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도

백계산 정보

benel_jt 2016. 3. 20. 16:06



백계산

높이 : 505.8m
위치 : 전남 광양시 옥룡면

특징, 볼거리

백계산(505.8m)은 주산인 백운산(1,218m)에서 뻗어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아담한 산으로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백계산에 7천여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백계산 동백림은 선운사나 오동도에 비해 덜 알려진 동백림이지만 역사는 깊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동백숲은 해발 403m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동백이 펼쳐져 있는 숲만 2천1백 평 정도이다.인공림이 아닌 자연림이고 동백 크기는 5~6m 정도로 큰 편이다. 수백 년된 동백이 옥룡사지터와 운암사 뒤쪽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동백이 팔뚝굵기로 자라는 데만 1백 년이 걸린다는데 이곳의 동백은 20~40cm인 것이 흔하다. 3월 초순에 꽃을 피워 월말이면 절정을 이룬다.

광양 백계산 동백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백 7천여그루가 2만여평의 산에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가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다.게다가 아직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 오붓하게 정취를 즐길수 있고 무엇보다도 동박새를 만날수 있어 좋다. 3월초부터 피기 시작해 중순에 절정을 이루는데4월까지 예쁜 꽃송이를 간직하고 있다.

옥룡사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계산 동백림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반들반들 윤이나는 진초록 잎새 사이로 빠알간 꽃송이가 보색 대비로 강한 인상을 준다. 족히 한 아름은 넘을 것 같은 동백이 이곳 동백림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동백터널을 지나 조금 오르면 탁 트인 곳에 옥룡사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보통 크기의 시골 기와집이라 절인지 가정집인지 얼른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처마밑에 한글로 `옥룡사'라고 쓰인 간판만이 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때 수백여명의 사문들로 법석댔다는 역사적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쇠락한 모습이다.

옥룡사를 감싸고 있는 동백림의 압권은 옥룡사에서 운암사에 이르는 산책로. 터널을 이룬 산책로에 들어서자 `삐리리 삐리리' 동박새의 울음소리가 경쾌하다.조그만 비둘기 크기의 동박새는 잿빛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이 가지 저 가지에열심히 옮겨 앉는다.

조매화(鳥媒花)인 동백에게 있어 동박새는 사랑을 전해주는 전령같은 존재다. 동박새가 꽃가루를 부리에 묻혀 암술에 옮겨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옥룡사지 사적제407호(국가지정문화재)

옥룡사지는 통일신라 말의 뛰어난 고승이자 한국풍수지리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이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하신곳으로,우리나라 불교역사에 매우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천년의 불교성지이다.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옥룡사지를 싸안고 있는 백계산(505.8M)은 주산인 백운산(1,218M)에서 뻗어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아담한 산으로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옥룡사는 신라 말에 조그만 암자였던 것을 도선국사가 864년에 중수하여 거쳐하였으며, 수백명의 사문들이 그의 법문을 듣고자 몰려들어"옥룡사파"란 지파가 형성되자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에 운암사라는 사찰을 추가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옥룡사는 몇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사세를 이어 오다가 1878년 화재로 소실된 후 폐찰 되었으며 현재 서 있는 대웅전은 1969년에 건립되었다.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와 수제자인 통진대사의 비와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1920년경에 모두 없어져 버리고 비문만이 탁본되어 "동문선"등에 전해온다.

 

교통 안내

버스 : 광양읍-옥룡면 추산마을(시내버스 1일 9회, 30분소요)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광양IC에서 빠져나와 광양읍 초입인 새광양교회에서 우회전 해 이정표를 따라 6km쯤 국도를 달리면 삼정교에 닿는다.직진하면 백운산 가는 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의 농로를 1km 더 가면 추동마을이 나오고 곧바로 지나치면 목적지인 백계산이다.

