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 구봉산 20220205 토 (K&R)
코스 : 육신사/사육신기념관-충절문-삼충각-충효당-박두율여사생가-도곡재-태고정-육신사-충의사-박준규 국회의장 생가-충의사,유허비-육각정-110m봉-141m봉-공장-도로횡단-목골고개-주능선-161m봉-172m봉-156m봉-순천박씨가족묘,철탑-도로횡단-파회정-삼가헌-낙빈서원-강변대로지하통로-155m봉-데크구봉산전망대-하목정-하산1리정류소 <17km/6:07>
07:16-08:25 화명-동대구(무궁화)
08:30-09:30 동대구-문양역(전철)
09:38-09:48 문양역-육신사 입구(칠곡0번버스)
09:50 육신사 입구 정류장에서 시작
09:54 충절문
10:01 육신사주차장
10:03 사육신기념관
10:03 삼충각
10:07 충효당
10:12 부채
10:15 박두율여사 생가
10:19 도곡재
10:24 달성 태고정
10:29 육신사(성인문, 숭정사)
10:32 13,14,15대국회의장 박준규 생가터
10:34 충의사, 유허비
10:43 육각정
10:54 110m봉
11:36 141m봉
11:41 철탑
12:00 공장
12:01-12:06 도로횡단
12:06 목골고개/절개지
12:19 주능선
12:34 191m봉/구봉산
12:43 172m봉
12:57 156m봉
13:08 순천박씨가족묘,철탑
13:18 도로횡단
13:48 파회정
13:55 삼가헌
14:01 낙빈서원
14:24 강변대로지하통로
14:56 155m봉
15:13-17 데크낙동강전망대
15:39 하목정
15:58 하산1리정류소 종료 <17km/6:05>
구봉산 GPX트랙 파일 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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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입구 이정표, 들머리 길의 충절문, 삼충각, 삼충비
충효당 안내판, 충효당, 부채, 부채이야기
박두율여사 생가, 도고개, 육신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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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앞 마당의 육각비석/각 면에 사육신의 기록이 있다.
육각비석은 여섯 마리의 돌거북이 받치고 있다.
그 우측에는 태고정이 있다.
사육신[死六臣]
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 이후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당시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조성되어 있다.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권저(權著)·김문기(金文起)·박중림(朴仲林)·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인년(朴引年)·박쟁(朴崝)·성승(成勝)·성삼고(成三顧)·송석동(宋石同)·심신(沈愼)·윤영손(尹令孫)·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이호(李昊)·이휘(李徽)·조청로(趙淸老)·최득지(崔得池)·최사우(崔斯友)·최치지(崔致池)·허조(許慥)·황선보(黃善寶)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종에 대한 충심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으며,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이용해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좁아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성삼문을 통해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은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사육신의 유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정조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배향(配享)하기로 하여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육종영(六宗英)이라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화의군·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이양(李穰)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사의척(四懿戚)이라 하여 송현수(宋玄壽)부터 권자신(權自愼)·정종(鄭悰)·권완(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세 재상을 삼상신(三相臣), 민신(閔伸)·김문기(金文起)·조극관(趙克寬)을 삼중신(三重臣), 성승(成勝)·박쟁(朴崝)을 양운검(兩雲劒)으로 하였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이보흠(李甫欽)·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불이문(不二門)·홍살문·비각(碑閣) 등을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金寧) 김씨(金氏)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이개·유성원·박팽년·하위지·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두어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顯彰, 밝혀 나타냄)하기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육신 [死六臣] (두산백과)
육신사 입구에서 보면 안쪽으로 좌측에 육각형의 비가 있고 우측으로는 태고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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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太古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성종 10년(1479)에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朴壹珊)이 세웠다. 지금 남아 있는 정자는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동쪽의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의 2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물 정식 명칭은 '달성 태고정'이다.
일시루[一是樓]
명사 역사 지금 남아 있는 정자는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정자로, 동쪽의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의 2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물 정식 명칭은 ‘달성 태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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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는데 그 이상은 문이 잠겨 있었다.
밖으로 내려오면서 우측에 보이는 우물터는 옆에 박준규 생가터라는 작은 돌비석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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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경내의 충의사는 박중림을 추모하고 있다.
문민공 한석당 박중림은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
한석당(閑碩堂),문민공(文愍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충의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한석당(閑碩堂). 증조할아버지는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박숙정(朴淑貞)이고, 증조할머니는 대언(代言)을 지낸 민시(閔蒔)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원상(朴元象)이며, 할머니는 판밀직부사(判密直副使) 홍언유(洪彦猷)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박안생(朴安生)이고, 어머니는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휴(金休)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총제(摠制)를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김씨와 사재령(司宰令) 이덕배(李德培)의 딸 증정경부인 신평 이씨(新平李氏)이다.
