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덕산 응해산 왕산 20211207 화 솔로(K&R)
코스 : 달구벌고등학교(대왕재)-도덕산-응해산-왕산-연경뉴웰시티아파트앞 종료 <9.93km/5:20>
교통편 : 동대구역(0825)-동대구역지하차도2(101-1번)-달구벌고등학교 앞 하차//
귀가 시 교통 : 동부 8번 승차(14:59)-아양역 하차(15:27), 아양역에서 814번 승차-동대구역 건너 하차(15:42)
도덕산 응해산 왕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들머리는 도덕암으로 바꾸면 좋을 듯함, 이 파일의 들머리는 비추천
대왕재(大王峴)
대구 동구 덕곡동과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지대에 위치하는 고개로 도덕산(660m) 아래에 위치한다.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가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를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왕건의 기병 군사 5000명이 여기서 숙영 했다고 하여 대왕재라고 한다.
조선 숙종은 왕자가 없어 성전암 농암스님께 기도를 부탁해서 숙빈 최 씨가 왕자를 탄생하니 이 분이 조선 21대 영조대왕이며, 파계사로 행차하실 때에 이 재를 넘었다고 해서 대왕재라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파계사로 행차한 임금은 숙종인가, 영조인가.
잠행을 잘 하던 숙종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송광매 기념관..
보고 가자는 걸, 일찍 하산해야 하는 친구가 있으니 바로 가자고 했다.
절대 여유로운 산행이 아니니, 다음에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코로나 핑계로 폐문했을 수도 있으니..
송광매의 매가 매(鷹)인가 했더니 매(楳)다.
삽화라도 하나 있었다면 쉽게 이해가 되었을 걸...
달구벌고등학교, 덕산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저 앞으로 보이는 고개 너머는 칠곡군 동명면이다.
등고선에 의하면 해발고도가 270m 정도는 될 것 같아 보인다.
정상까지는 400m 정도만 높이면 되는 거리다.
하산 지점은 고도 60m 정도다.
도덕산이 앞으로 보인다.
주인장이 고맙게도 길을 열어두었다.
열쇠는 본래대로 복구해 두고 문을 닫았다.
길까지도 계속 위협적인 고압전선이다.
결국 마지막은 선을 누르고 넘었다
그곳에도 스프링으로 만들어 선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배려가 세심하다.
농장 쪽을 뒤돌아 보니 팔공산의 능선이 보인다.
붉은색의 글씨는 모두 탈색해버렸지만 유기탄과 불발탄에 대한 주의 환기다.
길이 사라지면 때때로 나타나는 시그널이 반갑다.
선답자들도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짐작이 간다.
가시를 피하고 헤치고, 급경사에서는 의지할 부분이 없어서 매우 긴장이 되는 곳들이 있다.
이런 숲을 헤치고
정상석이 앙증스럽기도 하다.
도덕산(道德山)의 이름은 도덕암(道德庵)에서 차용한 것일까
도덕암[道德庵, 칠곡] 道德山 道德庵
팔공산은 대구, 영천, 경산, 칠곡, 군위 등 경북 중부를 아우르는 한국불교의 성산이다. 때문에 팔공산 권역 내의 대부분의 사찰이 산명을 당연히 ‘팔공산’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칠곡의 도덕암은 예외이다. 분명 팔공산 도덕암이 분명할 터인데 도덕암은 독자적으로 사명에서 그 이름을 따 ‘도덕산(道德山) 도덕암(道德庵)’이라 지어 부르고 있다. 도덕암은 신라 눌지왕 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고, 고려 광종 19년(968) 혜거 국사(惠居國師)가 칠성암(七星庵)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중수했다는 사적만이 남아있다. 훗날 조선 철종 4년 몽계 스님에 의해 ‘도덕암’이라는 사명을 고쳐 부르고 사명에 따라 도덕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도덕암에는 조선 철종 13년에 그려진 몽계당 선의 대사(夢溪堂 善誼大師)의 진영이 보관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16 나한상이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모으고 있는데 현재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해놓은 상황이라고 한다. 특히, 도덕암은 이 16 나한상의 존재로 인해 칠곡에서는 유명한 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도덕암에서도 나한 기도만을 올리는 신행단체인 ‘나한봉참회’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고려 광종이 이곳에 와서 도덕암(道德庵) 약수를 마시고 지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어정수(御井水)‘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도덕암이 팔공산이 아닌 도덕산(道德山)에 자리한 것이라고 내세우는 ‘자존’은 ‘암자답지 않은’ 유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음도 하거니와, 예부터 선지식을 많이 배출해 ‘도덕암’이라고 지었다는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 도덕암의 설화 및 역사 *
도덕암은 신라 19대 눌지왕 대(417-458) 창건설이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광종 19년(960)에 혜거 국사(惠居國師)가 대중수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적이 전해온다. 당시 고려 광종은 혜거대사를 왕사로 모시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종이 친히 어가를 몰아 지금의 도덕암으로 와 왕사로 모실 것을 권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이에 광종이 돌아가려 가자 대사는 ‘이것도 속세의 인연’이라며 며칠간 쉬면서 속병을 고치시라 했다.
