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진도 첨찰산 - 보길도 2011.4.28-29 목,금

benel_jt 2011. 5. 2. 22:29

2011년 4월 28일은 복된 날이었다. 충무공탄신일이기 때문인지 진도를 찾았다는 건 매우 의미 깊은 날이기도 하다. 바로 그 곳 진도대교가 울돌목, 백의종군의 억울한 중벌에서, 애써 육성했던 수군의 주력을 모두 잃게 된 후에야, 패장인 상관 원균의 명을 거스려서라도 탈영 패주한 배설에 의하여 12척의 배와 잔류한 병력을 모아 총력을 동원한 왜군을 상대로 대승하여 서해를 통한 진출을 차단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는 명량해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배설은 다시 비겁한 탈영을 하였다가 권율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래도 칠천도  참패의 전멸에서 12척의 배와 군인을 살린 영웅이었는데, 그가 있었기에 명량해전 대승의 기틀을 마련했건만.... 참 아이러니한 역사다.

1시간 앞당겨 6시 10분에 덕천동 지하철역에서 부터 승차를 하였다. 김해를 거쳐 서쪽으로 달리고 달려 진도대교 앞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다리를 건너기 전의 우수영공원, 진도대교를 지나면서 차 안에서 충무공의 동상을 3개나 본 것 같은데.... 그럴만 하다고 동의하고 싶다. 이 곳 전투가 한산대첩이나 노량해전보다 그 중요성 면에서 무게를 더 둘 만하지 않았을까.

첨찰산을 향해 들어가면서 삼별초가 옹립한 승화후 온의 무덤이 있다는 고개를 지났다. 이 고개를 세 번이나 넘으면서도 왕온의  묘라는 안내판만 보고는 지나치는 안타까움.... 그래서 다음 기회에 승용차로 와서 차분하게 답사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운림산방을 지나 진도아리랑비가 있는 곳에서 13:00 경에 산행이 시작되었다. 14:00 정상 도착, 15:00 쌍계사 도착.

쌍계사 바로 옆에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이다. 일정표에 운림산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이던 허유(1807∼1890)가 말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선생은 30대에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아 남종화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헌종(재위 1824∼1849)의 총애를 받아 임금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으며, 왕실 소장의 고서화를 평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시·서·화에 뛰어나 3절이라고 칭송되었는데, 대표작으로 ‘선면산수도’, ‘완당선생해천일립상’등이 있고 『몽연록』을 저술하였다.
운림산방은 철종 8년(1857)에 귀향하여 지은 것으로 본채와 사랑채인 화실, 신축된 유물보존각 건물과 연못이 있다.

다시 왕온의 묘가 있는 재를 넘어 진도개 공연을 관람하고(이건 무료였다고 한다), 다시 재를 넘어 금계리 해변에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다는 모도와  그 부근을 조망한 후 용장산성으로 이동하였다. 성곽을 보려면 산으로 올라야하는데 행궁지만 보고 그 부근의 용장사와 홍보용 시설물들을 관람하였다.

진도에 들어가기 전날에 버스가 통과하게 될 도로 부근의 지도를 위성지도로 살피면서 한 번 쯤 보고 싶은 곳들을 체크해 보았는데. 대교 동편에 우수영 공원, 대교 서편의 녹진전망대와 바로 아래의 강강술래터, 벽파항의 이충무공전첩비 등은 괜찮을 듯 했는데 모두 지나쳤다. 다행히 저녁 식사를 대교 서편의 횟집에서 하게 되어 식전에 급히 달려 대교 하부 울돌목의 파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조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데 그 모습이 홍수 때 낙동강 하구의 물보다 더 빠른 것 같고 소리 또한 우렁찼다. 식당에서 900m를 오르면 녹진전망대이지만 울돌목의 관심이 더 컸고, 이동 시간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 숙소인 해남 대흥사 아래의 집단 시설 지구로 가니 벌써 어둠이 짙어졌다.