아들 5형제 중 큰아들이 충정공(忠正公)박팽년(朴彭年)이다.
박중림의 후손들은 현재 하빈면 묘리 묘골에서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박중림(朴仲林)[?~1456]은 1417년(태종 17) 생원시, 1423년(세종 5) 문과,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에 차례로 급제하였다.
1427년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1428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1442년(세종 24) 전라도 관찰사, 1451년(문종 1) 경기도 관찰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공조 참판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병조 참판·호조 참판·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단종이 신하들에게 대사헌(大司憲)을 맡길 만한 인물을 물었고,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이 박중림을 추천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자 박중림은 관직을 그만 두었다.
세조가 박중림을 위무하기 위해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큰아들 박팽년을 비롯하여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중림은 아들 박팽년과 함께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결국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들을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인 환열형(轘裂刑)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중림의 아들 다섯 명과 손자 세 명이 모두 죽었다.
당시 손자 박순(朴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는데, 뱃속의 아기를 경상도 대구군 하빈현(河濱縣) 묘골[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친정에서 출산하였다.
그 소생이 박일산(朴壹珊)으로, 이후 묘골은 박중림 후손의 세거지가 되었다.
[묘소] 묘는 사육신 사건으로 화를 당해 실전(失傳)되었다.
[상훈과 추모] 1739년(영조 15) 복관되었다.
1784년(정조 8)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9)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위치한 겸천 서원(謙川書院)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어 있다.
1977년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육신사(六臣祠)[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경내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육신사 경내에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하여 박중림의 위패를 별도로 봉안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육각정 / 육신사 뒷산에서 구봉산 산행길을 시작한다.
길을 잘못 선택했다.
공장으로 들어간 셈이다.
조금 더 전에 내려와서 고갯길에서 올라가야할텐데..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절개면이 있는 고개가 있다.
철망을 옆으로 비켜 오르내리는 길이 된다.
반대편으로도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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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 정상 191m
하산은 철탑을 보고 내려간다. 철탑 직전에 순천박씨 가족묘역이다,
우로 돌아 ㄷ자 모양으로 길이 돌아가게 된다.
낙빈서원으로 내려가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런데 파회정을 먼저 갔다가 삼가헌을 거쳐 낙빈서원으로 트랙을 만들었기에 길을 바꾸었다.
삼가헌 방향을 선택하면 능선에 낙동강을 조망하는 파회정이 있다.
파회정
파회정(坡回亭)의 파회는 묘1리 마을 이름이다.
강정보녹색길은 이 길을 경유하도록 했다.
낙동강 건너 성주 땅이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에 아득하게 높은 곳이 가야산이다.
육신사 가는 길, 반대편에서 보면 강정보 가는 길이다. 묘리는 현위치
삼가헌
연못의 바닥 물이 모두 말랐다.
이 건물은 하엽정이라는 서당 건물로 파산서당이라고 현액이 붙었다.
달성 삼가헌 고택 (達城 三可軒 古宅)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삼가헌과 하엽정(중요민속자료 제104호)
① 삼가헌의 내력
삼가헌은 1747년 처음 세워졌다. 박팽년의 11대손 성수(聖洙)가 이해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삼가헌이라 했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묘골에서 이곳으로 분가한 다음 1809년 초가를 헐고 정침을 지었으며, 18년 뒤인 1826년에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은 이보다 더 늦은 1874년 광석의 아들 규현(圭鉉)에 의해 지어졌다.
② 살림채 영역 : 문간채·사랑채·중문채·안채·곳간채
③ 별당채 영역 : 하엽정과 인공연못
④ 사랑채 대청 위에 걸린 '禮義廉恥孝弟忠信(예의염치효제충신)'은 미수 허목의 글씨
⑤ 중문채는 초가집인데 이는 사대부 집안에서 '청빈함'을 자랑하기 위해 택했던 방식
⑥ 안채는 왼쪽 날개가 짧은 ㄷ자형 건물로 사랑채와 맞물리면서 튼 ㅁ자 형태를 이룸
→안방은 안주인이 사용하는 공간, 대천 건너 건넌방은 주로 며느리가 사용하던 방, 날개의 돌출부에 있는 갓방은 안손님들이나 출가한 딸들이 해산하러 친정에 왔을 때 쓰이던 곳
낙빈서원[洛濱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낙빈서원(洛濱書院)은 단종의 복위에 목숨을 바친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배향한 서원이다.
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5번지에 있다.
낙빈서원은 박팽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하빈사(河濱祠)에 연원을 두고 있다.