그래서 광종은 여기에서 3일간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복용했더니 씻은 듯이 속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샘물을 ‘어정수(御井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아직도 극락보전 뒤편에 샘물이 남아있다. 이 일로 광종은 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 절을 칠성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어정수를 약물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도덕암을 찾는 불자들은 으레 이 어정수를 꼭 복용한다고 한다. 도덕암의 이후의 사적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전하는 바가 없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고 광해군 12년(1620) 법거선자(法居禪子)가 중수했으며 인조 10년(1632)에 훈장선사(訓?禪師)가 나한전을 건립했다. 또 효종 4년(1653) 기성대사(箕城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덕암(칠곡)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파계사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 하였다.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 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 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동화사와 더불어 대구 지방의 유명한 풍치지구이며,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인 동화사의 말사로서 불상, 석등, 석불, 영조대왕의 어의가 보관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구도나 형식에서 특색을 갖추고 있고 필법과 채색 또한 품격을 지닌 뛰어난 작품으로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파계사의 주요 문화재
현존 당우로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 법당인 원통전(圓通殿), 적묵당(寂默堂)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현니암(玄尼庵) ·성전암(聖殿庵) ·금당암(金堂庵) 등이 있는데, 성전암은 경북 3대 도량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로 보물 파계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원통전(지방문화재), 원통전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영산회상도(후불탱화 보물) 민속문화재(시지정) : 설선당,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산령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산신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신각은 산신을 봉안한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짐작게 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사찰 내에 봉안되게 되었다. 산신신앙은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 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조선시대 이후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설선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원통전을 중심으로 적묵당과 마주하고 있다. 1623년(인조 1) 계관 법사에 의해 창건되어 두 차례(1646, 1725)에 걸쳐 중건하였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를 시행한 후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 건물은 대중식당과 강습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조양식과 가구 수법 등이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영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기영각은 영조대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으로 이름한 전각이다. 1696년(숙종 35) 현응조사가 성전암(성전암)과 더불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친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바른 층 쌓기 기단 위에 건립된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구조양식은 덤벙 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와 함께 앙서와 수서를 장식한 외일출목 주심포계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 후기 공포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나 우물천장으로 가리어져 있다.
[적묵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적묵당(寂默堂)'이란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한다는 불교용어인 적묵(寂默)에서 따온 것으로 설선당과 마주 보고 있는 'ㄱ'자형의 건물로 소박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진동루]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원래 물의 줄기가 아홉 갈래고 흩어져 있다 하여 물길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로 파계사라 이름하였다 하며, 진동루는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곳의 기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하였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으로 가공하지 않은 방형의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층 어칸을 통로로 하고 측간의 뒷부분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에는 통간 우물마루를 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부재가 다소 약한 감이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문은 모두 미닫이 유리문을 달아 어색한 면이 있으나 익공 등에서 볼 때 조선시대 중·후기 양식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통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07.25 지정) 원통전은 일반적으로 관음전(觀音殿)이라고 하며,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을 주불로 봉안하는 불전을 말한다. 파계사는 중심 전각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설선당, 적묵당 그리고 앞에는 진동루 등이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선조 38) 계관 법사가 중건하고, 1695년(숙종 21)에 현응조사때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건축양식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가구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은 후 둥근기둥을 올리고 있다. 법당 내부의 불단은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의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형태로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 넣어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불단의 상부에는 보개(寶盖)를 설치하고 있다. 원통전 앞에는 좌우 양쪽에 당간지주와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수미단(須彌壇)은 사찰의 법당 등에 설치하는 수미산(須彌山) 형상의 단. 수미산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상상의 산으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대구 파계 사건칠 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1989.04.10 지정)
파계사의 주전인 원통전의 주존불이다. 고려 후기 불상 양식으로 삼중의 높은 보관과 통견의를 걸치고 있으며 온몸에 장엄하고 복잡한 영락을 표현,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 불상이 차지하는 큰 의의는 1979년 개금불사 때 복장(腹裝)되어 있던 영조대왕의 어의(御依)와 어의를 복장하게 된 경위와 불상의 건립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발원문을 발견하여 불상이 조성된 것이 최소 1448년 이전이라는 것과 불상 조각의 변천과 유사 불상의 편년을 가늠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수 있다.
