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수주팔봉(493m), 두룽산(458.2m) 20201117 화 뉴한사랑
코스 : 모원정-노적봉(140m)back-출렁다리-칼바위-수주팔봉전망대-물레산갈림봉-수주팔봉(496m지도상 높이)-두룽산(458m)-달천수질측정센터-새재자전거길-향산주차장 <6km/3:10>
08:30 덕천동 탑승-낙동강구미휴게소 경유
11:44 토계리 수주팔봉 주차장 하차
11:52 모원정
12:02 노적봉(140m)
12:18 모원정
12:20 구름다리
12:32 전망대/최고의 조망처
13:28 수주팔봉(496m)
13:58 두룽봉(458m)
14:44 수질검사소
14:48 새재자전거길
14:50 향산1교/산행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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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탄금대로 이동
13:35-14:20 탄급대-노래비-충혼탑(이승만친필, 6.25 전사자)-팔천고혼위령탑(신립장군 등 임란 희생자)-감자꽃노래비(권태응)-탄금대기-열두대(신립장군순국터)-우륵의 탄금대-대흥사
17:20-18:00 점촌에서 저녁식사()
건천휴게소 경유
금곡역
21:05 귀가
수주팔봉 GPX 트랙 첨부 :
두룽산의 이름이 두리뭉실하다는 뜻일까. 산이 온통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드러다가 하산은 급경사로 떨어지곤 한다.
오늘의 우리 팀도 탄금대로 향했다.
탄금대로 이동하면서 멀지 않은 임경업장군 묘소를 지도로만 챙겨보았다.
갈비봉 정상부근에 있는데 묘역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고 주차장도 있다고 한다.
비운에 간 명장 ...그를 기리며...
임경업[林慶業]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임유명(林有名),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을 역임한 임덕윤(林德胤), 아버지는 영중추부사를 역임한 임황(林篁),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594년(선조 27)년 충주에서 태어난 임경업(林慶業)은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 무과 급제자가 정식으로 임관되기 전 의무적으로 변방에서 근무하는 제도)을 나갔다가 1620년(광해군 12) 함경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부임하여 군량과 병장기를 구비하는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오르고, 1622년(광해군 14)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공신인 김류(金瑬)의 군관으로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형 임승업(林承業), 동생 임준업(林俊業)과 함께 선봉장 정충신(鄭忠信) 휘하에 들어가 안현전투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1625년 중추원부사겸우림위장과 전라도 여수 돌산도의 방답첨사(防踏僉使)를 거쳐,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28년 체찰부별장, 1629(인조 7) 용양위부호군, 1630(인조 8) 평양중군을 거쳐 1631년(인조 9)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으로 퇴락한 검산산성·용골산성·운암산성·능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약화된 군사력을 이유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포기하려는 조정의 움직임에 대한 청북민의 반대운동을 사주했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으로 한때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정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2월 청북방어사겸영변부사에 임명되어 의주의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장자도에 정박하고 있던 명나라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명나라 황제로부터 총병(摠兵)에 임명되고 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이때부터 임경업의 이름이 명나라에서도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1634년(인조 11) 의주부윤겸청북방어사 재직 중 밀수 혐의로 파직되었으나 도원수 김자점의 상소로 복직하고,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과 봉황산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 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 군대는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0여 일 만에 한성에 육박하였고, 1637년 1월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백마산성을 지키고 있던 의주부윤 임경업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청나라 태종의 조카 요퇴(要魋)의 정예 기병 300기를 압록강에서 격퇴하고 잡혀가던 조선 백성 120명과 말 60여 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공을 세움으로써 심양에 가서 청나라 황제에게 포상을 받았다. 이후 의주로 돌아와 피폐해진 의주의 물적 자원을 확충하기 위해서 상인을 보내 심양에서 밀매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1638년(인조 16) 8월 명나라의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려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파견된 조선의 병력이 제때에 집결지에 도착하기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문책을 두려워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을 복권시켜 조방장을 삼아 심양에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게 하였다. 임경업은 3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1638년 9월 평안병사에 임명되었다.
