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전남 강진의 만덕산..다산의 유배지를 찾아서 2011.12.17 토

benel_jt 2011. 12. 19. 12:24

2011.11.17 토

만덕산-강진, 다산초당


11:29 석문 도착
11:33 석문등산로
11:37 석문 정자
11:39 대석문 등산로 [백련사 5.81km, 석문정 0.16km, 삼거리 0.58km, 바람재 4.87km, 옥련사 7.47, 용문사 0.93]
11:55 삼거리 [백련사 5.23, 석문공원 0.58, 용문사 0.35]
13:04-27 중식
13:31 이정표 [바람재 1.47, 용문사 3.04]
13:44 안테나, 돌담
13:53 바람재
14:06 개구리바위(두꺼비바위) 이이름은 우리가 지나가면서 붙였다
14:19 이정표 [바람재 0.26, 깃대봉 0.54, 다산초당 1.13]
14:34 만덕산깃대봉, 이정표 [바람재 08, 필봉 1.39], 이정표 [헬기장 0.45, 바람재 0.8, 필봉 1.39]
15:05 백련사
15:17 해월루
15:27 천일각
15:29-다산초당 동암, 다산초당, 서암
15:50 다산유물전시관
16:06 귤동마을 주차장

 

 

 

 

 석문공원, 앞에 보이는 다리 앞쪽이 석문인 듯하다. 양쪽으로 암벽이 가로 막혀 문의 역할을 ...

 석문정 앞에 선 바위가 아래에서도 눈에 띄는게 석문의 문지기인가

 

석문정 石門亭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산58-2번지
이 정각亭閣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선열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혼의 정신을 기리고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도암면민의 뜻과 힘을 모아제1대 尹明夏 도암면장 등이 건립한 사각 돌기둥 목조기와 형태인 해방기념각이 있던 자리이다.
잦은 태풍 등의 영향으로 건물 일부가 멸실되었고 남아 있던 건물을 1981년 인근 용문사로 옮기게 되었다.
道岩面에서는 해방기념각을 복원하여 옛 선열들의 애국애족하던 정신을 계승하고 후손들의 민족사랑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강진군에서 사업비 9천만원을 확보하고 2004년 2월 착공하여 2005년 4월 준공하였다.
또한 石門山의 奇巖怪石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석문정을 관광객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자연석 돌계단으로 등산로를 개설하고 주변에 동백나무와 철쭉을 식제하여 관광객의 편의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石門亭이란 명칭은 이 곳 도암 출신이며 茶山 丁若鏞 선생의 외손자이신 舫山 尹廷琦 1874~1879 선생, 조선시대 학자인 松下 吳漢奎 1838~1908 선생, 그리고 옥봉 백광훈 1537~1583 선생께서 이곳 석문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詩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에 각계 각층의 주민과 문화예술인 등의 의견을 모아 命名하게 되었다.
上樑文은 만인 김세환 짓고 현판의 글씨는 청강 윤승동 쓰고, 청암 김성이 서각하다.
2005년 8월 10일 도암면장

 이어지는 능선이 온통 바위길이다

 

 

 

 벼랑 끝에 선 바위 위에 개구리가 앉은 듯한 바위...보는 이들마다 감탄을 발하며 지나간다.

 

 

 

 만덕산 깃대봉 정상석

 

 백련사

 백련사 사적비 안내판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해월루

 천일각

천일각 天一閣
천일각이란느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일애각天一涯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m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다산동암 현판

 동암의 현판 중에 보정산방은 추사의 글씨라고 한다.

동암 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 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여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 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이게 연지석가산이라고 한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이 돌이 다조

다조
다산이 이 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 곳에서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의 제3경이다.

 

 

 

 

 

다산초당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남윤공의 묘소, 외가인 이 집안에서 배소의 마련을 주선했다고 한다.

 

 

 

 

 

 

 

정다산 유적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 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 준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 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牧民心書, 經世遺表, 欽欽新書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