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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아홉산 칼다봉 대혜폭포 도선굴 채미정 20220101 토

benel_jt 2022. 1. 1. 22:52

구미 아홉산 칼다봉 대혜폭포 도선굴 채미정 20220101 토 (K&R)

 

코스 : 구미역 - 금강사 옆길 따라 가다 폐가 옆 들머리 - 146.5m/삼각점봉 - 올레길전망대/금오산저수지 조망 - 우로 꺾어 진행 - 260m봉 - 돌탑전망대(290m) - 능선 이탈 좌향 - 256m 봉 - 무덤 지나 능선 우로 갔다가 back - 255봉(255정)정자 - 243m 봉 - 사거리 안부 - 급경사 오름 - 능선에서 좌 갈림길 - 코끼리바위 - 다시 내려와서 좌로 - 바위 잡고 오름 - 주능선만남 - 칼다봉(730m/정상석에느 711m로 표기) - 삼거리/04시방향 - 다리 건넘 - 할딱봉/도선굴 조망 - 긴급경사 계단 - 대혜폭포 - 도선굴 - 금오산성 - 케이블카승강장 - 채미정 - 금오저수지 둘레길 반시계 방향 - 구미외고방향 - 구미역 <16km/6:50>

 

07:15 화명역
09:08 구미역
09:30 구미역 뒷문으로 나와 금강사 좌측길
09:52 철봉 삼각점/146.5m
10:18 올레길전망대
11:00 사거리[칼다봉, 환경연수원, 선기동(대성지), 올레길전망대]
11:06 225정(225m봉)
12:00 큰 바위 우로 우회
12:30 코끼리바위/밧줄 포기하고 내려가서 좌로 우회함
12:54 주능선
12:56-13:05 칼다봉(정산표지 해발71m,등산지도에는 730m)
13:18-13:20 긴 급경사지 계단
13:30 능선 안부/구급상자/이정표[폭포방향으로]
14:09 할딱고개
14:10 할딱봉/대혜폭포,도선굴 원경 조망
14:19 할딱고개 내려가는 계단
14:27 계단 끝 /대혜폭포 앞
14:40 도선굴
14:55 해운사
15:01 금오산성
15:16 금오산성 사적비
15:28 채미정/야은 길재의 회고가
15:36 금오지/금오산올레길 안내도
15:38 금오지의 금오정 수변 및 수상 데크길
산책하는 시민들이 매우 많음
16:03 금오천변 길/구미외고 앞
16:26 구미역 도착/ 16:29 구미발-구포행 매표
16:29 구미역 승차-18:40 구포역 하차/식사
19:55 귀가

교통편 : 구미(-09:08 기차), 올 때 구포(16:29-18:38)

 

 

 

구미 칼다봉 아홉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Track_구미_아홉산_칼다봉_20220101.gpx
1.13MB
구미_아홉산_칼다봉_2022-01-01_09-27.gpx
0.60MB
칼다봉 아홉산 깔딱봉도선굴__20220101_0924.gpx
0.27MB

09:08 구미역 도착, 실내에서 등산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09:30이 다 되었다.

 

금강사 좌측으로 들어가 폐가 지나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무덤 옆을 지나 올라가는데 길은 매우 순하다. 아홉산 구간이 끝날 때 까지는..

 

 

아홉산 첫봉의 삼각점, 146m로 표기 되어 있다.

체육쉼터가 이는 봉

반려동물이 출입 금지된 산길

아홉산 코스에서 금오지 둘레의 올레길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내려올 때 저  우측 길을 돌았는데 좌측이 조금 단조롭고 가깝다.

대부분의 동네 산책객들은 둘레를 한바퀴 도는 것 같다.

둘레를 한 바퀴 돌면 약 2.5km 정도 될 것 같다.

 

칼다봉은 직진해서 무덤을 지난다.

좌로 환경연수원으로 가면 바로 올레길(금오지 둘레길)이다.

 

무덤을 지나 살짝 오르면 능선을 만나 우로 잠시 가서 255m봉을 보고 내려 온다.