일반인들에겐 낯선 곳이라 얼마전 도선국사 유물 발굴로 유명해진 옥룡사를 물어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옥룡사가 바로 동백림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광양읍 터미널(061-762-3030)에서 옥룡면 추산마을행 시내버스 1일 9회 운행, 30분 소요

남해고속도로 광양IC - 광양읍(11번 지방도) - 옥룡 - 추산리 옥룡사지

 

 


 

 

광양 백운산(1,218m)에서 뻗어 내린 지맥에 아담한 산 두 곳이 있다. 두 산은 백운산의 중앙부에 위치했지만 아직은 일반인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백운산 둘레길 1코스’ ‘도선국사 천년숲길’로 명명되고 소문이 나면서 등산객들이 서서히 찾아들고 있다. 산의 이름은 백계산(505.8m)과 제비추리봉(593.2m). 명산은 명찰을 끼고 있는 법. 산자락에는 전설적 사찰인 옥룡사지와 운암사까지 자리 잡았다. 등산 시작점은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지 주차장과 운암사다. 옥룡사지와 운암사는 지능선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양분되어 있다.

운암사 입구에서 등산에 나선다. 제일 먼저 절 앞마당에 세워진 거대한 황동약사여래입상이 눈에 들어온다. 2007년에 조성되었는데 좌대 높이가 10m, 불상 높이가 30m로 속리산 법주사의 청동미륵대불(27m)보다 규모가 더 크다. 여래불상 앞쪽에는 대리석 테두리로 만든 커다란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사찰을 한 바퀴 둘러보고 좌측 동백나무 숲 속으로 들어선다. 대낮인데도 캄캄할 정도로 동백 숲이 우거져 있다. 앞쪽에 부도탑이 보이더니 길은 좌측 지능선으로 곧장 올라붙는다.

◆옥룡사 주변 수백 년 된 동백 군락지=능선 맞은편에 드넓은 옥룡사지가 보인다. 통일신라 말기의 뛰어난 고승이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35년 동안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다가 입적한 곳이다.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으며 수백 명의 사문들이 그의 법문을 듣고자 몰려 들어 옥룡사파란 지파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때 몰려드는 인원을 수용하려고 인근에 사찰을 세웠는데 이곳이 바로 운암사다. 운암사는 사세 확장을 거듭하다 1878년 화재로 소실된 뒤 폐사되었다가 1969년에 현재의 건물로 다시 세워졌다. 옥룡사지 주변에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려고 심었다는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7천여 그루의 동백이 7만㎡ 산자락에 군락을 형성했다.
모두 인공림이 아닌 자연림이다. 동백나무의 높이는 5, 6m로 큰 편이고 모두 수령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다. 동백이 팔뚝 굵기로 자라는 데 100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곳의 동백은 대개 20~40㎝인 것들이다.
지능선으로 다시 올라와 능선을 타기 시작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등산로는 거의 융단 수준이다. 이렇게 아늑하고 편안한 등산로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완만한 경사길을 재촉하노라니 솔 향기가 콧속을 파고든다. 곧이어 우측으로 송전탑이 나타난다. 이정표가 보이긴 하는데 거리 표시는 없다. 직진하면 백계산으로 가는 숲속길이고, 우측 내림길은 ‘둘레길/ 눈밝이샘’으로 가는 길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 흔적 전하는 옥룡사지=‘눈밝이샘’은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 길은 산사면 아래로 비스듬히 연결된다. 100여m 정도 내려가니 우측 골짜기 사이로 샘터가 보인다. 이곳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도선국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참선 수행길을 다니던 중 천하의 명당인 백계산에 옥룡사를 창건하고자 했지만 큰 연못이 있어 곤혹스러워했다. 도선은 숯을 한 가마니씩 가져와 연못에 넣고 샘물을 마시면 눈병이 낫는다며 샘물의 효험을 널리 전파했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눈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연못에 숯을 넣고 이곳에 올라와 샘물을 마신 후 눈병이 완쾌되고 눈이 밝아지자 이때부터 이곳을 ‘눈밝이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풍수적으로 이곳은 ‘비천오공’(飛天蜈蚣`하늘을 나는 지네)의 생식기에서 동향서출(東向西出)하는 형세를 하고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샘터의 모양이 여성의 자궁처럼 생겨서 손을 대지 않고 표주박으로 받아서 먹는다고 한다.

