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칠곡 가산 오계산 20211002 토

benel_jt 2021. 10. 2. 22:52

칠곡 가산 오계산 20211002 토 솔로(R&L,K)

 

코스 :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할머니할아버지바위-산성-가산 정상(902m)-용바위-유선대-가산바위-성곽길-황학지맥 갈림봉(847m)-가산바위-성곽길-팔공지맥에서 황학지맥 분기봉(847m)-오계산(466.3m)-소야고개(245m) <11km/6:00>

 

 

가산, 오계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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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역-대구역, 대구역-명덕역-칠곡경대병원역...팔공3 승차-칠곡 가산산성 진남문 하차

팔공3의 출발지.

토요일과 공휴일에만 출발하는 특별한 경우이며, 갓바위까지 팔공산을 중심으로 운행한다.

평소에도 승객이 없는지 오늘은 탑승객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팀 4명이 더하니 엄청난 숫자가 된 듯한 느낌인가...

 

칠곡 가산산성 진남문

칠곡 가산산성(漆谷 架山山城)


칠곡 가산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축 산성, 경상북도 칠곡군.
1971년 3월 26일 사적 제216호로 지정.
===
<현지 안내문>
이 산성은 가산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쌓은 방어 성곽이다. 이 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조선 인조 18년(1640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축성을 조정에 건의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에 관찰사 정익하의 장계에 의해 왕명으로 완성되었고, 외성은 숙종 26년(1700년)에 관찰사 이세재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성내에 별장을 두어 성을 수호케 하고, 인근 경산,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 지역의 군영 및 군량이 이 성에 속하도록 했으며 칠곡도호부를 산성 내에 두었다. 내성은 그 길이가 1,710보(약 4km)이며, 동서북의 분지 및 8개의 암문이 있다. 중성은 602보(약 460m)이며, 성문루, 위령각이 설치되었다. 외성은 3,754보(약 3km)이며, 남문 및 암문 3곳이 설치되었다.
이 성의 주 출입구는 외성의 남문이다. 성내의 건물 들은 남아 있지 않고 건물 터만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성벽 및 암문은 원형을 남기고 있다.
===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
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 내에 있었다.
내성은 인조 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건의로 쌓았으며,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크다.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왕명에 의해서 쌓았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 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의 집중 폭우로 문 위쪽의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 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100여 m의 고도를 힘겹게 치고 오르니 바로 할아버지할머니바위다.

이건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덤이다.

반대편에 약간 올라가서 한 번 내려다 보고서야 후련하다.

 

이건 정상석이 아니고, 이정석이다.

윗면에는 용바위를 가리키는데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현위치라는 뜻인가.

 

 

삼각점표는 있는데, 이정석을 삼각점으로 삼은 걸까.

저 아래 보이는 비석이 정상석이다.

저곳은 장대터라고 한다. 옆에 안내가 있다.

정상에서 용바위 0.1km, 유선대 0.2km, 가산바위 1.4km

 

아래에 자리 잡은 가산 정상석(902m)

정상석과 장대터는 같은 위치에 있다.

정상석과 장대 안내가 있는 곳에서 정상의 모습은 우러러보아야 볼 수 있다.

용바위와 유선대를 찾아가는 동안 저 바위를 보면서 용바위인가?

정상 부근의 용머리와 유선대의 이정표는 각각 100m, 200m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 오른쪽으로 내려간 위치의 철난간으로 안전시설이 된 곳이 용머리, 저 아래가 유선대다.

GPS로 확인된 거리도 거의 일치한다.

파이프 울타리가 있는 저 바위, 과연 신선이 놀다 갈만 하다고 하면서 보았는데.

저쪽에서 바라보니 정말 신선 외에는 감히 놀다 갈 수 없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등산지도의 표시는 이게 유선대,

앞의 그 용머리 같은 모양이 용바위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가산산성 등산로 입구에서 가져온 안내에는 위에 첨부한 지도 사진에서와 같이

이게 용머리이며, 그 아래의 뾰족한 성의 부분이 유선대라고 적혀 있다.

그냥, '유선대'나 '용머리' 중의 하나만 선택해서 이 부근에서 신선이 놀았다고나 하지.

많은 헛갈리는 자료들..

앞으로는 더할 혼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들 사이에서... 

그렇지만 법관의 화인 맞은 양심보다 더 맑은 양심들이 판단할 것 아닐까.

진실한 역사는....

유리처럼 투명한 세상인데.

그들은 후손들과 역사에 두고두고 조롱거리로 남을 것이다.

 

용바위의 전망대에서 나오다 보니 마가목의 빨간 열매가 예쁘다. 이 산에 유독 마가목이 많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고도가 낮아졌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미답의 구간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리는 조금 늘어난다,

황학지맥분기점까지 가려면. 

그런데 예정보다 너무 지체되었다.

그래서 조금 편한 길을 택했다.

가면서 가산바위의 위용도 다시 한 번 챙겨 볼 여유를 얻을 수 있고.

 

가산바위 이정표가 앞에 보인다.

