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괴산 가령산 무영봉 낙영산 도명산 산행 20180707 토

benel_jt 2018. 7. 7. 22:43

괴산 가령산 무영봉 낙영산 도명산 산행

20180707 토 산하

산행코스 : 충청북도자연학습원-가령산-무영봉-낙영산-미륵산성-도명산-마애삼존불상-학소대-화양서원-화양동탐방지원센터-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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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작 201807071043
산행종료 201807071700
전체시간 6시간17분
전체거리 12.5km
평균속도 2.3km/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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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3 충북자연학습원
10:59 신발 벗고 화양천 도강
11:00 산행 시작
11:25 밧줄
11:55 헬기장
12:00 가령산정상(642m)[자연학습원1.8, 낙영산4.2]
12:19 전망바위
12:26 [가령산1.3, 낙영산2.9]
12:50~13:00 [가령산2.3, 낙영산1.9]-중식
13:12 속리산 조망 최고 능선전망대
13:19 무영봉정상(742m)
13:25 밧줄, 위험구간
13:41 [낙영산1.0, 가령산3.2]
14:13 헬기장
14:14 [낙영산0.3, 가령산3.9]
14:16 오른손 벙어리장갑바위
14:17 기암들(...)
14:41 공림사갈림길, 미륵산성 [낙영산0.5, 도명산1.4, 공림사1.3]
14:47 낙영산 정상(684m)
15:02 미륵산성
15:25 도명산 정상(642m)
15:42 마애불(도명산 마애삼존불상)
16:19 학소대[도명산2.8, 자연학습원2.0, 주차장2.5]
16:23 와룡암
16:29 능운대
16:31 첨성대
16:35 화양구곡 입석
16:37 화양서원묘정비
16:38 화양서원
16:39 괴산만동묘정비
16:40 만동묘
16:45 운영담
16:56 화양동탐방지원센터
17:00 대형주차장/산행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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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산, 낙영산, 도명산은 2차례에 걸쳐 나누어 산행을 한 곳이다.
첫번째는 공림사에서 낙영산, 도명산, 화양동으로, 둘째번에는 자연학습원에서 가령산, 무영봉으로 가서 학습원으로 원점회귀한 산행이었다.
그 정도가 나에게 알맞은 거리인데 이번에는 조금 길다.
그렇지만 할만한 거리에다 시간은 조금 가능할 정도다.
다른 산행기를 보니 도명산에서 학소대로 내려간 코스에 6시간45분, 도명산에서 첨성대능선을 이용한 경우에는 7시간45분으로 한 시간을 더 사용하였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나도 이 코스를 생각했지만 도명산 정상에서 이미 한시간 3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같은 시간에 도명산에서 발이 빠르다고 첨성대 방향의 능선으로 가자고 하는 이가 있어 만류를 했다.
학소대로 가는 길이 약간 짧고, 그 이후는 포장도로라 속도를 적당히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충청북도 자연학습원이다.
다리가 없는 내를 건너는데 최근에 내린 비로 수량이 늘어 신발을 벗고, 대장이 잡고 있는 긴 밧줄을 의지해서 건넜다.
거너서야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고 산행이 시작되었다.
결국 10여분을 도강에 보낸 것이다.
날씨가 모처럼 개어 조망이 좋았다.
가령산 정상에서 무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가끔 보이는 속리산의 능선이 장쾌함을 더해준다.
험한 밧줄구간도 더러 있다.
가령산 정상 가지 직전에 계단에서 발에 밟히지 않을 아슬한 위치에 병아리난초 한 포기를 만났다.
며칠 전 서천 희리산에서 보았던 것보다 달린 꽃의 수가 적고 갸날프다.
간혹 원추리, 말나리 등이 눈에 띄었다.
기암괴석에 정신이 온통 팔려 꽃은 그냥 지나치는 것 같은 산이다.
온통 바위로 뒤덮힌 도명산에서 보는 기차바위는 모양새가 정말 기차인 듯한 느낌이다.
도명산에서 학소대로 가는 길에 삼존마애불상을 거쳐서 내려간다.
하산기간에 맞추느라 조금 재촉하면서 갔다.
학소대의 화양천과 만나기 전의 계곡물은 맑기가 옥수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학소대에서부터는 수량이 많기는 하지만 수질은 이끼가 있는 곳들도 있고 약간 오염의 흔적을 느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좋은 계곡이 어디 있으랴.
운영담 부근의 물가에는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다시 보고 왔다.
송시열과 그들의 역사를 더듬으며...
비례부동(非禮不動)..
전에 갔을 때는 돌에 매직으로 쓴 것이 보이더니 이번에는 대량생산을 했는지 삼각형의 돌에 새겨 놓은 같은 모양의 非禮不動이 몇개 보였다.
밖에 나와 화양서원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에도 非禮不動을 이용한 이벤트를 기획한 흔적이 보인다. 이걸 이용했던 정치사가 느껴진다.
볼 건 다보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갔더니 하산 마감 시간인 5시였다.
벌써 하산후식을 하고 있다.
그저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 뿐일까.
날씨가 시원하여 땀을 심하게 많이 흘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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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불어 신발을 벗고 건넌 화양천







