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광양 학사대 노랭이봉 억불봉 20190706 토

benel_jt 2019. 7. 6. 23:06

광양 학사대 노랭이봉 억불봉 20190706 토 산하 (백운산 가면서)


학사대와 광양송천사지회은장노비를 찾고, 억불봉을 꼭 밟고 오리라는 생각으로 A팀이 진틀에서 백운산 갔다가 억불봉, 노랭이봉, 포스코수련원으로 가는 동안 몇 명과 함께 이 코스를 답사했다.

송천사지회은장로비는 지도의 위치와 맞지 않게 더 위쪽에 있다고 하는데 주민들의 이야기를 참고한 덕분에 실수를 했다.


<이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탐방했는데....>


겨울철에 어느 한가한 날이 있으면 재탐방을 하리라 하고...

학사대의 위치도 지도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 위치가 오히려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가에 경치 좋은 곳이니 공부하기는 괜찮은 곳이 아닐까...

계곡의 수량도 많고 수질도 좋아 이곳으로 하산했다면 더 좋았을 걸 싶었지만 수련원 입구로 잡은 것은 산행 거리가 길어 2km라도 단축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수련원의 급수시설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함께 고려한 것이다.

또 하나는 A팀의 긴 거리에서 억불봉과 노랭이봉은 옵션으로 남겨두면 체력에 따라 포기할 수 있기 때문...


답사를 마친 나의 코스는 동동 마을회관으로 가서 노랭이봉 능선으로 올라갔다.

마을길을 지나 시멘트 포장 농로를 조금가다가 통행 제한하는 지점에서 좌로 돌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고사리밭을 만나면서 우로 들어가면 길이 잘 나 있는 산길이다.

능선에 붙는 듯하면서 보면 임도를 만나는데 임도의 끝점이 되고, 아마도 지도에 헬기장으로 표기된 시멘트 포장 도로의 끝점인 약간 너른 공간을 좌측으로 만난다.

등산로는 우로 돌아서 도로를 약간 걸으면 앞에 이정표가 있고 살짝 우로 비켜 능선길로 들어 간다.

많은 사람이 밟은 등산로가 있다.

아마도 포스코수련원에 오는 사림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실제로 수련원에서 왔다는 이들을 몇 번 만나기도 했다

좌측은 포스코의 VIP가 헬기장에서 내려 승용차로 갈아 타고 이동하는 도로인 것 같다.

나는 A팀을 여기까지 내려와서 우로 돌아 수련원으로 들어 가는 길을 잡았는데, 조금 오르니 하산하면서 우로 나가는 샛길이 생겨 있었다. 150m 정도는 단축 될까.

등로에 계단 둘이 멀지 않게 있고 밧줄도 있다.

둘째 계단 부근에서는 포스코 수련원이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둘째 계단 위에 약간 너른 공간이 있어 5명이 식사시간을 잠시 가졌다.

여름이 짙어가면서 큰까치수염이 상당히 기세를 드높이는 듯 하다.

힘들이지 않고 노랭이봉까지 상당히 완만하게 올랐다.

정상에는 정상표석이 둘이나 있고 이정표와 통신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노랭이봉에서 보는 억불봉.. 이건 두 번째이다.

2년 전의 그 날은 정말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오늘의 A코스와 같은 길이다.

학사대를 찾느라 너무 시간을 보내어 산행이 급해졌다.

그렇지만 언제 다시 억불봉을 찾을 수 있으랴 싶어 포기할 수 없었다.

A팀 중에는 포기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나와 같은 경우다.

억불봉은 크지도 않은데 멀리서 보면 우람하게 도드라져 백운산의 한쪽 모퉁이에서 뚜렷하다.

정상까지 가려면 3~4번은 오르내린다.

오르내릴 때마다 계단이 있어 안전에는 걱정이 없지만 체력의 문제는 고려해야겠다.

조망은 최고다.

지난 봄에 백운산 정상에서 쫒비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길의 매봉도 뚜렷하다.

정상을 찍고 보니 수목이 자라 조망이 제로다.

조금 더 나가니 무덤이 있는 공간의 조망에 좋았다.

억불봉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도 있다.

다음 봉까지 갈까 하고 보았는데 위험해 보얐다.

밧줄과 튼실하지 않은 나무계단..

바위 틈으로 오르는 길...

그래도 다녀 오는 이들이 있지만 시간이 급한 우리는 일단 눈으로만 찍고 포기했다.

노랭이재에서 하산했는데 시간이 만만치 않다.

모두들 하산하고 후식 준비중이다.

배낭을 두고 잠간 세수를 하고는 늦은 후식에 동참했다.

