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영암 월출산 2010.4.29 목

benel_jt 2010. 4. 25. 19:23

그 유명세를 타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영암 월출산

 

산행 일시 : 2010.4.29 목 

산행 코스 : 도갑사-미왕재-바람재-천왕봉-구름다리-천왕주차장 약9.3km

산행 시간 : 12:00-17:15 (중식, 휴식, 촬영 시간 포함)

 



 

월출산 [月出山]  808.7m
위 치 :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서면, 강진군 성전면
전라남도의 남단이며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는 것 처럼 우뚝선 산 월출산은 서해에 인접해 있고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고 하여 월출산이라 한다.
정상인 천황봉을 비롯,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시루봉, 주지봉, 죽순봉 등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거대한 수석 전시장 같다. 정상에 오르면 동시에 3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지리산, 무등산, 조계산 등 남도의 산들이 대부분 완만한 흙산인데 비해 월출산은 숲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바위산에다 깎아지른 산세가 차라리 설악산과 비슷하다.뾰족뾰족 성곽모양 바위능선, 원추형 또는 돔형으로 된 갖가지 바위나 바위표면이 둥그렇게 팬 나마 등은 설악산보다도 더 기이해 호남의 소금강이라 한다.
바람폭포 옆의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는 지상 120 미터 높이에 건설된 길이 52m, 폭 0.6m의 한국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로 월출산의 명물이다. 사자봉 왼쪽 산 중턱 계곡에서는 폭포수가 무려 일곱차례나 연거푸 떨어지는 칠치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월출산은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풍경이 장관이고,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있는 운해,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월출산은 동백꽃과 기암괴석이 한창 절묘하게 어우러져 해빙기의 등산로로도 압권이다. 천황사에서 계곡에 이르는 1㎞ 남짓한 초입부부터 동백꽃으로 곱게 단장하고 있다. 하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도갑사 부근에는 3월 중순 경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꽃이 3월말이나 4월초까지 절정을 이룬다.
월출산의 운해는 평야의 들바람과 영산강 강바람이 맞부딪쳐 천황봉 정상에서 만들어내는 구름바다가 볼 만하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영암아리랑 노랫말이 말해주듯 월출산은 산 봉우리와 달 뜨는 광경의 어울림이 빼어난 산이다. 구름을 걸친 채 갑자기 우뚝 솟아 눈앞에 다가서는 천황봉의 신령스러운  모습, 그 위로 떠오른 보름달의 자태는 달맞이 산행의 명산이기도하다. 월출산 일대인 영암, 강진, 해남은 "남도 문화유산답사의 1번지"로 꼽을 만큼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단아한 모습의 무위사, 서쪽에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도갑사가, 구정봉 아래 암벽에 조각한 높이 8.5m의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13호, 도갑사 해탈문은 국보 50호다. 또한 도갑사 서쪽 성기동에는 백제의 학자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아스카문화의 원조가 된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돼 있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가 있음. 구정봉 밑 용암사터 근처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보 제144호인 마애여래좌상이 유명

 

대웅보전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 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석탑(보물 제1433호),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 5층석으로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

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원중창은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억불숭유'의 열악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653년(효종4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도 사원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대형석조
더구나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2005년 주지로 부임한 月佑화상에 의해 "대웅보전"이중창되어 2009년 4월11일낙성식을 갖는 등 유관기관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복원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대가람에 걸맞게 눈푸른 납자을 양성하기 한 수행환경을 위해 選佛場(선불장)개창하려고 한다.

원컨데 상량을 한 후에는 선지식이 배출되고,온국민이 편안하고 모든백성들이 화복하며 풍족하고 국가는 태평성세 하고 남북이 통일되어 영원히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기를 기원한다.

도갑사는 이제 서서히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앞으로 도선국사의 재 조명에 힘입어 새로운 불교문화의 성지로 자리 매김 할 것이다.


 

ㅁ도선국사의 성지 영암

지금까지 도선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논문들이 있었으나 도선국사의 업적은 여전히 암흑 속에 가려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 다랠 길이 없다. 이제까지의 수많은 전적들은 지극히 도선국사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며, 일부는 와전된 채 왕인박사의 업적에 부풀려져 예우를 받고 있는 현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월출산을 끼고 있는 영암 땅은 그 신령스러움과 기개(氣槪)로 따져볼 때 승지(勝地)들이 지닌 지세적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인물이 끊이지 않는다는 양택(陽宅)의 입지라는 구전과 함께 역사적으로 길이 추앙받는 왕인과 도선국사와 같은 출중한 인물을 태어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왕인박사는 그에 관한 이렇다할 기록이나 저술,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를 기리는 각종 복원사업 및 기념행사가 붐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면에는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과 사기들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도선국사 또한 저서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의 사료나 사가들은 그를 높이 추앙하고 받들어 칭송해왔다. 그 점은 도선국사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인물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끼친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전국에 걸쳐 건립한 사원과 사탑이 3800여기에 달한다는 점 하나로 기껏 '풍수쟁이' 시조쯤으로 폄하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도선국사가 '도참인'이 아닌 선승(禪僧)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도 우리 나라 학자가 아닌 일본인 금서룡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국사께서 탄생하신지 천년이 넘었다. 우리는 그 천년 동안 무엇을 했던가. 영암에 있는 구림리 성기동은 왕인의 탄생지로 지정되었고, 문산재 위에 위치한 석상은 '왕인상'으로 명명된 사실을 보면 역사의 아리러니를 실감케 한다.