4-5명이 한 방을 사용하여 밤을 지냈다. 집을 떠나 있으니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지만 따뜻하게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착각, 저녁 식사를 한 곳인 줄 알고 녹진전망대를 일찌기 올랐다가 오면 운동도 되고 전망도 살피고 일석삼조이겠다 싶어...그런데 착각이었던 것이다. 치매 전조는 아니리라.

아침 식사 계획이 7시 30분이었는데 8시경에 배식이 된다는 걸 확인하고는 숙소에서 나와 고바우님과 함께 가벼운 아침 등산을 했다. 고계봉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의 하부로 갔지만 길이 완전히 덤불로 막힌 상태라 적당히 오르다가 되돌렸다. 손과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남기고...

2일차 일정은 솔직한 마음으로 매우 느슨한 느낌으로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 시간부터 남들보다 뒤로 밀렸다. 어떤 팀은 우리가 일어나서 아침 산행을 하려고 했던 6시 조금 지나 식사가 끝나고 차량 승차 및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시간에 조리해서 8시경에 배식한다고 했으니 시작부터 좀 늦었던 셈이다. 아니 여유롭다고 하는 게 더 덕스러운 말이다.

대흥사를 돌아보았다. 2009년 9월 3일 두륜산 산행 때 다녀온 곳이다. 우리 산악회에서는 2001년과 2009년에 갔다 온 곳인 셈이다.

송지면 땅끝마을로 가서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정상에 다녀 왔다가 다시 땅끝탑을 찾아서 진잦개 해변길을 걷게 되었다. 조금더 정보가 있었다면 조정을 할 수 있는 코스였을 수도 있었겠는데..덕분에 경사로는 피하고 걸었으니 투자한 가치는 충분히 되는 셈이다.

모노레일이 왕복 4,000원, 전망탑이 또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땅끝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멋진 장면이다.

12:00 탑에서 귀환하면서 바로 점심식사, 곧 이어 13:00에 보길도행 카페리를 타고 30여분 동안 파도를 가르며 남진하여 보길도에 이어진 노화도의 산양 선착장에 도착했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두 개의 교량을 통과하면서 이어졌다.

섬이 크지 않아 이동시간은 20분 정도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보길대교를 지날 때는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나올 때는 걷지 않아 시간이 단축되어 선착장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보길도에서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이다. 담양의 소쇄원과 비교할 때 차라리 접근성이 떨어져서 문제일 뿐 소쇄원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이게 더 멋진 정원이라고 생각되는데...양산보 소쇄원의 흉내라도 내어본 걸까.

 

담양 소쇄원 [潭陽瀟灑園]은 1530년(중종 25) 조광조의 제자 소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南面) 지곡리(芝谷里)에 건립한 원우(園宇).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전체 면적은 4,060㎡(지정구역), 118,866㎡(보호구역)이다.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고암정사(鼓巖精舍)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다.
홍문관(弘文館)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출처] 담양 소쇄원 [潭陽瀟灑園 ] | 네이버 백과사전

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尹善道園林]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의 항복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은거를 결심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경관에 매료되어 머물렀던 곳이라고 전한다.
윤선도는 1637년(인조 13)부터 1671년 죽을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곳에 드나들며 글을 쓰며 생활 했는데 햇수로는 13년이나 되어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가 많다.
세연지(洗然池):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판석(板石)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이다.
세연정(洗然亭): 1637년 세연지 가에 단을 조성하여 지은 3칸짜리 정자이다.
낙서재(樂書齋):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하던 곳으로, 석실과 마주보이는 곳에 있다. 무민당(無悶堂) 등 건물 4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집터만 남아 있다.
곡수당(曲水堂):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지은 집이다. 윤선도의 아들이 조성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이다.
동천석실(洞天石室): 곡수당 건너 산중턱 절벽 위에 지은 1칸짜리 집. 여기서 독서하며 사색을 즐겼다 한다.
소은병(小隱屛),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며, 특히 보를 막아 연못을 조성하는 등 기발함 등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출처] 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尹善道園林 ] | 네이버 백과사전

