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창원 진해 밤갓산, 남산 웅천왜성, 제덕산, 제덕토성, 제포성지, 사화랑산, 성실봉 20210120 수

benel_jt 2021. 1. 20. 21:25

창원 진해 밤갓산, 남산 웅천왜성, 제덕산, 제덕토성, 제포성지, 사화랑산, 성실봉 20210120 수 솔로(R&K)

 

코스 :

1. 흰돌메공원-밤갓산 4km/1:30
2. 남산/웅천왜성-제덕산-세스페데스공원 4km/1:20
3. 공원묘지-사화랑산/봉수대-성실봉/영동왜성 5km/2:10
4. 영동, 삼포, 제포 해변길 3.8km/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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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거리/시간 : 16.8km/6:00

 

08:00 집에서 출발
화명IC-남해고속도로-장유IC-대청IC-부산신항접속고소도로-진해IC-
웅천교회로 가서 왜성부터 시작하려다가 황포돛대를 먼저....
08:43 황포돛대 안내조형물 800m 거리
해안길 이동
08:55 황포돛대노래비
09:00 흰돌메공원
09:44 밤갓산
10:25 흰돌메공원 회귀
차량 이동-웅천교회로
10:57 주차장에서 출발/웅천왜성 방향 표시
차가 올라갈 수 있는 임도
11:08 체육공원-좌로 안내 화살표 2개
11:16 성곽 통과/정상에서 이어져 내려온 3곽인 듯
11:25 남산 정상, 왜성 안내, 삼각점
이 위치가 천수각 인 듯, 사방으로, 바다쪽 조망 양호
11:35 성의 동쪽 끝 부분에서 바다 방향과 주변 조망
11:52 안부 체육공원
12:17 제덕산 정상
12:38 77m봉/여기서부터 제덕토성인 듯하다.
좌로 가서 가가운 곳으로 내려가서 제포진성까지 갈까 하다가 우로 돌아 가니 토성 흔적,
12:50 세스페데스공원/기와가마 흔적 전시
13:09 웅천교회/ 주기철목사 출신교회
13:30 차량 이동/와성 마을 - 제포회관
13:33 제포성지 입구
13:43 제포성지 안내판, 주변 조망
시간 관계로 건너편은 포기하고
차량 이동
14:10 천자봉공원묘원 하단부에서 주차하고 출발
14:45 사화랑산 정상/봉수대
15:10 성실봉 정상/삼각점, 명동왜성
15:26 도로에 나옴, 도보로 이동 음지도로
15:45 음지도 갔으나 도보 이동 감안하여 입구에서 되돌아 나옴.
16:11 삼포 마을을 언덕 위의 도로에서 조망하고 진행
16:21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
16:25 사화랑산봉수대가는 길 이정표
16:50 주차한 곳/공원묘지 하단부
차량 이동 - 웅천읍성
17:07 웅천읍성
17:20 주기철목사 기념관
17:25 차량 이동 귀가길
저녁 식사후
19:37 귀가

밤갓산을 덤으로 챙긴 대신, 소사마을과 도자기전시관, 웅동중학교를 보려고 했는데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시간은 어지간히 맞춘 셈이다.
제포왜관은 다음 기회에 한 번 챙겨보아야겠다.
왜성재발견과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일으면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이야기에 끌려 어제 한글 소설 오다 쥬리아 상하권을 주문했다.
지난 번 송운대사분충서난록 처럼 희귀본이 되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조선 여인이 끌려가서 천주교도가 되고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천주교도라고 귀양...
어쨌던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이 사람을 소재로 여러 책이 발간되었다는데....

 

 

 

흰돌메공원에서 밤갓산 코스 왕복
남산 웅천왜성, 제덕산, 제덕토성, 세스페데스공원 코스
제포진성 코스

 

 

사화랑산봉수대와 성실봉 명동왜성 코스
사화랑산봉수대, 성실봉 명동왜성 코스
사화랑산-성실봉 하산하고 명동, 염포, 제포 해안길

 

GPX트랙 파일 첨부 :

