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의성 빙계서원 빙산 북두산좌우능 20200921 월

benel_jt 2020. 9. 21. 21:55

의성 빙계서원 빙산 북두산좌우능 20200921 월 뉴한사랑

 

코스 : 현리교-캠핑장-용추-빙계서원-물레방아-윤의사비각-빙산사지오층석탑-빙혈-풍혈-빙산정상/정자-무지개다리-355m봉-Y자갈림길(좌향)-T자갈림(좌향,하산방향)-윤씨묘-경사진너른바위-빙계교(등산안내도)/산행종료

 

08:30 덕천동 탑승
10:53 현리교
10:55 빙계계곡 입석
10:57 현리교회
10:58 함양박씨제실
11:02 오토캠핑장/빙계얼음골야영장
11:07 용추
11:10-20 빙계서원
11:25 물레방아(수대)
11:29 빙계계곡 풍혈, 빙혈에 얽힌 원효대사-요석공주 사랑 이야기
11:32 의각
11:34 빙산사지 오층석탑
11:35 인산
11:37 빙혈
11:40 풍혈
12:30 빙산(氷山333m), 정자(지도에는 309m)
13:51 마늘 건조장

구름다리 건너면 바로 북두산 등산로
14:26 355m봉
15:02 윤씨묘
15:24 큰 경사진 바위 통과
15:30 빙계교, 선암산 일대 등산 안내도
15:32 주차장/산행종료
17:00 모두 산행 종료하고 주차장 출발
건천에서 석식
통도사휴게소/약간 추워지는 날씨
20:15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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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의 경주 조양산, 삼태봉의 산행 여파로 오늘은 최단 구간으로 단축했다.
시작점은 빙계계곡 입석이 있는 현리교에서부터다.
A팀은 조금 더 들어가서 빙계온천 부근에서 약17km의 산행으로 계획 되었고, 팀은 나와 함께 간 5명이 단거리로 계획한 대신 빙계계곡의 8경이라는 곳을 모두 챙겨볼 수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용추, 수대(물레방아), 의각(윤씨제각 같아서 입구만 보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다시 체크), 오층석탑, 인산, 빙혈, 풍혈, 불정이다.
불정은 빙산의 정상부에 있는 두 봉우리 사이의 굉장한 암벽, 암괴를 말하는 내용인데 따로 안내가 없었고, 전체 안내판의 안내를 참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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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 부근의 양영장 앞을 지나는데 입구가 삼엄할 정도로 폐쇄되어 있고 화장실도 아예 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다.
코로나를 대비한다는 뜻이다.
마을길에 풍혈 안내는 있는데, 관광객의 출입을 거절하는 안내도 붙어 있다.
위쪽의 주차장에도 비닐끈으로 금줄이 쳐져 있었고, 대부분의 관람시설들도 줄을 쳐서 막아 두었으나 포기할 수는 없어 보고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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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 정상의 팔각정자는 깨끗하다. 정상표지 팻말도 세워져 있다.
팻말에는 氷山333m라고 적혀 있다.
등산지도에는 309m로 표기되어 있는데...
정상에서 요기를 하고 30분간 쉬어가지고 했는데도 모두들 바쁘다.
어디까지 갈 생각인지도 없으면서..
식후에 앉아서 앱의 나침반과 지도 정치 후에 주변 산들을 돌아보니 북쪽의 비봉산, 금성산,
남쪽편으로 산세가 뚜렸한 팔공산, 그 좌측으로 나즈막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정상부분에 풍력발전단지가 있는 것 같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가 아미산 방가산 부근의 방향으로 잡았으나 아미산은 풍력발전기가 있을 곳이 아닌 것이 당연하다.
방가산은 가 보았지만 풍력발전단지가 있는 곳은 아닌데.
귀갓길 차에서 우로 팔공산이 보이는 위치 부근에서 좌측으로 풍력단지가 보였다.
지도를 보니 '화산' 부근인데...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맞다면 화산도 등산로에 임도가 설최되어 있겠다.
조양산, 삼태봉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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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 능선에는 도토리들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있다.
다람쥐 외에는 다른 동물을 본 게 없는데, 그들에게는 풍요의 산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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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정자에서 느긋한 휴식을 하고 마을길로 내려 오면서 보니 폐가가 상당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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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면서 확인 못한 의각을 챙겨보고는 바로 앞의 구름다리를 건너니 바로 등산로에 접어 든다.
첫 구간은 길이 순한 편이다.
조금 더 오르니 계속 이어지는 밧줄과 급경사, 그러나 심한 고도가 아니어서 모두들 잘 올라갔다.
뒤돌아보니 빙산이 제법 웅장한 바위에 쌓여 있다.
그런데 빙산의 이름이 빙계계곡, 빙혈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극지방의 빙산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라 차라리 빙계산이 어떨지 무슨 다른 이름으로 지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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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과 좌우를 돌아보면서 오르니 당연히 다른 이들의 뒤로 처지게 된다.
355m봉에서는 크게 급경사가 아니다.
오르면서 A팀 방향으로 가서 짧게 하산하는 팀을 만났다.
그 팀을 지나 올라가니 북두봉에서 약 1.2km 정도 아래일까.
Y자형의 갈림길이 있어 좌로 붙었다.
산허리를 감싸고 약 50m를 지나나 T자형으로 갈림길이다. 우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과 이 지능선을 지나는 산허리의 히미한 길은 '등산로 아님'이라는 안내가 있다.
우리는 좌로 내려 붙었다.
등고선을 보니 올라오는 길보다 훨씬 완만한 길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쉽게 고도를 낮추어주지 않는 인색함이 느껴질 정도다.
윤씨묘를 지나면서 방향을 좌로 바꾼다.
한 두곳이 조심스러운 구간이 있지만 밧줄은 거의 없는 편한 길이다.
주차장이 보이면서 경사가 급해지고 큰 바위가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넓어지지만 앞을 보면서 길을 찾았다.
바위가 미끄럽지는 않고 완만하여 다행이다.
이 구간이 지나면 곧 도로에 떨어진다.
안내도가 하나 있다.
주차장은 빙계교 다리를 건너 좌측에 있지만 주차장에도 비닐로 금줄을 쳐 두었다.
우리 차는 우측으로 100m 정도 가서 우측의 약간 느르 곳에 주차 되어 있다.
빙산에서 내려 오면서 차의 위치를 보아 두었기에 별로 어려움 없이 찾았다.