병아리난초


원추리



가령산(742m)










무영봉(742m)










낙영산(684m) 정상









괴산 미륵산성안내



도명산 정상 건너편의 기차바위


도명산(642m)





도명산에서의 조망












학소교(학소대를 건너는 다리)


첨성대바위



만동묘





화양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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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만동묘에 얽힌 사연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온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숙종 30년(1704)에 권상하 등이 화양동서원 안에 건립한 만동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처음과 끝 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1726년에 영조는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렸고, 그 뒤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그해에 어필 사액을 받았고 순조 때는 허름한 건물을 헐고 다시 지었다. 헌종 때는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충청도 관찰사가 정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당시 만동묘는 신위를 봉안한 다섯 칸짜리 묘우와 제관들의 숙소 그리고 유생들의 회합 등에 쓰이던 정침과 동서 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으며 1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유생들의 집합소가 되면서 화양동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극심해졌다. 고종 2년(1865) 나라에서는 서울의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 지내므로 따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폐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은 뒤에 재건되었으나 순종 1년(1907) 일본 총독부의 금지령으로 만동묘를 철폐하였으며, 그 뒤 재산을 국가와 지방관청에 귀속해버렸다.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은 화양구곡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다. 깨끗한 물속에 잠긴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 금사담 위의 높직한 암반 위에 송시열의 서재이자 별장이던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암서재는 송시열이 굴피집을 짓고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좋은 경치를 정원으로 삼아 앞쪽에 난간을 둔 자그만 집인데, 암서재 역시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서 지은 것이다. 암서재 앞 금사담 가의 바위벽에는 '금사담'이라는 이름을 비롯해 '충효절의(忠孝節義)'니 '창오운단(蒼梧雲斷) 무이산공(武夷山空)' 등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창오산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고 무이산은 주자가 살던 산이다. '창오산은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은 비었다'라고 한 것은 명나라가 사라지고 오랑캐, 즉 청나라가 들어선 상황을 송시열의 입장에서 절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곳 암서재 바로 옆에 일명 큰절이라고 부르는 환장사(煥章寺)가 있었다.

환장사에는 재미난 일화가 숨어 있다. 『이순록』에 실린 다음의 글은 이곳에 머물던 승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색당파를 구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거처한 지가 30여 년이 되었는데, 산수가 절승이므로 유람하러 오는 길손들을 많이 겪어서 자연히 사색당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양과 행동을 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처음 동구에 들어올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좋다! 좋다! 하고 동(洞) 안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암자의 중을 부르고 서원을 지날 때에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휘저으며 기침하고 침을 뱉기를 함부로 하고 만동묘를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을 하지 않는 자는 남인이요, 동에 들어올 때 산수를 자세히 보지 않고 서원과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중들의 허물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서 잔소리를 하며 성가시게 구는 것은 노론이요, 동에 들어와서 산수만을 보고 서원과 만동묘를 지날 때 존경하는 뜻은 없으나 또한 너무 거만한 태도도 짓지 않고 바쁘게 지나가는 자는 소북(小北)이요, 동에 들어올 적에 좌우로 산천을 돌아보며 혹 냇가에 앉거나 바위에 기대었다가 서원에 이르러서는 조심스럽게 뜰에서 절하고 자세히 서적을 보며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처마만 쳐다보아도 이미 깊은 감회가 생기고 전(殿) 안을 봉심(奉審)하고 몸을 굽혀서 뜰을 지나 암자에 이르러서는 중들의 생활을 자세히 묻고 밤에는 늙은 중을 불러 담화하면서 산중의 조작을 묻는 자는 소론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동묘에 얽힌 사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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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695년(숙종 21) 건립.

1695년(숙종 21)에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이곳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데다가,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각자(刻字)하여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건립 당시부터도 첩설(疊設: 거듭 설치하다)이라는 소론(少論)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한 적이 있고, 사액을 받을 때도 예조에서 첩설서원이라 하여 방계(防啓)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허용되었다.

사액은 1696년 대사성 이여(李畲)가 경연에 입시한 틈을 타서 사액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다.

숙종 말년의 노론 집권시기에는 국가에서 유례없이 20결(結)의 토지와 많은 노비를 지급받았으나, 반면 경종 때 소론집권하에서는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하여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가서 제수전(祭需錢)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가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고, 이를 거부하는 수령에게는 통문(通文)을 보내어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또 춘추 향사 때의 유생 공궤(供饋: 음식을 드리는 것)를 빙자하여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 양민을 피역(避役: 부역을 피하는 것)시키면서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백성은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의 민폐를 심하게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폐습이 노론정권이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지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에 의하여 복주촌은 영구히 폐지되었고, 지방관에 대한 징구(徵求)도 심한 통제를 받았다.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한 서원·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의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 이면에도 실은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조선시대 당시 청주 화양동에 있었음)와 함께 화양동서원의 폐단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71년(고종 8)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었고 묘정에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깨져 현재는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양동서원 [華陽洞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