차량 웅천교회 와성 제포마을회관__20210120_1332.gpx
0.03MB
사화랑산 성실봉(영동왜성)__20210120_1409.gpx
0.06MB
도보 음지도-염포제포__20210120_1552.gpx
0.07MB
남산 웅천왜성 제덕산 세스페데스__20210120_1053.gpx
0.09MB
밤갓산-흰돌메공원 왕복__20210120_0906.gpx
0.07MB
도보_음지도-고방골_2021-01-20_15-52-14.gpx
0.10MB
창원진해_사화랑산_성실봉_음지도_2021-01-20_14-08-46.gpx
0.15MB
차량이동_웅천교회-와성-제덕마을회관2021-01-20_13-32-28.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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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_진해_남산_웅천왜성_제덕산_세스페데스_2021-01-20_10-52-44.gpx
0.20MB
창원_진해_범삿산_2021-01-20_09-06-22.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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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창원남산웅천왜성제덕산세스페데스20210120.gpx
0.59MB
Tr창원사회랑산봉수대성실봉영동왜성20210120.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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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창원진해제덕성지20210120.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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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창원밤갓산흰돌메공웡20211020.gpx
0.43MB

 

 

밤갓산 정상 삼각점

 

흰돌메공원저전망대에서 보는 남산, 정 정상에 웅천왜성이다.
정상에서부터 여기까지 그리고 아래로 성곽이 이어진다
제2곽 위치인 듯한데 성돌의 쌓인 형태가 살아 있다.

창원 진해 웅천왜성(昌原 鎭海 熊川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
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79호로 지정.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려와서 안부 체육공원 위치에서 뒤돌아본 입구의 모습
제덕산 정상, 아래 해안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인가..

창원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Parque Céspedes]

쿠바 산티아고데쿠바 도심에 있는 공원.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퍼레이드 광장과 주광장 그리고 제정광장으로 이루어진 공원으로 이곳 주민들의 쉼터이다.
공원 안에는 제1차 독립전쟁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마누엘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Céspedes) 동상이 있다.
공원 주위에는 시청 건물, 최초의 정복자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가 살았던 집, 주정부 산하 문화부 건물, 카사 그란다 호텔, 고비에르노 궁전 그리고 400년 된 아순시온 성당(Catedral de la Asunción) 등 역사적 건축물이 많다.
특히 아순시온 성당 안에는 벨라스케즈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스페데스 공원 [Parque Céspedes] (두산백과)

 

 

 

와성마을 앞까지 차량으로 왔으나 마을 안내가 없다. 저 도로는 신항만으로 가는 도로, 등산지도에는 미반영
이 안내가 방향을 애매하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반대편에도 있었던 모양
안내판의 반대방향에도 네니버,다음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저 건물은 펜션인가...사유지가 있을 위치가 아닌 것 같은데...

창원 진해 제포진성(昌原 鎭海 薺浦鎭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

진해 제포진성의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몇몇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포진성(薺浦鎭城)이 아니라 제포성(薺浦城)이라 지칭하고 있으며 제덕토성과 혼동되기도 하는 등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논의 또한 복잡하다.
진해 제포진성이 처음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좀 더 명확한 자료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1437년(세종 19) 진을 설치하였지만 진성은 축성되지 않았고, 연변(沿邊)에 창고 시설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84년(성종 15) 집의(執義) 조숙기(曺淑沂)가 제포를 포함하여 전라도·경상도 연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러면 왜인들이 놀랄 수 있고, 각 포에 성을 쌓으면 수군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 육지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성종은 적극적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 17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이 달에 경상도 제포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4,316척 3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진해 제포진성의 규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웅천현 읍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진해 제포진성은 축성 당시 4,313척[측정 결과 1,377m]으로, 웅천 읍성[3,514척] 보다 1.23배가량 큰 석성(石城)이었다.
다만 지금은 성체를 볼 수 없으며, 동문지와 해자, 남쪽 축대와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진해 제포진성 내에는 남아 있는 건축물이 없지만, 읍지에 의하면 축성 당시와 이후 성내에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의 『지방지도』 경상도 부분의 「웅천현 지도」와 「제포진 지도」이다.
「제포진 지도」에 의하면 진해 제포진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내아·이청·문루·신당·사령청·포수청·화포청·사공청·장교청·창고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웅천현 읍지』에 의하면 성내에 우물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성 내외 주변 지역에서는 백자와 기와편이 다수 출토된다.
성외 시설로는 어변정(禦邊亭)이 있었다.
어변정은 수군의 무기고로서 『웅천현 읍지』에 따르면 웅천현 읍성에서 4리 떨어진 제포 해변에 있었다. 어변정 인근 해변에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내륙쪽으로는 천자봉,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천자봉공원묘원의 제일 낮은 위치에 주차를 하고 좌측의 길로 올라간다. 사화랑산, 성실봉을 찾아서...
천자봉공원묘지 좌측의 가장 상단부분이다.바로 위가 능선이다.
길이 제대로 없어 개척하다시피 오른다.
사화랑산 정상, 봉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터는 닦여 있다. 아래는 축대가 있다.