이름은 빙계계곡 명승지이나 물은 맑아보이지 않았다.

맑은 물을 기대 했었는데....
17:00까지 하산 예고, 마지막은 16:50에 도착했다.
17:00에는 버스가 출발했다.
귀가길에 화산의 풍차들을 다시 눈여겨 보아두었다.

 

 

 

 

 

 

 

GPX 트랙 파일 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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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 길은 이 지도 2코스의 역순인 셈. 여기에 현지버스주차장에서 부터 빙계서원을 거쳐 빙산까지 먼저...

 

 

현리교 하차
현리2리 버스정류장
빙계계곡 입석
현리교회
함양박씨제실
빙계얼음골야영장 안내판 / 이 구역 전체를 봉쇄 중, 코로나 관련

빙계 서원[氷溪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길 80[빙계리 산73-1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1년(1566)에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이 창건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였다.
창건시는 의성읍 창천(현 남대천 상류)에 위치하여 선조9년(1576)에 창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 33년(1600)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로 이건 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합향하여 빙계서원으로 개칭하고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추향하여 오다가 대원군의 전국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2002년도 유교문화권 광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한 복원공사가 2006.5월 완공됨에 따라 지역유림이 뜻모아 이건의 공적을 기려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추향함으로서 6현을 봉향하고 있다.
2006.5
의성군수

‘학이재(學而齋)’, ‘시습재(時習齋)’가 동재,서재

 

