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의상과 원효, 고운 최치원.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설을 쌓아둔 산이 경남 거창군의 우두산(牛頭山·1,046.3m)이다. 산정이 소머리를 닮아 '우두'다. 이 산만한 경치가 세상에 없단다. 하여 이백의 시구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별유'를 빌려 별유산으로도 불렀다. 우두산은 백두대간에서 불거진 수도지맥의 두리봉, 마령의 산줄기들을 이어 받아 비계산, 오도산으로 연결한다.
경남 거창군에는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만 20여 개가 넘는다. 산꾼들은 그 산세의 위용과 비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산꾼들도 거창의 고산들은 '별천지' 급으로 대접한다. 울산·밀양·청도 일대의 가지산, 재약산, 신불산 등의 1,000m짜리 고봉이 '영남알프스'다. 이 일대 산들도 영남알프스 못지않게 웅장하고 수려하다. 그렇다면 가야산을 중심으로 거창, 합천 일대에 퍼진 1,000m 산군을 묶어서 '가야알프스'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백두대간 수도지맥의 명산
암봉 절경 소금강에 비유
등산로엔 천년고찰 고견사
주봉보다 의상봉이 더 유명
우두산 산행의 장점은 자유자재 코스 꾸미기다. 입맛대로 가능하다. 짧은 건 3시간, 길게는 10시간 코스까지 있다. 비계산, 오도산, 매화산을 품어보려면 1~2일간의 종주산행도 꿈꿀 수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메뉴는 장군봉을 돌아 지남산~우두산~마장재를 거쳐 기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우두산의 주능선을 다 밟는다. 주변 경관과 암봉 타는 느낌이 그만이다. 하나 잰걸음으로 6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부담스럽다.
'산&산' 팀은 이 코스 대신 짧지만 알찬 코스를 꾸며봤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고견사를 지나 의상봉(1,032m)~정상을 거쳐 마장재로 돌아오는 코스다. 주차장 해발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500m다. 출발부터 반은 먹고 간 셈이다. 정상까지 된비알은 없다. 다만 정상에서 마장재로 이어진 능선에서 각종 암봉을 넘거나 우회해야 하고, 오르내리막이 번갈아 나온다. 이 구간이 조금 신경 쓰인다. 하지만 '소금강'으로 비유되는 능선의 아름다움만 생각한다면 그 정도 발품은 가치가 있다.
기점인 주차장에 약수가 있다. 식수를 보충했다. 도토리묵과 파전을 파는 고견산장 매점을 지나자마자 갈림길이 나온다. 의상봉, 고견사는 왼쪽, 오른쪽은 마장재 방향이다.
널따란 돌이 길바닥에 박혀 있어 걸음걸이가 성큼성큼 나아간다. 5분 정도 지나 철 계단을 오른다. 철 계단을 밟고 지나면서 오른쪽에 견암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30m짜리 기암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인데, 가뭄 탓인지 수량이 적고, 물살에 힘이 없다.
등산로 왼쪽으로 모노레일이 있다. 주차장에서 고견사로 이어진 '물건 운반용 삭도'다. 이 삭도를 따라 가면 고견사까지 무난하게 이른다.
등산로는 숲을 지난다. 사과나무 대목(접을 붙일 때 바탕이 되는 나무)에 쓰이는 아그베나무가 떼로 있다. 평지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다.
견암폭포에서 20분 정도 순한 오르막을 올라오면 고견사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은 층층나무와 서어나무가 자라는 길이다. 향은 없지만 그늘이 깊은 길이라 걷기에 그만이다.
이정표에서 고견사까지는 10분 거리. 고견사(古見寺)는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7년(667년) 의상과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 원효가 절을 만들고 보니 '전생에 와 본 곳'이라는 뜻에서 고견사로 불렀다. 다른 말로 견암사(見岩寺)다. 조선시대 매년 2월과 10월에 고려 왕씨들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가 열렸다. 고견사 석불(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63호)과 동종(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70호)이 볼 만하다.
