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운주산 산행
20181227 목 한마음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겨울복장 채비를 갖추고, 핫팩도 하나 준비하고 머리에는 얼굴을 감싸는 모자를 덮었다.
영천은 종일 영하의 기온으로 예보되어 있다.
운주산은 낙동정맥이 지나는 길을 따라 걷다가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 잡는다.
雲住山, 雲柱山 두 가지 표기가 있다.
구름이 살든, 구름기둥이든..
구름과 관련된 산이름을 가졌다.
잡목이 덮힌 산을 올랐는데 정상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멋진 풍광을 만들어 준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까지 만들어 두었는데 향로도 만들어져 있다.
등로를 포크레인으로 밀어서 만든 듯 한데....
아마도 두릅나무 농사를 위한 배려인가, 아니면 ...
올라가는 길이 급경사이기는 하지만 계곡이 패여 새로운 물길이 생겨버렸다.
봄철에 조금 녹는다면 길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안전을 위협할 것 같은 상황이다.
그 사이에 어떻게 조치를 할 것인지 염려스럽다.
오늘 언 땅을 밟고 지나가는데도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작업을 한 후에 현장확인은 한 것일까.
분명히 상당한 예산을 사용했을 텐데...
바람이 세어 영하의 날씨에 손이 시릴 정도였지만 보온 조치의 효과를 본 셈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360도 거의 좋은 편이다.
지난 해엔가 다녀온 자옥산, 도덕산, 봉좌산, 어래산의 흔적을 살짝 볼 수 있고 천장산은 미답이지만 이 부근에서 갈 수 있는 위치다.
비학산도 멀지 않아 보인다.
동해바다와 포항시가지가 조망되는 위치다.
동대구로 가서 영천으로 가는 기차와 영천터미널로 가는 버스 등을 계산해보니 부지런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휴식을 포함해서 3시간40분 정도 걸렸다.
4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 코스다.
북서쪽 방향으로 보현산천문대가 보이며, 비슷한 위치에 면봉산이 있는데 아마도 그 산에는 강우레이더 기지가 있는 것 같다.
면봉산을 언제 한 번 길 수 있으려나...
남쪽방향으로 아득하게 가지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의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남서쪽으로는 팔공산의 능선이 보인다.
봉우리찾는 앱을 사용해 보았는데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야생화 찾는 앱도 그렇더니....조심해서 사용해야겠다.
하산 시간이 14:00도 되지 않았다.
후미를 조금 기다려 마무리하고는 임고서원으로 갔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이다.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증언하는 듯하다.
경북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너편의 부래산에 있던 것을 임고서원을 이거하면서 옮겨 심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보고 왔기에 다음 기회에 재탐방할 계획을 세워보아야겠다.
포은집에 전하는 단심가를 옮겨본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녕유개리야여)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歟 : 어조사 여>
영천 운주산 GPS 트랙 첨부 : 영천운주산20181227.gpx
정상 오르기 전에 무덤, 절충장군.낙동정맥갈림길의 돌탑봉으로 바로 가면 이 무덤을 거치지 않는다... 정상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정상표지, 좌측옆에는 천제단이 있다.
운주산의 정상은 4위의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도로옆의 백연암이정표,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귀로에 들린 임고서원의 조옹대, 포은이 낚시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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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2012년 정보>
부산 금정구 노포동 동부시외버스터미널(1688-9969)에서 경북 영천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하루 9차례(07:40 08:30 10:45 13:20 13:50 15:00 15:50 17:00 18:00, 요금 6천800원, 1시간10분 소요) 운행된다.
영천터미널(1666-0016)에서 산행 들머리인 임고면 수성2리로 가기 위해서는 영천교통(054-333-3552) 좌석버스(08:40 12:05 13:30 15:00 18:00 20:00, 요금 1천200원, 40분 소요)를 타고 마을 앞에서 내리면 된다.
산행을 마친 후 수성에서 영천으로 가는 좌석버스는 하루 6차례(07:20 09:30 13:00 14:30 16:05 18:50) 운행한다. 영천터미널에 가면 부산행 시외버스(9:00 10:40 11:10 13:00 15:00 15:35 16:10 16:40 18:20 19:50)가 있다.
부산에서 영천까지는 열차로 갈 수도 있다. 부전역(1588-7788)에서 영천역까지 무궁화호와 새마을호 열차가 하루 16차례 운행된다. 부산으로 돌아올 때 이용해도 좋다.
자가 승용차를 타고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다. 경주IC에서 내린 후 7번 국도를 타고 포항 방면으로 달리다 강동교차로에서 28번 국도로 갈아탄다. 영천 시내를 통과해서 68번 지방도를 타고 죽장·청송 방면으로 가다보면 수성리 표지판이 보인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는 '운암사'를 찍으면 된다.
음식점
사방 10리 안에서 음식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지다. 원점에서 포항시 북구 기계면 쪽으로 지방도를 타고 20분가량 달려야 겨우 식당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오리요리와 삼겹살, 매생이전골을 전문으로 하는 '푸른정식당'(010-3817-6948)이다. 전남 완도서 직접 가져온 매생이와 굴을 넣고 끓인 매생이 칼국수(5천 원)가 일품이다. 바다 내음이 물씬한 국물이 언 몸을 녹여준다. 허기가 많이 진다면 매생이 오리찜(3만 원)을 먹어도 된다.
