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도

임실 지사면 경계 산길

benel_jt 2019. 12. 10. 00:20

임실군 지사면 경계 산길, 영대오봉칠봉에 이어


[임실 덕재산 산행] (2019.12.18 수)

A) 갈 때
구포역) 0838-1054 구포-순천 / 12100/17300/
부산역) 0825-//13200/18900

순천역) 1108-1151 순천-오수  / 3700/5300
오수역) 차량 이동

B) 올 때
날머리에서 차량 이동 후
오수역) 오수-순천 1657-1748
순천역) 순천-부산 1802-2050 13200/18900/
/-2036 구포, 12100/1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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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역-의견공원-관곡서원-아침재로 차량 이동>

(산행은 역순으로)매골입구←쉰다랭이골←223m←중대골←수로고개골←223m←288m←방구고개←409m←466m←487m덕재산←473m옥녀봉←369m←한치재←414m←삼거리←매봉431m←다시 삼거리←아침재(출발)


관곡서원[館谷書院]
건립시기·연도 : 1820년(순조 20)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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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1-935 화명-순천/8000/11400
1103-1151 순천-오수 / 3700/5300

1200 오수역-의견공원-매골입구 들머리 2.6km

아침재-오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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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8-1054 구포-순천 / 12100/17300//부산역0825-//13200/18900

1108-1151 순천-오수  / 3700/5300


오수-순천 1657-1748

순천-부산 1802-2050 13200/18900//-2036 구포, 12100/1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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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의견공원-//-매골입구-쉰다랭이골-223m-중대골-수로고개골-223m-288m-방구고개-409m-466m-487m덕재산-473m옥녀봉-369m-한치재-414m-삼거리-매봉431m-다시 삼거리-아침재-


관곡서원[館谷書院]
건립시기·연도 : 1820년(순조 20)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에 있는 조선후기 최윤덕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820년(순조 20)에 지방유림들이 최윤덕(崔潤德)·이형남(李亨南)·이적(李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8년 후손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가 있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 (豆)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곡서원 [館谷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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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崔潤德]
조선 전기의 무신. 대마도 정벌과 4군 설치, 읍성 축조 등 조선 전기 국방 체계의 강화에 큰 공을 세웠다.
출생-사망 : 1376 ~ 1445
본관 : 통천(通川)
자 : 백수(伯修) ·여화(汝和)
호 : 임곡(霖谷)
시호 : 정렬(貞烈)

1376년(고려 우왕 2년) 경남 창원에서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를 지낸 최운해(崔雲海)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최운해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던 인물이다.

최윤덕은 1394년(태조 3) 무과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를 따라 서북면 수비에 나서는 바람에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못했다. 1396년(태조 5)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그때의 공으로 1400년 태종(太宗)이 그를 직접 불러 훈련관 부사직으로 삼았다. 1402년 최윤덕은 호군(護軍)으로 승진했다. 또한 회시에 합격하고도 전시에 응시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여 왕의 명령으로 특별히 무과 복시(覆試) 급제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1403년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다. 1404년 부친의 사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상중에도 관직을 수행하게 하는 기복(起復) 명령을 받아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임명되었다.

1410년(태종 10)에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하자 조전 지병마사(助戰知兵馬使)로 파견되었으며, 이듬해까지 경성 병마사(鏡城兵馬使)·경성 절제사(鏡城節制使) 등을 역임하며 동북면 방어에 큰 공을 세웠다. 1411년에는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1412년에는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 1415년에는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임명되었다.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한 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었고, 이듬해인 1419년에는 의정부 참찬(參贊)이 되었다. 왜구의 약탈이 기승을 부리자 곧바로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태종으로부터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임명되어 이종무(李從茂) 등과 함께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공조판서로 임명되었고,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1423년에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어 2년 동안 서북면으로 파견되었다가 1425년에 다시 의정부 참찬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를 거쳐 1428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도순무사(都巡撫使)로서 충청·전라·경상도 지역을 순시하며 왜구 방어를 위한 읍성 축조 계획을 세워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1430년에는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임명된 뒤 도순문사로 다시 파견되어 경상도의 연일(延日)·곤남(昆南)·합포(蛤浦), 전라도의 임피(臨陂)·무안(務安)·순천(順天), 충청도의 비인(庇仁)·보령(保寧) 등에 읍성(邑城)을 쌓았다.

1432년 겨울에 파저강(婆猪江) 유역에 살던 이만주(李滿住, 1407∼1467) 휘하의 건주여진이 국경을 넘어 침략해오자 평안도 절제사로 파견되어 이를 토벌하였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433년(세종 15)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여진족이 다시 침략해오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가 되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때 정승의 지위를 지닌 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 맞지 않다며 우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길 원했으나 이는 수용되지 않았다. 1435년(세종 17) 최윤덕은 계속해서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파견되어 있으면서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때에도 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였으나 이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삼군도총제부를 대신해서 설치된 중추원의 최고직위인 정일품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국방 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곳곳에 읍성을 축조하고 각 도의 병기 체계를 정비하는 등 왜구의 침략에 꾸준히 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에 대해서도 여연(閭延)·자성(慈城) 등에 보와 성곽을 축조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에 토관제도(土官制度) 실시를 건의하는 등 국방 체계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건의로 4군과 6진이 설치되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정되었다.

