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영월 계족산 산행20180627 수

benel_jt 2018. 6. 27. 23:54

영월 계족산 산행

20180627 수 한마음


07:50 덕천동 승차
11:36 왕검성주차장 도착
11:43 정종대왕태실비
11:53 영월정양산성(寧越正陽山城)
(※2011.08 영월군수와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명의의 등산로 우회 안내판이 있다. 국가지정사적 446호 영월 정양산성 유적 보존 복원 사업을 위한 문화재 발굴 조사의 일환으로 등산객 안전사고의 방지를 위해 일시 폐쇄한다는 내용이다,)
[←등산로(삭도쉼터)]
11:57 되돌아 왔다.
계족산을 찾은 주요 목적이 산성이었기에.
등산로는 잘 다듬어져 있다.
12:06 외성(外城)
12:16 서문(西門)
12:20 북문(北門)
12:56 [등산로(삭도쉼터)→]
(여기까지 2.4km로 80분이 소요되었고, 고도는 트랭글 기록으로 594m이다)
12:57 삭도(索道)쉼터<대한민국케이블카의 원조>
13:07 [정상1.7, 주차장2.8]
13:30 전망점(태화산, 마대산,곰봉, 소백산의 주능선)
13:49 6봉? 중식
14:10 [정상0.5, 주차장4.0]
14:28 계족산정상(890m)
14:35 (선바위)
14:49 [정상0.5, 등산로입구2.2]
15:07 [정상1.2, 등산로입구1.5, 새재쉼터0.4]
15:16 [정상1.6, 등산로입구1.1]여기가 새재쉼터...쉴한 곳은 못된다.
15:25 폭포(물은 없다)
15:33 마을부근 채소밭
15:36 가래골천표지(한강합류점부터0.6km)
15:43 왕검성주차장(수도전은 있으나 물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산꾼들이 계족산을 찾지 않는 이유들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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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태실비(正宗大王胎室碑)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산133번지
조선 제22대 정종대왕의 태를 봉안한 태실비로서 영조29년(1753)에 영월읍 정양리 태봉에 처음 조성되었고, 정조가 사망하자 순조 원년(1801)에 가봉하고 비를 세웠다.
1929년 이왕직에서는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를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태실은 그 이후 석회 광산의 개발로 훼손, 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금강공원으로 옮겨 관리해왔으며, 1997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제22대 정조는 본래 정종이었으나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변경되면서 정종→정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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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정양산성(寧越正陽山城)
국가지정 사적446호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1일원
산성이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이 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정양산석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가 남하하였을 당시 중부지역의 거점이 되었던 설곽으로 보기도 하고,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왕검이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아직 학술적으로 그 축조 연대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산성이 둘레 '799보(步)이며, 상 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고 하였는데, 산성의 실측둘레는 액 1.3km이다.
성벽은 한쪽만쌓는 편축방식, 혹은 양쪽을 쌓는 협축방식이 함께 사용되었고, 자연석을 적당히 치석하여 매우 정교하게 쌓았다.
높이는 구간에 따라 무너진 곳이 많기때문에 일정하지 않으나, 높은 곳은10~12m에 이른다.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는데, 타(?)의 구분이 없는 평여장으로 되어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이다.
성문은 문턱을 높게 하여 사다리 등을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懸門式)이다.



 

계족산 산행의 기록과 트랙, 오르내림이 많지 않게 꾸준히 올랐다가 정상에서부터는 꾸준히 내리막을 치는 피로도가 크지 않은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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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 왕검성주차장은 영월화력발전소 바로 옆에 있다.


정종대왕태실비

정종대왕태실비(正宗大王胎室碑)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산133번지
조선 제22대 정종대왕의 태를 봉안한 태실비로서 영조29년(1753)에 영월읍 정양리 태봉에 처음 조성되었고, 정조가 사망하자 순조 원년(1801)에 가봉하고 비를 세웠다.
1929년 이왕직에서는 태실의 관리와 유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를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태실은 그 이후 석회 광산의 개발로 훼손, 매몰되었던 것을 1967년 금강공원으로 옮겨 관리해왔으며, 1997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제22대 정조는 본래 정종이었으나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변경되면서 정종→정조로 바뀌었다.)


 정조 태실

등로에서 뒤돌아 본 영월화력발전소 방향(우)과 진행 방향 우측으로휘돌아가는 강물(좌)


영월정양산성(寧越正陽山城)
국가지정 사적446호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1일원
산성이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이 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정양산석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가 남하하였을 당시 중부지역의 거점이 되었던 설곽으로 보기도 하고,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왕검이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아직 학술적으로 그 축조 연대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산성이 둘레 '799보(步)이며, 상 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고 하였는데, 산성의 실측둘레는 액 1.3km이다.
성벽은 한쪽만쌓는 편축방식, 혹은 양쪽을 쌓는 협축방식이 함께 사용되었고, 자연석을 적당히 치석하여 매우 정교하게 쌓았다.
높이는 구간에 따라 무너진 곳이 많기때문에 일정하지 않으나, 높은 곳은10~12m에 이른다.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는데, 타(?)의 구분이 없는 평여장으로 되어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이다.
성문은 문턱을 높게 하여 사다리 등을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懸門式)이다.