물을 마시고 돌아나와 숲속으로 길을 재촉하니 삼거리다. 우측이 백계산 정상을 다녀오는 길이다. 작은 봉우리 2개를 넘으니 백계산 정상목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삼각점이 보인다. 간단히 기념 촬영을 하고 다시 되돌아 나오니 약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금목재로 향하는 길은 서쪽으로 뻗은 능선이다. 오르내림이 없는 참나무 숲길이라 힘이 들지 않는다. 중간지점에 벤치 2개가 있는 곳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가야 할 도솔봉 능선이 가로 줄기로 보인다.
금목재에 도착하니 시멘트 포장길이 연결되어 있다. 우측 편에 ‘도선국사 천년숲길 등산 안내도’와 ‘백운학생양영장 2.4㎞ 40분’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중식을 해결하고 임도 건너편 나무계단을 오른다. 길은 우측으로 꺾이고 작은 봉 하나를 넘으니 나무 쉼터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경사길. 숨이 조금씩 막혀온다. 주능선 조금 못미처 전망바위에서 가쁜 숨을 고른다. 뒤돌아보니 좌측 백운산에서 억불봉까지 늘씬한 능선들이 시원한 파노라마를 그렸다.

도솔봉 주능선 갈림길에 도착하니 의외로 작은 봉우리다. 해발 745m로 오늘 등산 중 최고 높이다. ‘금목재 1㎞’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금목재에서 35분 정도 걸렸다.

남쪽으로 거쳐 가야 할 송전탑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고 한참을 내려섰다가 다시 봉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올라선다. 길은 이내 삼거리 하나를 펼쳐 놓는다. 우측 능선길로 올라서니 오늘 산행의 두 번째 목적지 제비추리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593.2m로 오히려 무명봉보다 150여m가 낮다.

정상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본격적인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소나무 숲길을 40분여 내려가니 우측에 산막 한 채가 보인다. 백운산 자연휴양림이다.

◆울창한 휴양림`황톳길서 산행 피로 풀어=휴양림에는 미끈하게 잘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들어서는 순간 머리가 맑고 상쾌해진다. 낙엽송, 삼나무, 소나무, 전나무와 잣나무 등 울창한 숲이 황토 산책길, 야생화 정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매표소를 통과하니 외산마을 삼거리에 관광버스가 정차되어 있다.

옥룡사동백림주차장이나 운암사를 들머리로 ‘옥룡사지~금목재~백운산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약 7.1㎞ 거리, 소요시간은 3, 4시간 정도.
올해 꽃샘추위가 유난히 심술을 부리고 있다. 지난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인지 예전보다 꽃소식이 늦다. 사적 제407호인 옥룡사지의 동백꽃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숲을 둘러보는 감동은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다. 꽃이 절정일 때 찾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시간이 짧아 아쉽다면 돌아오는 여정에 30분 거리인 섬진강 마지막 포구인 망덕포구에 들르면 시인 윤동주 유적지와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욱 가옥’이 있다. 대구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해도 오후 7시 이전에 귀가할 수 있다.

 

 

옥룡사가 위치한 백계산(白鷄山)은 도대체 어떤 산이고 어떤 연유에서 도선국사는 백계산에 옥룡사를 중수 했다는 것일까?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보자

1.백계산(白鷄山)은 어떤 산 일까?

전남 해안에 있는 광양의 백계산(白鷄山)은 예로부터 지금의 백운산(白雲山 1,218m)을 통칭하던 이름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주산은 백운산으로, 백계산은 그 혈처인 추산(秋山)의 명칭으로 분리되고 바뀌었다.

 

 

 

 

오늘날 백계산은 (505.8m)은 주산인 백운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지맥에서,한 맥이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백운산 남쪽 중앙부에 형성된 추산리 도선국사의 탑이 있는 산을 말하고 조선중기 이전의 기록은 주산인 백운산과 혈처인 운암사를 함께 통칭했었던 말이다.



◇ 광양현지도(1872)




◇ 동여비고(1682)

 

 


대표적으로 도선국사 비문에서 "백계산유고사왈옥룡(白鷄山有古寺曰玉龍)"즉 "백계산(백계산)에 옥룡 이라는 옛 절이 있다"는 기록에서 ,백계산은 주산인 옥룡산을 말하고 경보선사의 비문에서 "백계산동지운암강(白鷄山東之雲巖崗)" 즉 백계산을 동쪽 운암사 산 능선이라 한 것은,백계의 혈처인 추산리 백계산을 말하는 것으로,운암사 동쪽 산 능선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삼신산의 우두머리인 방장산(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좌측에 있는 백운산은 그 자체가 "순천 서면(西面)"과 "구례 간전면(墾田面)"에 두 발(鷄足山)을 딛고 ,동서(東西)로 날개를 펴고 ,북쪽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닭의 형국이다.

