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읍성 주변 문화유산을 찾아서 20220811 화 (R)
이 정도 거리라면 자전거로 이동하는 게 딱 좋은데...
장마 뒤끝이라 비가 예보된 날이다.
어제저녁까지도 일기 예보를 점검하면서 망설이다가 자전거는 포기하고
밤늦게야 결정하고 기차를 예약했다.
예약부터 해 두어야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다.
예약한 후에야 동선을 대강 구상했지만 구체적으로 트랙을 그리지는 않았다.
동행이 있을 경우에는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주읍성의 동문, 집경전 옛터, 읍성의 옥터, 삼랑사터 당간지주, 노서동 석불 입상, 그리고 박물관, 반월성, 석빙고, 월정교 등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기 예보에 어제까지만 해도 10시가 넘으면 비가 없는데, 기차에서 신경주역에 하차할 때 보니 비를 퍼붓는 듯했다.
잠시 기다려 해운대, 태화강을 거쳐 오는 류와 조정한 결과, 비가 많이 오는데 박물관이나 보고 가자는 걸, 읍성을 중심으로 복원한 동문, 이성계의 어진이 있었다는 집경전터, 경주읍성 감옥터를 보고 성곽의 크기를 대충 느낄 정도로 외곽을 돌고는 서쪽으로 가까운 삼랑사터의 당간지주를 찾아보고, 삼랑사에 머물던 신라의 유식학 승려 경흥이 머물던 곳과 남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노서동 석불입상까지 보고 박물관을 거쳐 가기로 했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동문지로 갔을 때는 역에서 퍼붓던 비는 소강상태여서 더위를 줄이며 걷기에 편하였다.

신경주역에서 읍성까지 가기 위해 버스를 이용했는데 13㎞/20' 정도 소요되었다.

이동 경로 : 경주읍성 동문 - 집경전구기 - 감옥터 - 김동리 문학기념비 - 삼랑사지당간지주 - 노서동 석불입상 -
박물관은 택시로 이동

경주읍성 안내(사적 제 96호)
이 안내도를 보고 읍성의 대강을 가늠해보고 동문에서 부터 복원된 성곽을보고는 복원 예정인 북문까지 돌아보기로 한다.
계림초등학교는 성내에 있으며, 학교 옆의 동쪽은 복원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다.
북문은 부지에 흙더미를 쌓아 두어 공사가 곧 이루어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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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문은 동문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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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에 올라 상량문을 보니 2018년이다.
복원 시점을 나타낸 것.
2018년 무술(戊戌) 3월 22일 신(申)시[16시 전후] 향일문(向日門) 재건(再建) 상량(上梁)
3월 22일은 양력일까. 아니면 음력?

동문의 남쪽 성벽 부분에 복원 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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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물 마당, 동문의 남쪽 성벽 앞에 전시되어 있다.
인근 지역의 자연석은 물론 각 시대별 살림집의 주춧돌, 큰 절의 석부재, 석탑부재, 석교부재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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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에서 바라보는 동문의 옹성
옹성은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는 용도, 치성은 성벽에 접근한 적을 공격하는 용도.
옹성의 여장에 안과 밖을 향한 총구의 높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동,서,남벽의 치성은 각6개, 북벽은 7개, 모두25개의 치성을 설치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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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내외의 금속제 홍살문은 예술품일까...
계림초등학교 동쪽으로 복원공사 중인 부분이 있다.
학교 뒤쪽으로도 복원 겅벽 구간이 있고 북문까지 복원이 계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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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의 북동쪽에 위치한 계림초등학교, 학교 남쪽 길 건너 성내에는 문화재해설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현재 복원된 성벽의 끝이다.
뒤돌아보니 치성과 동문이 보인다.

성벽에서 내려서서 이 안내를 보고 집경전 터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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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평생학습가족관, 한림야간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의 동쪽 마당에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
'집경전구기(集慶展舊基)'라는 비석이 있다.
글씨는 정조대왕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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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평생학습가족관, 한림야간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의 동쪽 마당에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
'집경전구기(集慶展舊基)'라는 비석이 있다.