자가용이나 관광버스가 아니고는 힘든 곳으로 생각했던 곳이 오는과 같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으니

다음 이른 봄에는 한 번 보고 갈 수 있을까.

 

위에는 가산바위, 옆에는 용바위와 화살표가 있다. 

이정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가산 정상에도 이런 게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상석일까 했었다.

 

가산바위의 오르는 방향이 그늘이 졌다.

 

너른 가산바위에 사람이 많아 끝에서 동쪽의 능선 방향을 조망..

성곽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우측에 이등변삼각형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소학산이다.

황학산 다음 구간에 통과할 곳이다.

여기서 나침반으로 측정하니 소학산 정상이 정서향이다.

그렇다면 지난 번에 궁산에서 보았던 그 정경을 생각해보니 

90도 정도 좌로 돌리면 와룡산 부근일텐데 너무 희미하여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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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바위
가산바위는 가산산성에 자리함.
17세기에 산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높은 망루 중 하나.
바위 위에 오르면 멀리 대구광역시와 영남대로의 산세를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의 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산바위의 정상부는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셰일이 두텁게 반석(磐石)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넓고 평탄한 층리(層理)로 발달하여 국내의 일반적인 화강암 바위와는 달리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바위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바위 가운데의 큰 구멍에 신라 고승 도선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地氣, 토양 속 공기)를 눌러두었는데, 조선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며 이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련 문헌으로는 『여지도서』(1757∼1765)에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우수한 전망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1899년 발간된 <칠곡부읍지>에는 ‘칠곡의 3대 형승(形勝)으로 바위의 크기가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사방의 경관과 봉우리와 별들이 펼쳐져 있다’라고 묘사되는 등 오래도록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된 역사성이 있다.

 

가산바위에서 내려와 바위에 이어지는 북서방향의 성곽을 따라 황학지맥분기점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현재는 팔공지맥길이다.

 

팔공지맥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모래재 안내가 있는데, 모래재는 팔공지맥 상에 있다.

이 안내판을 따르면 황학지맥이 이어지는데,

저기 급경사가 보이는 황학지맥 분기봉으로 향한다.

 

수구문이 아니고 석문인 것 같다. 안내는 없다.

 

직진하면 팔공지맥, 좌회전하면 황학지맥이다.  (해발 847m)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곳인데도 119안전이정목이 보인다.

여기까지 내려온 길은 급경사라 조심스럽지만 길은 찾을만하다.

 

거리를 나타낸 이정표도 있을 정도다.

여기까지는 길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겠다.

모래재는 우로 완전히 꺾어서 가는 임도다.

황학지맥은 임도를 횡단하여 직진한다.

여기서부터는 한동안 길이 거칠다.

잡목이 좀 있는 정도.

 

580m봉에 걸린 표지기들

 

누리장나무 열매가 반짝인다.

 

투구꽃이 잘 자라고 피었다.

 

여기도 6.25전사자 유해발굴지역이다.

바로 건너편이 유학산이 아닌가.

다시 지난 해의 두 죽음이 생각된다.

하나는 구국의 영웅 백선엽장군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박대를 했을까.

또 하나는 성범죄로 사퇴한 서울시장이다.

범죄자를 위해서는 5일장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게 자랑스러운 역사일까.

 

이 나무의 표시는 유해발굴장소를 말하고 있다.

 

오계산 정상(466.3m)에도 표지기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앞의 580m봉 등 더 높은 봉이 있는데도 굳이 여기에 이름이 주어진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이 산의 이름이 여기가 아니라는 동네 사람들의 주장이 있다고들 하는데...

 

삼각점..

 

철탑 아래를 통과한다.

해주최씨 가족묘역을 지나면 산길은 끝난다.

 

을유년 9월 중양절

60년이 지나면 어떻게 둔갑시킬 건가

소야고개, 여기가 다부원휴게소인가.

매점에 잠시 들러 간식.

승차지점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이동 경비가 늘었다. 

소야고개(245m),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앞으로 차들이 쌩쌩 달린다.

예상보다 너무 늦어 교통편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실봉산(457.5m)을 넘으면 이곳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차를 타기 위해 걸어서 오게 되었다.

 

다부초등학교 앞의 버스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예보가 없자 택시로 학명리로 가기로 하고 이동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그 버스를 타고 동명까지는 갈텐데...

오늘 대중교통은 실패, 실패를 거듭했다.

 

검색결과 학명리 정류소로 버스가 온다는 정보가 있었는데도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그걸 탔다면 도착 시간도 훨씬 빨랐을텐데....

덕분에 할인도 되지 않는 토요일의 새마을까지 탔네...

불과 5분 정도의 차이로....

사실은 자동차전용도로에 인도가 없는 길이라 1km를 걷기에는 안전에 부담이 컸던 건 사실이다.

다부초등학교 방향은 갓길이라도 있었으니 다행.

 

다부초등학교 앞 정류소에서 검색하니 이쪽에선 곧 도착 정보가 없다.

그래서 일단 택시로 이동 학명리까지..

세심하게 검색하지 못한 실수에 대한 댓가.

가산오계산교통비.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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