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적상산에서 史庫 등을 보았다.

benel_jt 2010. 7. 18. 08:52

2010.7.15 목 아침에 서울로 올라갈 때는 낮 동안에 처리할 일이 있어 바로 달려 갔지만 이틀 밤을 좁은 방에서 자고는 바삐 움직이다가 17일은 아침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내려오는데 8시까지는 집에 가야한다는 재촉에 쫒겨 적상산사고 한 군데만 목적지로 정했다. 백호공의 시를 생각하며 임실을 들려볼까 했는데 그건 다음으로 미루었다.

영월을 처음에 생각했지만 소백산 이북은 비가 있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남쪽으로 잡은 것이다. 10:30에 출발하여 13:30이면 충분히 도착하리라 생각했는데 고속도로에서 폭우를 만나 시속 100km 도로가 60km 이하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북쪽을 들어서니 비는 없고 먼 산의 경치가 보일 정도였다.

무주 부근을 여러 차례 지나쳤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만든 기회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안국사에 도착한 시간은 15:27이다.

현재 안국사는 옛 호국사의 자리라고 사고에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권중헌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던가. 지도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늦어 내려오면서 차례로 적상산성터의 일부분..안국사 일주문의 옆에 난 성돌과 설명을 보고는 아래로 내려가다가 적상산사고를 돌아보있다.
선원각과 실록각을 차례로 다락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돌아보았다.
내려와서 주변을 보니 양수발전소의 상부댐인 적상호가 내려다 보인다.
권중헌선생이 갓을 쓰고 차림을 갖추어 나와 여러 가지 설명을 해 주셨다. 안내도에서 안국사의 옛 위치가 이 부근으로 나왔는데 왼쪽 뒤에 있는가 했더니 저 아래 저수지 자리가 안국사터라고 한다. 사고보다 위쪽에 있을 수 없다는 얘기도 곁들인다. 스스로 터득했다는 대금을 연주하여 주기에 사진 한 장 찍고 연주하는 모습과 소리를 동영상으로 저장했다. 전망대가 옛 동문터라기에 차로 이동하여 갔었다. 지도에서 검색하여 보았을 때 유료주차장으로 보았는데 주차비를 어느 곳에서도 받지 않는 착한 관광지였다. 주차한 곳은 안국사와 전망대, 사고 옆에는 마땅히 댈 만한 곳을 찾지 못해 아들이 운전하여 잠시 갓길에 세웠다.
권선생의 명함을 하나 받았기에 사진은 메일로 보내기로 했다.
전망대까지는 500m. 전망대는 무슨 큰 굴뚝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중앙에 있는 시설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한데....
전망대에서 보니 상부댐이 보이고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하부댐도 보인다. 삼랑진 양수발전소에 있는 천태호와 안태호와 비슷하다.
전망대의 안내판에 덕유산, 남덕유산 등의 조망도가 보인다. 덕유산 정상만 구름이 약간 덮혔을 뿐 대체로 양호한 시야여서 고속도로의 폭우와 비교되는 날씨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말 벼르고 벼른 적상산이었는데....대형버스로는 여기까지 오를 수 없을 것이다. 봉고는 가능할텐데... 산행을 하면서 성터와 조망을 더 할 수 있을 걸..주변의 지명들도 그냥 붙여진 것 같지 않았다.
상사내, 내사내, 외사내, 마산, 말묘, 내창, 외북창, 서창...
내려오는 길에 해발 500m 정도에 있는 머루와인동굴을 잠시 보고 왔다. 동굴내는 완벽한 냉장고였다.
고속도로를 타고 도착한 시간은 8시 15분. 예상보다 도로가 막히지 않았기에 이만한 시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 달려 그냥 집으로 온다면 더 빠를 수 있었지만 나로서는 더 유익한 길을 택한 것이다.

 

 약 20km, 45분 걸리는 거리이다. 구불거리는 길은 시속 20km 제한 속도

 

 

 

 안국사에서 주차하니 앞에 지도가 있다. 성터와 주변 지명이 인상깊다.

 적상산에서 향로봉까지의 산행개념도가...

 청하루...맑은 안개..욕심을 버리라는 뜻일까...

 

 

 

 

 

 적상산 성벽

 

 

 적상산사고의 안내판..그런데 이건 좀 정리가 되어야겠다.

 선원각...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다락계단으로 올라가야한다.

 

 

 사각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게 실록각이다.

 실록각을 배경으로 서서 대금을 연주하는 권중헌 선생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이 사고의 자료를 지키기 위해 애쓴 이야기가 있다. 정치판의 싸움이 나라를 이꼴로 만들었는데 어느 시대고 권력때문에 일어나는 암투가 있었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해서야 되겠나. 언제쯤이면 제대로 국민이 살맛나게 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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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1대 태조로부터 25대철종에이르는 472년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 기록이다. 또한 실록은 1973년 12월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에서 담당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1부씩 보관했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의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추,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실록을 보관했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재기 되었다. 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제외한 모든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로인해 광해군때 이후로는 서울의춘추관사고,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소고의 5사고체제로 운영되었다. 또 구후 묘향산사고는 후금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산산성이라는 전라도 부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크게 파손되고 효종때 화재가 일어나면서 현종때에 인근의 종족산사고로 이전했다.일제 점령기때 4대사고의 실록들이 모두 조선 총독부에 접수되었다가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실록은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정상산사고본은 창경궁 장서각에,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 이후 정족산에 보관된 실록은 서을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보관

되었고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되었다. 정상산본은 6.25전쟁 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후에 북한에서 이책의 번역본이나오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가져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는 평양에보관되고있다. 오대산본기록은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하여 동경제대에 반출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지진의 여파로 788책은 소실되었고 74책만 남아있다. 이후 27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있고 47책은 일본 동경대 도서관에 보관중이었다. 그러다가 2006년 시민운동으로 마침내 47책이 한국으로반환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있다. 4대사고의 실록 중에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의 원본 실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크다.

↑위글은 건국대학교 신병주교수의 (조선왕조실록)의편찬과 보관

 오르내리는 계단이 가파르다. 사용을 통제해 둔 것이 보인다.

 적상산전망대 안내석, 동문터라고 한다.

 전망대가 수로에 연결되어 있다..이게 조압수조(調壓水燥)인데 발전기 급정지시 水路內의 압력이 급상승하는 것을 완화시켜주는 안전장치로 상부저수지(적상호)와 하부저수지(무주호)의 지하발전소를 연결하는 수로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 향적봉이 남쪽으로 보인다.

 

 

 

 

 

 

 굴뜩 같이 생긴 전망대, 전망대라는 이름은 붙였지만...차라리 동문을 복원하는 게 어땠을까.

 상부댐 적상호의 표지석

 머루와인동굴 입구

 

 

 시음하느라 줄을 서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