글씨는 정조대왕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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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집경전 검색 결과
검색어 집경전 : 총 9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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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46)세종 (4)세조 (2)예종 (1)성종 (8)중종 (1)명종 (2)선조 (10)인조 (9)영조 (1)정조 (4)헌종 (1)고종 (3)
1.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6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 전주·경주·평양의 영전에 칭호를 내리고 각기 전직 2인을 두게 하다
평양(平壤)에서도 또한 영전(影殿)이 있지마는 칭호(稱號)가 없으며, 또 전직 (殿直)도 없으니 전주에서는 경기전(慶基殿)이라 일컫고, 경주에서는 집경전(集慶殿)이라 일컫고, 평양에서는 영숭전(永崇殿)이라 일컫게 하고는, 각기 전직(殿直) 두 사람을 두게 하고,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전직의 성적을 심사하여 우열(優劣)를 정해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세종실록 97권, 세종 24년 8월 8일 을미 1번째기사 / 의정부가 경기전·집경전·영숭전의 전직에 대하여 아뢰다
의 전직의 예(例)에 따라 감사의 천망(薦望)대로 임명해 보내되, 전주와 경주에는 토관(土官)이 없으니 경중(京中)의 예(例)에 따라 천관 전임(遷官轉任)하게 하옵소서 ." 경기전(慶基殿)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곳. 집경전(集慶殿)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 영숭전(永崇殿)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 준원전(濬源殿)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 하니, 그대로 따랐다.
3.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9일 경신 1번째기사 / 태조의 수용을 경주 집경전에 봉안하게 하다
의성군(誼城君) 용(㝐)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수용(晬容)을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에 봉안하게 하였다.
4. 세종실록 118권, 세종 29년 11월 3일 신묘 1번째기사 / 여러 산릉과 진전의 제품의 위치를 정하다
고, 목청전(穆淸殿)·준원전(濬源殿)·경기전(慶基殿)·집경전(集慶殿)·영숭전(永崇殿)의 여섯 별제에는 제탁에 화초가 있고, 첫째 줄에 중박계(中朴桂) 네 그릇, 둘째 줄에 붉고 흰 산자 다섯 그릇, 세째 줄에 다식(茶食) 다섯 그릇, 네째 줄에 실과 여섯 그릇, 면협탁에는 화초가 없고 첫째 줄에 떡 네 그릇, 둘째 줄에 면·잡탕 등 다섯 그릇 , 세째 줄에 잔(盞) 셋이고, 선왕(先...
5.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 8월 6일 무진 4번째기사 / 예조의 건의로 각도의 준원전·목청전·경기전·집경전의 수직 제도를 고치다
수복(守僕)의 예(例)와 같이 근방의 양민 20명을 뽑아 정하여 번(番)을 쉬게 하고 수직(守直)하게 하소서." 어용전(御容殿)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안치한 전(殿). 준원전(濬源殿)·목청전(穆淸殿)·경기전(慶基殿)·집경전(集慶殿) 등을 말함. 수복(守僕) 조선조 때 묘(廟)·사(社)·능(陵)·원(園)·서원(書院) 등을 지키는 일을 맡아 보던 하예(下隷). 하니, 그대로 따랐다.
6.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1월 19일 임술 5번째기사 / 공조에서 경상도 제언에 제방과 해자를 수축케 하도록 청하다
북천(北川)의 물길이 바로 읍성(邑城)으로 향하고, 또 성밑에 해자(海子)가 모두 메어서 막혔습니다. 본주(本州)는 다른 고을의 예(例)와 같지 아니하여 집경전(集慶殿)이 있고, 또 객인(客人)이 경유하는 곳이니, 청컨대 명년 농한기에 본주의 백성을 뽑아 내어서 제방(堤防)과 해자를 수축하게 하소서." 해자(海子) 성 밖에 빙 둘러가며 판 못을 말함. 하니, 그대로 따랐다.
