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와 승자의 운명이 갈린 홍성 백월산
20181201 토 산하 (용봉 가는 시간에)
홍성 용봉산은 2회 다녀왔다.
2011.12.15 산수산악회와 처음.
2013.5.9 무척산악회와 둘째 번이다.
이번에는 용봉, 덕숭을 이어 타는데 2013년 코스와 같다.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부근의 산을 탐방하기로 했다.
원거리라 잘 갈 수 없는 곳이다.
봉수산과 임존성, 최익현 묘소를 아우르는 코스를 생각했으나, 차를 먼저 내려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함께 내려 백월산으로 가서 '홍가신청난비'와 그 주변을 볼 생각으로 백월산을 선택했다.
용봉초등학교에서 택시를 타고 갈까 했는데 우리 버스가 뒤로 돌지 않고 바로 가서 외나사거리를 거쳐 가는 게 거리와 시간이 단축된다고 바로 가기에 중계리의 삼거리에서 하차하여 홍천문화마을 앞을 지나 산혜암 입구에서 올라갔다.
문화마을은 보니 아마도 굿당이 있는 것 같았다.
산혜암은 하산길에 보기로 하고 먼저 '홍가신청난비'를 확인하고 그 곳에서 골을 따라 샘터가 잇는 길을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비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지금 홍천역이 만들어진 곳의 철길옆에 있던 것을 최근에 이설한 것이다.
홍천역은 천안아산역으로 가서 아산역에서 내려오면 된다.
서천 갈 때와 같은 경로이지만 시간은 더 절약되는 코스다.
다음 기회에 홍천을 심층탐구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능선에 오르니 바로 이정표가 있는데, 그 때 바로 앞의 임도에 승용차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거의 정상까지 차가 올라오는 것이다.
좌로 정상에 가려면 바로 앞에 커다란 바위가 진을 치고 있다.
그게 바로 '코끼리바위'로 불려지고 있다.
나는 이걸 보는 순간 최영장군이 칼로 친 말의 머리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앞쪽에서 보니 원숭이얼굴이다.
정상으로 가면서 되돌아보니 삽살개의 얼굴이다.
정상에는 아래에서 보았던 그 태양열집열판이 넓게 보이던 그 곳이다.
나지막한 오석으로 만든 정상석과 삼각점, 그리고 삼각점 설명판이 있는데 위치정보를 손상시켜두었다.
정상에서 남쪽방향 조금 내려서면 전망데크가 있고 그 부근에서 아마도 활공장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되돌아 내려오면서 동행한 두 분은 코끼리바위를 올랐지만 나는 진작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고, H님은 오르고, K님은 오르다가 포기했다.
정상부의 중간 정도에 네이버지도상에 일월산이라고 표기한 곳에 산당이 지어져 있는데 돌담으로 둘렸고 등산로는 그 곳을 거쳐 가게 된다.
당집 앞으로 전망데크가 있다.
그 편액에 '홍후만전묘(洪侯晩全廟)'라고 붙어 있는데 홍성군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홍가신(洪可臣)의 호가 만전당(晩全堂)이다.
그의 사당이라는 말이다.
문에 최신의 번호키가 달려 있어 잠긴 줄 알고 창으로 들여다 보다가 옆에 보니 약 8cm×22cm 정도의 코팅지에 세로로 'OPEN'이라고 적혀 있었다.
뒤집으면 'CLOSE' 일 것이다.
그래서 유리문을 옆으로 밀었더니 열린다.
나무를 깎아 만든 위패가 우측에 도열하고 좌측에는 목형의 크기가 조금씩 다른 5기, 우측으로는 약간 크게 만든 '白月山神之位'라는 산신의 위패가 지붕모양까지 얹어 만들어져 있고 그 우측으로는 약간 낮게 만든 홍가신, 박명현, 최호, 임득의, 신경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청난공신들의 위패인 것이다.
'홍주청난사중수비'가 있다.
비명의 좌우에 보니 작은 글씨가 있다.
만력46년 무오에 세웠고,(광해군11년, 1618년)
광서12년 병술 2월 15일에 중수,(1885?)
단기 4262년 기미 2월 6일에 중수,(1929)
서기 1974년 갑인3월 27일에 개축.
사당의 뒤에 바위가 있고, 바위 가운데 또 다른 비가 하나 있는데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다.
무슨 기원단인 듯하다.
조금 더 지나면 정자가 있고 정자 아래에 '백월산고천제단(白月山告天祭壇)'이 있다.
흔히 보던 철쭉제단의 모양이다.
정자 뒤로는 지도상의 '코뿔소바위'다.
