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선계곡
2010.8.5 목
산행코스 : 주차장-삼거리-추성통제소-비선담-원점회귀
.....
참고
국립공원 공고 제2010년 - 50 호
국립공원 특별보호구 시행 변경 공고
자연공원법 제28조 및 동법 시행규칙 제20조의 규정에 의거 다음과 같이 국립공원 특별보호구 실시를 변경 공고합니다.
1. 시 행 일 : 2010. 6. 5일부터
2. 시행목적 : 국립공원내 보호할 가치가 높거나 인위적․자연적 훼손으로부터 보호 필요성이 있는 야생동물서식지, 야생식물서식지, 습지, 계곡 등 주요 자원의 보호를 위해 일정기간 사람의 출입을 통제함.
3. 벌칙사항 : 본 공고 위반자에 대하여는 자연공원법 제86조 제2항에 의거 50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4. 변경사항
○ 신규지정 18개소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부근의 전설들
http://tour.hygn.go.kr/ 함양문화관광홈페이지 참조
1. 벽송대사(碧松大師) [한 대사의 도 닦은 이야기]
어느 지방 어느 고을을 가나 사찰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러한 류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가면 벽송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다.
이 절을 지은 벽송대사의 행적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으며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조정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었다.
지암은 무과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무사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북벌 계획을 시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장군은 혹독한 혹한 속에서 국경지대를 수비하다가 장검을 집고 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번뇌 속에서 시름하다가 문득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짓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양군 마천면에 소재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십일 동안 헤매던 중에 드디어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법계정심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 지암은 지금까지 번뇌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걸어 온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지암은 너무나 기뻤다.
그날부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히 해결해 왔다.
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상에게 뜻을 전하니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 하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정처없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지암은 그길로 다시 강점에 계시는 대사 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손을 놓이 하늘로 치켜 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만한 절을 짓고 벽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대사의 시신을 화장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대사의 수제자인 환성대사가 다시 절을 짓고 석탑을 세워 벽송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6. 25 동란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2. 선유정(仙遊亭)의유래 [선녀와 살던 사냥꾼]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고 거북이가 용궁에 드나들던 시대의 이야기로서 방장산(지금의 지리산)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마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삼정계곡은 벽소령으로 올라가는 계곡으로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합니다.
지리산 계곡중에서도 경치가 아름다울 뿐아니라 조용한 계곡입니다.
이 곳에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 생활을 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재산은 없고 빈 털털이로 산속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지만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가장 행복하고 마음 흐뭇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산속으로 들어가 산짐승을 사냥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사는데 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 다니는 길목에서는 매일 꼭 세 차례식 아름다운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유심히 보아왔습니다. 아름답게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 무지개 뿌리 아래의 소(沼)에서 어여쁜 세 여인이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깊은 산속에서 여인들만 있으면서 밥 짓는 것도 이상하였지만 그 여인들이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여인들을 보지 못한 인걸이는 참으로 황홀했습니다.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선녀 같았습니다.
이러한 여인과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황홀함과 호기심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그 밥 짓는 광경을 구경하노라니 그들은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 들고 무지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옥황상제의 시녀들로서 산자수명한 방정산으로 밥을 지으러 내려왔습니다. 맑은 공기 속에서 맑은 불로 밥을 지어 옥황상제의 진지상을 차려서 운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호기심이 늘 그곳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인걸이는 매일 산속으로 들어가 사냥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길목에서 선녀들의 밥짓는 구경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데 더위를 참지 못해서 였던지 그녀들은 소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씬한 몸매,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정신이 황홀했습니다.
그 때 인걸이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 날개옷만 입으면 몸이 가벼워져 하늘로 날아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 올라가면 옥황상제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옷을 벗어놓은 곳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서 그 날개옷을 훔쳤습니다. 되돌아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서 찍 소리를 내고 옷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기척이 나고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나자 이에 놀란 선녀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각기 자기 옷을 찾아입으려고 허둥지둥 서둘렀지만 그중 아미라는 선녀는 옷이 없어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황하고 놀라서 쩔쩔매는 표정이었습니다.
다른 선녀들은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하늘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미는 날개옷이 없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슬퍼하고 안타까와 하는 모습을 인걸이는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인걸이는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가 입던 옷을 가져다가 입혔습니다. 하늘로 날아올라가지 못한 아미 선녀를 자기 움막으로 데려가 몇 날을 지냈습니다.
옆에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쁘고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한편 하늘 나라에서는 아미 선녀가 하늘로 올라올 수 없음을 알고 어쩔수 없으니 땅에서 살라고 허락했습니다.
인걸이와 같이 살 것을 윤허하고 비단옷 세 벌씩과 쌀 나오는 바위 하나를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혼례식을 올리고 신혼 살림을 차려서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쌀 바위에서는 매일 필요한 양 만큼의 쌀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쌀바위는 최근 도로공사로 인하여 땅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아 하늘아래 첫동네에서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자를 짓고 재미있게 살던 아미는 어느 여름날 날개 옷을 보자고 졸랐습니다.