 

세연정도 역시 입장료를 받는다. 세연정에서 나와 윤선도의 유적들을 돌아볼 수 있는데 약간의 시간적 손실이 있었다. 배 시간을 생각해야 되어 나머지 부분을 모두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곳을  산행하듯 걸으면서 찾을 여유를 가지려면 오전에 들어와야 했을 텐데.. 점심까지 먹고 왔으니 조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좀 여유를 가지고 동천석실에도 올라갔다 오고, 가까이에 있는 낙서재, 곡수당 등도 돌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아니 그 두 시간 정도에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되었을 거리였지.

산행까지는 어렵겠지만 송시열 글씐 바위까지 보고 왔으면 다시 미련을 남기지 않았을 터....

여기도 언젠가 다시 한 번 답사할 여지를 남기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저 노화도와 보길도를 밟았다는 위로만 받고.

 

보길도에서 다시 땅끝선착장으로 돌아온 시각은 4시 40분, 5시에야 버스가 출발했다. 하동에 들어가 늦은 저녁 식사로 재첩국을 먹고는 진영, 김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건 10시 30분...김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멋진 일박이일의 여정이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기를.

 

 

 등산로 안내

 진도아리랑비가 있는 아리랑교에서 부터 산행 시작,

 첨찰산의 동백꽃

 진도 첨찰산 정상 표석

 산행하기 전에 미리 본 기상대 진입도로를 부산의 황령산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이나 김해 천문대 가는 길 정도는 되리라 했는데..

정상에서 저 쪽으로 보이는 건 진도 기상대, 임도에서 여기까지 200m 정도다.

두목재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오는 길에 버스는 곤란하고 4륜구동이면 가능하다고 했지만 승용차로 오를 수 있을 듯하다. 

 휴식년제 구간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백터널에 다리 하나를 건너면

또 다시 동백 길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에는 아래와 같은 보물이

진도쌍계사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좌상

 첨찰산 쌍계사는 운림산방과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깝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857년(신라 문성왕 19)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절 양옆으로 시냇물이 흘러서 쌍계사라 불렀다고 하며, 1648년(조선 인조 26) 의웅(義雄)이 중건하였다. 1677년(숙종 23) 대웅전을 세웠으며, 1695년에는 시왕전을 중건했다. 1880년 《동사열전》의 저자인 각안(覺岸:1820∼1896)이 머물며 동산(東山)·지순(知淳)과 함께 대법당과 시왕전·첨성각을 중수했으며, 이후 1980년 도훈(道薰)이 해탈문을 세우고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해탈문·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진도쌍계사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건물로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을 비롯하여 여러 점의 탱화와 소종·중종·법고가 있다. 그 가운데 중종은 종신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1686년에 조성되었으며 1720년에 다시 주조되었다. 명부전은 시왕전이 바뀐 이름으로 내부에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모두 33점의 목조각상이 있다.
유물로는 진도쌍계사목조삼존불좌상과 시왕전목조지장보살상, 삼층석탑, 부도 2기가 전한다. 그 가운데 목조삼존불좌상은 1697년 제작되어 1999년 8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되었고, 시왕전목조지장보살상은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삼층석탑은 1920년에 세워진 것이고 부도는 정견(正見)의 것이 1700년, 월하(月下)의 것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이다.
[출처] 쌍계사 [雙溪寺 ] | 네이버 백과사전