빙계 서원[氷溪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길 80[빙계리 산73-1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빙계 서원은 가정 병진년[1556년(명종 11)]에 장천(長川)가에 처음 세우고 김안국의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장천’으로 사액 받았다. 그 후 빙산사(氷山寺) 옛 터로 옮겨 세우고 이언적의 위패를 함께 모셨으며 이름을 ‘빙계’로 바꾸었다. 1689년(숙종 15) 고을 사람들이 올린 상소에 따라 유성룡, 김성일, 장현광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氷溪書院 在郡南三里明宗丙辰申元祿創建享文敬公金安國宣祖丙子賜額長川庚子李光俊移建于氷山寺舊址改今名追享文元公李彦迪肅廟己巳追享文忠公柳成龍文忠公金誠一文康公張顯光]”고 기록하고 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원의 창건 연원이 깊고 지역에서의 영향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빙계 서원 건립은 신원복(申元福), 신원록(申元祿) 형제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신원복은 1543년(중종 38) 인근 고을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할 때 동생 신원록을 보내 주세붕을 스승으로 받들게 하였다. 주세붕에게서 수학을 한 뒤 돌아온 신원록은 의성에도 서원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였고, 논의 끝에 1556년 김안국(金安國)을 배향하는 장천 서원을 건립하였다. 1576년(선조 9)에는 나라로부터 ‘장천(長川)’의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0년(선조 23) 의성 지역 유림들의 논의를 거쳐 현 위치[빙산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이듬해 ‘빙계(氷溪)’로 이름을 고쳤다.

서원을 이건한 내용은 1666년(현종 7) 남몽뢰(南夢賚)가 쓴 기문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건은 1600년(선조 23) 이광준(李光俊)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전란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옛 재목과 남은 기와를 주로 활용하여 이듬해 준공하였다. 서원 건물은 강당, 동재, 서재, 전루(前樓), 동몽재, 공수청(公需廳) 등 총 30여 칸으로 되어 비록 병란 직후 어려움 속에 건립했지만 학궁의 규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한다. 다만 마루가 좁고 연못이 없는 것을 아쉽다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광준의 손자 이정숙(李廷橚)과 박전(朴㙉)의 주도로 1647년 봄 묘우가 이루어졌고, 1648년 가을에는 서루(書樓)가 일어났으며, 1654년에는 주방, 1662년에는 강당 등 전후 건물들이 차례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빙계 서원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오랜 기간 동안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 2002년 의성 지역 유림의 공의를 모아, 2006년 유교 문화권 관광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을 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빙계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태로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인 학이재(學而齋), 서재인 시습재(時習齋)를 비롯하여 공수청, 빙월루(氷月樓)[누각, 서원의 출입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교당 앞에 자리 잡은 학이재와 시습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돌방으로 방을 한 칸 내고, 난간을 두룬 툇마루를 넓게 낸 것이 특징이다.

학이재 옆에는 담장을 쌓아 별도의 부속 건물을 두었는데 공수청(公需廳)과 전사청(典祀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양쪽으로 방을 두면서 마루를 앞으로 내었다. 좌측 방과 마루 틈새에 창고의 역할을 하는 건물을 배치시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 안에는 빙계 서원(氷溪書院)은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언적(李彦迪)[1491~1553]·김성일(金誠一)[1538~1593]·유성룡(柳成龍)[1542~1607]·장현광(張顯光)[1554~1637]·이광준(李光俊)[1531~1609] 등 6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빙계 서원에는 ‘빙계 서원(氷溪書院)’, ‘숭덕사(崇德祠)’, ‘명교당(明敎堂)’, ‘학이재(學而齋)’, ‘시습재(時習齋)’, ‘빙월루(氷月樓)’, ‘공수청(公需廳)’, ‘전사청(典祀廳)’ 등의 현판과 「빙계서원기(氷溪書院記)」 등의 기문이 있다.

비지정문화재로, 현재 빙계 서원 재산 보존 관리 위원회가 관리하고 있다.