 



 

외성(外城)
정양산성 외성은 내성의 서쪽에서 연장되어 산성의 서북쪽 계곡을 보다 넓게 에워싼 것을 말한다.
외성은 북동쪽 성벽, 서북쪽 성벽, 남쪽 성벽으로 구성되며, 동남쪽은 내성 성벽이다.
서북쪽 성벽에 한 개의 문터와 한곳의 배수처(排水處)가 있으며, 동북쪽 성벽에도 한 군데의 문터로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서북쪽 성벽의 남반부와 남쪽 성벽은 성벽을 인공으로 축조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외성의 내부는 계단식의 대지 및 농경지로 이용된 밭두둑으로 되어 있다.
이러하 계단식을 이룬 평탄지는 거의 절반이 되며, 계곡을 이룬 부분의 좌우측이다.
계곡은 내성으로부터 스며든 물이 조금씩 흘러 내려가는데 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외성은 자연석석을 그대로 쌓거나 반치석하여 난중쌓기로 축조하였으며, 토석혼축의 형태를 보이는 것도 있다.

내성과는 달리 성벽이 낮고 매우 퇴락(頹落)되어 있으며, 특히 문터에서 계곡으로 횡단하는 지점에서는 토루(土壘) 모양의 단(段)을 이루고 있다.
문터는 현재 통행하는 길이 성벽선과 만나는 지점이며, 일대에서 기와 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문루(門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은 후대에 산성을 확장하여 사용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고대의 성곽을 중세나 근세에 보완해 사용한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문(西門)
정양산성 내성의 서문터는 서북쪽 성벽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으로, 남서쪽 모서리에서 180m, 북쪽모서리에서 90m의 거리에 있다.
북문과는 직선거리 100m이며, 성벽을 따라서는 135m 정도 떨어져 있다.
서문터의 지형은 북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경사진 산의 사면이며,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내성에서 가장 지대가 낮고 평탄하여 샘과 연못, 기타 여러 시설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으로 바로 연결된다.
문의 바깥은 산의 경사면이고, 문구부의 모양은 현문(懸門)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의 안쪽에서 남쪽개구부(開口部) 측벽을 길게 쌓고 성벽 너비보다 넓게 만든 치(雉)모양의 시설이 있어 특징적이다.
성문을 만든 곳이 산의 경사면이기 때문에 성벽의 외측 벽면은 수평을 이루되, 대형 석재를 이용하여 경사면 아래로 밀리는 힘에 내구성을 갖도록 시공하였다.
쐐기돌을 이용하여 수평을 맞춘 흔적이 벽면에 나타나고 있다.



  



 북문(北門)
내성 북문은 북쪽 모서리 끝에서 남동쪽으로 약 4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이 거의 직선으로 뻗은 곳으로 평탄한 성벽에서 경사지대를 오르는 시작점에 해당된다.
밖으로는 완만히 계곡을 이룬 안부(鞍部)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형적인 현문 형태의 유구가 잘 남아 있다.
개구부(開口部)는 동서측벽(側壁)이 일부 무너졌으나,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만큼 발 보존되었다.
개구부의 측벽에는 커다란 면을 가진 석괴(石塊)를 이용하여 축조한 부분이 나타나는데 이는 남문, 서문에서 보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며 이로 본다면 성문이 파괴된 후 다시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성문 입구 외측의 성벽에는 동측 문구부 측벽이 아래까지 연장되는 석축 구분선이 관찰되면, 주변 성벽의 하부에는 보강공사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계족산 정상 (890M)




등로와 달리 하신길은 밧줄과 바위가 약간 있는 편으로 이 선바위 다음 구간은 능선에 밧줄이 양쪽으로 잡아야 하는 정도의 험로가 이어진다.

그러나 길지는 않으니 부담은 가지지 말아야 할 듯...




폭포가 있으나 물이 말라 있다.

주차장의 급수전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조금 걸어 나가서 뻘물이 흐르는 강물에 탁족..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









 청령포를 건너다 바라보며


 


 

왕방연 시조비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출생-사망 ? ~ ?

조선시대 문신 겸 시인. 세조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있었는데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있은 뒤 1457년(세조 3) 왕명에 따라 상왕(上王)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되어 영월(寧越)로 귀양갈 때 호송하였다. 당시의 심경을 읊은 시조 한 수를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온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단종 유배길 호송의 책임을 맡은 금부도사 




누군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구나 라고 탄식을 한다.


산행을 마치고 청령포 전망대에 잠시 들렀다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