 

창원 진해 사화랑산 봉수대(昌原 鎭海 沙火郞山 烽燧臺)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사화랑산에 있는 봉수대이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화랑 봉수는 경상도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봉수에 이르는 봉화선로의 중간노선을 연결하는 간봉(間烽)이다. 여기서는 동쪽 가덕도 천성 연대에서 봉수를 받아 장복산 봉수와 창원의 여음포 봉수에 알렸다. 『웅천읍지』를 비롯한 지리지에 따르면 사화랑봉수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 100명이 있었다고 한다. 전국의 봉수제도를 폐지하던 고종 31년(1894)에 없어졌다.

 

 

성실봉의 삼각점
중간에 길이 보이지 않아 약간 헤매었더니 여기는 계단이 있다. 바로 내려서면 축대, 낮은곳을 찾아 우로 향하면 길이 열린다.
절개지 축대의 물받이 홈둑이 길이 된다.
삼포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노래비가 있는 삼거리로 진행...

 

삼포마을의 이름이 이 삼포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챙겨 본다.

바로 옆의 제포가 왜관이 있는 곳이라면 여기까지 멀지도 않은 이웃이 아닌가.

 

삼포(三浦)

조선 전기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동남 해안의 세 포구(浦口).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염포(鹽浦)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해당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들 지역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였던 곳이었다.
부산포진(釜山浦鎭)은 동래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었으며, 1488년(성종 19)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5,356척에 이르렀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다스렸다.
웅천의 제포진(薺浦鎭)은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으며, 성 주위가 4,000여 척에 이르렀는데 수군첨사(水軍僉使)가 다스렸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인 있었다.
울산의 염포진(鹽浦鎭)은 울산군 남쪽 23리 지점에 있었으며, 성 주위가 1,000여 척이나 되었다.
본래 수군만호가 다스렸는데 삼포왜란 이후 진을 폐지한 것 같다.
부산포에는 한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지휘하던 좌병영(左兵營)이 있었고, 염포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지휘하던 좌병영이 있어 울산의 외곽을 지키는 군사요지였다.
삼포의 해안 지역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던 곳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들을 다스려 세종 때는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왜구가 발호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일본이 무역을 재개해줄 것을 간청하므로 1423년(세종 5) 부산포와 제포(내이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였다.
뒤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수가 증가하여 이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1426년(세종 8) 염포를 개항하였다.
왜인들은 성 밖에 거주하도록 제한된 장소를 왜관(倭館)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1510년 왜인들이 부산포와 제포를 습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이 평정된 뒤 삼포의 왜관이 폐쇄되었으나 뒤에 부산포와 제포를 다시 개항하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표시된 초량왜관(草梁倭館)은 조선 말기까지 이들의 거류지가 존속하였음을 뜻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삼포(三浦)]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

노래를 듣는 음향장치가 있는데 스위치 두 개가 모두 작동 불가.

오는 길에 황포돛대 노래비는 음향 장치가 작동을 했는데...

그 비는 사진을 담지 못했다.

찍는다고 했는데 보니 동영상이 되어 있어 지웠다.

정상적인 사진도 없는 상태라..

사화랑산봉수대까지 1km 거리다 . 이걸 보고 산을 넘어가자고 한다. 조금 돌아도 평지가 낫지 않나.

평지를 걸어야 그 지방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몇 번 온 곳이지만 차를 타고 지나친 곳이라 제대로 지도가 그려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제대로 체험하는 셈이다.

제포왜관 지역을 제대로 밟지 못한 게 아쉽다.

웅천 읍성에서 몇 가지 추가 정보를 얻었다.

지난해 11월10일 나홀로 소사생태길의 마지막 코스로 여기 왔을 때는 제포왜관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다.

지난 번과 이번에 합하여 웅천역사둘레길은 거의 다 돌았다.

