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행 상호군 노직(盧稷), 좌승지 정광적(鄭光績), 주서 박승업(朴承業), 가주서 이성(李惺), 검열 임수정(任守正), 이필영(李必榮)이 입시하였다. 상이 김식(金軾)의 서계를 대신들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주사(舟師)가 전군이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대신이 도독과 안찰(按察)의 아문에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은 배가 있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만 대고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로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뿐이다."
하였다. 좌우가 모두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니, 상이 소리 높여 이르기를,
"대신들은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감히 대답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너무도 민박한 나머지 계책을 생각지 못하여 미처 주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 전군이 대패한 것은 천운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각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214) 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정광적은 아뢰기를,
"아군은 칠병포(七柄砲)만을 쏘았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수길(平秀吉)이 항상 말하기를 ‘먼저 주사를 격파한 다음에야 육군을 노획할 수 있다.’고 했다 하더니 이제 과연 그렇게 되었다."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9일의 싸움에서는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지난 일을 논의하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일변으로 통제사를 차출하여 남은 배를 수습하면서 일변으로는 도독부에 알리고, 또 일변으로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전군이 모두 패몰되었는가, 혹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도 있는가?"
하니, 항복이 대답하기를,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해도(海圖)를 살펴보며 항복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하니, 항복이 이르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적의 점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남해를 근심하고 있는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어찌 남해만 근심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명원이 아뢰기를,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 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적세를 알지 못하고 입으로만 늘 당병(唐兵) 당병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왜적이 움직인다면 수천에 불과한 중국 군사가 방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를 겁쟁이라 여겨 그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나 마 도독의 군사는 만 명도 채 못 되고 양원(楊元)의 군사도 3천 명 정도이니 어떻게 남원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만약 적이 돌아서 호남 연해에 정박한다면 남원 지방 정도는 마치 큰길 가운데 손가마를 놓아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양원이 홀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국의 군사가 많이 집결되면 서로(西路)는 그런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하삼도(下三道)는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왜적이 혹 광양·순천으로 향하면 양원이 혼자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지금은 중국의 군사를 믿을 만하지 못하니, 마땅히 남은 배로 강화(江華) 등지를 수비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비록 잔여 선박이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하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통제사를 차출하지 말고 각도의 수사로 하여금 우선 그 지방의 군졸을 수습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산동(山東)의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풍랑이 점점 높아질 때이니 그들이 반드시 온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온다 해도 왜적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중국군이 나오기만 하면 왜군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 하지만 이 말은 틀린 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담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국가의 성패에는 도움이 안 된다. 