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 / 학남산-백운산-천왕봉 20200204 화 (K,R&)
(2005년 국제신문 참고 )
코스 : 갈천서원(차량이동)-덕원사입구-덕원사-학남산(551m)-낙남정맥갈림길-백운산(484m)-back-천비룡사길림길-천비룡사-(도로이동)-큰재-임도횡단-576.1m봉-갈림길(석문)-천왕산(582.6m)-임도횡단-대가저수지위-덕원사입구원점회귀 <9.27km/5:32>
08:00 덕천동 승차
09:44 갈천서원/문이 닫혔다. 밖에서 안내판 등만 보고..
처음에는 갈천마을의 허씨재실 앞에 세워 능선을 탈까 하다가, 다시 큰재 방향으로 오르면서 주차할만한 곳을 찾다가 다시 내려가서 덕원사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09:59 김해허씨재실 앞 하차, 주변 돌아보고
10:10 갈천농장(큰재 아래)에서 회차
10:15 대가면 갈천리 831-1, 덕원사 입구 주차 주인 양해
10:21 산행 시작
10:29 대밭옆
10:31 덕원사 입구
10:41 함안이씨부부묘
뒤로 희미한 길이 좌로 안부방향 있으나 무시하고 바로 능선으로 치오름
11:05 능선길
11:39 전망바위/4분 정도 연화산과 그 주변 조망
11:50 학남산 정상(550.5m), 바위벽의 비문
'三峰處士 全州崔公諱祥駿之墓삼봉처사 전주최공휘상준지묘, 玄孫再銖현손최재수'가 새겼다
12:14 철탑
12:18 501.4m봉(작은학남산/서래야)
12:30 백운산(483.9m), (486m/새마포산악회)
무덤1기, 조망 좋음
본래 트랙은 501.4m 봉을 거쳐 큰재로 가기로 했으나, 중간 하산길이 보여 내려가서 차도로 갈 생각으로 이동
12:39 전주최씨가족묘역이 하산길 우측에 약간 비켜 크게 자리 잡고 있다.
12:55 예사롭지 않은 석축과 큰 비석이 있는 곳,
'化主 大源行 靈巖 金貞伊之碑화주 대원행 영암 김정이지비'
13:04 석탑(?관음탑)/이미 천비룡사의 경내에 들어와 있다.
13:05 게시판/범종불사모연문/불기2545년/서기2001년/주지 최일선 합장
13:15 천비룡사 입구
13:27 큰재/등산안내도/큰재 부근은 해발 350m에 가깝다.
13:31 임도횡단
14:07 급경사 치고 오르니 576.1m봉(작은천왕산/서래야)
14:16 전망바위
14:20 이정표 희미함[..1.2km]
14:21 전망대(봉화산조망 가능)
14:31 우전방 천왕봉 조망
14:39 [봉화산2.2, 화리재1.0]
14:40 석문
14:44 천왕산 정상(582.6m), 삼각점(582.4), 산불방지무인시스템
14:53 임도횡단[정상0.3, ..1.8, ..1.0]안내글씨 없음, 능선으로 내려감
15:15 갈천저수지 보이기 시작함
15:16 옆에 임도 끝/공사중인 듯하나 포크레인이 완전히 쉬고 있는 듯 비닐을 덮은 지 오랜 듯하다.
15:28-48 저수지 위쪽 하천 탁족
16:00 덕원사 입구 주차장 원점회귀 종료
==
고성박물관 관람 후 귀가
덕천동18:10 / 석식 후 귀가(19:40)
瞻 볼 첨, 1. 보다, 쳐다보다 2. 바라보다 3. 우러러보다 4. 비추어 보다 5. 살피다, 관찰하다(觀察--)
들머리로 올라가는 길에 본 갈천서원,
고성 갈천서원 (固城 葛川書院)
고성 갈천서원은 행촌 이암(杏村 李嵓)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원이다.
이암(1297~1364)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했다.
처음에는 회화면에 금봉서원이라 이름 지어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712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우면서 갈천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45년 광복 이후 유림들이 복원하였다. 지금은 행촌 이암과 함께 묵재 노필(墨齋 盧㻫),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 도촌 이교(桃村 李嶠)를 모시고 있다.
서원은 갈천천과 대가천이 만나는 지점의 구릉 서쪽 비탈면에 서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다. 낮은 곳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을 배치하고 높은 곳에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이다.