백계산의 혈처라는 도선국사의 비가 서 있는 산은 보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날아오르는 닭의 등에 해당 하는 것으로, 즉 이러한 전체적인 풍수는 학(鶴)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도(神仙圖)와 같은 의미이고,혜철국사가 이 산을 크게 중용한 것은 북쪽의 한반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태평성대를 위한 포석을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백운산 모습

 

 


2.풍수지리로 본 백계산(白鷄山)

- 백계산에는 왜 물이 귀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계산(白鷄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산 머리에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샘이 있으며,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나는데,소원을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몸과 마음이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 하지 않으면 샘물이 마른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이곳은 백계(白鷄)라는 풍수로 보아도,수맥이 있어서도 안되는 곳이다.

즉, 계(鷄)는 물이 없어야 하고, 용(龍)은 물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계(鷄)와 용(龍) 둘의 조건은 ,물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극과 극이다.

다시 말하면 백계(白鷄)의 혈처에 옥룡(玉龍)이 있는 것은 상극(相剋)이고 현무(玄武)의 혈처에 옥룡이(玉龍)이 있다는 것은 상생(相生)이니,풍수로 보아도 백계의 혈에 옥룡이 있다는 것은, 합이 맞지 않는 잘못된 것으로 ,자자손손 패가망신(敗家亡身)할 혈이다.



◇ 순천시 선암사 도선국사 영정

 

 


도선국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때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백룡(白龍)이 살고 있었는데,숯으로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었다는 전설에서 보듯이 ,백룡(白龍)은 옥룡(玉龍)과 같은 "흰 용"으로 옥룡(玉龍)의 혈처에 지은 법당이라면,그것이 연못이든 물구멍이든 당연히 수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추산이 백계산 옥룡사는 전설과는 거리가 먼 땅이다.

도선국사가 점지했다는 백계산 운암사라는 지명과 풍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곳이 백계(白鷄)가 알을 품고 홰를 치는 명당이라는 등등.......저마다 그럴 듯 한 이유를 들어 명당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운암사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실체는 물론 풍수의 기본도 모르는 잘못된 해석이다.

계(鷄)와 수(水)는 상극인데, 닭이 알을 품은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처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운암(雲巖), 즉 구름과 바위가 있고, 더구나 그 알을 훔쳐 먹고 사는 뱀 즉 용(龍)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패가망신하고 자손이 멸절(滅絶)될 뿐,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임에도, 엉뚱한 전설이 이어져 온 것은, 부질없는 사람들의 허욕이, 도선국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망상일 뿐, 이곳에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마음은 분명 아니었다.

또 다른 전설에서, 도선국사가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심었다는 주위의 동백나무숲 역시 이른바 풍수들이 밥을 빌기 위한 말장난이다.

세상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동백나무숲이 백계산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그곳에 구멍 즉 우물을 파는 순간, 흰 닭이 품고 있던 신령한 알은 깨어져버렸고, 다시 사람이 머물며 불을 지핀 것은, 곧 그 백계마저 죽여 태워버리는 사혈(死穴) 즉 사지(死地)가 되었고, 사람의 시신을 그곳에 묻는 것은, 신성(神聖)해야 할 신의 땅을 오염시키고, 포란을 부패시키는 일이므로, 아마도 도선국사 이후, 그곳을 살아서 들어가, 살아서 나온 이는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터가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끝없이 수난을 당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 백계산과 풍수와의 모순

이러한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백계의 혈에 우물을 파고, 구들을 만들어 불을 피우고, 시신을 묻고, 탑과 비를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절대 금기사항인데....... 임금의 명령으로 백계산에 비를 세운 경보선사는 말할 것이 없지만, 천하 풍수의 대가라는 도선국사가 자신이 살아생전에 신을 위해 마련한 신의 땅을, 죽어서 침범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계혈이 있다는 땅을 중심으로, 동서 골짜기에, 조성된 동백 숲을 가지고, 굳이 풍수를 논한다면, 그것은 닭의 깃을 아름답게 장엄하여, 장천(長天)을 날아가려는 신선사상(神仙思想) 즉 백계산 산신령을 위한 배려이다.