대신이 먼저 도독과 안찰에게 가서 알리는 한편 일변으로 주사(舟師)를 수습해야지 그밖에 다른 선책은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말이 지나친 염려인 듯하지만, 중국 장수들은 늘 우리 주사를 믿는다고 했는데 지금 이같은 패보를 들으면 혹 물러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아마도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산은 왜적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외로운 군사로는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조금 후퇴하여 전라우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결국 남해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확실히 알지는 못하나 지금 주사가 패몰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다면 남방 인심이 이미 놀라 흔들릴 것이니 다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을 것인가. 어찌 죽기만을 기다리고 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민박’ 두 글자만 부르짖는다고 왜적이 물러나 도망하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남해와 진도를 지키다가 감당하지 못하면 물러나서 다른 요새지를 택하여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위로 중국이 있으니 왜적의 소유가 될 리는 없다. 그러하니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8책 9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6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註 214]
봉전(封典) : 중국으로부터 받는 봉작(封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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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 悶迫 : 애를 태워 매우 답답함
悶 답답할 민
1. 답답하다 2. 깨닫지 못하다 3. (사리에)어둡다 4. 번민하다(煩悶--) 5. 혼미하다(昏迷--) 6. 민망하다(憫惘--) 7. 뒤섞이다 8. 번민(煩悶) 9. 혼미(昏迷)한 모양
迫 핍박할 박
1. 핍박하다(逼迫--) 2. 닥치다 3. 줄어들다 4. 가까이하다 5. 궁하다(窮--: 가난하고 어렵다) 6. 좁다 7. 몰리다 8. 다가오다 9. 다급하다(多急--) 10. 허둥거리다 11. 다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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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御別殿, 引見大臣及備邊司堂上。 領議政柳成龍、行判中樞府事尹斗壽、右議政金應南、行知中樞府事鄭琢、行刑曹判書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兵曹參判柳永慶、行上護軍盧稷、左承旨鄭光績、注書朴承業、假注書李惺、檢閱任守正ㆍ李必榮入侍。 上以金軾書啓, 出示大臣曰: "舟(帥)〔師〕 全軍覆沒, 今則無可奈何。 大臣當往告于都督、按察衙門。" 又曰: "未知忠淸、全羅等道有餘船乎, 豈可諉以無可奈何而置之? 今可收拾餘船, 以爲防守之計耳。" 左右默無一言者久, 上厲聲曰: "大臣何不答乎? 將欲置而不爲乎? 不答則倭賊可退, 而國事可做乎?" 成龍曰: "非敢不對, 悶迫之間, 未得思其策, 不及達矣。" 上曰: "全軍覆沒, 天也奈何? 元均雖死, 豈無他人? 但當收拾各道船隻, 速爲防備而已。" 上曰: "不設斥堠歟? 何不退保閑山乎? 成龍曰: "幾至閑山, 到七川島, 夜二更, 賊乘暗潛入, 不意放砲, 焚我戰船四隻, 蒼皇之間, 不能追捕, 翌日天明, 賊四面來圍, 我軍不得已向固城登陸, 賊先下列陣, 我軍措手不及, 盡被殺死云矣。" 上曰: "固守閑山, 以爲虎豹之勢可也, 而必令督出, 以致此敗。 非人之所爲, 天實爲之。 言之無益, 豈可置之無可奈何, 而不爲之所乎? 當收拾餘船, 防守於兩湖之界。" 恒福曰: "爲今之計, 莫如差出統制使及水使, 使之畫策防守耳。" 上曰: "此言是矣。" 又曰: "賊數極多, 當初漂風之說, 亦是虛言。 必不抵當而自退。 閑山形勢極好, 把截亦便, 棄之不守, 計甚誤矣。 元均嘗以爲難進絶影前洋, 今果至此。 予已前言, 彼賊六年相持, 豈爲一張封典乎? 大槪賊船, 比前極大云, 然耶?" 應南曰: "然矣。" 上曰: "大砲、火箭, 亦載來乎?" 命元曰: "此則不知, 金軾言: ‘倭賊薄上我船, 將士不能措手而敗沒’ 云。" 光績曰: "我軍只放七柄砲火云, 良可痛心。" 上曰: "平秀吉每言: ‘先破舟師, 然後可取陸軍云。’ 今果然矣。" 稷曰: "初九日之戰, 士卒怯不能發一矢云矣。" 上曰: "已往之事, 論之無益。 一邊差出統制使, 收拾餘船; 一邊告于督府, 一邊奏聞天朝。" 上謂恒福曰: "全軍覆沒乎? 猶有逃生者乎?" 對曰: "在洋中則雖敗, 或有逃出之理, 而今則不然, 屯泊狹隘之地, 猝遇賊船, 窘迫下陸, 大槪必至於全軍覆沒矣。" 上搜海圖, 指示恒福曰: "退來之時, 未及見乃梁, 而遇賊於固城之地, 而有此敗耶? 由彼則可以易退於閑山, 而由此而致敗耶?" 恒福曰: "是。" 成龍曰: "若失閑山, 則南海, 是要衝之地, 今必爲賊所據。" 上曰: "領相憂南海耶?" 成龍曰: "豈獨以南海爲憂哉?" 上曰: "此豈獨人謀之不臧? 天也奈何?" 命元曰: "若遣將則誰可爲者?" 恒福曰: "今日之事, 惟在是而已。" 上曰: "元均則初不欲往, 而聞南以恭之言, 裵楔亦曰: ‘雖依軍律, 我當獨死, 軍卒豈可盡置之死地云云。’ 大槪凡事, 當看勢爲之, 固守要害, 可也。 都元帥督促元均, 致有此敗耳。" 上曰: "我國至今不知賊之兵勢, 每云唐兵唐兵, 賊若動發, 則數千天兵, 可以防禦乎? 聞此言, 必以予爲怯懦, 而被他(朝)〔嘲〕 笑, 麻都督兵尙不滿萬, 而楊元兵三千, 其能孤守南原乎? 賊若回泊湖南沿海, 則如南原者, 若置屋轎於大路中也。 楊元獨可防守乎? 天兵若多集, 則西路猶或可保, 下三道難以收拾矣。" 恒福曰: "賊倘向光陽、順天, 則楊元無獨守之理。" 成龍曰: "天兵今無可恃之勢, 當以餘船, 防守江華等處。" 斗壽曰: "雖有餘船, 軍卒難得, 姑勿差統制使, 令各道水使, 收合其軍, 各守地方何如?" 成龍曰: "山東水軍, 雖云出來, 漸至風高, 難恃其必來。" 上曰: "天兵雖來, 賊豈有畏懼之理? 衆言天兵出來, 則倭賊必退, 此言差矣。" 上曰: "雖爲閑話, 無益於成敗。 大臣先往告于都督、按察, 一邊收拾舟師而已。 此外無他善策。" 上曰: "予言則似爲過慮, 唐將每以我舟師爲恃, 今見如此, 恐有退去之患。 若然則奈何?" 恒福曰: "必不輕易退去。" 上曰: "閑山近賊, 不可以孤軍守之。 退保全羅右道, 庶可矣。" 成龍曰: "然則南海必見奪矣。" 上曰: "予不知之, 今有舟師覆沒之奇, 則南方人心, 已皆驚擾, 無復可爲。 然豈可以無可奈何, 而不爲之所乎? 安有待死而不用藥之理? 徒稱悶迫二字, 賊其退遁乎?" 成龍曰: "或守南海、珍島而不能, 則退據某地可矣。" 上曰: "我國上有天朝, 必不終爲賊有。 凡事更宜盡力爲之。"