정문인 불사문을 지나면 강당이 있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이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마루 양쪽에 방 1칸씩을 두고 있다. 오른쪽 방 앞에는 원두막 형식의 마루인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원내의 행사나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강당 뒤로는 사당으로 가는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으며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이 있다. 사당은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왼쪽으로부터 행촌 이암, 도촌 이교, 묵재 노필, 관포 어득강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짓는 맞배지붕이다. 도리나 장여 밑에 소로를 받쳐서 장식한 소로수장 구조이며, 도리는 3개로 구성되어 있다.
=====================================
오늘 산행에서 고려의 역사에 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가계는 두문동 파가 아니라 조선조 초기에도 충성한 자손들을 두고 있다.
갈천서원의 이암은 공민왕때 문하시중이었다는데 명필로 더 유명하다.
이암(李嵒,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그는 고려국 판밀직사사 감찰대부(高麗國 判密直司事監察大夫)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鐵原君) 우(瑀)의 아들이다. 도촌(桃村) 이교(李嶠)가 그의 동생이다.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 문벌가였으며, 조선 개창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을 비롯하여 조선초기와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이암은 고려 말기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그의 글씨는 조맹부의 송설체에 견줄만하다고 했고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유려하고 힘있는 글씨가 조맹부를 능가한다고 평가한다. 근래에 일제 강점기 반출 문화제 환수 등 사회적 관심에 따라 그의 글씨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암은 서예가로서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
행촌 이암과 청평사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
이암의 대표적 필적으로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를 들 수 있다. 이 비는 강원도 청평산 문수사에 세워졌던 것으로 이암 31세 때의 필적이다. 고려시대 서예의 쌍벽인 탄연과 이암의 비문 글씨가 모두 이곳 문수사에 세워졌으니 인연치고도 참으로 기이한 경우이다. 비문은 1327년 3월 원나라 황후가 보낸 사신들이 내조하여 성징(性澄) 스님 등으로부터 진상받은 대장경을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아울러 돈 만 냥을 시주하면서 그 이식으로 황태자와 황자의 생일에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불서를 열람토록 했다는 사실을 김이(金怡) 등이 충숙왕에게 아뢰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비는 일찍이 파손되어 현재 파편조차 알려지지 않는다. 조선후기 문인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그의 아들 신명준(申命準)이 1819년 청평산에 들어가 메워진 못가에서 이 비를 발굴하여 탁본 3본을 뜨고 스님에게 절간 처마 밑으로 옮겨 비바람을 피하도록 했는데 돌이 단열되어 다섯 조각으로 되었다는 기록이 전할 따름이다. 다행히 당시의 대표적 문사로 이 비문을 지은 이제현(李齊賢)의 『익제난고(益齋亂藁)』에 그 전문이 실려 있고, 이우(李俁)의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등에 고탁본이 실려 있다.
비문에는 "내시 통직랑 도관정랑 사자금어대 신 이군해 봉교서병전[內侍 通直郞 都官正郞 賜紫金魚袋 臣李君侅 奉敎書幷篆額]"이라 하여 이암이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 '군해(君侅)'로 되어 있다. 비는 성징 스님과 원나라 사신의 주도로 그 해 5월 세워졌으며, 계작(戒昨) 스님이 글자를 새겼다. 비 뒷면에는 성징 스님의 음기(陰記)가 있다.
<문수사장경비>의 글씨는 행서체로서 왕희지의 <집자성교서(集字聖敎書)>를 많이 따랐는데 특히 자형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한편 왕희지에 비해 글자의 틀이 좀더 가로로 넓고 획에 살집이 좀더 살아나 있으며 붓끝을 처리하는 방식 등에서 송설체의 영향이 보인다. 이 글씨에 대해 세간에서 조맹부의 신수(神髓)를 얻었다고 평하듯이 이암은 조맹부가 추구했던 필법의 요체를 파악하여 송설체 수용의 초기 단계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송설체의 완미(婉媚)한 외형미에 주력하거나 그 필의를 잘못 이해하여 근골(筋骨)이 없이 늘어지기만 하는 것들과는 달리, 이암의 글씨는 아직 완숙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중년 초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기교적 처리나 외형적 수식보다는 정제되지 않은 쇄락(灑落)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이는 송설체를 수용하면서도 왕희지 등의 고전적 풍격에 대한 기초가 탄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왕희지의 서풍을 매우 유려한 필치로 변환시키면서도 결코 근골을 잃지 않은 탄연의 행서 등이 글씨 공부에 있어 좋은 선례가 되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암 [李嵒]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
문수원중수비[文殊院重修碑]/탄연
강원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청평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비. 1130년(인종 8) 건립된 청평산 문수원의 중수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이다. 원래는 비의 상하부가 깨진 채로 청평사에 세워져 있었으나, 6·25 때 심히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130년(인종 8) 건립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원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3가 26(비편 소재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청평사(淸平寺)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비.