최윤덕은 1444년(세종 26)에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영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세종은 1445년(세종 27) 음력 11월에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안석(案席,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사용하는 방석)과 지팡이를 그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최윤덕은 병이 깊어져 그해 음력 12월 5일에 사망했다. 세종은 최윤덕이 죽은 후 ‘정렬(貞烈)’의 시호를 주었으며,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1451년 세종이 죽은 뒤에 최윤덕은 허조(許稠), 신개(申槩), 이수(李隨)와 함께 세종의 묘정(廟庭)에 함께 배향되었다.

최윤덕은 무신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올라 ‘장상(將相)’으로 불리며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래서 1707년(숙종 33)에 숙종은 평안도 안주(安州)에 최윤덕과 을지문덕 등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짓고 ‘청천사(淸川祠)’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다. 최윤덕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에 있으며,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에 위치한 최윤덕의 생가 터는 1995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윤덕 [崔潤德]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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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許稠]
자 중통(仲通), 호 경암(敬菴), 시호 문경(文敬)
출생 - 사망 : 1369년(공민왕 18) ~ 1439년(세종 21)
본관 : 하양(河陽)
대표관직(경력) : 예조판서,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

1369(공민왕 18)∼1439(세종 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허수(許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허윤창(許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허귀룡(許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左補闕)·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續六典)』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1426년 참찬·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죽었다.

『소학』·『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조 [許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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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개[申槩]
조선 전기 문신. 공조참판으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집현전 제학이 되었다. 세종 때 전라 · 황해 · 경상 ·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후, 형조참판 · 예문관대제학 · 대사헌 · 도총제 등을 거쳐 이조판서로서 북변에 침입이 잦은 야인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출생-사망 : 1374 ~ 1446
본관 : 평산(平山)
자 : 자격(子格), 호 : 인재(寅齋), 시호 : 문희(文僖)

본관 평산(平山). 자 자격(子格). 호 인재(寅齋). 시호 문희(文僖). 1390년(공양왕 2) 사마시를 거쳐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고, 태종 때 이조정랑을 거쳐 예조 ·병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공조참판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다. 세종 때 전라 ·황해 ·경상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후, 형조참판 ·예문관대제학 ·대사헌 ·도총제(都摠制) 등을 거쳐 1433년(세종 15) 이조판서로서 북변에 침입이 잦은 야인(野人)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434년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판서를 거쳐 1436년 우참찬(右參贊)에 승진,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했으며 좌찬성을 지낸 후 1439년 우의정이 되었다. 1444년 궤장(几  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으며 1447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인재문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개 [申槩]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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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李隨]

자 : 택지(擇之), 호 : 심은(深隱), 관곡(寬谷), 시호 : 문정(文靖)
출생 - 사망 : 1374년(공민왕 23) ~ 1430년(세종 12)
본관 : 봉산(鳳山)
대표관직(경력) : 공조정랑, 예조정랑, 예문관제학

1374(공민왕 23)∼1430(세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봉산(鳳山). 봉산이씨의 시조. 자는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 또는 관곡(寬谷).

1396년(태조 5) 생원시에 제1위로 합격하였으며, 1410년(태종 10) 왕이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사람을 구할 때,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의 천거로 뽑혔으나 사퇴하였다.

이듬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소명(召命)을 전하자 상경하여 여러 왕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1412년 종묘서주부(宗廟署主簿)를 지내고, 1414년 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취사(取士)할 때, 제4위로 급제, 전사주부(典祀主簿)·공조정랑·예조정랑을 역임하고, 1417년 전사소윤(典祀少尹)을 지냈다.

이듬해세종이 즉위하자 사재감정(司宰監正)·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1422년(세종 4)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고부부사(告訃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3년 예문관제학·이조참판,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참찬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27년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고, 1429년 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재등용되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수 [李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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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서원[寧川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전북문화재자료 제20호 / 1984년 04월 01일 지정

1619년(광해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희생된 4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1686년(숙종 12)에 임금이 친필로 ‘영천(寧川)’이라는 현판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 및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당시 남원부 48방 중의 지사방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서원은 48방 내의 30여 서원 중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권위가 높아 우수한 학자들이 멀리에서 몰려왔다고 한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이다.

서원 안에는 안처순(安處順)을 주벽으로 하여 정환(丁煥), 정황, 이대유 등이 배향되어 있다. 훼철되기 전에는 사우(祠宇) 3칸, 신문 1칸, 동서협문 각 1칸, 전사고 1칸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우와 강당 및 3문만이 남아 있다. 4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는 맞배지붕에 겹처마 건물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중앙에는 상부가 교창(交窓) 형식으로 된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좌우측에는 같은 형식의 2짝 10개의 분합문이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되었으며,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화반 1개씩을 놓았다.

원내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맞배지붕, 홑처마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가구(架構) 형식은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놓고, 종보를 올린 다음 종마루를 받치는 사다리꼴의 대공을 얹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서원 [寧川書院]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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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


신진 사림의 등장과 시대적 배경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伸寃)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보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별시로 치러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어 정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신진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였고, 특히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갈등이 일어났고 당면 정치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특히 발단이 된 사건은 중종반정으로 공신 117명이 선정된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도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신진세력들은 조광조의 이러한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훈구파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특히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기묘사화의 전개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한달만에 사사되고, 김정(金淨)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었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은 파직되었다. 사림파의 몰락으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겼던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묘사화 [己卯士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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