255m봉에는 정자가 있다.

255정이라고 붙었다.

 

255정

 

255봉을 되돌아 내려와서 칼다봉 방향으로 가다보면 안부 사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칼다봉 방향은 급경사와 바윗길의 연속이다.

 

첫번째의 큰 바위덩이는 우로 우회하도록 길이 있다.

 

 

 

비탈을 힘겹게 올라오니 코끼리바위가 있다.

밧줄이 달려 있으나 포기하고 내려가서 좌로 길을 찾았다.

 

.

.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가는 길도 만만한 길이 아니다.

 

.

 

 

 

 

 

 

 

 

겨우 주등산로 능선에 올라섰다.

칼다봉길은 일반 등산코스로는 좀 부적절하다.

단체 산행으로 할 때는 보조자일을 챙겨야 할 곳이다.

칼다봉 715m/등산지도에는 730m로 표기되어 있다.

김천 방향으로 조망이 열린다.

 

김천시 방향, 황악산 방향의 조망, 

중부고속도로가 좌(남)에서 우(북)로 진행하는 게 보인다. 경부고속도로는 우측 능선에 막혀 볼 수 없다.

아홉산을 진행할 때는 우로 나란히 진행하고 255봉에서는 대성저수지 건너편을 지나고 있었다.

 

중부고속도로의 동그라미 부분의 아래는 터널 구간이다.

칼다봉에서 앞에 보이는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아님이 확실하다.

사진에 보인 부분은 칼다봉에서 서쪽으로 가까이 보이는 도로인 셈이다.

 

내려가면서 다시 하트모양의 대성저수지가 보인다.

저 건너편의 도로가 경부고속도로.

 

칼다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긴 계단이 이어진다

급경사다.

 

이 암벽으로 인하여 급경사 계단이 필요했던 것.

능선이 급한데 내려가다가 양쪽에 바위가 오똑한 석문을 지난다.

 

좀더 내려가면 안부를 만나고 우로 폭포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거리는 나타내지 않았다.

하산길도 이쪽이 더 안전할 것 같다.

 

대혜폭포로 가기 위한 지름길을 찾는다고 이리로 내려 오려는 걸 다시 능선을 따라 가다가

등고선을  따라 이 길을 걸었다.

비교적 안전한 길이다.

이정표도 있다.

단축을 못한 게 아쉬운지 자꾸 이 길을 되돌아 본다.

지금까지의 예로 산허리를 치고 오르는 길이 얼마나 고달팠던가,

내려오는 길 또한 다름이 없으리니.

 

 

이전 산행 때는 볼 수 없었던 다리다.

산에서 보고 이곳이 대혜폭포인가 했더니 내려와서 보니 전혀 다른 곳이다.

아나 이 아래 정도 되리라.

 

얼음이 꽁꽁 얼어 있다.

이곳이 대혜담이다.

대혜폭포의 수량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이 다리 아래로 제방을 쌓아 저수되고 있다.

제방의 높이로 보아 저수량도 상당할 것 같다.

할딱고개

옛날에 올라오던 할딱고개가 아닌 것 같다.

여기서부터 폭포까지 계단이 이어지고 있으니...

그리고 정상을 향하여 가는 길도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금호지가 내려다 보인다.

좀전에 지나온 길은 저 절벽의 위쪽에 있는 길이다.

저 하얀 얼음의 왼쪽이 도선굴이다.

여기서 보고는 저 굴을 도선굴로 착각했다.

 

저 얼음폭포처럼 보이는 곳은 도선굴 보다 우측 바로 곁에 있다.

도선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를 할딱봉이라고 한다.

 

할딱고개 안내판

 

내려가면서 계단에 안내된 홍보물들이 이어진다.

케이블카는 1974.9.30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도선굴, 철난간이 있기는 하나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긴 닳아 미끄러운 바위로 조심해야.

 

약사봉, 약사암.

구미보..

금오산성

박정희대통령 생가

 

금오산성

 

계단 끝에 대혜폭포

대혜폭포[大惠瀑布]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에 자리한 대혜곡의 폭포.