1130년(인종 8) 건립. 청평산 문수원(文殊院)의 중수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이다.
원래는 비의 상·하부가 깨진 채로 청평사에 세워져 있었으나, 6·25 때 심히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수원은 현재의 청평사로서, 그 전신은 보현원(普賢院)이었다. 고려 예종 때의 명신 이자현(李資玄)의 아버지 이의(李顗)가 춘주감창사(春州監倉使)로 부임하면서 옛날 당나라 승려 영현(永玄)이 세운 백암선원(白巖禪院)의 옛터에 절을 세워 보현원이라 하였다.
1089년 (선종 6)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여 불법(佛法)을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산이름을 청평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라 고쳐 중수하였다. 이자현이 죽은 뒤, 나라에서는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적을 새겨 비를 세우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이 비이다.
비면 윗부분의 비제(碑題)는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로 자경(字徑) 10㎝의 해서(楷書)이며, 비문은 행서(行書)로 자경 2㎝ 안팎이다. 비문은 김부철(金富轍)이 짓고, 글씨는 탄연(坦然)이 썼다.
특히, 탄연의 행서는 신라의 영업(靈業)과 함께 해동명적(海東名跡)으로 꼽히는데, 왕희지풍(王羲之風)의 행서로 출발하여 운치가 풍부한 새로운 글씨체를 형성하였다. 비는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완전한 탁본(拓本)이 전하여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원비는 비신높이 1.35m, 너비 1m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수원중수비 [文殊院重修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 지역에 이씨가 많다. 행암은 고성이씨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 산야의 비석에는 함안이씨가 주류였고, 이 분은 선산이씨라는데
여기에 오래 살았다고 한다. 학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대충 안내하고 있다.
오랫만에 보는 '포인트', 이 종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일년이 아직 되지않은 어린 강아지란다.
대숲을 지나면 덕원사 입구가 나오는데...
학남산 덕원사 입구부터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문,,,
여기 주지는 속성이 혹시...
이정표의 맨 위에 등산로라고 표시되어 있는데....안내를 따라 올라간다.
이 위쪽으로 길이 나 있다. 묘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래 마을 이씨의 안내에 의하면 여기서 좌측 안부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등고선을 따라 학남산에 가까운 곳으로 치고 오른다.
길이 좋은 편은 아니다.
급경사이지만 일단 힘겹게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 능선의 좌측으로는 고속도로를 건너 연화산의 봉우리들이 반긴다.
좌측에 지도상의 어산御山(533.7m), 길 건너편의 혼돈산混沌山(498.6m)을 지도만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다.
학남산 정상의 넓지 않은 평지에는 무덤이 있는데 파묘를 한 건지....비석을 자연석의 바위면에 새겨 두었다. 전주최씨다.
오늘 산행 중에 최씨의 흔적을 또 한 번 보았는데...백운산 아래에서다. 두 번의 기록이 있다.
501.4m봉은 학남산에서 백운산으로 가는 중에 낙남정맥의 천왕산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다.
백운산은 484m로 조금 낮지만 이름이 주어진 곳이다.
그 흔한 이름 백운산으로..
백운산 정상에서의 조망
12:55 예사롭지 않은 석축과 큰 비석이 있는 곳,
'化主 大源行 靈巖 金貞伊之碑화주 대원행 영암 김정이지비'
잘 모르는 표현들이다.
측면의 이름을 보니 崔씨 삼형제와 세 자부, 그리고 각 손자들의 이름이 있다.
1949년생이면 좋은 세상에 너무 일찍...
확실시 되는 점은 전주최씨가의 어머니였다는 점이다.
석축이 길게 벋은 저 끝 수십 미터 벼랑끝에 사자석상이 하나 보인다.
사자석상은 조금 내려가면 천비룡사의 대웅전 앞에도 비슷한 크기로 두 마리가 조성되어 있다.
바로 아래쪽에 넓은 터가 정비되어 있고 여기도 임도가 넓게 이어져 있다.
상당한 예산을 투자한 흔적이 엿보인다.
-------------
별다른 설명이 없어 애매한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化主화주
1. (명사) 불교 ‘부처’의 다른 이름. 중생을 교화하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2. (명사) 불교 [같은 말] 화주승(인가에 다니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法緣)을 맺게 하고, 시주를 받아 절의 양식을...)