1639년 11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를 공격하기 위한 청나라의 군사 지원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에 임명되어 수군을 이끌고 1640년 4월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사전에 임경업은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등주에 있는 명나라 수군도독 홍승주(洪承疇)에게 보내어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의 전투에서 힘써 싸우지 않았고, 임경업의 의도를 눈치 챈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임경업을 처벌할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은 귀국한 임경업을 일단 파직시켰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수군도독 홍승주가 임경업이 명나라와 밀통한 사실을 알렸다. 또한 명나라와 밀거래를 하다 청나라에 발각된 선천부사 이계가 임경업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낸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임경업이 청나라에 거짓 협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임경업은 체포되었으나 청나라로 압송되는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1643년(인조 21) 명나라 총병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소속되어 평로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북경과 남경이 청나라에게 함락되자 마등고는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1644년(인조 22) 3월 조선에서도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면서 임경업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결국 1645년 정월 부하의 밀고로 청나라 병사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18개월 동안 감옥에 구금되었다. 1646년 6월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한성으로 압송되어 심기원과의 역모 공모에 관하여 추국을 받다가 1646년 6월 20일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임경업은 충신이요 걸출한 무장이었지만 철저한 친명반청파로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임경업이 나라와 백성에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진정한 애국지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후세 사람들에게 병자호란의 아픈 기억과 함께 청나라가 두려워했던 유일한 조선의 명장으로써 추앙받고 있다. 임경업은 두 자루의 단검을 얻고서 용천검, 추련검이라 이름하고 「용천검 추련검」이란 칠언절구를 각각의 단검에 새겨 넣었는데, 임경업의 대장부로서의 기질과 우국충절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정묘호란 후 의주부윤겸청북방어사로 있으면서 1634년(인조 12) 인조에게 올린 상소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성으로 직행했을 때 평안병사 유림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유림에게 보낸 편지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한 틈을 노려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공격하면 청나라가 조선에서 철군할 것이므로 심양을 공략하기 위한 병력 5천 명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충주 임경업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 산 45-1에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1677년(숙종 23) 임경업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를 건립해 임경업을 배향했다. 1727년(영조 3) 충렬사에 사액을 내리고, 1738년(영조 14) 임경업의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켰다. 1791년(정조 11) 정조가 서문을 써서 규장각 관원 김희(金熹)에게 『임경업실기(林慶業實紀)』를 편찬하게 하였고, 충렬사에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를 건립하고 정조가 비문을 지었다.
송시열은 임경업의 행장을 읽고 감격하여 전기를 지었고, 숙종 때 이조참판을 역임했던 이선(李選)이 『충민공전(忠愍公傳)』을 저술했다. 영조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한 황경원(黃景源)이 『황조배신전(皇朝陪臣傳)』을, 구계(龜溪) 백봉석(百鳳奭)이 『대명충의임공전(大明忠義林公傳)』을 저술했다.
임경업이 배향된 사당은 충주시 단월동의 임충민공 충렬사,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별묘(別廟), 평안북도 의주군 현충사, 평안북도 선천군 충민사, 전라남도 순천시 충민사, 인천광역시 연평도 충민사 등이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경업 [林慶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앞에 선 장수는 신립장군이다.
신립 장군에 대하여는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읽은 것이 내게 크게 영향을 주었을 터...
천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의 전술전략이 그 꼴을 만들었으니 어찌 좋게만 보였으랴.
전교조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이렇게 변하는 것도 같은 것 아닐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니편 내편.... 타령하는 꼴을 언제까지 보아야 할까.
옛날과 달리 정보가 유리 속을 보는 듯 한데
터무니 없는 거짓증거로 그것도 도적과 내통하여
의롭게 법집행하겠다는 걸 내 편 잡는다고 뭉게니..
이건 정말 볼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며칠 전 웅동의 비석에서 본 글에
'붓든 강도를 박멸하자'
는 말이 있는데 박멸이라는 용어 자체가 순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한 세대가 지나면서 일어날 일을....
신립[申砬]
조선 중기의 무장.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했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우방어사, 중추부동지사,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으나 패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6년 명종 1년에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생원을 지낸 신화국(申華國)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다. 어린시절부터 글공부 보다는 무예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50여 명의 목을 베고 개선하였다. 이후 이탕개가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六鎭)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1584년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왜적의 수가 많고 대적하기 힘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퇴하지 않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북상해오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대군에 포위되어 패배하였고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부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우륵[于勒]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에 따라 가야국의 궁중 악사가 되어 예술을 통해 혼란스러운 가야국의 정치적 통합을 꾀하고자 했던 악성(樂聖)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시대적 상황 탓에 순탄하지 않았다. 조국인 가야국이 멸망하게 되자 신라로 투항하였고, 여러 난관 속에서 신라 진흥왕의 신임을 얻어 신라 음악의 발전을 이뤄낸 인물이다.
대가야 성열현 출신의 우륵
우륵은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정치·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고, 중앙 세력 즉 대가야의 왕명이 직접 하달되는 곳이었다. 성열현이 현재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대구시 동구 불로동 일대,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일대 등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우륵을 발탁한 인물은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열현의 악사(樂師) 우륵이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왕경으로 입경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520년 초반으로 그의 나이 30대였다.
대가야의 가실왕이 우륵을 발탁한 것은 대가야가 처해있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5세기 후반의 대가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섬진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공세가 강화되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실왕은 신진세력을 발굴하여 중앙 정계를 개편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하여 백제의 공세에 맞서고자 했다. 이때 가실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세력 기반이 필요했고, 이를 대표한 인물이 우륵이었다.
가야금과 우륵의 12곡
우륵 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다. 바로 가야금이다.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가야금은 완전하게 독창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가실왕은 가야금을 제작할 때 중국의 악기 제도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것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가야국의 정신이 담긴 독특하고 유일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하나, 우륵이 직접 제작에 관여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가야금의 외관은 가야의 천문관이 반영되어 있다. 가야금의 모양에서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天圓)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地方)한다고 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六合)을 본받고 열두 개의 줄은 1년 12개월을 상징하였다.