다음 기회에 자전거로  아쉬운 부분은 다시 한 번 돌았으면 좋겠는데....

 

주기철목사 기념관은 다시 찾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문은 닫혔다.

그러지 않아도 전염병 관련하여 거의 닫았던데....

이미 전 번에 보았기에 나는 개의치 않는데...

 

귀가길에 고속도로로 안내하는데 이정표를 잘못해석하여 국도로 나오게 되어 정체가 심했다.

고속도로도 정체야 있었겠지만 이 정도야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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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스를 답사하기 전에 몇 가지 챙겨 본 계획 단계를 참고로....

 

웅천교회옆/주차-웅천왜성(남산)-제덕산(제포왜관)-세스페데스공원-<이동>-와성-웅천읍성/주기철목사기념관-<이동>-천자봉공원묘원위/명동왜성,사화랑봉수-삼포<왜관, 노래비>공영주차장-제포<음지도>/제덕마을<제포진성지>-흰돌매공원-황포돛대노래비-웅천도요지전시관-웅동중학교-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역사적 배경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富山浦)와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 熊川), 1426년(세종 8) 염포(鹽浦)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다.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삼포에는 거류 왜인을 총괄하는 그들의 책임자가 있어 일정한 조직 체계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이들 조직체를 통해 공물로서 면포를 받아가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세종 때부터 그들의 토지 경작에 대한 수세론(收稅論)이 논의되다가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 왜인의 경전(耕田)에 대해 수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면세 혜택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책을 악용,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고 연산군 때를 거치면서 그 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에 1506년 중종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해 법규에 따라 엄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에 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조선인들과의 충돌이 잦게 되었다.
1510년 4월,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쓰코(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첨사(僉使) 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金世鈞)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여 삼포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前節度使) 황형(黃衡)과 전방어사(前防禦使)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소는 피살되고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이 위구심(危懼心)을 가지도록 하였다.
왜란 진압의 공으로 황형 등 188명은 1등으로, 현감 백사반(白斯班) 등 326명은 2등으로, 갑사(甲士) 권영생(權永生) 등 359명은 3등으로, 모두 873명이 논공행상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삼포왜란(三浦倭亂)]

 

창원 진해 웅천왜성(昌原 鎭海 熊川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
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79호로 지정.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포왜관.....

 

제포(薺浦)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었던 포구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이 일어났던 곳의 하나이다.
1443년(세종 25)에 계해조약에 의하여 왜인들에게 삼포(三浦: 부산포·제포·염포)의 왕래를 허가하였다.
왜인들의 상주를 불허하였으나 그들이 상주를 간청하므로 포구마다 왜관을 설치하여 60여 명 정도만 거주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의 상주 인구가 점점 늘어 제포에만 500여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여러 가지 충돌이 잦게 되자 왜인들의 단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1510년(중종 5)에 왜인들이 대마도의 원병과 함께 난(庚午亂)을 일으켜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세조(金世釣)를 살해하고 제포와 웅천(熊川)을 점령하였다.
정부에서 급히 토벌군을 보내어 왜인 300여 명을 참획(斬獲)하여 제포성을 복구하였다.
그 뒤 한동안 왜인들의 거주를 허가하지 않다가 부산포와 함께 이들의 거류를 허가하였다.
제포진은 하나의 큰 성으로서 주위가 4,000여 척이나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우도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어 안골포(安骨浦)·사량(蛇梁)·당포(唐浦)·영등포(永登浦)·옥포(玉浦)·평산포(平山浦)ㆍ적량(赤梁) 등을 관할하였으나, 뒤에 절제사영이 부산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수군만호가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제포 앞 바다에는 가덕도(加德島)가 있어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과 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제포는 웅천 뿐만 아니라 창원을 방어하고 마산포의 조운(漕運)을 돕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부근에 사화랑(莎火郎) 봉수가 있었고 보평역(報平驛)을 통해 김해ㆍ창원ㆍ안골포 등과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1908년에 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창원군에서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이후 2010년 7월에 진해시가 창원시에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로 편입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포(薺浦)]

 

 