7.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1월 25일 을사 1번째기사 / 집경전에 누각과 일영을 제조하여 관상감에 주어 내려 보내어서 교습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관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에 누각(漏刻)이 없는 까닭에 제향(祭享)을 지내는 시각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공조(工曹)로 하여금 누각(漏刻)과 일영(日影)을 제조하여 관상감(觀象監)에 주어 내려 보내어서 교습하게 하소서." 누각(漏刻) 물시계.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성종실록 69권, 성종 7년 7월 4일 을사 4번째기사 / 새 경주 판관 강응겸을 집경전 당직시 재소에서 기생 간통한 일로 개차시키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새로 경주 판관(慶州判官)에 제수된 강응겸(康應謙)은 집경전(集慶殿)의 당직(當直)으로 있을 적에 재소(齋所)에서 기생을 간통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자 망명(亡命)을 한 자이었는데, 어찌 수령(守令)으로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 성종실록 123권, 성종 11년 11월 12일 무자 2번째기사 / 의정부 우참찬 현석규의 졸기
(景泰) 계유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집경전 직(集慶殿直)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여러 번 천전(遷轉)되어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이 되었다. 천순(天順) 경 진년에 문과(文科)에 차석(次席)으로 뽑혀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으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 성균 직강(成均直講), 형조 도관(刑曹都官)·형조 정랑(刑曹正郞), 예조 정랑(禮...
10. 성종실록 174권, 성종 16년 1월 9일 임진 3번째기사 / 우상 홍응을 경기·충정·전라·경상 4도의 순찰사로 삼고 여러 일을 검토하게 하다
고 가는 사목(事目)에 이르기를, "1.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과 전주(全州) 경기전(慶基殿)에 쇄소(灑掃)·점화(點火)·금화(禁火) 등의 일을 받들어 살펴서 계달한다. 쇄소(灑掃) 청소. 1. 경상우도(慶尙右道)와 전라좌도( 全羅左道)는 본래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인데, 보(堡)를 설치하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한가를 살펴보고 따라서 곧 수축(修築)한다. 적로(賊路) 적...
11. 성종실록 281권, 성종 24년 8월 13일 을해 3번째기사 / 의성군 이채의 졸기
숭록 대부(崇祿大夫)를 가하였다. 이때 경주(慶州)에 집경전(集慶殿) 이 이루어졌는데, 채(寀)가 어용 봉안사(御容奉安使)가 되었었고, 경태(景泰)경오년에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심가 대전관(代奠官)이 되어 특별히 흥록 대부(興祿大夫)에 가해지고, 홍치(弘治)기유년에는 특별히 현록 대부(顯祿大夫)에 가해졌다가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83세이다. 시호(諡號)는 ...
12. 성종실록 288권, 성종 25년 3월 21일 경술 2번째기사 / 전사청에 불이 난 까닭으로 신을 위로하는 치제를 올리려하니 예문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다
집경전(集慶殿) 전사청(典祀廳)에 화재가 났습니다." 집경전(集慶殿)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던 영전(影殿). 경주(慶州)에 있었던 것을 뒤에 강릉 (江陵)으로 옮겼음.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처음엔 정전(正殿)인가 의심하여 마음으로 매우 놀랐는데 정전이 아니고 곧 전사청(典祀廳)이라고 한다. 참봉(參奉)을 의금부(...
13. 성종실록 288권, 성종 25년 3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 집경전의 화재에 대한 치제는 공릉에 뇌진하였을 때 제사지냈던 방식을 따르게 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성현(成俔)이 와서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 화재(火災)에 치제(致祭)하는 예(例)는 예전 예(禮)를 참고해 봐도 없습니다. 요즘 공릉(恭陵) 에 뇌진(雷震)하였으므로 대신(大臣)을 보내어 제사지냈습니다. 청컨대 이 예에 의하여 치제(致祭)하되, 다만 제기(祭器)나 제복(祭服)은 모두 불에 타버려 마땅히 고쳐야 하는데, 만약 고쳐 만 들기를 기...
14. 성종실록 288권, 성종 25년 3월 22일 신해 5번째기사 / 전라도 등의 관찰사 등에게 능이나 전각에서 불의 사용을 금하는 영을 엄격히 지키라 명하다
開城府留守)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경상도(慶尙道) 집경전(集慶殿)의 전사청(典祀廳)에 실수로 불이 나서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이 죄다 탔다고 하니, 이것은 평상시(平常時)에 불을 조심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참봉(參奉) 김희(金曦)는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심문하여 죄를 받도록 하였으니, 모든 능(陵)이나 전각(殿閣)이 있는 곳에는 불의 사용을 금하는...