인걸이는 보관하고 있던 찢어진 날개옷을 기워서 아미에게 입혔다가 아미가 그 옷을 입고 그만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걸이는 한없이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엇하랴. 업질러진 물이요 쏘아버린 화살에 지나지 않은 것을....
그 후 인걸이는 세 자녀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의 하강을 기다렸습니다.
매일매일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미는 끝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인걸이는 세 자녀와 기다리다 지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이와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그 뒤 선유정이란 정자를 짓고 쌍무지개 다리를 놓아 아미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영영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3. 강씨 문중의 애기장군 [졸렬한 지배자들의 희생물이 된 영웅들]
이 이야기는 마천면 강청리 강청부락의 강씨 문중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로 전해지고 있다.
얼마나 옛날의 사회가 맹점이 많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강씨 집안에 애기 장군이 태어나기 전이다.
애기장군의 할아버지가 마을 뒷산의 장군대좌라는 명당 자리에 자기 부친의 묘를 썼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마을에서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건넌편의 개울물을 끌어오려고 수로를 내게 되었다.
뒷산의 장군대좌 위쪽 약 삼백미터 지점의 산등성을 파고 산줄기를 잘랐다.
그랬더니 자른 산등성이에서 뜻밖에도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것이 장군대좌의 장군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목을 잘랐으니 거기서 피가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나서부터 세월은 흐르고 몇 십년이 지나갔다.
강씨 문중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어린이가 바로 애기장군이다.
그는 태어나자 말자 바로 걸어다니고 어머니가 밖에서 일을 할 때에는 방안에서 놀면서 새가 되어 방안을 날아다녔으며 사람이 방에 들어오면 어린이로 다시 변하여 평소와 같이 재롱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애기장군은 새로 둔갑하여 산속으로 날아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자기집에서 불이 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사람으로 환원하여 손가락으로 물을 묻혀서 공중으로 튕겼다.
그랬더니 별안간 오색이 영롱한 무지개가 서고 그 무지개를 타고 어디선지 힘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순식간에 불을 꺼졌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린 애기장군은 뒷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들고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소변을 하여 바위에 홈이 패이고 오줌이 흘러 내려간 흔적이 지금도 완연히 바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희대의 영웅이었다.
평범한 장군의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인물의 될 소지가 엿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략과 용력을 지닌 애기장군이 시대를 잘못만나 태어났음을 어이하랴 !
이 세대에는 이 같은 인물이 태어나면 자라서 역적이 되는 것이라 하여 삼족을 멸하는 화를 입게 된다. 그래서 용맹스럽고 힘 있는 어린이는 죽여 없애는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마음이 좁다.
포용력이 없고 저들보다 뛰어나면 죽어야 했으니 어찌 나라가 발전하고 창대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인재를 위해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지혜와 계략이 뛰어나며 용감하고 힘있는 장군감이 출생하면 크게 환영 했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경사스럽게 생각하고 잘 키워 충성을 다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훌륭한 장군으로 양육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행여나 자기 권력이나 왕위를 빼앗고 노리는 역적이 될까 무서워서 처치했다. 위험천만이니 차라리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기막힌 암흑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대담하지 못하고 졸열한 방법을 써서 아까운 인재를 없앴다.
그런 자들이 왕이 되고 그런자들이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그 나라가 강성할수 있었으랴 !
강씨 문중인들 이같은 생각에서 벗어 날수는 없었다. 애기장군의 괴력과 기이한 행동을 그대로 보고만 넘길 수 없는 큰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역적이 났다 하여 가문을 멸하는 화를 당할는지도 모르는 판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하여 문중 사람들이 모여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상의를 하였다.
“저 아이를 관에서 알게 되면 우리 문중이 몰살을 당할 터인즉 어찌하면 좋을까?”
“가문을 위해서 멀리 도망을 시킵시다.”
“도망 시킨 것을 알면 더 크게 당할 터인데...”
“아까운 인물이지만 우리 가문을 위해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없는 사람을 그것도 우리 핏줄을 어떻게 죽이는가?”
“우리 문중의 운명과 그 아이의 목숨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별로 뾰족한 생각은 없고 결국 죽이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애기장군을 불더미 속에 던졌으나 타지도 죽지도 않고 아무런 이상도 없이 기어 나오자 문중에서는 두려워 떨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잡아서 거름더미 속에 파 묻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깊은 물 속에 던졌으나 가라앉지도 않은 채 헤엄쳐 나왔다.
그러니 강씨 문중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야 하겠는데 죽일 방도가 없으니 걱정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혈족을 죽이려는 비참한 심정과 죽여도 죽지 않는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눈치를 안 애기장군은 어머니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하였다.
“소자를 죽이는 방법이 단 한가지 있습니다. 성씨가 다른 세집의 지붕에서 삼대(森貸) 한 개씩을 뽑아 세 개를 한꺼번에 쥐고 소자의 겨드랑이 밑을 찌르면 바로 죽게 됩니다.”