【태백산사고본】 58책 9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6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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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룡의 향토사 산책 60 - 원균(元均) 장군의 무덤(?)
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55
김일룡의 향토사 산책 60 - 원균(元均) 장군의 무덤(?) - 한산신문
임진왜란 선무1등공신 원균(元均. 1540~1597) 장군의 묘가 광도면 안정(安井) 황리(黃里)에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한 원균 장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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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1.06
임진왜란 선무1등공신 원균(元均. 1540~1597) 장군의 묘가 광도면 안정(安井) 황리(黃里)에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한 원균 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 1기가 황리의 돌감나무골에 그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통영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도로변의 밭이다.
조선 중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간(金幹. 1646~1732)이 원균 장군의 일대기를 엮은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에 보면 공(公)은 1540년(중종 25) 1월 5일에 출생했다.
어려서 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함경도 조산만호(造山萬戶)로 봉직할 때에 북방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정규 등급을 뛰어넘어 일약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
이어서 녹둔도(鹿屯島)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그 이듬해(1588년), 함경도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적의 본거지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하였다.
가옥 200여 동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 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리는 등 당대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 1592) 2월, 공의 나이 53세에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현 가배량)에 본영을 둔 경상우수사에 제수되었다.
결국 그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후방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급함을 알리는 한편 군사들을 수습해 수군연합함대를 결성하게 된다.
그 후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장수가 이끄는 3도의 연합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견내량(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왜적선을 연이어 무찔러 다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그러다가 정유년(丁酉年. 1597) 왜적이 재침하자, 이순신 장군에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어 통제영 본진인 한산진영에 도임한다.
그리고 그해 7월, 도원수 권율(權慄)을 비롯한 조정의 강압에 의해 조선수군을 이끌고 왜적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진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왜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거제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게 된다.
이때 충청도와 전라우도수군은 진해(鎭海. 현 마산시 진동) 앞바다로 퇴각했다가 모두 참패하고, 경상우도의 전선 12척만이 왜적선의 포위망을 뚫고 견내량을 건너 본영으로 퇴각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군량미와 무기 등 군수품을 왜적의 수중에 넘기지 않기 위해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한산진을 불사르고 호남해역으로 퇴각하여 수군의 재정비를 도모한다.
훗날 이 충무공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한 그 열두 척이 바로 이 전선인 셈이다.