 


금오산 정상 근처 산성 안에는 1595년경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우물[九井]과 일곱 개의 못[七澤]이 있어 거기서 비롯된 큰 계곡을 대혜계곡이라 하였고, 그 곳에서 형성된 폭포를 대혜폭포라고 하였다. 또 그 물이 여울을 이루어 구미 지방의 용수 공급에 큰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대혜폭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대혜폭포는 명금폭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35년쯤 경상북도 도지사인 일본 사람이 이곳을 찾아 주변 경관과 물소리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사물은 희미한데,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하고 자기의 시상(詩想)이 사라지기 전에 석수(石手)를 불러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겼다고 한다. 그 후로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오늘날 명금폭포라고도 불리고 있다.

대혜폭포는 금오산 북측 대혜곡(大惠谷)의 중간 지점 해발 400여m 지점에 위치하며, 높이가 28m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은 사계절 변함이 없으며, 그 위력으로도 유명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의 벼랑은 계곡을 흐르는 감입 곡류에 의한 침식의 결과물이다. 가파른 경사로 병풍처럼 보이는 계곡에는 겨우내 대혜골에서 흐르던 물이 절벽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혜폭포를 통과해서 하류로 흐르는 물은 남통천이라 불리며 금오산저수지의 수원이 되어 금오천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가장 많이 찾는 등산로에 위치한 대혜폭포는 그 자체로 등산객들에게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능선, 도선굴, 약사암 등과 어우러져 금오산 관광의 백미를 구성한다. 왼쪽의 짧은 능선과 오른쪽의 긴 바위 능선 사이에 패인 골짜기로 떨어지는 높이 28m의 대혜폭포는 여름철 강우량이 많을 때 보면 큰 폭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내리며 부서지는 물보라와 폭풍 같은 냉풍이 주위를 시원하게 한다. 갈수기(渴水期)에는 떨어지는 물의 양이 극히 적어 물방울이 휘날릴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폭포 위에 폭포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대혜담이란 조절지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혜폭포 [大惠瀑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도선굴 안에서

 

금오산&amp;amp;amp;amp;nbsp;굴&amp;amp;amp;amp;nbsp;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 암각[南通洞道詵窟通路記文岩刻]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도선굴 암벽 두 곳에 새겨진 글자.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다.

금오산 굴은 금오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지만, 절벽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올라가 볼 수 없었다. 이를 아쉬워하던 구미면장 김승동(金昇東)이 1937년 봄 금오산 중턱 절벽 한가운데 위치한 도선굴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고자 뜻을 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였다. 이에 암벽의 돌을 깎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고, 이 과정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를 새기게 되었다.

도선굴은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중턱 450m 지점의 절벽에 위치한다. 금오산도립공원 매표소를 지난 지점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승려 도선(道詵)이 세웠다고 하는 해운사(海雲寺)에 다다른다. 해운사 모퉁이를 돌아 5분쯤 오르면 높이 28m의 거대한 대혜폭포(大惠瀑布)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데, 이를 왼쪽으로 두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도선굴 통로인 절벽 밑에 이른다. 도선굴 통로 기문은 도선굴 입구 통로 암벽에 새겨져 있고, 금오산 굴 통로 기는 도선굴 내부의 오른쪽 돌출된 벽 상부에 판석으로 박혀 있다.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은 도선굴 통로의 자연 암벽 표면에, 통로에서 2m 정도 높은 위치에 새겨져 있다. 글자는 한자 해서체(楷書體)로서 15~30㎝ 크기이며, 3행에 총 11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선굴 통로 기문은 자연석 암벽에 제목 없이 글자만 새겼는데 그것은 '천석통로(穿石通路:돌을 깎아 길을 통하게 하다) 구미면장(龜尾面長) 김승동(金升東).'

이라고 되어 있다.