◇ 백계산 전경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풍수들이 백계산을 거론했지만, 도선국사 이후 "이곳에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 즉 선녀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옥녀배혈(玉女拜穴) 즉 선녀가 엎드려 절하는 명당이 있다."고 말했다는 당나라에서 온 양맥수란 사람만이, 겨우 담 너머로 도선국사의 뜰 마당을 보고, 자신의 이름값을 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백계산 운암사(현 추산리 옥룡사)는 도선국사가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비보(裨補)로써, 백계산 산신령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고, 인간들의 탐욕이 만든, 백계포란(白鷄抱卵)의 혈처라는 전설로 보아도, 사람들이 머물러 살거나, 시신을 묻어서는 안 되는 지세(地勢)이므로. 사람의 거처를 위한 구들을 없애고, 우물도 메우고, 냄새나는 사람의 시체까지 들어내어, 처음 그대로 솔바람 물결소리 향기로운 청정한 도량을 만들어, 백계산 주인이신 산신령님께 돌려드리고, 국태민안을 비는 것이, 당장의 국리민복을 위하고, 다시 천년의 사직을 비보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선도(仙道)를 공부했던 풍수(風水)의 대가이다. 옥룡자(玉龍子)라는 도호(道號)는 바로 선도적(仙道的) 의미가 담겨 있는 호이다.

옥룡자 도선국사는 전라남도 영암(靈岩) 구림동(鳩林洞)에서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어머니 최씨가 신인(神人)에게서 한 알의 밝은 구슬을 받아 삼키는 꿈을 꾼 뒤 잉태했다고 해서, 옥룡자(玉龍子)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최씨는 처녀의 몸으로 옥룡자를 잉태했는데, 한겨울에 월출산 아래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청외를 건져 먹고 임신을 했다고 한다.

최씨는 처녀의 몸으로 남몰래 아기를 낳았으므로, 숲 속 바위 위에다 아기를 내다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가보니,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아기를 덮어 보호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최씨는 그 신기한 광경에 감화 받아, 아기를 안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 때부터 아기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 비들기 구(鳩), 수풀 림(林)자를 써서 구림동(鳩林洞)이 되었으며, 아기를 버렸던 바위는 국사암(國師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룡자는 15세에 월출산(月出山) 월암사(月庵寺)로 출가를 하였고,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는《화엄경》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곡성 동리산(桐裡山) 태안사(泰安寺)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선풍을 떨치던 혜철(惠哲,786~861) 스님에게서 무설설(無說說, 주장 없는 주장) 무법법(無法法, 법 없는 법)의 묘리를 깨우쳤다.

그리고 옥룡자는 운수행각에 나섰는데, 태백산에서 움막을 치고 수도생활에 용맹정진 하는 등, 백운유수(白雲流水)를 벗 삼아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다.

《청학집》에 의하면 옥룡자가 풍악산에서 물계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때 물계자는 동안(童顔)에 눈같이 흰 살결로 병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연세를 여쭤보니 800세라고 했다고 한다. 《청학집》은 옥룡자가 물계자의 여운이라고 계보를 밝히고 있다.

옥룡자 도선국사의 연구가들은 옥룡자의 사상이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등 어느 종교, 어느 사상과도 상충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모두를 흡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도〈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주지했다시피, 현묘지도(玄妙之道) 풍류도(風流道), 즉 선도(仙道)는 근본적으로 유·불·도(儒佛道) 3교(敎)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팔도강산을 두루 행각한 옥룡자는 당나라로 가서 일행(一行) 선사에게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술수(術數)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라로 돌아온 옥룡자는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펴보며 삼천리 팔도강산의 아름다운 산천(山川)과 명혈(名穴)을 모두 답사하였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할 영웅 호걸들이 태어날 천하 명당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마지막으로 천문(天文)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자미(紫微)에 황운(黃雲)이 끼면서 불길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옥룡자는 깜짝 놀라 천문(天文)을 제삼 살펴본즉, 아뿔싸! 이는 필시 중국에 있는 일행선사가 신라에 영웅 호걸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난을 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옥룡자는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그러자 일행선사가 중국에 앉아서 신라의 명산(名山) 대혈(大穴) 들의 영기(靈氣)를 모두 끊어버리기 위해 진언을 암송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옥룡자는 곧바로 천상(天上)의 오성(五星)에게 조공(照拱)한 후에, 천태산(天台山)으로 급히 달려갔다. 천태산은 영기(靈氣)로써 중국에 있는 천태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산이었다.