박팽년의 혈손이 하빈에 세거하였는데, 박계창(朴繼昌) 때 와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박팽년을 향사하게 되었다. 1679년(숙종 5) 박팽년을 비롯한 나머지 사육신 하위지,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를 위한 사당을 짓고 봉사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고 도내 유생들의 소청으로 1694년(숙종 20) '낙빈'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가 1924년 문중에서 원래 위치보다 조금 위쪽에 복원하였다.
1971년 육 선생 추모 사업 추진 위원회가 조직되고 국고 보조 및 도지사, 군수의 지원을 받아 1982년 별도로 육신사를 만들어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낙빈서원은 산비탈 위에 자리한다.
원래 건물이 있던 위치에서 벗어나 별묘(別廟)도 세우지 않은 재실 형식의 간단한 건물이 되었다.
외문을 들어서면 강당만 남아 있고 비석 1기가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에 2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가운데 마루 2칸의 칸살을 좌우 온돌방보다 작게 잡았으며, 좌우 온돌방과 마루 사이는 4분합 들어 열개문을 달았다.
온돌방 뒤편에 벽장을 만들고, 전면 출입문 위에 환기창을 두었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낮게 조성한 후 정면 기둥만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상부 구조는 오량가(五樑架)이다.
19세기 훼철된 것을 1924년 문중에서 복원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내 건물은 강당 1채만 남아 있으며, 강당 건물에는 낙빈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밖에 비석 1기가 남아 있다.
현재 낙빈서원에서는 향사를 드리지 않고 육신사에서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빈서원 [洛濱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낙빈서원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 (묘리 792번지)
1679년(숙종 5) 창건. 박팽년ㆍ성삼문ㆍ이개ㆍ하위지 등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사육신 중 박팽년의 둘째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유복자를 낳자, 종이 낳은 딸과 서로 바꾸어 몰래 기르면서 하빈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의 혈손인 계창 때에 와서 사우를 세우고 박팽년과 아울러 사육신까지 모시게 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말년에 유림들이 남아 있던 터에 당을 세워 보존해오다가 1982년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 토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구봉산 등산로'는 도채지 동쪽에 있는 지도상의 구봉산을 말하는 게 아니고
지금 가는 방향의 낙동강변에 나란히 가는 산줄기의 산, 탁대로 알려진 그 곳을 말한다.
낙빈서원으로 가는 길에 삼가헌의 안내에 도움을 받은 그 분의 말로는 '구룡산'이라고 하던데...
구봉산을 잘못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두 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면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어쨌던 탁대를 소개한 글에서도 이곳을 구봉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묘리 부근을 둘러싸고 있는 산 전체가 구봉산이라는 말이 아닌가.
191m의 구봉산 정상을 다녀왔는데 지금은 반대방향이다.
그래도 구봉산 방향이라고 지칭한 곳으로 간다.
강정보 녹색길도 그 구봉산의 능선을 밟고 지난다.
이 고개에서 잠시 좌로 올랐다.
가야할 길은 도로를 넘어 있고, 시간이 지체되어 이곳은 내려섰다.
지도에 장자바위가 있는 곳이다.
갔다가 지나서 내려올 수도 있었지만 줄였다.
우측 대숲 쪽으로 길이 있다.
그런데 나는 보리밭을 가로 질렀다.
이 굴다리를 넘어 바로 이정표가 있는 등산로에 오른다.
강정녹색길도 이 길로 이어진다.
구봉산전망대를 지나게 하는 코스가 된다.
강정보 가는 길이라고 표지가 붙었다.
굴다리를 지나서 보니 육신사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육신사 쪽에서 왔으니...
능선 위에 오르니 녹색길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능선에 오르니 낙동강이 내려다 보인다.
건너편은 성주 땅이다.
성주대교를 건너서 왜관으로 가는 버스가 저 길을 지난다.
아침에 타고 온 버스는 강을 건너지 않고 왜관으로 가는 버스였다.
묘1리(파회)에서 보았던 이정표의 구봉산이 오곳을 말함일 듯. 155m정상,
여기에 누군가 매직으로 5봉이라고 적었다.
구봉산 중의 제5봉이라는 말일텐데...
이 부근을 탁대라고 한 것 아닌가.
탁대를 제대로 보려면 강 건너 성주 땅에서 보아야 한다.
구봉산 중에서 최고의 절경이라고 하는 곳이다.
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6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
하빈면 구봉산 바위절벽 '탁대'에서 발췌한 아래의 글을 참고로 올린다.
..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1592년 5월 18일, 왜적이 묘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때 박팽년 선생의 5세손인 총관공 박충후의 두 딸이 왜적을 피해 낙동강가 높은 바위벼랑인 탁대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당시 언니는 인근 하산마을의 전의 이씨 이종택과 혼례를 올린 후 신행을 앞두고 친정에 머물던 중 변을 당했고, 동생은 아직 처녀의 몸이었다.