 

 

대흥사
물레방아/수대

 

수대(水碓) [碓 방아 대]
시냇물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규모가 큰 물레방아가 있었다가 오래 전 자취를 감춰 버렸고, 그 빈터 가까이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빙계정사(氷溪精舍)가 세워져 신도들의 발길이 잦다.

 

오층석탑

 

의성 빙산사지 오층 석탑[義城氷山寺址五層石塔]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길 127[빙계리 산70]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7호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있는 신라 말 고려 초 오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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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빙산사지 오층 석탑은 의성 지역에 위치한 의성 탑리리 오층 석탑의 형식을 모방한 모전 석탑으로 단층 기단 위에 올린 오층의 석탑 형식을 하고 있다.

1973년 석탑을 완전 해체하여 수리하였는데 사리구 일체가 출토되었다. 사면에 양식화된 봉황을 투조한 사각 금동제 사리합과 그 안에 녹유리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외에 금동 보주형 두광배, 금동 뒤꽂이, 청동 소령, 청동 부젓가락, 석제 구슬 등도 함께 공양품으로 들어 있었다.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정확한 건립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의성 탑리리 오층 석탑에 비해 기단부, 지붕의 층단 받침과 낙수면의 층단, 전체적인 규모 등이 축소되고 간략하게 처리한 축조 양식으로 보아 신라 말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서원 마을 서쪽의 빙산(氷山)[300m]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탑 주변으로는 붕괴된 기단 석축과 각종 석재, 기와편이 산재하고 있다. 탑이 있는 곳은 신라 말에 창건된 빙산사(氷山寺) 터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 불우조에 “빙산사는 의성현 남쪽 3, 4리 되는 빙산에 있다. 절의 북쪽에는 빙혈(氷穴)이 있고 서쪽에는 풍혈(風穴)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자리에 빙계 서원(氷溪書院)이 세워졌으나 훼철되고 빈 터만 남아 있다. 빙계 서원은 현재 빙계계곡 입구에 복원되어 있다. 유불 교체가 단행된 조선 시대에 기왕의 절터에 서원이 건립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 석탑의 높이는 815㎝이다. 지대석은 16매로 구축되었으며, 그 위에는 홈을 파서 중석을 받게 하였다. 중석은 탱주와 면석을 별도로 하여 15석으로 구성하였고, 각 면의 탱주는 1개로 넓은 기단 면을 양분해 놓았다. 갑석은 8석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옥신[몸체]을 받치기 위하여 높은 굄돌을 배치하였다.

탑신부는 여러 매의 판석과 각재를 이용하여 구성한 초층 옥신은 별석으로 우주를 세우거나 모각하지 않아 전탑이나 모전 석탑의 옥신과 닮은 형태이다. 정면에는 감실을 만들었는데, 높이 153㎝, 너비 116㎝, 깊이 56㎝이다. 지붕돌[옥개석]은 각기 크기가 다른 석재로 각 층을 구성하였으며, 지붕 받침은 4단이다. 낙수면에도 층단이 있으며, 각 층 5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 있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 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7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주변을 정비하여 잔디를 심고 철제 펜스를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석탑 앞에는 안내판을 세워 관람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의성 빙계계곡이 관광 단지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 석탑은 인근에 있는 의성 탑리리 오층 석탑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전탑과 목탑의 형식과 수법을 응용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의성 탑리리 오층 석탑에 비해 세부를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형태가 납작하고 기단부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을 뿐 초층 옥신에는 기둥 새김의 흔적이 없어 전탑 쪽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빙계계곡 풍혈과 빙혈에 얽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