문산재 위의 석불은 미륵불, 또는 문수보살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 이유로 천불천탑이 있는 화순 운주사의 석불과 고창 청량산 문주사에 있는 문수보살상과 그리고 삼각산 도선사 석불과 똑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 세 곳의 석불이 도선국사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6년 문수보살상은 왕인상으로 탈바꿈되었다.

도선국사는 왕인보다도 더 많은 증거자료와 유적지와 업적 등을 남기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며 모든 민중이 대 스승으로 받들고 있는 현실인데도 이를 관과해 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글에서 왕인을 부인하려는 하는 것은 아니다. 똑 같이 영암, 그것도 같은 구림리에서 태어난 이 두 인물은 사료에 의한 명백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지에서 거론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를 존중하는 선진국가는 역사적 왜곡이 있을 수 없다. 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 문수암인가 문산재인가"

대부분 연세가 많은 영암지역 주민들은 현재의 문산재는 과거 문수암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옛부터 불가(佛家)에서는 문수보살이 머물고 계신 곳을 문산(文山)이라고 일컬어왔다.

특히 구림 주변에 살고 있는, 50대 이상의 주민들은 문산재를 문수암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문수암이 문산재가 된 것은 1986년 왕인유적지로 '문산재'와 '양사재'가 재 건립되면서였다. 역사적 검증이 확인되지 않은채 문수암이 문산재로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오류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결국 이 오류는 오랜 세월 면면이 이어왔던 문수암의 역사를 사라지게 했고, 어이없게도 문수암이 왕인이 공부했다는 서당터로 창작되어 왕인박사 유적지 가운데 관광의 한 코스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수암 위쪽 바위 사이에 위치한 미륵입상(문수보살상)도 똑같은 수모를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문수보살 입상'이 졸지에 '왕인석상'으로 이름이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코스에는 없었지만 다음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은 곳이 이웃에 있었다.

 왕인박사유적지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인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과 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聖泉)이 있으며, 탄생지 옆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또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冊堀)과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가 있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박사께서 공부하면서 고향 인재를 길러 낸 곳으로 매년 3월 3일에는 왕인박사의 추모제(追慕祭)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책굴앞의 왕인박사 석인상(石人像))은 박사의 후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것이라 한다. 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 보았다하여 돌정고개가 되었다 한다. 상대포(上臺浦)는 박사가 일본을 떠날 때 배를 탔던 곳으로 당시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왕인박사는 백제인으로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는 화이길사(和邇吉師), 일본서기에는 왕인이라고 그의 이름이 나타나있다.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은 물론 기술공예의 전수, 일본가요의 창시 등에 공헌함으로써 일본 황실의 스승이며 정치고문이 되어 백제문화의 전수를 통하여 일본 사람들을 계몽한 일본문화사상(日本文化史上)의 성인(聖人)으로 일본 비조문화(飛鳥文化)의 원조가 되었다. 이 유적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사당을 비롯한 유적지정화사업을 시작으로 왕인공원 등 성기동 문화관광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위 치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산18번지
사 적 :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20호
관리청 : 영암군 왕인박사유적지관리사무소(061-470-2559)
지방기념물 : 왕인묘, 학이문, 백제문, 전시관, 유허비, 聖泉, 聖川, 탄생지, 문산재, 양사재, 석인상, 책굴, 홍살문, 돌정고개, 상대포
시설물 : 영월관, 왕인박사상, ,부조, 봉선대, 신선태극정원, 월악루, 수석전시광, 망우정,제명당, 수신정, 야외무대, 요산정, 놀이터, 천자문계단, 노래비, 돌탑, 왕인학당, 월록정

 

어제만해도 날씨가 매우 변덕스러웠는데 오늘의 기상은 산행하기에 최상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겨울 복장을 입은 경우엔 매우 더웠을 것이다.

도갑사 입구엔 좌우에 노란 유채꽃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1진을 선택하여 도갑사에서 오르기 시작하여 억새밭까지는 평이한 계곡길이었다. 2진보다 잘 선택한 것이라 생각했다. 오르면서 적당한 워밍업, 그 후로는 능선따라가는 길, 구정봉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성벽따라 가는 듯한 느낌, 때때로 바위를 타고 철다리와 철구조물들이 있는 코스도 있었지만 천황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2진의 오르는 길이었으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급경사와 계단, 사다리의 연속이었으니....

 

 

 

 

 

 

 

 

 

 

 

 

 

 

 

 

기왕에 구정봉에 왔으니 백호 임제의 월출산 노래를 읊어본다.


월출산 노래

서호 달밤에 학과 노닐고
구정봉 구름 위에서 용을 탔네
밤이 깊자 쇠피리를 불고
이른 아침 옥황님께 조회를 마치네

月出山詞

玩鶴西湖月
騎龍九井雲
夜深橫鐵笛
朝罷玉宸君

월출산사

완학서호월
기룡구정운
야심횡철적
조파옥신군
==

*구정봉은 월출산에서 이름 높은 봉우리이다.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았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구멍 하나가 있는데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만 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 쯤 앉을만한 자리가 있다. 그 평평한 동이처럼 움푹 파여 물이 담겨진 곳이 9군데나 있으므로 구정봉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이 마르지 아니하는데 아홉 용이 그 곳에 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영암군 산천조>
*3행:武夷山 은자 劉兼道가 쇠피리를 잘 불어 구름을 뚫고 바윗돌을 쪼개는 듯하다. <주자, 鐵笛亭詩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