금오산 굴 통로기는 도선굴 내부의 작은 동굴 입구 벽 위에 가로 70㎝, 세로 48㎝의 다듬은 판석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자 수는 세로 24행, 가로 각행 15자로 총 341자이다.금오산 굴 통로기도 역시 구미면장 김승동이 지은 것으로, 제목은 금오산 굴 통로기이고 내용은 도선굴을 비롯한 빼어난 자연 경관과 굴 통로를 만들게 된 동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산은 선산의 진산으로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옛날 고려 말에 야은 길재 선생이 절개를 지켜 돌아와 산 아래에 은거하니 이후로 산이 더욱 드러났다. 전해오는 말에 대각국사가 이 산을 보고 '중국의 숭산과 닮았다.' 하여 남숭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산은 빼어난 곳이 많다. 그 가운데 가는 폭포와 큰 폭포가 있는데, 큰 것은 온 산의 물이 합쳐져 오기 때문에 그 폭포가 떨어지는 곳은 자연스레 못을 이룬다. 가는 것은 절벽으로부터 수백 척을 내려오는데, 물은 적지만 형세는 높기 때문에 떨어지는 비를 흩뿌려 그 곁을 적신다.

큰 굴이 있는데 벽의 3분의 2 위에 있어 볼 수는 있으나 오를 수가 없어 항상 유람하는 사람들의 한이 되었다. 선산군지에 승려 도선이 굴 속에 집을 지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우리 선조 욕담 선생이 또한 굴에 피난하여 일찍이 그 못에서 목욕하고 나서 스스로 욕담이라 하고, 이끼 낀 벽에 두 글자를 새겼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가 완연하다. 대체로 당시에 절벽을 어떻게 출입했는지 알지 못했다. 정축년 봄에 내가 길을 열겠다는 뜻으로 의견을 내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이에 측벽으로부터 돌을 깨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과 통하게 하고 측량하니, 높이는 21척이고 넓이는 24척이며 길이는 25척이나 되었다.

아직 기와 조각과 쇠그릇이 묻혀 남아 있으니,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분명하다. 그러나 산의 형상이 변해서인지 혹 호사자가 훼손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길이 통하게 된 후에 시인이나 유람하는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마침내 한 풍경을 더하여, 모두 '이 공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내가 외람되이 면장에 있으면서 사실 이 일을 주관하였으니 이를 돌에 새겨 후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서 경치의 한 역사를 기록하게 하노라. 면장 김승동이 기록하다."


도선굴 통로 기문은 수직 암벽 면에 음각되어 있어 자연 풍화에 노출되어 있으나 상태는 아직 양호하다. 금오산 굴 통로기는 도선굴 내부에 있지만 위치가 높아 사람손이 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판석의 재질이 오석이어서 잘 보존되고 있지만 기문 말미의 ‘연월일’이 고의로 훼손된 상태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昭和 十二年 四月日"(소화 12년 4월일)이라 새겨져 있어 1937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도선굴 통로 기문과 금오산 굴 통로기는 비지정 문화재이고, 도선굴과 함께 구미시 금오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금오산 도선굴은 신라 말기 도선, 고려시대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조선시대의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이 찾아 은거할 만큼 절경이었지만 제대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구미면장의 노력으로 오늘날 누구나 이곳에 올라 금오산과 도선굴의 비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도선굴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통로 기문은 이 통로가 만들어진 내력을 잘 밝혀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 암각 [南通洞道詵窟通路記文岩刻]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해운사 석축 준공비를 보고서야 절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금오산성

금오산성[金烏山城]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33외 6필
시대 : 고려/고려 후기

경상북도 구미 지역 금오산에 축조한 이중의 석축 산성.