15. 성종실록 289권, 성종 25년 4월 5일 계해 4번째기사 / 청녕위 집의 역사를 정파할 것과 강자순의 조상 분묘 참배를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다
까? 청컨대 빨리 정파(停罷)하게 하소서. 또 듣건대 집경전(集慶殿)의 행향사(行香使)인 강자순(姜子順)이 초계(草溪)·의령(宜寧) 등지에서 조상의 분묘(墳墓)에 참배(參拜)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를 허락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근년에 연곡(年穀)이 잘 되지 못하였는데, 양전(量田)까지 더하게 되니, 한 도( 道)가 소란합니다. 대신의 행차에는 노력과 비용이 반드시 ...
16. 중종실록 95권, 중종 36년 7월 16일 경자 3번째기사 /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이언적의 귀양장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모자(母子)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였습니다. 남은 해가 많지 않은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나 오히려 봉양할 날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신의 아우 하나는 지금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형제가 함께 관직에 있으므로 늙고 병든 어버이 곁에 봉양할 사람이 없습니다. 법에 따라 귀양하게 허락해 주소서."
17.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 12월 25일 계유 2번째기사 / 경주의 불타버린 관사에 위안제를 지내게 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경주(慶州)의 관사(館舍)가 불탔다 하는데 집경전(集慶殿)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한다. 불을 끌 때 조상의 영혼이 놀라지 않았을 까닭이 없는데 위안제(慰安祭)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조에 이르라."
18.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1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 도승지를 보내어 경주 집경전을 살피게 하다
도승지 권철(權轍)을 보내어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경주 관사(館舍)에 불이 났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19. 선조실록 24권, 선조 23년 12월 23일 신묘 1번째기사 / 경상 감사가 경주 동헌이 불에 탔다며 위안제를 지내는 여부를 묻다
첩정(牒呈)에, 이달 11일 밤에 객사의 서헌(西軒)에서 불이 났는데 마침 서풍이 세게 부는 바람에 대청 동헌(東軒)까지 모두 타버렸다고 합니다. 객사는 바로 집경전(集慶殿)에서부터 매우 가까운 데에 있으므로 필시 경동(驚動)하였을 것이니 매우 미안합니다. 위안제(慰安祭)를 지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조정의 명 령을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20.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6일 임술 5번째기사 / 비변사가 수용을 보존한 집경전 참봉 홍여율의 6품 초서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홍여율(洪汝栗)은 수용(睟容)을 위호(衛護)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전일 본도로부터 온 자들이 그의 충성됨을 칭찬한 자가 많았습니다. 이제 첫번째 보고를 보건대 매우 가상하니 6품(品)으로 초서(超敍)하여 본임(本任)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21.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16일 신미 10번째기사 / 광릉 참봉 이이첨이 광묘의 영정을 모셔오다
이 다 적의 화를 면치 못하였는데, 유독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홍여율(洪汝栗)이 태조의 영정을 받들었고, 광릉 참봉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받들어 끝까지 보존 해내었다. 그러나 여율을 집경전 참봉으로서 본전의 영정을 받든 것이고 또 열읍이 호송해주는 도움을 받았지만, 이첨은 광릉 참봉으로서 봉선전의 영정을 받든 것으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
22.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21일 계유 4번째기사 / 정원이 진주성 전사자 포상, 유성룡 소환, 어용 보호 등의 일을 아뢰다
무 늦은 듯하 여 성사(成事)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집경전(集慶殿)에 봉안(奉安)했던 어용(御容)이 현재 예안(禮安) 땅 청량산(淸涼山)에 있는데 이 근처도 믿을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는 좌도 관찰사(左道觀察使) 한효순(韓孝純)의 서장(書狀)이 지금 막 도착하였으니, 한효순에게 하유(下諭)하시어 그곳의 관원 두 사람을 속히 어용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후회되는 일이 없...
23.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21일 계유 8번째기사 / 비변사가 정원의 계사에 대해 전사자 포증 연기 등의 의견을 밝히다
들을 불러 모으게 하는 것도 좋은 계책입니다. 그리고 집경전(集慶殿) 어용(御容)을 행재소(行在所)로 옮겨 오는 일에 대해서는 재신(宰臣) 중에도 옳다고 생각하는 이가 간혹 있습니다마는 어용을 받들어 모시고 있던 참봉(參奉)이 지난번 변란 때에 모시고 동서로 옮겨 다니며 노고를 꺼리지 않았으므로 끝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참봉은 그 공로로 이미 승서(陞敍)되...