박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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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 등의 사람들을 창솔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 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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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문화재
임고서원 (臨皐書院) 전적
지정별 : 보물 제1109호(1991.12.16)
시대 : 조선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들은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있다. 임고서원은 명종 8년(1553)에 창건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은 약 200여 책이 있는데,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다. 지정된 책을 보면,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논어언해", "심원록", "임고서원고왕록", "임고서원장학계안" 등의 책으로 모두가 임고서원에 관련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설명자료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대책문(對策問)
당시 빈번하게 국경을 넘어오던 홍건적(紅巾賊)에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한 포은 선생의 과거시험 답안
제김득배문(祭金得培文)
김득배를 장사지내며 지은 제문(祭文), 포은 선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김득배를 위해 문생(門生)의 예로써 장사지내며 그를 위한 제문을 남겼다.
오죄상소문(五罪上蔬文)
포은 선생이 오죄와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사람들의 사면, 복권을 위해 올린 상소문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포은 선생의 시를 엮은 책, 포은집은 1439년에 초간본이 간행되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포은집은 정사중간본으로서 1667년 영천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임지인 영천에서 목판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고 그 판목은 임고서원에 보관하였다.
선죽판(善竹板)
장충판 중의 하나. 장충판은 조선 성종(成宗)이 1486년에 포은 선생의 충과 효를 널리 장려하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손순효에게 명하여 내린 문서로 후에 여러 차례 보태어졌다. 총 18장의 장충판 중에 본 선죽판은 탄은(灘隱) 이정(李霆)이 그린 녹죽을 판각한 여덟번째 판이다.
임고서원고왕록(臨皐書院考往錄)
임고서원의 연혁과 당시의 원장 유사 등 서원과 관련된 중요 사실을 기록한 책
회찬송악악무목왕정충록(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송나라의 충신인 악비(岳飛)의 정충기사(精忠紀事)와 포전(褒典), 유사(遺事)등을 수록한 것으로 선조 18년(1585)에 국왕이 임고서원에 내린 선사본(宣賜本)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주돈이, 정호(程顥), 정이 등 송대(宋代)의 유학자 18인의 시문을 류별(類別)로 분류하여 편찬한 것으로 명종 8년(1553)에 국왕이 이황(李滉)에게 내린 선사본(宣賜本)을 본 서원에 기증
대우수전(大禹手篆)
조선 중기의 유학자 허목(許穆)이 중국에 있는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를 들여와 그 중 48자를 새긴 목판
정몽주 영정
지정별 : 보물 제1110호(1991.12.16)
시대 : 조선인조7년(1629)
1991년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인 1629년에 고려말의 문신, 학자인 정몽주를 그린 초상화로 비단에 채색되었고 영정의 사이즈는 98 cm x 98 cm이다. 좌안팔분면의 안모에 여말선초의 복제인 오사모와 청포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임고서원 (臨皐書院)
지정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1985.10.15)
시대 : 조선명종8년(1553)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조선 명종 8년(1553)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워져 1554년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 (1603)에 현 위치에 옮겨짓고, 이 때 임금으로부터 다시 임고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으며, 1차 성역화 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 황보인을 다시 모셨다.
임고서원 (臨皐書院)의 은행나무
지정별 :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 (1985.10.15)
시대 : 조선
이 나무는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에 이르는 나이가 약 500년의 은행나무로서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노거수이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약22m, 남북방향으로 약21m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 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며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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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의 활약
100척으로 500척의 왜구를 무찌른 진포대첩 鎭浦海戰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현 충청남도 서천군)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다. 원수 나세(羅世)를 필두로 심덕부(沈德符)와 최무선(崔茂宣)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왜군은 군선과 군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해상기지를 형성하여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고, 고려수군은 이 시기 이전에는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화포로 무장한 덕에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 화포공격을 가해 곧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다. 왜군은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지리산 일대에서 섬멸되었다.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화포를 정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으며,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고려가 해상방어를 적극화하는 새로운 변화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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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관음포대첩 觀音浦大捷
고려 말인 1383년(우왕 9) 5월 정지(鄭地)의 함대가 남해현(南海郡) 관음포 앞바다에 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남해대첩’이라고도 한다.
3년전인 1380년 진포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침입해 앞서 합포(현 마산)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받은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는 나주의 목포에서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航進)하였고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 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이었다. 이 싸움은 승리를 거둔 뒤에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관음포대첩은 왜구들이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세계 해전사에서 함포(艦砲)로 적을 물리침 전투라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화상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었으며, 관음포대첩으로 자신감을 가진고려군은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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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의 화포가 실린 기록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군(郡) ·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 땅에 쏟아진 쌀이 한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羅世) ·심덕부·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 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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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생가
포은 정몽주 생가는 영천시에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83번지 일대에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2015년 10월에 준공했다.
포은 정몽주 생가터 추정지에는 생가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이 드러나 있으며 인근에서 기와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여러 점 발견되었으며,
(재)계림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조사한 결과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것으로 각각 확인됐다.
또한,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22권 경상도 영천군조 인물편과 포은의 문집 「교서관본(校書館本)」과 서애 류성룡이 지은 「연보고이(年譜攷異)」에도 "지원3년 정축(1377년) 12월 무자일에 선생이 영천군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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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과학관
주소 : 경북 영천시 금호읍 창산길 100-29(원기리277)
TEL : 054-331-7096
FAX : 054-331-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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