금오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자, 인근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금오산(金烏山)에 피난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두었던 군창까지 두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는데, 『태종실록(太宗實錄)』에 1410년(태종 10)에 수축했다고 기록된 것이 있고,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선산부조(善山府條)에 1413년(태종 13)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80여 년간 문헌상 기록이 없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4년 뒤인 1595년(선조 28) 금오산성과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어야 할 것을 청하였고, 11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비변사에서 “산성에 들어가 지키게 하되 금오·천생·부산(富山)·악견(岳堅)·공산(公山)·용기산성(龍起山城)을 먼저 지킬 것이고, 화왕산성(火旺山城)을 급히 보수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각 도 감사(監司)에게 이 뜻을 알리고 산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일선지(一善志)』 금오산성조에 보면 단기간에 산성을 개수하는 데 9개 주현(州縣)의 민과 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7월 왜군이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1595년(선조 28)과 1596년(선조 29) 두 해에 걸쳐 각 산성을 수축하여 방책(防柵)을 튼튼히 하고 병력을 강화하여 왜군도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7년 동안 후반 4년 동안 금오산성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 후 41년 뒤인 1639년(인조 17) 외성을 쌓는 확장 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1868년(고종 5)에 새로 고쳐 쌓았다.

위치
금오산성은 금오산도립공원 내에 있다. 외성은 해발 약 350m에 위치하여 금오산 입구와 대혜폭포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노선 중간 지점에 있으며, 내성은 해발 약 850m의 성안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 있다.

형태
금오산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내성(內城)과 북쪽의 계곡을 두른 외성(外城)의 이중으로 된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금오산의 절벽과 급경사를 이룬 정상부와 북향의 교각능선(交脚稜線)을 이용하여 포곡식(包谷式)으로 구축되어 있다. 내성은 산의 윗부분에 둘레가 10리나 되도록 쌓았는데, 절벽이 험한 곳은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따로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 정도 된다. 북쪽 외성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의 높은 기단이 구축되어 있다. 정상에서 동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길이 약 450m, 폭 8~18m 되는 돌출 성곽이 있고 북쪽 외성 끝부분에도 짧은 돌출 성곽이 있다. 규모는 외성이 길이 약 3,700m, 내성이 2,7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은 1m 정도이다.

현황
금오산성 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각종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폐허가 되었다. 내성창(內城倉)·대혜창(大惠倉)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부근에는 도선암(道詵庵)·금오서원(金烏書院)·길재사(吉再祠) 등이 있었다. 지금은 내성과 외성의 문과 암문의 형체가 남아 있다. 샘인 금오정과 마지막으로 산성을 고쳐 쌓은 기록을 담고 있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금오산성은 성벽이 붕괴된 곳도 있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호국의 국방 시설물로서 역사적으로 보존을 필요로 하는 관방 유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산성 [金烏山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금오산 금오동학 각자[金烏山金烏洞壑刻字]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의 바위에 새겨진 조선 중기 명필 황기로의 글씨이다.

 


금오산(金烏山, 977m) 관리사무소(주차장) 근처의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150m 정도 산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그 바위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금오동학이란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각 글자의 길이는 세로 90~100cm, 가로 50~70cm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산 금오동학 각자 [金烏山金烏洞壑刻字] (두산백과)

회고가[懷古歌]

조선 초기에 길재(吉再)가 지은 시조.


1수로 진본(珍本)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는 고려왕조의 몰락으로 인하여 봉모(奉母)를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여 선산(善山)에서 은거하였는데, 조선 정종 2년(1400)에 조정에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주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작품은 고려왕조를 회고하며 지은 것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하되 人傑(인걸)은 간듸업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는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흥망이 유슈하니······’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고려의 도읍지를 돌아보며 느끼는 과거에 대한 회상(回想)·비탄(悲嘆)의 감정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런데 원천석은 목동들의 피리소리라는 애상적인 가락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비감함을 그렸고, 길재(吉再)는 은성(殷盛)했던 과거에의 회고와 무상감으로 이입되는 사상을 통해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회고가 [懷古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천석의 회고가[懷古歌]

조선 초기에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시조.

구성 및 형식
1수로 진본(珍本)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는 고려 말엽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였는데, 군적(軍籍)에 등록되므로 부득이 과거에 나아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다시 향리에 돌아가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을 개탄하였고, 조선조 태종이 그에게 배운 일이 있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원천석의 시조는 2수가 전하는데 그 중 1수가 회고를 읊은 것이다.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로다
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쳐시니
夕陽(석양)에 지나는 客(객)이 눈물 계워 하더라.