고견사 입구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지붕이다. 현판에 '우두산 고견사'라고 적혔다. 사천왕상 대신 금강역사가 문 양쪽에 서 있다.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아래채와 위채로 나뉘었다. 아래채가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아래채 뜰에 수백 년은 거뜬히 넘을 법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고운 최치원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돌계단을 밟고 위채로 올라간다. 위채 입구에는 '별유산 사천장문'이라고 쓰여 있다. 비구니의 염불 소리와 풍경 소리가 어울려 낭랑하게 울린다.
대웅전 왼쪽 약사전 방향으로 등산로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다소 경사를 의식해야 한다. 돌탑을 비켜서 기도터까지는 25분 정도. 기도터 바로 옆에 금동불상이 나무 그늘에 앉아있다. 예사로 봤으면 지나칠 뻔했다.
이곳부터 돌길이다. 큰 돌, 작은 돌이 뒤죽박죽이다. 조금씩 경사가 가팔라진다. 10분쯤 더 올라가자 의상봉 이정표가 나온다. 평평한 곳이라 잠시 쉬었다. 여기서 의상봉도 주봉도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에서 의상봉 방면으로 간다. 8분쯤 나무 계단을 오르면 또다시 이정표가 나타난다. 주변에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의상봉은 주봉보다 더 인기가 많다. 의상대사는 이 봉우리에서 참선하면서 과거와 현재·미래의 진리를 깨쳤다. 의상봉에 오르려면 20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의상봉은 암벽기술을 구사하는 전문산악인만 오를 수 있었다. 그러니 보통 산꾼들은 의상봉을 바라만 봐야 했다. 일부 산꾼이 섣불리 의상봉에 올랐다가 떨어지거나 조난사고를 당했다. 급기야 거창군이 나서서 나무 계단과 철 계단을 설치했고, 일반 등산객도 오를 수 있는 봉우리가 됐다.
계단 굽이를 돌 때마다 보이는 경관이 달라진다. 의상봉에 가까울수록 주변의 산들의 눈금들이 훤하다. 의상봉 마루는 넓지 않았다. 하나 그 품이 몇 천 배나 되는 조망을 선사했다. 백두대간의 덕유산, 수도지맥, 가야산이 빚어내는 능선은 한 폭의 푸른 산줄기 하모니였다. 1,000m급의 비계산과 두우산, 오도산, 흰대미산도 그 사이에서 고봉의 위세를 어김없이 뿜어냈다. 거창군이 왜 '고산천국'인지 예서 보면 안다.
이백은 '산중문답'에서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라는 질문에 '씩' 웃으며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다(別有天地非人間)"고 읊었다. 산행팀도 의상봉에 올라서고 나서야 왜 이 산을 별유산으로 불렀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산행팀도 씩 웃고 말았다.
올라왔던 계단으로 다시 내려간다. 996봉을 지나 10분 거리에 우두산 정상이 있다. 예전엔 이상봉(二上峰)으로 불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폐쇄 등산로를 이용하지 말라'는 출입금지 안내판만 있다. '주봉이 의상봉보다 못하다'는 산꾼들의 평가가 맞긴 맞았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기막히게 쉬기 좋은 곳이 있다. 바람도 실컷 보고, 비계산의 산줄기가 눈앞에 선명하다. 인지상정이라! 산꾼들이 앉으려고 옮긴 큰 돌이 예닐곱 개 있다.
쉼터에서 나와 937봉까지는 암봉이 들쭉날쭉하다. 돌아가거나 밧줄을 써야 할 곳이 제법이다. 조금만 신경 쓴다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매력적인 암봉이 곳곳이다. 곳곳이 포토존이다. 어떤 암봉에 서도 사위가 시원하다.
867봉, 862봉을 거쳐 마장재까지는 외길이다. 암봉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흙길이 나온다. 철 지난 철쭉이 한꺼번에 툭 튀어나올 무렵 마장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직진하면 비계산으로 이어진다. 하산길은 오른쪽이다.
소나무가 낸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거침없이 내려온다. 주차장 방향 이정표를 따라 길을 잇는다. 이정표에서 주차장까지 20분 정도. 오늘 산행시간은 충분히 쉬면서 4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문의 :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최찬락 산행대장 010-3740-9323
글·사진=전대식 기자
pro@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