왜관(倭館)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무역처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와 태종은 회유책을 써서 이들을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아무 곳에나 무질서하게 정박하는 왜인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어, 태종은 1407년동래의 부산포(富山浦)와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 薺浦)를, 1418년(태종 18)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와 고성군의 가배량(加背梁)을 개항해 이곳에만 정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세종 1)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은 폐쇄되었다.
그 뒤 대마도 도주(島主, 守護)인 소 사다모리[宗貞盛, 都都熊丸]의 간청으로 1423년에는 부산포와 내이포, 1426년에는 염포에 왜인의 내왕을 허가해 삼포(三浦)가 개항되었다.
왜관은 이 개항장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에서 교역·접대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왜관은 개항장의 설정과 변천에 따라 치폐(置廢)를 거듭하였다.
즉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으로 인한 국교 회복과 동시에 처음에는 제포(薺浦)만을 개항했고, 부산포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1541년 제포에서 조선의 관병과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를 폐쇄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그러나 1544년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다시 통교가 중단되자 왜관도 폐지되었고, 다시 1547년(명종 2) 정미조약의 체결로 부산포에만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다시 폐쇄되었던 왜관은 1607년(선조 40) 국교 회복과 더불어 부산항내 두모포(豆毛浦)에 새로 설치되었다가 1678년(숙종 4) 초량(草梁)으로 옮겼다.
한편, 서울에 온 왜인을 위해 서울에도 남산 북쪽 기슭의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동평관(東平館)이라는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감호관(監護官)·녹사(錄事)·금난관(禁亂官) 등의 관원을 두어 사무와 경비를 담당하게 하였다.일본 사절의 상경이 거부되면 왜관에서 외교적인 의례와 무역이 행해졌다.
그러므로 왜관에는 대마도주의 주재원이 상주해 특이한 외교 기관이 되었다.
삼포 왜관의 경우 농번기에 왜인이 오면 접대로 인한 폐해가 심해, 동래와 김해의 관리로 하여금 미리 창고를 가설해 그릇과 미곡 등을 준비했다가 접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입국하는 왜인에 대해 양곡을 지급했기 때문에, 왜인들 중에는 미곡을 더 받기 위해 서장(書狀)에 실제의 인원보다 많이 기재한 뒤 이를 대조할 때는 먼저 도착한 왜인을 불러 그 수를 채우는 등 폐해가 많았다.
그리하여 왜관과 왜막(倭幕, 倭戶)의 주위에 목책을 설치하고 밖에는 성(城, 倭城)을 쌓아 주변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그 안에 상주하는 거류민과 공청(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을 두었다.
조선 전기에는 입국하는 왜인의 수가 해마다 증가해 1439년 한 해만 6,000여 명이나 되었다.
성종 때에도 왜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왜관이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삼포가 개항된 초기부터 왜관을 중심으로 왜인과 조선 상인 사이에 무역이 행해졌으며, 삼포는 점차 항만 도시로 발전하였다.
삼포의 왜관 주변에 상주하는 왜인들은 일본 상선이 입항할 때 상행위를 하거나 근해 어업에 종사하였다.
또 부근의 공사전(公私田)을 입수해 경작하기도 했으며, 밀무역의 중개자 노릇도 하였다.
대마도주는 대관(代官)을 시켜 이들을 지배했고 이들에게 면포(綿布) 등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왜관(倭館)]

 