다행히도 6시간에 산행은 끝났지만 A팀을 내려주고 이동한 시간 때문에 6시간 30분을 모두 사용한 셈이다.

그렇다고 가는 길에 A팀을 B팀보다 뒤에 내려주어도 불평이 생길 것이다.

겨울철이 되면 기차를 타고 한 번 갈 곳을 눈여겨 보았다.

광양IC 북편의 조그만 산이다.

마로산인가..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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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를 나는 뒤쪽의 임도에서 접근했지만 동행한 이들은 물 건너 앞에서 찍어 오히려 좋은 영상을 얻었다.

송천사지 회은장로비도 찍어 왔다.

이런 억울한 일이 .....

비석 앞의 안내글까지 찍어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내 다시 가서 꼭 눈으로 확인해 보고 오리라...



















학사대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동굴
동곡리 동동마을에 있는 자연암굴이다. 옥룡천이 내려다보이는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동굴은 광양 출신의 대표적인 선비 신재 최산두가 10년 동안 학문을 닦은 곳으로 유명하다. 상단에 학사대라는 최산두의 자필 글씨가 새겨져 있고 정자가 세워져 있다. 바위굴의 내부는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이며, 자연 우물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소년 신재의 생활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위치와 실제 위치는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정확한 주소도 나와 있지 않고 옥룡면 동곡리라고만 했다.

그러니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광양송천사지회은장로비 250m'라는 도로표지판이 있지만 이것도 정확한 위치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정도다

좀더 자세한 안내와 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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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송천사지회은장노비



지번 검색으로 본 지도 ↓


주소 : 전남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산 196-1

광양송천사지회은장노비[光陽松川寺址悔隱長老碑]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송천사터에 있는 조선시대 승려 회은 관련 기념비. 석비. 시도유형문화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비의 높이 274cm.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송천사는 폐사되어 유구(遺構:건축의 구조와 양식들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거의 없으나 다행히 나한전지라 전해지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회은장로비만 홀로 서 있고 맷돌이나 그 밖의 석조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비신은 세장한 장방형으로 곳곳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다. 이수는 장방형으로 윗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용신의 비늘과 구름무늬가 가득 있고 따로 제액을 마련하지 않았다. 뒷면에는 용의 꼬리부분과 함께 게·거북이·달팽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비좌(碑座)는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문은 조선 후기 시문에 능했던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지었고 글씨는 낭성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1677(숙종 3)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윗면에는 “회은장로비명(悔隱長老碑銘)”이란 제명(題名)이 전서(篆書)로 되어 있고 비문은 해서체이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장과 승장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기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회은(1587∼1672)은 남원 사람으로 자는 응준(應俊), 호는 회은이라 하며 속성은 기씨(奇氏)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옥섬(玉暹)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뒤에 소용·호연·벽암 등 중장의 제자가 되었다. 1633년에 입암성장(笠岩城將)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승 벽암을 따라 전공을 세워 다음 해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에 임명되었다.
1647년에는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많은 공을 세웠다. 1651년에 남옹성(南甕城)을 쌓은 공으로 가의(嘉義)로 승급되었으며 1660년에 자헌(慈憲), 1663년에 정헌(正憲)으로 승진되었고 1672년에 86세로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의 교감과 역주」(이계표, 『전남문화재』10집, 전라남도, 1998)
「광양군의 불교문화유적」(최인선, 『광양군의 문화유적』, 순천대학교박물관·광양군, 1993)

[네이버 지식백과] 광양송천사지회은장노비 [光陽松川寺址悔隱長老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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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두


최산두崔山斗
前 조선 충청도 보은현 현감 
임기 : 1518년 ~ 1519년
1482년생/광양(光陽)~1536년/초계 (55세)
1513년 별시문과 급제
조선 시대 문관 겸 시인
아버지 최한영(崔漢榮)
어머니 청주 한씨 부인(淸州 韓氏 夫人)
외조부 한경회(韓敬澮)
호(號)는 신재(新齋)
종교 : 유교(성리학)
최산두(崔山斗, 1482년 ~ 1536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양(光陽)이며, 자는 경앙(景仰), 호(號)는 신재(新齋)이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전라도 광양(光陽)에서 아버지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과 어머니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도 교유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 박사, 홍문관 수찬·홍문관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보은 현감이 되었으며,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사람 26명을 선발하였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개혁과 반격
그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 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한 훈구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가 속한 신진 개혁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다.

유배 생활
1519년(중종 14)에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전라도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에 유배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 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유배지에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교유하며 사사를 받았는데, 뛰어난 제자로는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柳希春)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화순 적벽(和順 赤壁)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1533년에 해배된 뒤에도 그는 계속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에 의해서 화순 적벽(和順 赤壁)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는 유명 관광 명소로 탈바꿈 하였다.