24.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26일 계묘 1번째기사 / 별전에서 신하들을 인견하고 주청·봉공, 이정암의 처리 문제, 덕빈의 초혼장 문제 등을 논하다
니다." 하였다. 곤수는 아뢰기를, "경기전(慶基殿)·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된 수용(睟容)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으니 위안제를 거행하는 것이 옳을 듯 한데 조정에서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수용(睟容) 어진. "이와 같은 일은 예관(禮官)이 해야 한다." "양전(兩殿)이 피란하실 때에 참봉(參奉) 두 사람이 함께 모시고 갔는데 한 사람은 상(賞)을 받고 한 사람은 상을 ...
25.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22일 을축 6번째기사 / 비변사가 태조 대왕 수용의 봉안에 대해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태조 대왕의 집경전(集慶殿)의 수용(睟容)은 사변이 일어났을 때 임시로 예안(禮安)의 여염집에 봉안(奉安)하고, 경기전(慶基殿)의 수용은 아산현(牙山縣)의 객사(客舍)에 봉안하였는데, 난리중에 오랫동안 봉심을 폐지하였으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근일에 가까운 큰 고을로 옮겨 봉안하기를 청하는 상소가 많이 있으니, 비록 사세가 어떨지 알 수 ...
26. 선조실록 65권, 선조 28년 7월 18일 기축 1번째기사 /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다
않는가?" 하자, 대사헌 김늑(金玏)이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의 어용(御容)이 지금 예안(禮安) 이황(李滉)의 서당에 있는데 방이 협착하고, 참봉(參奉)이 거처하는 곳이 봉안(奉安)한 곳과 너무 가까우며, 산승(山僧)을 시켜 밥을 지어 먹이므로 연기가 끼니 매우 미안합니다. 왜적이 만약 바다를 건너간 뒤 그대로 그곳에 봉안한다면 날씨가 춥기 전에 수리해야 할...
27. 선조실록 75권, 선조 29년 5월 1일 정묘 5번째기사 / 경기전과 봉선전의 수용을 태묘로 이안하는 일은 봉심한 뒤에 처치하도록 하다
10년(1410)에 전주부(全州府) 남문 안에 세운 태조의 영전(影殿:임금의 화상을 모신 곳). 권안(權安) 임시 방편으로 모셔둠. 봉선전(奉先殿) 예종 원년(1469)에 정희 왕후(貞熹王后:세조의 비)의 뜻에 따라 광릉(光陵:세조릉) 남쪽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동쪽에 세운 세조의 영전. 집경전(集慶殿) 세종 때에 경주부(慶州府)의 객관(客館) 북쪽에 세운 태조의 영전. 하니, 상이 따랐다.
28. 선조실록 130권, 선조 33년 10월 12일 임오 2번째기사 / 좌참찬 홍진이 체직을 청하다
사하고 영악하며 흉물스러웠다. 정사성(鄭士誠)과 함께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이 되었는데, 임진 왜란에 정사정이 앞장서 창도하여 영정(影幀)을 짊어지고 단양(丹陽)과 제천(堤川) 사이에서 왜적을 피했었다. 그뒤 여율이 아버지가 있는 행조(行朝)에 은밀하게 내통하여 때때로 발설하기를 ‘여율이 함께 일하던 관료가 도망친 뒤에 온 힘을 다 기울여 보호하여 영정이...
29.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9월 11일 무진 1번째기사 / 강원도 강릉 집경전을 개수하고 영정의 환안제를 거행하다
강원도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을 개수(改修)하고 영정(影幀)의 환안제(還安祭)를 거행하였다.
30.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9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 정백창이 태조 강헌 대왕의 영정을 개수하고 돌아오다
대왕(太祖康獻大王)의 영정(影幀)을 개수(改修)하여 집경전(集慶殿)에 도로 봉안하고 돌아 왔다.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파손된 곳은 얼마나 되던가? 화공(畵工)이 잘 채색하여 보완하였는가?" 하니, 백창이 대답하기를, "왜란(倭亂) 때에 비가 새어 얼룩진 곳이 있고, 최광원(崔光遠)이 참봉으로 있을 당시에 지붕이 새어 젖게 만들었으니 매우 불경한 일입니...
