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적량
통영시 욕지면의 두미도 천황산을 탐방하기 위해 이용한 뱃길의 선착장이 있는 곳이 적량이다.
적량은 감목관의 목소가 있었던 창선 행정치소와 함께 창선면에서 가장 유서깊은 마을이다.
원래 우리말 땅이름은 성내였지만 사량도와 수우도 사이에서 해가 떠올라 성에 붉게 반사되어 적량이라 불려졌다고 전해온다.
적량은 창선면의 동단에 위치한 조선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세종대왕 때 축성되어 한일합방 이전까지 수군기지 역할을 했던 적량성이 200여 미터가 남아 있고, 삼천포 대방진 굴항보다 더 규모가 컸던 굴항의 흔적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또한 적량 만호 권전(權詮)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아장으로 노량해전에서 함게 전사했다고 이충무공 전서에 기록되어 있어 적량이 임진왜란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적량에는 1889년(고종26)에 세운 비가 하나 있다.
절충장군으로 첨사로 부임한 김정필 장군의 선정불망비로 적량마을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적량마을에는 역사문화재 외에도 섣달 그믐날 동제를 지내는 국사당이라는 정신적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다. 1535년(중종 30)건립된 국사당은 남해안의 다도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국사당 꼭대기에 있는 두 평 정도의 목조와가로 적량첨사가 나라의 번영과 임금의 평안을 빌었던 곳이다.
근대에 이르러 첨사가 없어지면서 마을의 평안과 풍농풍어를 비는 사당으로 변했다....
절충장군으로 첨사로 부임한 김정필 장군의 선정불망비로 적량마을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조선수군 주둔지 적량성
적량성은 세종2년(1420)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량진은 수군만호영으로 때로는 무관계의 최고 품계인 정3품 절충장군이 첨사로 부임하기도 했던 대단히 중요한 군사요충지이다.
또한 많은 고지도에서도 미조항진성, 평산진성과 더불어 남해를 방어하는 대표적인 성곽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진주목읍지에 진주 남쪽 1백10리 적량면의 석성으로 둘레가 1182척(553m), 너비가 405척, 길이가 407척, 전선 1척, 사복선 2척, 감관 1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노 젓는 병사 145명, 사수 28명, 화포수 10명, 포수 34명 등, 217명이 주둔했으며, 율포 방군 1452명, 당포 방군 548명, 사량 방군 360명, 가배량 방군 544명이 있다고 했으니, 그 중요성을 짐직할 만하다.
특히 남문 옆에 전선을 감추어 둔 굴항이 있었지만 지금은 농토로 개간되어 사라지고 석축의 흔적만 남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사봉이 우뚝 솟은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쪽에 세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1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적량진도에 그려져 있다.
현재 성곽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상당한 부분의 석축이 민가의 담장이나 논밭의 경계로 남아 후일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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