한편 원균 통제사의 최후에 관하여는 그동안 "한산도에서 패하여 죽었다" 또는 "거제(巨濟)에 상륙했다가 왜적에게 참살 당했다"는 등의 여러 주장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1993년 필자가 '전적지로 통해본 칠천량해전'이란 논문에서 원균 장군의 전몰지는 통영 광도면 황리의 옛 춘원포(春原浦) 해안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즉『선조실록』및『선조수정실록』에서 통제사 원균이 고성(固城) 춘원포(春原浦, 秋原浦)에 상륙하여 최후를 마쳤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어전회의에서 유성룡(柳成龍)은 "원균은 고성으로 가서 육지에 올랐다"고 했고, 영의정 유덕형(李德馨)은 "고성 춘원포(春原浦)", 도원수 권율은 "고성 추원포(秋原浦)"라고 임금에게 각각 보고하고 있다.
특히 한산도 사정을 조사하러 갔다 돌아온 선전관 김식(金軾)은 선조께 아뢰기를 "15일 밤 2경에 왜선 5, 6척이 갑자기 기습해 와서 우리 전선 4척을 불질러 모두 타버리고 말았으며, 장병들은 화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전열을 채 갖추지도 못하였습니다.
새벽닭이 울 무렵 왜선들이 헤아릴 수 없이 닥쳐와 서너 겹으로 에워싸며 형도(荊島. 현 용남면 싸리섬) 근처까지 가득히 깔렸으므로 계속 물러나며 싸웠으나 도저히 적을 당할 수 없어 우리 수군은 고성 추원포(秋原浦)로 물러났는데, 적의 형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고 우리 전선들은 모두 불타서 깨어지고 장수와 군졸들도 불에 타고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臣)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탈출하여 육지로 올라왔는데, 원균은 늙어 달아나지 못하고 빈 몸에 칼을 집고 홀로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으며 신이 달아나다가 뒤돌아보니 왜적 6, 7명이 칼을 휘두르며 이미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며, 그 후로 원균의 생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등은 겨우 살았으나 모든 전선들의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여 내려갔습니다"라고 원균 장군의 최후를 소상하게 증언하고 있다.(『선조실록』선조30년. 7월 22일조)
여기서 고성현 춘원포(春原浦)는 고려시대 춘원역(春原驛)이 있었던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황리 춘원포(春元浦. 춘원개)인 것으로 고증된다.
원래의 지명 춘원포(春原浦)는 조선 중기부터 춘원포(春元浦)로 혼용하기 시작했으며 토박이지명으로는 속칭 '추넌깨', '추원개', '추엉개' 등으로 불리었다. 즉 추원포(秋原浦)는 토박이발음 '추원개'의 음차표기이며, 따라서 춘원포와 추원포는 동일지명인 것이다.
한편 이곳 황리마을에는 "임진란 때 원균이 춘원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육지로 달아나다가 지금의 황리 돌감나무골에서 왜적들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머리는 베어 전리품으로 가져가고 목 없는 시신만 남겨진 것을 주민들이 지금의 황리 산435번지에 묻었다"는 옛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통영군사』지명유래편. 1986년)
이러한 당시의 여러 정황 자료와 지명 및 현지민의 구전 그리고 현 경기도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원균(元均) 장군의 묘(墓.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2)가 부장품을 묻은 가묘(假墓. 招魂墓)로 전해지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바로 이곳 풀 섶이 비록 공(公)의 무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옛날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던 이 일대가 공(公)이 최후를 맞이한 전몰지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1597년(선조30) 음력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왜적들의 급습에 악전고투하던 통제사 원균(元均)은 결국 이곳 황리 춘원포에 상륙해 고성으로 퇴각하던 중, 해안에서 약 5리 지점인 여기 '돌감나무골' 길모퉁이에 이르렀다.
무더운 여름날, 58세의 연로하고 비대한 몸으로 피로에 지친 장군은 결국 부하 장수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노송에 기댄 채로 추격해오는 왜적들을 맞아 최후까지 싸우다 생을 마친 것으로 고증된다.
내년이 임진왜란의 정유재란(丁酉再亂) 420주기를 맞이하는 정유년(丁酉年)이다.
제2대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해전의 패장으로서의 그 모든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게 그동안 세간의 평가이다.
그러나 공(公) 또한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책록된 용장(勇將)임이 분명할진데, 진솔한 역사의 재평가가 있었으면 싶다.
출처 : 한산신문(http://www.hansannews.com)
원균묘와 면화산
길따라 면화산 둘레길 12.2km
아래 지도들은 등고선을 따라 그렸을 따름이니 참고용
엉규이무덤 :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 435
https://blog.daum.net/gaetuel/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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