31.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10월 3일 경인 2번째기사 / 집경전을 수리할 때 공이 있었던 관리에게 상을 내리고 가자하다
집경전(集慶殿)을 수리할 때 공이 있었던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에게는 숙마 1필, 본도 감사 이현영(李顯英)과 강릉 부사 이명준(李命俊)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좌랑 이호(李岵)는 승서하고, 화원 이징(李澄)과 이신흠(李信欽)은 동반 6품 실직을 제수하고, 배첩장(褙貼匠) 김길(金吉)은 금군을 제수하고, 김덕남(金德男)은 면천하도록 명하였다.
32.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3월 7일 신사 1번째기사 / 강릉 집경전에 불이 난 일에 대한 처리 논의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에 불이 났는데, 이곳은 바로 태조의 진전(眞殿)이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에 이르기를 ‘선인(先人)을 모신 집에 불이 나면 3일 동안 곡을 하니, 그러므로 신궁(新宮)에 불이 나도 3일 동안 곡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선인을 모신 집이란 종묘를 말하는데, 신주(神主)를 들여오기 때문에 신궁이라고 하 는 것이다.’ ...
33.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3월 8일 임오 1번째기사 / 집경전의 실화로 강릉 부사 민응형 및 그 날 집경전에 근무했던 집사관과 향소의 색리 등을 국문하게 하다
"집경전(集慶殿)이 실화된 일이야말로 개국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입니다. 그곳의 수령이 필사적으로 진화를 하지 않아 이런 변을 초래했으니, 결코 심상하게 파추(罷推)만 할 수 없습니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민응형(閔應亨) 및 그날 집경전에 근무했던 집사관과 향소(鄕所)의 색리(色吏) 등을 모조리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34.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3월 8일 임오 2번째기사 / 정원이 집경전의 화재를 경계로 삼아 언로를 넓히고 간언을 받아들이도록 아뢰다
에 두 차례나 지진의 변고가 있었는데, 더구나 이 번 집경전의 화재 사건은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선유는 궁침(宮寢)에 불이 나기만 해도 ‘임금이 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 이런 변이 일어나게 하였습니까. 닦고 반성하여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헛된 형식만 따르거나 옛 일대로만 해서는 ...
35.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3월 9일 계미 1번째기사 / 집경전에서 위안제를 거행하자는 논의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대신을 집경전(集慶殿)에 보내 위안제를 거행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그 의논을 예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대신을 보내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대신으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였다.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이정구(李廷龜) 등이 아뢰기를, "차자에서 대신이 가야 한다고 한 것은 그 일...
36. 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3월 27일 신축 3번째기사 / 좌부승지 강홍중이 집경전에 봉심하고 돌아와 화재 원인을 아뢰다
좌부승지 강홍중(姜弘重)이 집경전(集慶殿)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본전의 수복(守僕)이 제관(祭官)이 나간 틈을 타 타다 남은 나무를 몰래 가져가려고 풀더미 밑에 두었다가 불을 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불러서 하문하기를, "그 고을은 인구도 많은데 어째서 불을 끄지 못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문(殿門)이 닫혀 있었던데다가 불길이 빨 리 번져...
37. 인조실록 30권, 인조 12년 10월 10일 계사 2번째기사 / 주강에 《시전》을 강한 후, 화폐 유통·아동 교육 등을 묻다
이런 형편입니다." 하였다. 홍주가 또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의 영정이 불에 타버린 뒤에 경주 사민(士民)들의 상소에 따라 이미 경주에다 봉안하기로 정하였는데, 지금까지 4년이 지나도록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년 봄이 되면 건물을 지어 봉안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 뒤에 윤방·김상용(金尙容) 등이 양전(量田)...
38. 영조실록 7권, 영조 1년 8월 22일 정해 1번째기사 / 태묘의 제향을 자정전·읍화당·위선당으로 옮겨 봉안하다
"융복전(隆福殿)·집경전(集慶殿)·회상전(會祥殿) 등 여러 전에도 옮겨 봉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곳은 모두 침전(寢殿)이므로 아마도 옮겨 봉안(奉安)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렇겠다." 하고는, 드디어 자정전(資政殿)·읍 화당(挹和堂)·위선당(爲善堂)으로 옮겨 봉안(奉安)하는 곳을 삼고 헌관(獻官)도 또한 각각 차임(差任)하도록 하였다.