옥룡자는 천태산 상봉(上峰)에 넓은 돌을 박아 반석을 만들고, 제단(祭壇)을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쇠로 만든 철마(鐵馬) 방아를 안치하고 매일같이 산에 올라 당나라를 향해 철마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당나라에서 괴변이 일어났다. 왕실의 동량이 되는 큰 인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앙화가 계속되었다.

중국의 왕은 태사관(太史官)을 불러 점을 치도록 했다. 태사관(太史官)이 천문을 두루 살펴보고 점을 친즉, 진방(震方)에서 살기(殺氣)가 일어나 태방(兌方)을 치니, 그때마다 당나라에서 괴변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방(震方)은 동쪽이니 신라요, 태방(兌方)은 서쪽이니 당나라였다.

한편 일행선사도 옥룡자가 자기에게 맞서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에 사람을 보내 꾸짖자, 옥룡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행선사께서 먼저 의(義)를 끊으셨으니, 나를 나무라지는 마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일행선사께서 먼저 신라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도력(道力)을 써서 신라의 산맥(山脈)을 끊었소이다.”

“······!”

“일행선사께서 먼저 경우 없는 행동을 하셨으니,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오이다.”

옥룡자의 말을 듣고 난 사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옥룡자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써서 일행선사에게 보냈다. 내용인즉슨, 일행선사가 끊은 신라의 산맥을 하루 속히 다시 이어달라는 편지였다.

일행선사는 중국 왕실에서 일어나는 앙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도력으로 끊었던 신라의 산맥들을 다시 이어주고, 옥룡자가 더 이상 당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신라의 산맥과 영웅 호걸들을 구한 옥룡자는 더 이상 철마방아를 찧을 필요가 없었다. 그 후에도 철마(鐵馬)만은 반석 위에 그대로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없어졌다고 《도암면지(道岩面誌)》는 전하고 있다.

천태산(天台山)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 소재지에 있다. 지금은 철마도 없어지고, 반석만이 무성한 이끼에 덮여, 오가는 등산객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후 옥룡자는 전남 광양시 옥룡면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서 연좌망언(宴坐忘言)으로 35년간 주석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875~886)은 옥룡자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궁중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옥룡자는 왕의 마음을 열리게 하였으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국왕이 해야 할 도리를 조언해 주고는 산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옥룡자는 신라 천년 왕도의 위업이 머잖아 막을 내릴 것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이래 신라는 중앙 왕실과 귀족들이 부패로 치달려가고 있었으며,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도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전쟁터에서 공을 이룬 장수들이 전쟁이 끝나면, 권력자의 시기질투를 받아 견제당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함께 부원수로서 전쟁터에 나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죽지랑(竹旨郞)과 그 낭도들이 전쟁이 끝나고는, 관리들에게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김유신 장군은 자신의 자손이 무시당하는 점에 대해 지하에서조차 통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족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에 지방 세력들이 반발하면서 신라 국정은 붕괴일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 건설의 꿈을 키워갔으니 궁예, 견훤, 왕건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옥룡자는 이미 왕건이 태어나기 전에, 왕건의 아버지에게 송악(개성)에 제왕지지(帝王之地)의 집터를 잡아주고 뒷날을 준비시킨 바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건 태조(재위918~943)가 고려(高麗)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려 때의 문신 최유청(崔惟淸)이 의종(毅宗)의 명에 의해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과 《고려사(高麗史)》에 상세하게 나온다.

989년(효공왕 2년) 3월 10일, 옥룡자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나는 이제 간다. 인연 있어 왔다가 인연이 다해 떠나니, 슬퍼하지 말라.”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채 입적하니, 세수(世壽) 72세였다. 제자들은 스승께서 35년 동안 머물렀던 옥룡사 북쪽 언덕에 사리탑을 모셨다.

한편 옥룡자 도선국사가 탄생한 구림동 백암마을에는 '도선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바위가 검은 색을 띠면 옥룡자 도선국사가 죽은 것이고, 흰색을 띠고 있으면 살아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바위는 지금까지도 흰 색깔을 띠고 있다고 한다.

주요 저서로는 비기도참(秘記圖讖)인 《옥룡기(玉龍記)》《송악명당기(松嶽明堂記)》《도선비기(道詵秘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가 있다. 그리고 승려로서 선도(仙道)를 함께 닦은 분들은 옥룡자 도선국사 외에도 원광법사, 원효대사, 월명사, 충담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더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