일행 두 명은 모두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 옆에 좌측으로(홍성군청의 반대편)에 바위가 약간 떨어져 있는데 나는 보는 순간 '앙천바위'하고 했는데 얼굴을 45도 정도 들어 하는을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H는 그 밑에 악어가 있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악어 두 마리가 위로 올라오는 듯 하기도 하다.
하산길은 산혜암을 돌아보기로 했는데 부근에 옛 성터의 흔적을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아무런 안내도 없고 특이점도 볼 수 없었다.
길따라 편히 내려가다보니 청난비까지의 원점회귀가 되었다.
차라리 약간 올라가서 철탑 방향으로 하산하면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텐데..
택시를 불러 수덕사로 갈 생각을 하고 대충 계산하니 거의 만원 정도 수준이다.
하차했던 곳까지 이동하면서 돌아보아도 택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아침에 메모해 두었던 전화번호에 걸어도 응답이 없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손을 들어 세웠더니 수덕사로 가는 여승 혼자 앞에 타고 가는 차로 뒤에 탈 것을 허략했다.
마침 방향도 같아 다행이었다.
결국 6km 정도는 걸어 백월산 산행을 마치고 수덕사로 이동하였다.
매표소를 거쳐 대웅전의 단청이 거의 지워진 옛모습을 보고 올라가면서 중간 중간 작은 암자들의 위치가 수려한 곳임을 보면서 갔지만 모두 수행도량으로 출입 금지였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산행팀은 거의 내려 오고 맨 후미팀을 그곳에서 만났다.
덕숭산에서 한 바퀴 둘러 보니 가야산 방향이 멀지 않고 건너편의 용봉산도 바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로 약간 돌면 우리가 다녀온 백월산도 조금 떨어져 볼 수 있다.
하산길에 '수덕여관'을 보니 이응로의 흔적이다.
그럴 줄 알았다면 이응로기념관을 가는 길에 보고 올 걸 그랬나 싶다.
다음에 기차를 타고 이 지역을 탐방한다면 여유가 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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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洪可臣]
만전집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홍가신의 문집. 6권 3책. 1666년(현종 7) 현손 유경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자 흥도(興道), 호 만전당(晩全堂), 간옹(艮翁), 시호 문장(文莊)
출생 - 사망 1541년(중종 36) ~ 1615년(광해군 7)
저서(작품) 만전집, 만전당만록
대표관직(경력)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1541(중종 36)∼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홍온(洪昷)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 당하였다.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해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해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하였다.
또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 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晚全集)』과 『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가신 [洪可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GPS 트랙 첨부 : Tr20181201홍성백월산청난비.gpx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웠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165호, 지정(등록)일 1984.05.17
홍가신(1541∼1615)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후,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된 틈을 타서 왕의 종친이면서도 서자인 이몽학이 조선 선조 30년(1597)에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 왔다. 당시 홍가신은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웠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있던 곳은 '대교리 55-1'
그렇다면 지금 홍성역이 있는 그 구역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청난사
정상에 가까운 샘터...여기까지 물이 있다니 놀랍다.
'코끼리바위'라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모양이 되는 큼직한 바위다. 귀가 늘어진 삽살개모양, 귀부분이 원숭이 모양, 아기공룡모양도..
정상에 있는 통신시설, 아마 산불감시시스템인 듯, 태양열집열판이 색다르다.
백월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다가 보일 법 한데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시계가 흐리다.
홍후만전묘...
유리문의 오른쪽에 월산2리청년회에서 붙인 A4크기의 안내문은 흥미롭다.
지도의 천제단과 팔각정자
이게 정자 뒤의 지도상 '코뿔소바위'
저 바위를 나는 '앙천'이라고 했는데, 악어 같기도 하다. 예산 가야산 방향이 보인다.
약간 우측으로 보이는 바위가 많은 산이 용봉산, 안부 방향에 용봉저수지가 있고 좌로 덕숭산, 그 뒤로 가야산이다.
천제단에서 하산하면서 본 안내문..용봉산과 백월산의 장수 이야기도 재미있게 전한다.
백월산의 바위가 적은 이유라고...
시간이 여유롭다면 수덕사까지 산길을 갈 수도 있지만 하산하여 택시로 이동하여 덕숭산까지 올랐다.