이 작품은 길재(吉再)의 “오백년 도읍지를 ……”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고려의 도읍지를 돌아보며 피리소리라는 애상적인 가락을 통해 자신의 비감한 정감을 잘 표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회고가 [懷古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채미정(採薇亭)

채미정(採薇亭)

 

구미 채미정[龜尾 採薇亭]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249번지 등)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명승 제52호이다.
크기 : 면적 56,603㎡, 정면 3칸, 측면 3칸

 


1986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2호로 변경되었다.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건립하였다.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앞쪽으로 흐르는 맑은 냇물과 계류와 수목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경역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 (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은(殷)이 망하고 주(周)가 들어서자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미 채미정 [龜尾 採薇亭] (두산백과)

 

 

길재[吉再]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출생-사망 : 1353 ~ 1419

본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재 [吉再] (두산백과)

 

 

채미정(採薇亭) 정화 기념비, 필체가 눈에 익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박희광[朴喜光]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희광의 별명은 박상만(朴相萬)이다.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박윤하(朴胤夏)이다.

박희광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6세 때 봉천성(奉天省) 남성자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하고 오동진(吳東鎭)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18세의 나이로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 개의 군사단체가 관동군(關東軍)의 진로를 봉쇄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의 집단촌과 독립단체를 와해시키기 위해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보민단(保民團)·일민단(日民團) 같은 친일단체를 만들었다. 친일단체 대표들을 암살하기 위해 대장 김광추(金光秋)와 대원 김병현(金炳賢)·박희광으로 3인조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당시 정갑주(鄭甲周)는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 서기로 있으면서 여순고등계 첩자로 악명이 높았는데, 1924년 6월 1일 밤 박희광은 정갑주 집의 대문에 사형 선고문을 붙이고 가족과 같이 환담하고 있던 정갑주를 사살했다.

1924년 6월 7일 정오에는 이용구(李容九)와 같이 한일합방에 앞장섰으며 재만조선인회 회장이란 미명 아래 보민단(保民團)을 조직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른 최정규(崔晶圭)의 집에 잠입하여 최정규의 장모·처·비서를 현장에서 사살했다. 최정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裵貞子)를 대련(大連)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했으며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또 1924년 7월 22일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그날 저녁 고급요정 금정관(金井館)에 침입하여 군자금으로 300원을 탈취해 나오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박희광은 관동청(關東廳) 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2심에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일본의 유인(裕仁) 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 감형되어 1943년 43세로 출옥했다.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같이 상해임시정부로 가려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가지 못하고,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와 44세의 만혼으로 문화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가정을 꾸렸으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들이 속속 귀국하자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더니 위로금으로 2000원을 주면서 정부 수립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1949년 김구가 암살되자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고 너도 나도 애국자였다고 나서던 때였으나 박희광만은 묵묵히 옥중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양복 수선을 생업으로 살았다. 생활고와 심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한때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세례명으로 영세까지 받았으나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상처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후일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동아일보 대구지국에서 발견되어 박희광의 행적이 입증됨으로써 뒤늦게 훈장이 수여되어 노후에 다소 보탬이 되었으나, 1970년 l월 20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하였다.

상훈과 추모
생전인 1968년 3월 l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며 타계 후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묘원에 안장되었다. 1972년 선산군의 뜻있는 유지들의 발기로 박희광의 기념사업을 추진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동상 건립비 100만 원과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10여 년간 진척되지 못하다가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구미문화원 사업으로 착수하여 1984년 8월 15일 기공식을 가지고 12월 28일 동상 제막식을 하였다. 동상은 금오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희광 [朴喜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금오지(金烏池)

 

금오정(金烏亭)

 

수중 데크로 이어진다.

금오지(金烏池) 전망대 정자

금오지(金烏池)의 일몰 시각에 하산하게 되었다.

2022년 정초부터 은혜로운 시간.

시간에 딱 맞추어 하산하고 열차와 3분 간격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