창원 진해 제포진성(昌原 鎭海 薺浦鎭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

진해 제포진성의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몇몇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포진성(薺浦鎭城)이 아니라 제포성(薺浦城)이라 지칭하고 있으며 제덕토성과 혼동되기도 하는 등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논의 또한 복잡하다.
진해 제포진성이 처음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좀 더 명확한 자료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1437년(세종 19) 진을 설치하였지만 진성은 축성되지 않았고, 연변(沿邊)에 창고 시설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84년(성종 15) 집의(執義) 조숙기(曺淑沂)가 제포를 포함하여 전라도·경상도 연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러면 왜인들이 놀랄 수 있고, 각 포에 성을 쌓으면 수군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 육지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성종은 적극적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 17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이 달에 경상도 제포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4,316척 3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진해 제포진성의 규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웅천현 읍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진해 제포진성은 축성 당시 4,313척[측정 결과 1,377m]으로, 웅천 읍성[3,514척] 보다 1.23배가량 큰 석성(石城)이었다.
다만 지금은 성체를 볼 수 없으며, 동문지와 해자, 남쪽 축대와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진해 제포진성 내에는 남아 있는 건축물이 없지만, 읍지에 의하면 축성 당시와 이후 성내에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의 『지방지도』 경상도 부분의 「웅천현 지도」와 「제포진 지도」이다.
「제포진 지도」에 의하면 진해 제포진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내아·이청·문루·신당·사령청·포수청·화포청·사공청·장교청·창고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웅천현 읍지』에 의하면 성내에 우물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성 내외 주변 지역에서는 백자와 기와편이 다수 출토된다.
성외 시설로는 어변정(禦邊亭)이 있었다.
어변정은 수군의 무기고로서 『웅천현 읍지』에 따르면 웅천현 읍성에서 4리 떨어진 제포 해변에 있었다. 어변정 인근 해변에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부산 지역에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이자 임진왜란 당시 종군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1551~1611]는 1551년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세스페데스는 살라망까 예수회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신학을 공부하였고, 1569년 1월 28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에는 순방 신부였던 알레한드로 발리그나노(Alejandro Valignano)를 따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가서 1년 6개월간 체류한 바 있다. 신부가 된 후 1577년 일본으로 옮겨가 주로 교토[京都]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1611년 12월 고쿠라[小倉]에서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34년간 일본에서 천주교 전파를 위해 일하였다.

세스페데스는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당시 일본의 고위층과도 교분을 넓혀갔다.
1585년 4월 세스페데스가 오사카[大阪]에서 수도원장으로 일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방문을 받은 일도 있었고,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와의 교분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 교구장이었던 신부 페드로 고메스(Pedro Gomez)의 요청으로 세스페데스는 나가사키[長崎]를 떠나 쓰시마 섬[對馬島]을 거쳐, 1593년 12월 27일 한국 남해안에 도착하였다.
세스페데스가 고시니 유키나가 휘하의 군대가 주둔해 있던 진해 근처 웅천에 도착한 것은 그 이튿날인 12월 28일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이때부터 부산 등 경상남도 일원에 1년 가까이 체류하면서 종군 신부로 일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경상도 일대의 해안 지방에 머물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겼다.
왜군들 외에도 조선인과도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황은 상세하지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선의 상황은 극동으로 진출했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서구 사회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웅천의 세스페데스는 이게 아니다.

세스페데스 공원[Parque Céspedes]

쿠바 산티아고데쿠바 도심에 있는 공원.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퍼레이드 광장과 주광장 그리고 제정광장으로 이루어진 공원으로 이곳 주민들의 쉼터이다.
공원 안에는 제1차 독립전쟁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마누엘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Céspedes) 동상이 있다.
공원 주위에는 시청 건물, 최초의 정복자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가 살았던 집, 주정부 산하 문화부 건물, 카사 그란다 호텔, 고비에르노 궁전 그리고 400년 된 아순시온 성당(Catedral de la Asunción) 등 역사적 건축물이 많다.
특히 아순시온 성당 안에는 벨라스케즈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스페데스 공원 [Parque Céspedes] (두산백과)

 

삼포로 가는 길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의 삼포 마을을 보고 이혜민 작사와 작곡하고, 강은철이 노래한 대중가요

1970년대 후반 이혜민이 고등학생으로 진해구 웅천동의 산길을 걷다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드넓은 바다를 향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치 동화책에서나 봄직한 삼포마을의 풍경을 마주하고, 이 아름다운 가사를 구상하게 되었다.

2008년 1월 당시 진해시에서는 경남 진해시 웅천동 삼포마을 도로가에 노래비를 세워 전면(前面)에 노래의 가사를 새겼으며, 누구나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음향 장치를 해 놓았다.

1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굽이굽이 산길 걷다 보면/
한 발 두 발 한숨만 나오네/
아 뜬 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 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2
저 산마루 쉬어 가는 길손아/
내 사연 전해 듣겠소/
정든 고향 떠난 지 오래고/
내님은 소식도 몰라요/
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 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
삼포 마을은 어디에서도 느껴보기 어려운 편안함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곳이다.
작사·작곡가 이혜민은 평소 서정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주로 만들었는데, 확 트인 바다와 푸른 뒷동산 그리고 높은 창공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한눈에 담아 감상하면서 낭만과 고독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굽이굽이 산길의 한 귀퉁이 어촌 삼포 마을의 향기에 취해 이 노래를 만들었고, 1983년 가수 강은철에 의해 대학가에서 불려지다가 누구나 좋아하는 애창곡이 되었다.
창원시 진해구민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며, 삼포 마을 또한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포로 가는 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해 명동 왜성[鎭海明洞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명동에 있는 왜성