나중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언니인 박씨부인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열부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하빈면 묘골 마을 입구 순천박씨 선영 아래에 자매의 묘가 있다.
巖名兄弟至今存(암명형제지금존) 이름하여 형제암 지금도 있으니
節義馨香萬古尊(절의형향만고존) 절의향기 만고에 높다네
寄語世間垂釣客(기어세간수조객) 세상에 낚시 드리운 객에게 부탁하니
莫敎閑踏動雲根(막교한답동운근) 공연히 (바위)밟아 구름뿌리 움직이게 하지 말라
하목정 입구의 자전거길 옆 휴게정자가 있는 공간의 계단 모양 벤취 수직면에도 이 싯귀가 한글로 적혀 있다.
정상에서 조금 지나면 구봉산전망대.
구봉산이라는 이름은 이정표 외에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먼저 다녀온 구봉산을 바라보는 전망대라는 뜻은 아니다.
이 방향은 구봉산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구봉산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이다.
강건너 방향이 잘 보인다.
좌전방에 가야산이 보이는 정도로 시야가 맑다.
오늘의 기온이 하빈면 기준으로 최고 0도, 최저 영하 7도였다.
바람도 제법 차다. 맞바람을 맞을 때는 더 추웠다.
강 건너 하얀 색은 비닐하우스다.
아마도 유명한 성주 참외 농장이 아닐까 싶다.
정면 산 중턱의 물빛과 비슷하게 보이는건
처처에 애물단지로 변하고 있는 집열판이다.
이건 조망판이 아니고 홍보판이다.
대구 달성군이 만든 것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성주 땅은 보는 이의 관심을 자극하지만 우리 땅이 아닌 거야...ㅎ
전망대의 조망판이 눈에 보이는 성주 땅은 빼어 버리고....
이게 지방자치제 덕분이다.
가야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왼쪽에 성주대교가 보인다.
낙동강의 성주 강변은 얼지 않았는데, 이쪽 대구 방향은 강변이 얼었다.
가야산 아래 가까운 쪽의 성주 낙동강변의 '뒷산' 강변들판에는 비닐하우스..
성주대교, 가야산....
구봉산전망대에서, 뒷산 정상 뒤로 독용산이 보인다.
성주에서 처음으로 갔던 곳은 독용산성이 있는 독용산인데...
근래에는 벽진이씨의 관향인 벽진면..그 부근의 사드기지...
방어를 방해하는 자들은 맞아도 괜찮은 자들인가,
이쪽의 이정목에는 '하산'이라고 적혀 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라는 말이 아니고 지명이 '하빈면 하산리'이다.
영하의 날씨에 강변의 물이 꽁꽁 얼어 있다.
성주대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목적지가 멀지 않음을 말한다.
하목정 입구의 쉼터, 계단형의 쉼터, 벤취 부분에 한글로 된 시들이 적혀 있다.
8년 전 자전거를 타면서 여기서 하목정을 들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저곳에 적힌 시 중의 하나다.
탁대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귀절이 있다.
달성 하목정 (達城 霞鶩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
'달성 하목정'은 낙포 이종문(1566~1638)이 1604년 경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과 정면 1칸, 측면 4칸의 방들이 서로 붙어서 전체적으로 “丁”자형의 독특한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자형 별당 건물임.
하목정은 “丁”자형 평면을 가진 것도 독특하지만 건물의 용도를 주인과 하인이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것도 매우 이례임.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평면형태가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공간구성과 세부기법 및 의장 등에는 많은 특색이 나타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남.
집오리 목(鶩),
자전거길을 따라 가려다가 마을 안길로 접어 드니 장어마을이라고 한다,
천주교 하산공소 앞을 지난다
하신1리 버스 정류소
여기보다 차가 많은 길 건너편의 하신리 정류소로 갈 생각이었는데,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물어보니 곧 온다고 한다.
그런데 저 친구는 조금 있다가
잘 모른다고 하던 녀석이 굴다리 방향으로 뛰어 간다.
그러고 보니 '곧 도착'이라는 250번의 안내가 보인다.
처음부터 그 쪽으로 갔었더라면 제대로 갔을 것을...
조금 있으니 다른 이가 차를 기다리려고 온다.
한참 기다렸다가 성서2번이 왔다.
250번은 바로 문양 방향으로 간다.
아마 대실역에서 타야할 수도 있었겠지만
성서2번은 공단지역을 한바퀴 돌아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산1리 정류소의 시간표는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간이다.
오늘의 산행 코스는 어려운 곳은 아니다.
그래서 하목정까지 잡았는데 들머리로 이동하는데 버스를 계획과 다른 것으로 탔기에
4km 정도 길어졌다.
코스 중에 몇 곳은 2013년 6월 4일에 자전거로 답사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시 새로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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