운림산방 [雲林山房]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가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이라고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임목을 심었다. 하지만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허형이 운림산방을 떠나면서 매각되어 운림산방의 연못과 가옥은 예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운림산방을 다시 사드렸고 1982년 허형의 아들 허건이 운린산방의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한다.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맨 위쪽에 허유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오른쪽 뒤편에 사천사(斜川祠)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유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살림집 앞에 1978년에 재건한 운림산방이 있다. 그 앞에는 가로 33m, 세로 27m 크기의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허유가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안채는 一자형 초가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웃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왼쪽 끝 1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로 만들었으며 오른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안채와 비슷한 민도리집이며, 기단은 낮은 토단이다.
운림사는 1983년 건립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1고주 5량 구조이며, 공포는 주간마다 1구씩의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천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구조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원형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식이다.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복제된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관에도 복제화·수석·단지·그릇 등 허련의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고, 한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이 이곳에서 그림을 익혀 한국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운림산방 [雲林山房 ] | 네이버 백과사전

 소치 초상화

허련 [許鍊, 1808.2.7~1893.9.6]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노치(老癡). 1808년 2월 7일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허유(許維)로 개명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을 두고 허유였다가 허련으로 변경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허씨대종보에는 련(鍊)으로 기록하고 있다. 1839년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화를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보였다가 작품의 솜씨에 감복한 추사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갔다. 허유는 한양에 머물면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사사를 받았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서화수업을 받았다. 1843년 제주 목사 이용현(李容鉉)의 도움으로 추사의 적거지를 왕래하며 서화를 익혔다. 1846년 한양으로 돌아와 헌종에게 《설경산수도》를 바쳤고 극찬을 받았다. 1847년 세번째 제주도를 방문하여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린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정주하였다. 1866년 상경하였고 1877년 70세에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其臭如蘭)"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893년 9월 6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글·그림·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출처] 허련 [許鍊 ] | 네이버 백과사전

 운림산방에서

공연 전 인사 

 진도개 민국이, 공연하느라 수고 많았어. 민국이.

 뽕할머니 석상

 뽕할머니의 전설

 정면으로 보이는 섬이 아니라 우측으로 보이는 섬과 연결된다. 3월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린다.

이 곳 외에도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바다갈라짐"으로 검색하면 국립해양조사원의 자료를 찾을 수 있다. ....보령 무창포 등

 

 용장산성의 행궁터, 실제 산성은 산 위에 있고..

 진도로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바라보는 백구

 1984년에 준공된 진도대교에는 진도의 상징인 진도개가 양쪽으로 버티고 있고 충무공의 동상이 다리 위에도 있다.

진도에서 나가는 손님을 배웅하는 황구

 진도대교의 진도쪽 주차장에 있는 울돌목 안내

 여기 충무공의 동상은 매우 동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울돌목을 내려다 보는 곳에 세운 성

 울돌목, 명량, 이곳의 파도는 정말 나라를 구한 귀중한 역사의 흔적이다.

저녁 식사를 한 곳이다. 저 위가 녹진전망대, 900m 정도면 가까운 거리인데 시간이 없었다. 

 아침 일찍 케이블카 옆의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붙은 안내, 광범한 지역에서 나물 채취를 금하고 있는데.....

 

땅끝 전망대의 게시물의 일부에서...오늘 간 길은 12km가 아닌 듯하다. 보길도 앞의 노화도 선양항에 닿았으니. 시간도 30분 정도 

 

 선착장에서 바라본 땅끝 전망대

 하얀 물결을 남기며 푸른 바다를 달린다.

 땅근 전망대를 뒤로 하고 미끄러지듯 보길도 방향으로 달리는 장보고호

 진행하는 좌측으로 땅끝으로 향하는 다른 여객선이 보인다.

산양항에 있는 여객선 시간표와 운임표, 승용차는 16,000원, 버스는 110,000원이다.

 보길도 안내도

 이게 물막이 보가 되면서 다리도 된다고 한다.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에 세연지, 세연정 

보길도에 연결된 노화도 선양항과 땅끝을 운항하는 카페리 

땅끝 선착장 옆의 맴섬 

맴섬 앞의 형제섬이 육지가 될만큼 썰물이 되어 나갔다. 

어느 바위가 형일까...이 바위가 덩치가 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