39.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3월 29일 을미 2번째기사 / 《명의록》이 완성되다
보호하여 주시고 우리 전하를 어루만져 사랑해 주었으며 집경전(集慶殿)에서 탕선(湯膳)할 적에는 혹 반걸음도 잠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영선당(永善堂)에서 근거없는 화가 빚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의 사기(辭氣)를 먼저 살펴 화의 싹을 미리 꺾어버림으로써 크게 대책(大策)을 도왔으니, 이는 대신(大臣)과 공경(公卿)들이 모 르고 있는 것이고 조정(朝廷)과 팔방(八方)이...
40.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윤7월 12일 계미 1번째기사 / 강화부 유수 박우원이 만녕전 수리를 감독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하교하다
수령으로 헌관(獻官)을 대행시키고 해당 유수도 엄중히 추고하라. 앞으로는 유수가 아닌 사람이 역사를 감독하지 못하게 하되, 규식을 정하라." 진전(眞殿) 조선 시대에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 역대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문소전 부속의 선원전,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목청전·경기전·집경전·영숭전·세조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봉선전 등을 말함. 하였다.
41.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5일 병오 2번째기사 / 경주 집경전의 옛터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라고 명하다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옛터에다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따라 비석을 세워서 기록하라고 명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이다.
42. 정조실록 48권, 정조 22년 4월 22일 병진 1번째기사 / 경주 집경전의 비각을 완성하다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비각(碑閣)을 완성하였다. 이에 앞서 명하여 집경전의 옛터에 비(碑)를 세우고 어필(御筆)인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다섯 자를 새기도록 했었는데, 부윤 유강(柳焵)이 그 일을 감독하고 탑본(搨本)을 올리니, 부윤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43.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 10월 4일 무신 1번째기사 / 함경 감사 서경보가 준원전에 도둑으로 어용의 초면이 부숴졌다고 치계하다
부사(永興府使) 서염순(徐念淳)을 찬배(竄 配)하고, 관찰사(觀察使) 서경보(徐畊輔)를 파직(罷職)시켰다가, 이윽고 서경보는 감영(監營)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그대로 잉임(仍任)시켰다. 또 종묘(宗廟)의 당실(當室)과 준원전(濬源殿)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집경전(集慶殿)은 곧 국초(國初) 태조(太祖)의 정전(幀殿)이다. 지릉(智陵) 태조의 증조부의 능.
4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14일 양력 5번째기사 / 선원전에 대신을 보내 위안제와 다례를 지내게 하다
아뢰기를, "삼가 등록을 상고하여 보니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에서 실화하여 영정을 봉출하지 못하였을 때 종묘(宗廟) 제1실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관리를 강릉에 보내어 신위(神位) 를 설치하고 역시 위안제를 지냈습니다. 이번에 선원전에서 실화하여 어진을 봉출하지 못한 데 대하여 마땅히 종묘에 위안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위안제는 날을 받지 ...
4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2일 양력 1번째기사 / 어진을 모사하는 일은 흥덕전에서 진행하게 하다
오는 의식 절차는 인조조(仁祖朝) 신미년(1 631) 집경전(集慶殿)의 전례대로 간소하게 하라." "올 봄에 어진을 이모(移摹)할 때에 연로(沿路)의 지방에 폐를 끼친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모하는 의식 절차는 이미 간단하게 한 전례가 있으니 거기에 근거해서 진행할 것이나, 이모할 장소는 어디로 해야겠습니까?" "흥덕전(興德殿)에서 설행하는...
4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 신기선이 준원전의 어진을 모셔오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다
금도 늦출 수 없다. 준원전의 어진을 인조조(仁祖朝) 집경전(集慶殿)의 전례대로 장례원의 당상(堂上)과 낭청 (郞廳)을 보내서 모셔오게 하는 것은 오로지 성조(聖祖)께서 폐단을 줄인 뜻을 우러러 본받고자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니, 신기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진전에 불이 난 변고로 하여 기막힌 슬픔은 위아래 사람이 모두 절절하였습니다. 준원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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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4)洪汝栗(4)柳成龍(3)世祖(2)兪泓(2)尹昉(2)崔慶會(2)李廷馣(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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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로에 흙더미를 쌓아 푸른 비닐로 덮은 곳이 북문 복원 예정지인 듯하다.