진해 명동왜성은 임진왜란 때 명동의 배후 야산에 쌓은 왜성으로 남산왜성[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알려져 있다.
본 성은 산중턱[80m]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장방형으로 깎은 자연석으로 본성과 외성을 쌓았으며 성석(城石)은 해안에 이르도록 줄지어 있다.
명동왜성의 역할은 진해만의 동쪽 기슭과 거제만의 북쪽 기슭을 감시하여 웅천왜성에 보고하는 것이었다고 짐작되지만, 왜군이 장기간 주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명동왜성은 1593년(선조 26) 마쯔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쓰시마 도주이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쌓았다는 주장도 있다.
1593년(선조 26) 8월 10일자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왜군이 웅천의 3곳에 왜성을 축성하고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남산왜성에서 약 1년 동안 머물렀던 세스뻬데스 신부의 서간에는 1레구아[약 5㎞]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소 요시토시가 주둔한 성이 있다는 내용이 보이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소 요시토시가 웅천 땅에 주둔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명동왜성에 소 요시토시가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1-1 일원에 해당한다.

 

형태 : 진해 명동왜성은 명동 뒷산 높이 80m 정상부를 삭평한 뒤 자연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으로 본성을 축조하였다.
성의 규모는 둘레 365m, 높이 1~2m에 이른다.
본성의 동·서 양쪽의 2구역에도 각각 장방형의 석루(石壘)를 축조하였으며, 본성 북쪽으로 500m 지점의 산봉우리에도 전방을 살필 수 있는 정방형의 석루 2개소를 축조하였다.
성벽 축조에 이용한 자연석은 큰 것은 140×110㎝, 110×60㎝ 정도이고, 작은 것은 56×35㎝, 30×18㎝ 크기이다.

 

현황 : 진해 명동왜성의 구조는 본성을 기준으로 동·서쪽의 산 중턱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축성 재료는 장방형으로 깎은 자연석이며, 성벽은 해안에 이르도록 줄지어 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성 내외에는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해 명동 왜성 [鎭海明洞倭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창원웅천조개더미(昌原熊川조개더미)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삼국시대 집터와 돌널무덤·토기류·골각기 관련 조개더미

남해안을 조망하는 자마산 정상부에 유적이 입지하며, 조개더미는 Ⅰ, Ⅱ지구로 구분된다.

 

Ⅰ지구는 해발 240m되는 자마산의 정상부에서 남동향의 구릉부에 위치한다.
패각의 분포범위는 해발 216m 전후의 평탄한 대지와 남쪽 사면의 계곡부에 형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최영희에 의해 알려진 뒤, 그 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1959년, 1961년, 1964년 3차에 걸쳐 발굴조사 하였다.
조개더미의 층위는 부식토층, 점토층, 패각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거지와 석관묘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토기 37,000점, 철기 83점, 골각기 260점이 수습되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사슴뼈를 활용한 골각기류와 조개·소라·굴 등의 어패류, 낚시바늘, 복골, 작살, 그물추 등이 포함되어 있다.
토기는 와질, 연질, 도질제 등이 섞여 있고, 주요 기종은 노형토기·호·고배·기대·시루 등이다.
노형토기는 와질제와 도질제가 있는데, 와질제는 비교적 소형이며 3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구에서 유행하는 형식이다.
철기류에는 도자·겸, 낚시바늘 등이 있다.
이밖에 지석, 유구석부, 방추차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Ⅱ지구는 웅천 일대를 바라볼 수 있는 능선 사면에 위치한다.
패각의 흔적은 구릉 정상부의 패총에서부터 남동향의 대략 120~200m 정도의 구릉 사면까지 확인된다.
채집유물은 패각과 호를 중심으로 한 토기류이다.
출토 유물은 대략 4세기에 해당한다.
조개더미 주변에서 확인된 웅천고분군은 자마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주능선과 경사부를 따라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출토 유물로 보아 가야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웅천조개더미는 인근의 용원유적, 마천유적, 석동-자은동유적, 여좌동유적 등의 조개더미가 대개 100m 이하의 구릉에 입지한 것과 달리 해발 200m 전후의 비교적 높은 산 정상부에 형성되고 있어 소위 고지성 취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형성 시기는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입지와 형성 시기를 보여주는 유적은 남해안 일대에 다수 알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자마산 일대는 조망권이 탁월한 해발 200~240m 정도의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취락과 고분군, 조개더미는 물론 산성까지 확인되고 있어 남해안의 역사를 밝혀 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웅천조개더미(昌原熊川조개더미)]

 

 

웅천 도요지[熊川陶窯址]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60호 지정.