암자들은 대부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덕숭산 정상
클릭해서 보면 안테나가 서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우측은 홍성시가지가 보이는 용봉산
수덕사 대웅전과 정혜사의 석문
수덕사 [修德寺]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79(사천리 20)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왕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15))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03)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3),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381), 수덕사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181), 수덕사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192), 수덕사 소장 소조불상좌상(충남문화재자료 384)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덕사 [修德寺] (두산백과)
수덕여관이 이응로화백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응로 기념관도 보고 올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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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계획 단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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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백월산(일월산)과 홍가신청난비
0730 덕천
1140 홍성 용봉초
택시 호출 이동(041-631-7566)
1200 산혜암입구-홍가신청난비-백월산-일월산-천제단-산혜암-홍천문화마을회관(4km/2:00)
14:20 홍천문화마을회관 앞 대기14:15 홍천출발395번버스,수덕사행
15:00 수덕사주차장-(덕숭산)-수덕사-주차장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
대한민국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65호 (1984년 5월 17일 지정)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산1
좌표 : 북위 36° 36′ 34″ 동경 126° 37′ 41″
홍가신청난비(洪可臣淸亂碑)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홍가신청난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홍가신(1541∼1615)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후,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된 틈을 타서 왕의 종친이면서도 서자인 이몽학이 조선 선조 30년(1597)에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 왔다. 당시 홍가신은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웠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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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혜암(山惠庵)
동의어 : 무염사(無染寺), 석령사(石鈴寺), 월산사(月山寺), 월산암(月山庵)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 전통사찰 제32호<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백월산에 있는 수덕사의 말사>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71-2,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구성북로 160번길 76
백제 때인 655년(의자왕 15) 또는 통일신라 문성왕(839~857) 때 인근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무염(無染, 801~888)선사가 창건하여 산혜암(山惠庵)이라 했다고 전한다. 절은 홍성읍 소재지의 서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표고 394m의 일월산(日月山, 일명 月山·白月山)의 동사면 중복에 있다. 16세기 중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령사(石鈴寺)'로 나오며, 1744년(영조 20) 간행본인 『홍주읍지(洪州邑誌)』 사찰조에 “산혜암은 읍의 주산 청원당 북면 서쪽으로 10리에 있다(山惠庵在州北面西距十里邑之主山作廳院堂)”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절이 폐사되었다고 적고 있어 정조대 무렵에 폐사되었다가 다시 중창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마곡사의 말사였으며, 김계장(金戒藏, 1912~1915), 장세완(張世完, 1915~1917), 지경운(池慶雲, 1918~1921), 이종환(李鍾煥,1918~1921), 박성전(朴成典, 1926~), 임홍근(林洪根, ~1932), 오연택(吳蓮澤, 1936~1942) 등이 주지에 재임하였다. 1922년 대웅전에 현왕탱화를 조성하였고 1980년대에 불사를 하였다. 1993년 2월 3일 충청남도 전통사찰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1985년에 새로 건축한 대웅전(정면 3칸, 측면 2칸)과 요사(정면 5칸, 측면 3칸)가 있으며, 석종형 부도 1기와 석조 약사보살입상(높이 215cm, 어깨 폭 56cm) 1구가 있다. 요사 남쪽에는 1982년에 세운 서경보 시비가 있고 요사 옆에는 돌절구(너비 70cm, 높이 56cm)가 남아 있다.
신라 하대 무염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선종 산문의 문화를 간직한 사찰이다. 『한국사찰전서』에는 석련사(石蓮寺)의 원래 이름이 산혜암이었다고 적혀 있으나 『태고사법(太古寺法)』이나 일제총독부의 관보에 따르면 대본산 마곡사의 말사로서 산혜암과 석련사가 각기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석련사는 산혜암과는 다른 절로 보아야 할 것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9234>
위치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덕서로 185-22
산혜암은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의 동쪽 사면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홍성의 진산인 백월산에 있어 홍성읍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이므로 비교적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흰 달이 산 위에 둥실 떠 있듯이 높은 석축이 특징적인 절, 산혜암이 바로 그곳에 있다.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는 꽤 높은 산으로 여기는 백월산의 울창한 수목 덕분에 산혜암을 찾아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구불구불한 길에 이정표가 그닥 많지 않고 인기척도 없어 가다쉬다를 반복해야 한다.
부처님과 인연 닿은 이들이 한돌 한돌 공들여서 쌓아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 석축을 보면 예전에 이 곳이 홍성을 지키는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때의 모습까지 엿보인다. 그만큼 산혜암은 이 지역을 수호하는 진산으로서 기능하는 백월산의 정기가 모아진 곳이라 여겨진다.
고찰의 면모를 보여줄 성보문화재는 없지만, 대웅전 앞 뜰에서 홍성시내를 내려다 보면 이마를 스치는 청량한 바람 덕분에 속세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된다. (041-632-319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10741&cid=42856&categoryId=42856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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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해풍현성[洪城海豊縣城]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에 있는 석성(石城).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의 산혜암(山惠庵) 부근에 있다.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그 규모가 둘레 9,700척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결전을 하여 왕건 군이 승리를 거둔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1973년에 홍성군수 조영호(趙榮鎬)가 세운 사적표석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 해풍현성 [洪城海豊縣城]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43585&cid=40942&categoryId=3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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