[파계사 석조부도]
파계사 입구 오른쪽에 석축을 쌓아 조성(2기)되어 있다. 좌측 부도는 절충장군 가선대부 보광당 전명대사지탑(1651년 효종 2)으로 사각의 대석 위에 6각의 석조를 놓고 2중으로 조각된 앙련좌 위에 부도가 설치되어 있다. 우측부도는 회진당원의대사지탑(1648년(인조26)으로 6각의 대석위에 연화문을 조각, 그 위에 일석으로 된 앙련과 부련이 있고 그 위에 부도를 설치하였다. [팔공산 파계사 사적비] 파계사 사적 비명이라 하여 파계사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 애장왕(800-808) 때 심지 왕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회진된 것을 1605년(선조 38년) 계관 법사가 원통전을 시작으로 설선당 등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파계사 삼병조사(三甁組師)인 현응 대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693년(숙종 19년) 10월 5일 밤에 숙종의 꿈속에 현응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왕이 현응 대사에게 왕자 낳기를 부탁하는데 수락산(水絡山) 성전에서 100일 기도 끝에 이듬해 원자가 탄생하니 이가 후일의 영조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를 영조의 생전·사후의 복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절 입구에 「대소인 개 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를 세워 왕실 원당에 감히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관료들로부터의 착취와 사역도 면하게 해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계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정상석은 헬기장.
사실은 오늘 산행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가장 힘든 등로를 치고 올랐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다.
여기서 식사를 끝내고 다시 이동하기 전에 정상석을 한 번 더 보고...
다시 만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등고선의 조밀함이 보이는 곳으로 등로를 잡은 것은 지혜가 아니다.
단지 이 길을 선택한 것은 교통편과 이동 거리와 시간을 참고한 것이다,
동대구역에서 동대구역 지하차도 2번 정류소에 알맞게 연결되는 101-1번이 08:55분경에 온다는 게 동대구역의 시간과 약간의 여유를 두고 있으며, 09:35분경에 도착하는 시간이 매우 유리한 것이다.
동명 정류소에서 이곳 대왕재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적어도 1시간이 늦어진다.
그래서 조금 험한 길이지만 선택했는데,
이 길은 추천할만한 길이 절대 아니다.
올라가는 길에 요양원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길이 없다. 간다면 동물이나 다니는 길이다.'
라는 말이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도덕암에서 올라온다면 비교적 안전한 코스가 아닐까 싶다.
이 안내판은 '유기탄'이나 '불발탄'이 색은 바랬으나 형태는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난다.
오랫만에 걸을만한 능선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응해산으로 오르는 길은 다시 급경사를 한 번 각오해야 한다.
응해산의 정상부가 앞에 좌에서 우로 약간 내리막을 그리고 있는데 또 한 번 오르막을 치고 가야 할 판이다.
우측으로 가야 정상으로 오르지만 일단 있는 길을 이용하여 좌측의 농막을 향하여 올라가서 우로 방향을 버꾼다.
우측의 사잇길은 좋아 보인다.
곧 거칠게 오르는 길을 따라야 한다.
튼실하지는 않으나 이 밧줄이 있는 곳으로 오르면 조금 도움이 되는데...
첫 부분은 이 밧줄보다 우측으로 옮겨서 올라가게 되었는데 가파른 데다 잡고 의지할만한 게 별로 없었다.
512m 봉에 올라서면 완만하고 평평한 면을 만난다.
'응해산 518.2m' 표지가 걸렸다.
등산지도에는 '응매산(518)'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부근에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곳이 있다.
내려가는 좌측에 이전에 다녀온 '응해산'은 이름이 같다.
그 아래의 '왕산' 또한 이름이 같다.
좌측(동쪽)의 응해산에서 남동쪽으로 1.5km 정도에는 '응봉'이 있다.
현 응해산에서 남서쪽으로 2.2km 정도의 거리에는 '응애산(369m)'이 있다.
'응'자가 많아 매와 관련된 이름인가 하여 들머리의 송광매 기념관도 매가 매(鷹)인가 했더니 매(楳)였던 것.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표지판만 뚜렷하다.
370m 봉
353m 봉
뒤돌아본 도덕산과 걸어온 길
도덕산이 가운데 보인다.
왕산 정상 부근에는 철탑이 두 개가 있다.
왕산 (191m)
내려오는 등산로의 좌측에도 나란한 위치에 왕산이 또 하나 있다.
그건 247m로 이곳보다 높다.
그 하산길에 신숭겸 유적지가 있다.
왕산 이후에 또 하나의 작은 봉이 있다.
마지막 봉인 162m 봉이다.
'풍저창 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영천 이공의 묘소를 지나면 바로 도로에 떨어진다.
풍저창[豐儲倉]
고려 및 조선시대에 국용(國用)을 담당하였던 관청.