면적 약 1,001㎡의 작은 가마터로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이다.
두동요지(頭洞窯址)로 알려졌으며 도굴에 의해 상당히 파괴되었고 지표면의 유물도 일본까지 반출되어 흔적이 미미하다.
가마터의 지표면과 파괴된 가마에서 출토되는 도자기 조각은 사발·대접·접시류를 비롯하여 귀얄문과 덤벙문 분청사기 등이다.
귀얄문 분청사기는 올이 굵은 풀비 같은 붓[귀얄]의 분장자국이 빠른 운동감에 의해서 문양으로 남는데 주로 15세기 후반에 생산되었으며, 덤벙문 분청사기는 분장할 때 그릇의 굽을 잡고 담가서 분장을 한 것으로 표면이 차분하여 얼핏 보면 백자와도 같아 백자로 변해가는 마지막 단계인 16세기에 나타나는 제작법이다.
따라서 이 가마터는 15∼16세기에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으로 폐요된 것으로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5∼16세기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오름가마[등요]로, 경사를 따라 양벽을 점토로 쌓아올려 궁륭형의 천장을 만들고 내부에 격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칸으로 나누었다.
또한 격벽 밑에는 통염공을 두었는데 이 가마터도 정식으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면 주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웅천 도요지 [熊川陶窯址] (두산백과)

 

 

웅동중학교연혁

2020.03.01 제10대 이완호 교장 취임
2020.01.10 제68회 졸업식(졸업생 69명, 졸업생 총수 7,660명)
2019.03.01 10학급에서 11학급으로 학급 증설
2015.09.01 제9대 조종호 교장 취임
2013.03.04 8학급에서 9학급으로 학급 증설
2012.03.02 7학급에서 8학급으로 학급 증설
2011.03.01 제8대 김경혜 교장 취임
2010.03.13 웅동학원 박정숙 이사장 취임
2006.09.01 제7대 정능기 교장 취임
2001.09.01 제6대 류춘우 교장 취임
1998.04.18 마천동에서 두동 1166-4번지로 교사 이설
1996.03.01 제5대 김종상 교장 취임
1991.03.01 제4대 김진건 교장 취임
1985.05.23 웅동학원 조변현 이사장 취임
1965.09.01 제3대 성창근 교장 취임
1955.07.15 제2대 박응섭 교장 취임
1952.07.08 소사동에서 마천동 99번지로 교사이설
1952.04.30 초대교장 정윤호 취임
1952.04.18 웅동중학교 설립인가
1950.07.23 6. 25사변을 맞아 교사 1명과 학생 46명의 학도병 출정(전사 18명)
1946.09.02 웅동 고등공민학교 설립(12월 10일 인가) - 장영실 초대교장
1919.04.03 웅동, 웅천 지역 독립만세운동 주도
1908.10.20 계광학교 설치- 심익순(아일랜드인), 문세균, 배익하, 김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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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지난 해에 이미 온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경북 영주에 있는 동양대학교와 함께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곳 아닌가.

그렇지만 숨기고 숨겨 모르고 지난 이들이 훨씬 많으리라.

이 학교의 초대교장의 이야기는 소사생태길의 첫머리에 가까운 곳에 삼일운동기념비와 함께 작은 빗돌에 새긴 유명한 글이 하나 있다.

'붓든 강도를 박멸하자!"

 장영실 초대교장은 지역의 선구자로 새겨져 있고 그 분의 유훈이 위와 같이 오석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우리 땅을 뺏앗아 위의 성곽을 허물어 저들의 성을 만들어 침략해온 자들의 역사보다 더 분노를 일으키게 한 사건들...

후세 사람들을 위해 작은 글이나마 남기고 간다.

그 실명과 구체적인 사건들은 공개하지 않아도 다 아는 바들 아닌가.

장열실 선생님의 유훈을 받들어야할 자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