동문지에서 부터 여기까지 복원할 것으로 안내 되어 있다.
삼랑사지로 가기 전에 경주 감영의 옥터를 먼저 돌아보았다.
감옥터는 지금 아파트 내부의 공원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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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터 삼랑사지로 이동한다.
트랙을 미리 그리는 대신 다음카카오지도에 목적지와 현위치를 찍어서
이동 방법을 도보로 설정하여 길을 이동하였다.
삼랑사지 입구에 김동리선생 기념비가 있어서 잠시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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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선생 문학 기념비
삼랑사지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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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사(三郞寺)는 삼국사기에 597년(진평왕 19)에 준공된 것으로 전한다.
지금은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이 절은 유식학(有識學) 승려 경흥(憬興)이 머물던 곳으로 현본(玄本)이라는 승려가 경흥의 행적을 적어놓은 삼랑사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경흥은 문무왕(재위661-681)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 신문왕(재위681-692)에게
"국사(國師)가 될만한 인물이니 내 뜻을 잊지말라,"
고 했을 정도로 존중 받던 승려였다.
삼국유사에는 경흥과 괌련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경흥이 말을 타고 대궐로 들어가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성대한 행렬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이 때 마침 초라한 행샛을 한 거사(居士)가 마른 생선을 넣은 광주리를 지고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었다.
경흥의 수행원이 이를 보고서는
"네가 중옷을 입고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다니느냐?"
고 꾸짖었다.
그러자 그 거사는
"다리 사이에 생고기를 끼고 다니는데 저자에서 파는 생선을 짊어진 것이 무슨 흉이냐?"
고 되받으며 일어나서 가 버렸다.
절문을 나서던 경흥이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거사의 뒤를 쫓게 하였다.
그 거사는 남사 문수사 문 앞에서 광주리를 던지고 사라져 버렸는데, 거사가 짚고 있전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있었고, 광주리 속의 마른 생선은 소나무로 변해 있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경흥은
"관세음보살이 오셔서 내가 짐승을 타고 다니는 것을 꾸짖으시는구나."
라고 탄식한 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승려들의 생활 태도를 비판하면서 한갓 미물(微物)에 불과한 짐승조차도 배려해야 함을 깨우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삼랑사에는 참된 구도자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상기하게 해주는 설화도 전해온다.
애장왕(재위 800-809) 때의 눈쌓인 추운 겨울날 저녁 무렵이었다.
황룡사의 승려 정수(正秀)가 삼랑사에 갔다오던 길에 천엄사(天嚴寺) 문 밖을 지나다가 해산을 하고 거의 얼어죽게 된 거지 여인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껴안아서 몸을 녹여준 뒤에, 자기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맨몸으로 뛰어 돌아와서는 짚풀을 덮고 밤을 보냈다.
그날 밤, 하늘로부터 대궐을 향해
"황룡사의 정수를 왕사(王師)로 봉하라."
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사정을 알아본 애장왕은 정수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한다.
<하일식 지음, '경주 역사 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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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석불입상
여기서는 택시로 박물관까지 이동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

경주 명활산성비

명활산성
진흥왕은 551년 경주 명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해 수도 방어의 요지로 삼음.
명활산성은 405년 동해안으로 침략해 온 왜군을 막아내는 근거지였으며, 자리마립간이 한때 피난처로 삼았을 정도로 중요한 성곽이었다.
진평왕은 백제와 왜의 침략에 대비해 수도인 경주 주변에 성을 새로 쌓고, 오래된 산성을 계속 정비했다.
591년 남산에 산성을 처음 쌓았고, 2년 뒤에는 명활산성을 고쳐 쌓았으며 경주 서쪽의 선도산에 서형산성을 새로 쌓아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
남산에 성을 쌓은 내용을 새긴 비석은 지금까지 10개가 발견되었다.







임신서기석

경주에서 자전거를 대여할 경우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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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6/경주시외버스터미널~경주박물관
경북15바6797/010-6520-6127
승하차 : 11:20~11:31
승차거리/요금 : 4.3km/5,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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