천원 지방과 1년 12개월이라는 천문관은 곧 왕권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악(樂)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하는 유교적 예악(禮樂) 관념이 바탕이 된 것이다. 삼국 중에서 가야금이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진 사실은 가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가야금은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는 악기였다. 가실왕이 악사 우륵을 왕경까지 불러내 가야금을 만들고 아울러 12곡을 작곡하게 한 것은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가야 세력을 결속하고자 한 목적이 있었다. 가실왕은 ‘제국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악성 우륵에게 하나가 아닌 12개 지역에 해당하는 12곡을 짓게 하였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하여 대가야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국가 의례에서 각 지역과 관련된 악을 연주하는 것은 바로 그 지역에 대한 관념적인 지배의식의 표현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주변 제국들의 악을 연주하게 하거나 기예를 보이게 했는데 같은 맥락이다.
당시 가야금 곡조에는 모두 185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륵이 지은 곡이 12곡, 우륵의 제자 니문이 지은 곡이 3곡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해,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가야의 지역명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가야연맹을 형성했던 소국이거나, 국방상 주요 거점 지역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야국의 불교행사 혹은 국가행사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우륵이 지은 12곡은 1년 12달에 맞추어 상징화한 국가 예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제작한 때는 6세기 전반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 대가야를 맹주로 한 대가야 연맹이 음악을 고리로 삼아 제국의 일체화를 기도한 시기와 맞물려 510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가실왕의 재위 시기와 우륵의 연령을 고려하여 520년대 초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또한, 가실왕을 이뇌왕과 도설지왕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추정하여 금관가야가 멸망한 530년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대가야 세력권이 분열된 540년경에 작곡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시기에 작곡을 했던지 간에 결국 우륵의 12곡은 정치적 통합의 성공적 산물이 아닌 불안한 정세의 산물이었다.
우륵은 왜 신라로 망명했을까?
악사 우륵이 조국인 대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흔히 우륵이 가야금과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서 망명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의 망명 이유는 단순히 음악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배신이 아니었다.
가실왕은 대가야의 중흥을 위해 가야금을 만들었지만, 그의 의도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백제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지만, 양국 간의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백제와 신라에 끼여 대가야의 대외적 입지는 점차 줄어만 갔다. 이 상황에서 대가야의 정치세력은 친백제계와 친신라계로 나뉘어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우륵의 정치적 후견인인 가실왕의 사망과 이에 따른 친신라계의 몰락은 우륵이 더 이상 중앙 정계에 머물 수 없게 했다.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탄압이 예고되었을 것이고, 그는 조국인 가야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우륵의 망명은 음악가의 망명이 아닌 대가야의 정치적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륵은 신라로 망명할 때 가실왕과 함께 만든 '가야금'을 가지고 갔다. 대가야 출신에다가 가실왕의 정치적 개혁을 도운 우륵이 처음부터 신라의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가야에서 만든 12곡이 신라에서 환영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우륵은 신라의 입장에 맞게 12곡을 5곡으로 줄여 새롭게 편곡할 수 밖에 없었다.
우륵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진흥왕이었다. 551년 정월, 신라 진흥왕은 왕태후의 섭정체제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다. '개국'이란 연호 사용을 신호로 그해 3월 진흥왕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예비 답사로서 낭성(지금의 청주)에 행차하였다. 이때 국원(지금의 충주)에 있던 우륵과 그 제자 니문이 진흥왕이 있는 낭성으로 특별히 불려 갔다.
이들은 신라와 진흥왕을 위해 새롭게 지은 노래를 연주하였다. 가실왕의 정치적 개혁을 도왔던 우륵이 이제는 한강 유역을 공략하려는 진흥왕의 의지를 반영한 음악을 지은 것이다. 그가 왕 앞에서 연주하였을 때 진흥왕은 감동하였으나, 일부 신하들은 '가야는 망한 나라인데 그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라며 반발했다. 진흥왕은 '가야가 망한 것은 음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응수했다. 우륵은 이후 552년부터 약 10년간 진흥왕의 명에 따라 계고, 법주, 만덕 등 신라인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하였다.
신라는 우륵을 통해 대가야의 음악을 수용했다. 물론 신라의 토속 음악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신라는 정치적 통합을 노래하는 유교적 선진 음악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까지 삼았다.
이제 신라 음악은 더 이상 일상을 노래하는 가요가 아닌, 선왕의 덕을 드러내고 세상을 경계하는 세련된 ‘아(雅)’의 음악으로 전환하였다. 신라는 가야국의 대표 악기인 가야금을 통해 신라의 예술을 승화시켰다. 악성 우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야금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제대로 이어진 것은 우륵과 가실왕, 그리고 진흥왕의 공이 크다. 대가야 출신 우륵의 음악이 신라 음악으로 채택되던 날,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진흥왕의 순수비가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륵 [于勒] - 12곡 가야금 곡조에 실은 혼란기 정치적 통합의 꿈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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