고려 전기에 국용을 담당하였던 관청은 우창(右倉)이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여 우창을 풍저창(豐儲倉)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使) 1명(정 5품), 부사 1명(정 6품), 승(丞) 1명(정 7품)을 두었다. 고려 전기에 우창의 별감(別監)을 근시(近侍)[내시(內侍)]로 임명했던 것과 달리, 충선왕은 풍저창의 사와 부사를 정식 관리인 품관(品官)으로 임명했다. 이는 풍저창을 비롯한 국가 중요 재정관청의 관리와 운영을 공적으로 하려는 의도였다. 공민왕 때에는 사를 종5품, 부사를 종6품, 승을 종7품으로 낮추고, 대신 종8품의 주부(注簿)를 더 설치하였다.
충선왕 때 정해진 풍저창의 이름과 기능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정미 일의 관제 개편 때 풍저창은 국용을 수입하고 지출하는 일을 맡는 관청으로 정해졌다. 관원은 사 1명(종5품), 부사 2명(종6품), 승 2명(종7품), 주부 2명(종8)이 설치되었다. 조선 초기 정도전(鄭道傳)의 저술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傳)』 부전(賦典)에는 ‘풍저창에서 제사(祭祀)·빈객(賓客)·전역(田役)·상황(喪荒) 등의 국용(國用)을 담당하였고, 공상(供上)을 담당한 것은 요물고(料物庫) 등 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조선 초기 풍저창이 고려시대 우창을 이어서 국용 전반을 담당한 관청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풍저창은 광흥창(廣興倉)과 함께 국가 재정 운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삼사(三司)의 회계 출납 대상이었고, 사헌부(司憲府)의 감찰을 받았다. 풍저창은 1405년(태종 5) 정월 관제 개편 때 광흥창·공정고(供正庫)·제용사(濟用司) 등과 함께 호조(戶曹)의 속사(屬司)로 편제되었다.
1466년(세조 12) 1월 무오일의 관제 개편 때 풍저창은 정4품 관청으로 승격되면서, 관원의 명칭과 구성이 바뀌었는데, 이것은 『경국대전』에 그대로 등록되었다. 『경국대전』에 경관직 정4품 아문으로 수록된 풍저창은 쌀과 콩, 초둔(草芚), 지지(紙地) 등의 물품을 맡는 것으로 규정되었고, 수(守) 1명(정 4품), 주부(主簿) 1명(종 6품), 직장(直長) 1명(종 7품), 봉사(奉事) 1명(종 8품), 부봉사(副奉事) 1명(정 9품)의 관원과 서리(書吏) 10명이 있었다.
조선시대 풍저창에서 담당한 국용의 범주는 분명하지 않지만 풍저창의 용례를 살펴보면, 풍저창에서는 각 관청의 운영경비, 제사 비용, 각종 연회와 빈객 접대 비용, 사냥 등 전역(田役) 비용, 구휼, 성균관과 5부 학당의 운영 경비, 잡역자들의 월봉 등을 맡았다.
1637년(인조 15) 3월 정미 일에 풍저창은 장흥고(長興庫)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이후 조세제도가 개편되고, 그에 따른 국가 재정운영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특히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고 선혜청에서 각 관청의 경비 조달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국용 전반을 담당하던 풍저창의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637년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조선 말기까지 풍저창의 용례가 보인다. 이것은 풍저창이 가졌던 국용전반의 재정을 담당하던 기능은 인조 대 이후 사라졌지만, 풍저창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제한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남았다는 것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풍저창 [豐儲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儲 쌓을 저
1. 쌓다
2. 저축하다(貯蓄--)
3. 마련해두다
거리는 길지 않으나 경사도와 업다운을 고려하여 5시간 30분을 예상했던 곳인데, 5시간 20분이 걸렸다.
欸 애, 예, 해
한숨 쉴 애, 성난 소리 예, 성난 소리 해
1. (한숨 쉴 애)
a. 한숨 쉬다
b. 탄식하다(歎息ㆍ嘆息--)
c. 험담하다(險談--)
2. (성난 소리 예)
a. 성난 소리
b. 아, 어(놀라는 소리)
c. 노 젓는 소리
3. (성난 소리 해)
a. 성난 소리
b. 아, 어(놀라는 소리)
c. 노젓는 소리
'樂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구 수성구 가창면 삼정산 녹동서원 우록당산 대바위봉 자라바위봉 20211214 화 (0) | 2021.12.14 |
---|---|
대구 달성군 다사읍 마천산 죽곡산 강정보 20211211 토 (0) | 2021.12.11 |
대구 산성산 앞산 20211204 토 (1) | 2021.12.04 |
경산 병영성지 & 고분군 20211201 수 (0) | 2021.12.01 |
대구 천을산 우산 고산 고산서당 20211127 토 (0) | 2021.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