 많아 한때 사림의 극성기에 이르렀다.
그의 문도로 저명한 분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매계 조위, 탁영 김일손, 지지당 김맹성, 임계 유호인, 우제 손중돈 등 대부분 영남 출신의 인사들로 모두 조야에서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에 이르러 유학의 꽃이 피워졌으니 모두 야은에게서 이어온 유학의 맥락이요 조 선조 500년 동안 정신문화의 뼈대를 이루어 오늘날 세계속으로 뻗어가는 국력도 세계의 석학들의 말에 의하면 끈끈한 맥이 오늘에 사는 한국민의 혈류속에 흐르고 있음이라 하고 있으니 다가오는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한국민은 유학의 정신문화로 이루어 나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한 뜻에서 오늘날 구미문화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를 [금오문화제]로 승격하고 발간하는 기관지도 [금오문화]지라 하고 있음은 금오산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총본산이요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왕복 케이블카를 탔으면 놓칠 수 밖에 없었겠지. 고을동(洞)자만 보이는 것 같아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 붙였다. 그런데 해석을 너무 화려하게 했다. 그냥 '이 지역을 금오동 골짜기라고 한다' 정도로 해도 될텐데...솔직히 크기도 지나치게 과장한 표현이다.

금오동학

외성과 케이블카 승강장 중간지점의 북편 낮은 절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고 하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할 만한 큰 글자로

,

그 뜻은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이란 뜻

이니 선산의 대망(大網)출신으로 덕산(德山) 사람인 경주부윤(慶州府尹) 상정 황필(橡亭 黃筆)의 손자이며 진사(進士) 황옥(黃沃)의 아들로 이름은 기로(耆老)요 호는 고산(孤山)이다.
그는 일찌기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서예에 정진하여 초서(草書)에 특히 능했으니 모제 김안국(慕薺 金安國)과 중국에 들어갈 제 그의 솜씨가 뛰어나 이구동성으로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 하여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 극찬하고 서로가 글 한 점씩 얻기를 원했다 한다.
그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여식 하나만 있어 덕수인(德水人) 율곡(栗谷) 선생의 아우인 옥산 이우(玉山 李瑀)를 여서(女壻)로 맞아 선산 강정리(江亭里)의 고산아래 보천탄(寶泉탄)에 정자를 지어 매학정(梅鶴亭)이라 하고 매화(梅花)와 학을 기르면서 옹서(翁壻)가 같이 즐겼으며 금기시서(琴碁詩書)가 능하여 세상에서는 사절(四絶)이라 하고 옹서간에 서로 詩로서 화답하고 보천탄을 굽어 보며 소일하면서 지냈다.
고산선생은 '두줄기 눈물이 낙강에 드리우니 先考께서도 이 강변에 거니셨으리. 외로운 섬 유정의 현판에는 말하지 마라. 들난 곳 아름다움을엔 고깃배만 떠 있어. 가신 어버이 글 차마 못 읽을래라 ' (衰淚雙垂洛水前 先君曾到此江邊 莫君孤島幽亭扁 非爲名區美勝齊 樹悲風無靜日 滿江明月有漁船 爺過忍讀爺仙試)라고 읊으니 옥산이 대구(對句)하기를 '그대 내집이 어디냐고 물었지. 산 등진 강 앞에 싸리문이라네. 시시로 구름끼어 사장을 덮으니.
싸리문은 볼 수 없고 구름만 보일 뿐' (君問我家何處在 依山臨水庵荊問 有時雲顚沙場路 不見荊問只見雲)이라고 새소리, 바람소리, 구름소리 물굽이 등 자연을 두고 노래하며 한 세상을 보냈다.
여기 금오산에 음각(陰刻)된 글씨는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히 있으나 세월의 무심함이런가 풍마우세(風磨雨洗)로 마모되어 판독조차 어려우니 보는 이로 하여금 안스러움을 짓게 한다.

 

 

 

회고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는 어린 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즐겨 암송하던 것이라 더 반갑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와 더불어 동시대의 시조이다.

 

구미 채미정(採薇亭)

이 건물은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정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이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채미정은 흥기문을 지나 우측에 있는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정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가 있는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다리 건너 흥기문

 

흥기문에서 바로 경모각이 보인다.

 

 

 

경모각 안에 영정과 숙종임금의 어필이 보인다.

 

숙종 어필 해석좌사간 길재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청림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함은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함일세.

한(漢) 나라 엄광(嚴光)의 고사. 엄광은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공부했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성명을 감추고 숨어살았음. 이를 광무제가 찾아 내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며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음. 후세에 그의 낚시질하던 곳을 일러 엄릉뢰(嚴陵瀨)라 하였음

 

 

채미정 앞에서//고사리를 캐는 정자라고, 고사리를 캐어 연명하던 백이-숙제의 옛일을 거울 삼아..

 

 

도선굴(道詵窟)이 굴은 천연동굴이며 암벽에 뚫린 큰 구멍이기에 대혈(大穴)이라고도 했으나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선사가 득도했다해서 도선굴이라 한다.
고려 충신 야은 길재 선생이 대혈사와 이 굴 아래를  소요하며 도학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향인이 난을 피해 암벽의 틈에 기어오르는 칡넝쿨을 부여잡고 이 굴에 들어와 세류폭포의 물을 긴 막대로 받아 먹으며 피난했으니 그 인원이 100여 명에 달했다 하며, 현재의 통로는 1937년 경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며 내부는 길이 7.2m, 높이 4.5m, 너비 4.8m 정도 된다.