하고 말하여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체념하고 어머니는 아픈 심정을 억누르고 사실을 문중에 말하였다. 문중 사람들의 마음인들 평안할 수 있었으랴! 피할 수 없는 일이라서 애기장군이 말하는 대로 성씨가 다른 세집의 삼대를 뽑아왔다.
하나로 묶어 애기장군 겨드랑이 밑을 찌르고 살펴보니 고기 비늘과 같은 비늘이 있었다. 이 비늘 사이를 삼대로 찌르니 애기장군은 간 곳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날에 죽이려고 애기장군을 던졌던 깊은 물 속에서 용마가 날아가 앉은 산을 비추노봉이라고 부른다.
이 소식을 들은 도선이라는 도사가 다시는 장군을 낳지 못하도록 비추노봉에 붓으로 점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을 파면 썩은 자갈이 나오며 그 후로는 힘센 장군감은 나오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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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주변의 문화재들
관광지명 : 벽송사 삼층 석탑
지정번호 : 보물 제474호
지정일자 : 68-12-19
위치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경내
규모 : 높이 350Cm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 이 석탑은 2중 기단위에 방형 3층의 탑신부를 갖춘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석탑이지만 건립연대가 벽송사 창건연대인 조선 중종 15년(1520)과 거의 같은 시기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지면에는 넓게 지복석(地覆石)을 깔고 그 중앙에 높은 지대석을 얹은 위에 중석을 두었는데 중석에는 아래에 1단의 얕은 턱을 마련하였으며, 각 면마다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하나가 있다. 갑석은 폭이 좁아 중석의 하단 턱과 같은 폭이며 경사진 윗면에는 네 모서리에 우주형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각 면이 한 돌인데 우주가 있으며 탱주로 양분되어 있다. 갑석은 1매의 넓은 판석인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경사진 윗면은 사우(四隅)에서 반전을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단일석인데 옥신에 우주가 얕게 조각되었으며, 옥개석은 전각(轉角)의 반전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받침수는 단층과 2층은 4단이나 3층은 3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覆鉢)이 남아있다. 이 탑은 건립 위치가 법당 앞이 아닌 절 뒤편이라는 점도 특이하며 신라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조선시대 석탑으로 드문 예이다.
관광지명 : 벽송당 지엄 영정
지정번호 : 도유형문화재 제 316호
지정일자 : 1997-01-30
위치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 내
규모 :
시대 :
상세설명 : 지엄(智儼)은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호는 야로(野老)이며 당호는 벽송(碧松)이고 세속의 성은 송(宋)씨이며 본관은 부안이다.
세조10년(146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는데 28세때 도원수 허종(許宗)의 군에 들어가 여진족과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와 세상을 탄식하고 계룡산 와초암으로 출가하여 연희(衍熙)에게 불경을 공부하고 벽계 정심 선사로부터 법계를 받고 1520년 지리산으로 들어와 벽송사를 중창하였으며 조선불교의 태고종 5대 정통이 되었다.
휴정 서산대사와 부용 영관대사등 제자들을 가르쳤고 중종29년(1534년)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벽송집과 가송잡서가 있고 통도사에 벽송당 노행록이 있다.
광해군(1617년)때 왕명으로 청매 인오(印悟)스님이 초상을 그려서 조사당에 모시고 제문을 지어 올렸다.
사진은 법화경을 강설한 고승 지엄(智儼)의 진영으로 서산 휴정대사의 사언절구가 기록되어져 있으며 예리하고 인자한 눈매가 특징이다.
관광지명 : 묘법연화경 책판
지정번호 : 도유형문화재 제 315호
지정일자 : 1997-01-30
위치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 내
규모 : 목판 241판
시대 :
상세설명 :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 경전인 묘법연화경은 불경의 하나로 법화경이라고도 한다.
이 묘법연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력을 미쳤고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되고 전승된 것은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으로 이는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상이다.
본 책판은 '강희이십사년 을축 중하일 경상도 함양군 지리산 안왕사 신간유진'이라는 간기로 미루어 볼 때 숙종 11년(1685년)에 만들어졌으며 총 7권 28품으로 되어있고 팩판의 수량은 237판이 보존 관리되고 있으며 예제편람 1판과 규장전운 2판, 다라니경 1판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형식은 사주단변으로 반곽은 23.2 × 17cm 이고, 10행 18자로 근본 경전은 7권 28품 221매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리산 안왕사의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벽송사로 옮겨온 기록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주차장에 있는 야영장에 돌탑이....
왜 우측 길을 버리고 용소계곡으로 들어 갔을까...나중에 다시 돌아왔지만 이 계곡은 결국 다시 만난다
선녀탕, 옥녀탕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비선담은 다리 위에서 한 컷...
비선담의 400m 위쪽에 통제선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비선담 위의 다리에서...
종일 흐리고 비까지 보슬보슬뿌리더니 하산하고나서야 맑은 하늘을 보여주니 이거 무슨 시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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