신라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가 젖먹이 설총(薛聰)을 데리고 지아비 원효대사를 찾아 이곳 빙산원(氷山院, 빙계계곡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는 유월 염천 유두(流頭)가 막 지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공주 일행이 서라벌을 떠나 보현산을 거쳐 조문국(召文國, 지금 의성군 금성면) 경내에 다다르자 궁궐터와 임금이 쓰시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있었다.
동네 어귀에서 원효대사의 거처를 물었더니 빙산사 빙혈(氷山寺 氷穴) 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빙혈을 지나면 찬바람이 씽씽 불어나오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는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하지요."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 들어갔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몇 굽이를 지나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점점 추워졌다.
공주는 전신이 꽁꽁 어는 듯 하였다.
발이 미끄러지는 곳은 얼음판이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굴이 넓어졌다.
허리를 펴고 팔을 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공주는 크게 소리쳐 불러 보았다.
"아바아(여보)!"
굴 속이 웅하고 울렸다.
울리는 소리가 마차 큰 쇠북 마지막 소리모양으로 길게 꼬리를 끌다가 스러졌다.
중략...
-춘원 이광수 작 원효대사 (하) 중에서
춘원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먼 옛날 이 계곡은 거대한 동굴(洞窟)이었다고 한다.
대지진으로 동굴이 무너지면서 풍혈, 빙혈 구멍이 지금같이 좁아졌으나 지하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런지 신비하기만 하다.

2006.12.


빙계계곡 역사문화 연구보존회

 

 

인암(仁癌)
인암 즉 어진바위는 빙계오현단소(옛날 빙계서원에 있던 제단) 앞에 있는 너비 2m, 높이 2.4m의 바위이다.
이 바위 전면에는 한낮의 햇빛이 강하게 내려 쬐이면 어질 인(仁)자 모양의 그림자가 완연히 보여 사람으로 하여금 착하고 어질게 살아야 한다고 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빙혈(氷穴)
마을 뒷산 산기슭의 바위 아래 4~5명이 들어설 수 있는 방 한칸 넓이의 공간이다.
입춘이 되면 찬 기운이 나고 한여름엔 얼음이 얼어 있다.
입추가 지나면 차차 녹아 동지에는 볼 수 없고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

 

 

 

풍혈(風穴)

동구 도로변 바위와 바위 사이에 뚫린 좁고 깊은 곳으로 여름엔 찬바람이, 겨울철엔 훈훈한 더운 바람이 일고 있다.
그 근방 크고 작은 바위 사이에는 거의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편이다.

 

 

도토리 열매들이 쏟아진 듯이 깔려 있다.

빙산 정상

333m라고 표기 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빙산 정상 정자에서 바라본 화산 풍력발전단지 확대사진

 

의성 마늘 건조 모습
빙산에서 하산하면서 다시 확인해 본 의각

 

의각(義閣)


임진란 때 윤은보(尹殷甫)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두 분의 위패를 청송 주왕산(周王山)으로 모셔 들어,가 7년 동안 삭망시 향화를 이어와 잘 피난 시켰다가 평란 뒤 서원에 안주케 했다.
그 공으로 의사라 일컬음을 받고 그의 갸륵한 의리를 기려 비와 이 전각을 세워 의사각(義士閣)이라고 부른다.

 

 

저 건너 편의 비봉산, 금성산, 중간의 M자형 산이 빙산, 좌봉이 정상이다. 두 봉우리 사이의 바위부분이 '불정'  이야기에 나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불정(佛頂)
불정봉(佛頂峰) 꼭대기에 움푹 파인 데로,
그 옛날 부처가 용과 싸울 적에 찍은 쇠스랑 자국이란 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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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계계곡 안내도에서 보면 '현 위치에서 550m 거리'라는 점으로 보아 이 위치가 맞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도의 위치 또한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쇠스랑 자국이라는 말도 그 형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정상으로 오르기 직전에 두 봉우리 사이의 능선에 좌측은 바위 절벽이며 ㅌ자 모양의 깊은 홈이 만들어져 있다.

 

 

화산풍력발전단지 / 아래 사진 확대

귀가길에 되돌아본 화산, 정상부의 풍력발전소 풍차가 보이는데... 사진은 희미하다.

경북 영천시 신녕면, 군위군 고로면의 화산에 있는 화산풍력발전단지다.

화산 풍력발전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