 

 

 굴의 내부

 

 

 

도선굴에서 바깥을 보며 나가는 통로

 

 

 

석판에 새긴 통로기의 말미에 기록자는 직명이 면장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아니다. 위의 지운 부분은 연대일텐데...왜 그랬지. 아마 1937년경이니까 왜식연호를 사용했겠구나. 昭和十二年이라고..그렇다면 연대를  긁어 둔 이유가 이해는 간다만... 가슴 아픈 역사는 역사가 아니랴. 민초들의 고난이 얼마나 컸으랴

 

 

 

 

 

 

 

 

대혜폭포(大惠瀑布)와 욕담(浴潭)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한 수직 27m 높이의 이 폭포는 대혜폭포 또는 대혜비폭(大惠飛瀑)이라 하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는 별명도 있다.
금오산 정상 부근의 분지에서 발원하여 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이 고장 관개(灌漑)의 유일한 수자원이 되니 큰 은혜의 골이라 하여 대혜골이라 했고 주변의 경관은 경북8경 또는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또한 물이 떨어지는 일대의 움푹 패인 연못이 있어 욕담(浴潭)이라 하니 선녀들이 폭포의 물보라가 이는 날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주변 경관과 옥같이 맑은 물에 탐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금오지를 내려다 보며 

 

칼다봉 방향을 바라보며 

 

 

 

 

 

 

 

 

할딱고개, 대혜폭포에서 계단을 따로 오르면 그 끝이 할딱고개동국제일문이라, 이 아래에 약사암이다. 일주문이 절 뒤에 있는 셈인가. 문의 우측에 알루미늄 판에는 이 곳에 급수 시설을 위한 도움의 손길들이 누구인지를 남겼다.금오산성으로 자리할 당시 이 곳은 중요한 방어시설이 되고, 법성사 방향에서 오르는 통로도 되었을 것이다

.

 

삼성각 뒤로 보이는 계단의 끝에 서 있는 바위가 장군의 모습인가..."성장 정진행"이라는 새김이 있다.

 

 

 

 

저 암벽 위에 불탑, 부회장님은 저 길을 나중에 찾아 확인한다.헬기 한 대가 이 쪽을 향해 날아 오른다.

 

종각에 가는 출렁다리도 문을 걸어 잠궜다. 저 곳에 가면 노태우 장군의 희사 흔적이 있단다.약사암에서 우측 앞으로 보이는 저 암벽 위에 불탑 몇 기가 있는데 마을의 어느 노인이 쌓은 것이란다.

 

군용헬기인 듯하다.약사암 마당에서 저 아래 능선에 고양이 한마리가 쥐를 잡고 있다고 스님이 전해준다.

 

고양이

 

이 암벽 아래가 약수암이다.

 

 

저 철다리는 폐쇄. 다리 건너면 샘물이 쫄쫄 나오는데 지금은 그나마도 없단다. 그래서 그래서 뒤쪽으로 산너머 '성안'에서 지하수를 전기로 끌어 올려 물탱크에 저수했다가 사용한단다. 금오산은 평지돌출형이라 물이 귀하다고 스님이 전하지만, 다녀본 겨울 산에서 폭포에 물이 흐르는 곳은 대혜폭포 외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산 골짝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게 물이 귀한 건 아닌데...약사암은 정상에 있으니 물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약사암은 전국에서 2등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하더라고 김ㅇㅇ님이 전한다.그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런데 2등이라는 말은 확인이 필요하다.1등이 지리산의 법계사라는 말은 공인된 것이라 하지만...  부회장님의 안내로 약사암 건너편까지 가서 탑들을 보았다. 쌍거북이라는 명찰이 인상적이다.

 

 약사암 건너편으로 가서 본 돌탑의 모습들 

 

쌍거북이

 

 
  

 

마애불과 금오동천은

이번에 어느 팀도 가지 못한 아쉬움에 빌어온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freemanksd?Redirect=Log&logNo=100114182535

금오산마애보살입상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불상.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0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5.55m이다. 이 불상은 거대한 암벽의 모서리에 조각된 마애석불로, 불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다. 머리에는 3면보관(三面寶冠)이 있으나, 마멸로 조각한 장식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나타났으나,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팔굽을 약간 굽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자세로 옷자락을 잡고 있다. 발은 곧게 서 있으며, 발가락은 매우 크고 듬직하다. 입상(立像) 앞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기둥의 초석이 있고 기와 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 자체에도 목조 가구(架構)의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선지(一善誌)》 기록으로 미루어 보봉사(普峰寺)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얼굴·신체·옷무늬·광배 등에서 9세기 보살상보다 더 발전한 형식화가 나타나 있으므로, 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금오동천

 

 '금오동천',  거리도 나타내지 않은 이 이정표는 특정한 지점에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이름이 金烏東川, 金烏洞川으로 착각을 했으나 金烏洞天이라는 음각이 있음을 찾았다.

그렇지만 엄연히 金烏洞天이니....

 

 金烏洞天이라면 금오동의 하늘??? 금오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첫 동네?? 그런데 이 음각의 위치가 계곡의 중간에 있다니... 백과사전 등에는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금오산에 있는 계곡"이라고... 

사진출처 석기시대님의 블로그에서(http://dolkee.blog.me/40124938828)

 

금오동천 [金烏洞天]
[출처] 금오동천 [金烏洞天 ] | 네이버 백과사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금오산에 있는 계곡.
금오산(976m) 정상에서 서쪽으로 800m 아래에 있는 성안분지를 중심으로 산 아래 계곡이 끝나는 곳까지를 말한다. 바닥까지 비치는 맑고 깨끗한 물이 사철 우렁찬 소리로 흐르며, 곳곳에 기암괴석과 폭포, 소(沼)가 있고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다. 계곡의 옆길로 등산로가 있으며, 계곡 중간 쯤에 산과 내에 둘러싸인 깊고 큰 골짜기라는 뜻의 금오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