최후
그는 유배된지 15년 만인 1533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1536년에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묘는 전남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 모셨다. 사후 1578년 광양군 광양면 우산리 교촌마을에 봉양사(鳳陽祠)를 세워 위패를 모셨으며, 1670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도원 서원(道源 書院)에 제향하였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최한영(崔漢榮)
어머니 : 한경회(韓敬澮)의 딸

관련 문화재
옥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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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인 나복산은?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 왕과 왕비는 태후를 모시고, 이곳까지 피난을 왔는데 수려한 산세에 반한 왕이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여 남짓 머물렀다. 그 후 원래 명칭인 나복산을 모후산으로 바꾸었다. 이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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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의 인물


1.도선국사(道詵國師) - [827-898] 

    - 한국 풍수지리설의 원조(비보사상), 선종사상의 대가
  -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과 고려 건국을 예언
   (왕건의 출생 시부터 교육을 맡은 스승이었고 고려 창업에도 도움을 줌)
  - 827년(통일신라 흥덕왕2년) 영암군 월출산 성기동에서 출생하여 898년(효공왕2년)에
   72세의 나이로 백계산 옥룡사에서 입적하였음.
  -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된 후 20세인 846년 (문성왕 8년)에
   곡성 태안사에 들어가 혜철스님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움
  - 운봉산, 태백산을 돌며 참선하다가 백계산 옥룡사에 들어와 35년간 수도
  -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에 봉해지고 인종 때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시호가 내려짐
  - 옥룡사는 1598년(정유재란)때 화재로 소실된 후 17세기 후반부터 중건 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전소
  - 현재 시에서는 1997년부터 대대적인 발굴·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음


2.김책 

    - 고려 광종(光宗)대에 정치개혁을 위해 실시된 과거제로 등제(登第)
  - 광종이 군신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친히 공복(公服)을 하사하였다고 함
  - 실제로 광양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한집(補閑集)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이 아주 뛰어났다고 함
   ※ 補閑集 : 고려 고종 때 최자(崔滋)가 지은 시화집


3.김황원 - [1045∼1117] 

    -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고문을 지어 海東第一이라 알려짐
  - 고려 예종(1112년) 정월에 翰林特講學士가되고, 禮部得郞, 國子祭酒, 翰林學士 역임
  - 예종 12년(1117년) 8월, 73세 나이로 별세
  - 평양 부벽루(浮碧樓)에서 통곡하며 썼다는 시가 유명함
   ※ 장성 한쪽에는 넘쳐 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 끝에는 점점한 산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4.김약온 - [1051∼1140] 

    - 예종8년(1113년) 12월에 知尙書都省事, 인종 즉위년(1124년) 5월에 參知 政事가 됨.
  - 우왕 원년(1375) 정월에 왕이 書筵을 두고 그로 하여금 스승으로 삼음
  - 조선조에 들어 光陽府院君에 봉하여 짐


5.신재 최산두 - [1482∼1536]
  - 1482년(성종13년) 4월 10일 봉강면에서 출생
  - 백운산이 내린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남
   ※ 이름의 山은 백운산을, 斗는 북두칠성을 뜻함
  - 옥룡면 동곡리‘학사대’에서 10년 동안 수학
  - 1504년(22세)에 진사에 오르고 1513년 (3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
  - 홍문관을 거쳐 호당(湖當)에 오름
  -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에 의해 37세 나이로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
  - 유배지에서 15년 동안 많은 학자를 양성하다가 1536년 53세 일기로 작고
  - 광양읍 우산리의‘봉양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음


6.매천 황현 - [1855∼1910]
  - 본관은 장수로 황희 정승의 후손
  - 1855년 음력 12월 11일 봉강면 서석촌에서 출생
  - 1874년(20세)에 상경하였으며 강위, 김택영, 이건창과 함께 한말 한국 문학의 4대 문장가로 활동
  - 1888년(34세) 생원에 응시하여 장원(성균관 생원이 됨)
  - 역사 비평서인‘매천야록’과 시문집‘매천집’, '매천속집'‘동비기략’저술
  -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에 맞서 절명시를 남기고 56세 일기로 자결함
  - 1999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됨(문화관광부)
  - 시에서 대대적인 생가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음


7. 강희보, 강희열 형제 의병장
  - 1560년경 봉강면 신촌마을에서 출생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단성
   (지금의 경상도 산청군)에서 왜군과 항쟁
  -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히 전사
   ㆍ강희보 1593년 6월 27일 전사
   ㆍ강희열 1593년 6월 29일 전사
  - 영조 40년에 강희보에는 형조좌랑(정6품) 강희열에는 병조참의(정3품)를 내림
  - 1998년 시에서 사당을 이전하고 동재·서재·삼문을 신축