3. (명사) 불교 [같은 말] 시주(施主)(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化主화주
1. (명사) 민속 별신굿이나 도당굿 따위의 제주(祭主). 청결한 사람이 화주가 되며, 제물 일체를 맡는다.
2. (명사) 민속 [같은 말] 곰뱅이쇠(남사당패에서,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보좌하여 기획을 맡아보는 사람)
---------
마하살(불교용어) : 대사(大士)의 원어인 마하삿트와의 음역어로 보살에 대한 미칭(美稱). 보살은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대원행(大願行)을 가졌으므로 마하살이라 함. 부처를 제외하고 중생가운데서 맨 윗자리에 있으므로 대(大)자를 더하여 대사라고 한다.
임도와 돌담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범종불사모연문.........
불기2545년/서기2001년/신사년 정월 좋은날에
백운산 천비룡사
주지 최일선 합장...
그러고 보니 주지 또한 최씨 성을 가졌다.
보기드문 사지상이 대웅전을 지키고 있다. 저 위에 있던 비석 가까운 곳에도 있었는데...
일붕대사기국상(一鵬大師祈國像)
-------------
일붕 (서경보)
승려, 전 대학교수
출생-사망 : 1914년 10월 10일 - 1996년 6월 25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학력 : 동국대학교 불교학 학사
1980년 국민훈장 동백상경력일붕신문사 발행인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초대종정
1980~1981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1992~1996 세계불교법왕청 초대법왕
천비룡사...이름조차도 특이하다.
여기는 사찰 입구의 로타리다. 여러 돌들을 모아서 조경을 한 흔적..석물들이 제법 모여 있다.
천비룡사 입구
여기 서 있는 동안도 대형트럭들이 이 사찰의 공사장으로드나들고 있다.
이 길은 대가면소재지에서 갈촌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소형버스는 지나갈 수 있을 듯. 군내 버스가 지나가는 길이다.
갈천저수지 아래의 좁은 길은 대형버스 통행이 어려울 듯.
MTB전용이라...
우리는 좌로 돌아 가다가 우측으로 산에 접어들었다
큰재의 등산안내도
576.1m 봉은 큰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 임도를 횡단한 후에 힘겹게 올라가면 첫 봉이다.
앞에 보이는 왼쪽 저수지는 대가저수지, 우측은 양화저수지.
두 저수지 사이의 산은 이 쪽으로 조금 올라와서 봉화산이다.576.1m 봉에서 봉화산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다.
봉화산 좌측으로 척정리의 척정저수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앞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이 벽방산, 좌로 거류산, 구절산...
천왕산 직전의 이정표와 수문장 같은 바위, 이정표는 하산길을 화리재로 잡았는데, 거리가 멀어져 직선으로 능선을 타기로 했다.
천왕산 정상이 너른 터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점은 고도를 582.4m로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서 큰재 방향과 그 뒤의 백운산 정상
아랫마을에서 보아 정상부에 보이던 철탑은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능선의 좌측에 있다.
오늘 송전선에 작업하러 온 직원들이 보였다.
임도에 떨어질 때까지의 길은 양호한 편이다. 이정표가 있지만 목적지의 표시가 보이지 않아 대충 볼 수 밖에 없다.
좌측은 아마 큰재인가.. 우측은 화리재쪽인가. 0.3은 정상인 듯하다. 트랙에서 계산하니 230m 정도인데...
임도를 만나니 일단 반갑다. 그렇지만 능선을 따라 가는데 길이 희미하다.
국제신문의 시그널이 촘촘하다.
여기까지 내려와야 숨을 쉴만하다.
갈천저수지 상부에 임도가 보이기는 하는데 이 하천을 건넜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면 화리재 방향을 걸어야 제대로 내려올 것 같았다.
아침에 주차를 하고 출발한 이씨네 집 앞이다.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다.
이동시간도 그렇지만 조망을 즐기면서 사방을 살펴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귀가길에 고성박물관을 잠시 들렀다. K님은 탈박물관과 남산공원을 보고 싶어 했는데....
이후의 일정에 약간 서둘러 귀가 했다.
18:10 덕천동 도착, 저녁 식사 후에 귀가(19:40)
'樂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청 정수산 20200211 화 (0) | 2020.02.11 |
---|---|
경주 관산 만불산 20200207 금 (0) | 2020.02.07 |
장성 영광 - 월랑산 태청산 장암산 & 필암서원 20200201 토 (0) | 2020.02.01 |
순창 아미산 신경준, 귀래정 20200128 화 (0) | 2020.01.28 |
경주 함월산 20200121 화 (0) | 202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