8. 황병학 의병장
  - 진상면 출생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백운산 용성굴에서 병기를 제작 옥곡면 원유지구에서
   왜병과 격전하였음
  -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자금 마련 활동을 벌이다가 평양에서 체포되어 옥사함



학사대 노랭이봉 억불봉 포스코수련관 GPX트랙 파일 첨부 : 광양억불2019-07-06_10-06-01.gpx, Tr광양억불201907061006.gpx









07:30 덕천에서 승차
09:55 진틀에서 A팀 하차
10:01 용문사 입구에서 B팀 하차
10:06 선동정류소에서 하차, 버스는 수련원으로 올라감
10:11 시멘트 교량 지남, 길이 묵어 도로 나와서
10:30 선동교, 앞에 삼각점(표고198.5m, N:35˚04'06.11",E:127˚37'02.45")
10:35 바위산장 입구
10:39 '광양송천사지회은장로비250m→' 안내도로표지
10:58 학사대
11:22 동동버스정류소, 보건진료소
11:34 등산로, 임도 앞에 출입금지 안내판
11:41 고사리밭
11:51 철망/중간중간에 철망이 막고 있으니 길 따라가야..
11:52 아스팔트 포장도로-수련원 연결, 헬기장
11:53 도로이탈, 이정표(방향 표시:수련원,억불봉,동동마을,HP)
12:35 목재계단
12:09 밧줄
12:20 목재계단(수련원조망)
12:23 계단 위쪽 조망처, 휴식, 간단한 중식
큰까치수염, 노루발풀꽃, 노루오줌
13:22 노랭이봉정상(804m)[노랭이재0.3, 국사봉9.3, 헬기장1.9]
13:38 노랭이재 [수련관1.3, 노랭이봉0.3, 구황3.7, 헬기장0.7]
13:53 [억불봉0.9, 수련관1.8]
13:58 헬기장,갈림길[노랭이재0.7, 정상__, 억불봉__ ]
14:06 [억불봉0.6, 수련관2.1]
14:14 억불봉2봉
14:34 억불봉정상(997m)
14:43 억불봉4봉 조망
15:08 [억불봉0.6, 수련관2.1]
15:10 헬기장,갈림길[노랭이재0.7, 정상__, 억불봉__ ]
15:19 [억불봉0.9, 수련관1.8]
15:27 노랭이재 [수련관1.3, 노랭이봉0.3, 구황3.7, 헬기장0.7]
15:46 수련원둘레길 임도
15:47 [억불봉2.4, 수련관0.3]
15:52 [정상7.2, 억불봉2.7, 노랭이봉1.6]
16:06 주차장/산행 종료
19:15 진영휴게소 10분 휴식
19:50 덕천에서 하차
20:15 귀가





















































































억불봉(億佛峰), 업굴산(嶪窟山)
진상면 어치리와 황죽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억불봉(億佛峰)은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의 원문에 '嶪窟山:白鷄山東支'라고 처음 표기하고 있다.
즉 '업굴산(嶪窟山)이란 백계산 동쪽 지맥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업굴산(嶪窟山)이 지금의 억불봉(億佛峰,1008m)이다.
또한 여기에서이 백계산(白鷄山)은 현재 동백림이 감싸고 있는 옥룡사(玉龍寺) 옛터의 뒷산(현재의 백계산:253m)이 아니라 현재의 백운산(1218m)을 지칭한다.
백계산(白鷄山)이 현재의 백운산(白雲山)이라는 고증을 더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1454)의 광양현 '山'조에 '鎭山白鷄山在縣北'으로 산 1개소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현재의 백운산(白雲山)을 말한다.
이 밖에도 백계산(白鷄山)에 관해서는 '동람도'(1531년경 제작), '동여비고'(1682년경 제작), '해동지도'(18세기 중기 제작) 등에 소개하고 있으며, 현재와 같이 백운산(白雲山)이라고 표기된 기록은 '여지도서'(1760년경 제작), '대동여지도'(1864년 제작), '광양현 지도'(1872년 제작) 등이 있다.
왜 업굴산(嶪窟山)이라고 했을까? 의문을 가져볼 수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현재의 억불봉(億佛峰) 동쪽 절벽에 있는 굴(窟)이 이를 증명할 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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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나가면서 보는

성공한 분이 추진하는 국토흑화사업...

국토녹화사업을 하신 분은 이미 낙인을 찍어두고..

나중에 후손들에게 정녕 성공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녹색 일까, 흑색일까.

꼭 그렇다고 한 쪽에 치우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은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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