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숨결 담긴 호남평야의 망루
600년 이상 냐생녹차 비밀 깃든 녹차밭과 유선사 볼거리
두승산(斗升山,444m)은 호남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았다.
부안의 변산, 고창의 방장산, 고부 두승산을 삼신산.
고려초 이곳 지명인 영주를 붙여 영주산(瀛州山)이라 불렀지만 언제부터인가 곡창지대와 무관하지 않게 한말, 한되를 뜻하는 斗升山이라 불리고 있다.
斗升山에는 병풍능선이 눈길을 끈다.
천혜의 요새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포곡형 두승산 성터가 입석리에 남아 있다.
유선사,미륵암, 관음사를 비롯한 11개의 절과 암자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육산에 가깝고, 크게 가파르지도 않다.
능선의 암각 명문들...
서해까지 조망,
노적봉 아래는 600년 역사의 야생녹차밭.
고부면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발원지다.
1892년 4월 고부군수로 임명된 조병갑은 다양한 명목으로 세금을 착취.
1894년 2월 동학접주 전봉준을 영도자로 고부관아 습격, 고부민란 1,2,3차 봉기.
황토현은 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자리.
입석1저수지를 지나 입석2저수지에 이르면 광주노씨세장산비, 산행안내도가 있다.
유선사(遊仙寺)는 신선이 놀다간 터와 같은 풍경, 대웅보전 우측에 8m 길이의 백호조형물.
통신탑,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 가로 8m, 세로 4m의 수직 암벽에 우주적인 도형들과 망화대(望華臺) 표지석, 시국을 한탄하는 5언절구, 삼인의 결의문 등 다양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둘째 통신탑이 있는 441m봉은 변산과 서해바다까지 보이는 조망처.
3분 거리에 스텐레스 정상표지가 있지만 斗升山 정상은 10분 정도 더 지난 곳에 있다.
정상석을 세운 흔적의 바위 기단이 있다.
김제평야, 모악산, 회문산, 내장산, 방장산 등 조망.
바위 끝에 새긴 망선대(望仙臺), 水斗木升 글귀.
끝봉 팔각정.
경사면 내리막길 안전로프.
노적봉(346m) 이정표는 없지만 말봉으로 표기된 3시 방향으로 가면 노적봉.
야생녹차밭 0.3ha, 600년 전통 정읍녹차자생지.
노적봉 정상은 잡목으로 시계 제한, 斗升山 정상은 약간 보인다.
언양김씨묘를 지나면 50m 정도의 시누대터널 통과.
집단묘가 있는 넓은 공터에서 우측끝으로 길이 있고 5분이면 입석1저수지다.<월간산2018.11참조>
두승산성[斗升山城]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에 있는 산성.
전북기념물 제54호 / 1981년 04월 01일 지정
이 산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삼한시대에 쌓았다고도 하고, 고려시대에 쌓았다고도전해진다. 성안에서 출토된 토기편은 백제시대의 것도 있으나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다. 따라서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이라고짐작된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 '영주시구성(瀛州時舊城)'이라고 나와 있어 매우 오래된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성은 서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진 복합적인 형세이다.
두승산(444m)은 도순산(都順山), 영주산(瀛州山)이라고도 불렀으며, 두승산성은 승고산성·영주산성이라고도 불렀다. 둘레는 1만 m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아홉 개의 봉우리를 이룬 절벽을 이용하여 5㎞가 넘게 둘레를 쌓았다. 두승산남쪽에 솟은 산봉우리가 선인봉인데, 이 선인봉의 남쪽 기슭이 고려시대 영주관찰부가 있었던 고부면 입석리이다. 선인봉의 남쪽 정상에는 석성지가 있다. 대부분 무너졌으나, 약간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두승산성[斗升山城]
전북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 남복리, 입석리 일대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54호. 현재 문지, 수구문 등의 시설이 남아 있으며 두승산의 서쪽 골짜기를 감싼 포곡형 산성이다.
규모(면적) 121만 6392㎡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산21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4호 / 1981년 04월 01일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장문리·남복리·입석리 일대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
지정면적 1,216,392㎡, 둘레 50,524m. 전라북도 기념물 제54호. 현재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두승산(斗升山, 443.6m)의 서쪽 골짜기를 감싼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두승산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1만 812척으로 큰 골짜기에 걸쳐 있으며 영주(瀛州) 때의 옛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삼한시대의 석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산성 내에서 채집된 기왓조각·토기조각은 대부분이 고려 시대의 것이다.
영주라는 명칭은 936년(태조 19)에 개명한 것이므로 고려 초에 관찰사를 두면서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곽의 북서편에 있는 유선암(遊仙庵) 일대에서는 백제토기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 시대 중방고사부리성(中方古沙夫里城)의 남방을 막는 작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구조는 수구에 서문을 설치하고, 동남면에 남문지(南門池)가 있다. 현재 석축의 대부분이 무너졌고 간혹 석벽원형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승산성 [斗升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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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터[古阜官衙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고부초등학교 내에 있는 고부관아의 터이다.
전북기념물 제122호 / 2005년 06월 03일 지정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161 외
크기
면적 17,370㎡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관아가 있던 터로,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있다. 고부관아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표상하는 곳으로, 고부봉기 때 농민군에 의해 점령됐던 곳이다. 운동장 한켠에 보이는 초석과 기단석만이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말해줄 뿐, 그 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해 관아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2005년 6월에 17,370㎡의 터가 전라북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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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터[古阜官衙址]
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더 세력이 큰 고을이었다. 봉건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고을의 물산이 풍부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관리에게 뜯길 일이 많다는 것으로, 오히려 주민의 고달픔을 더해주는 일이었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은 그 전에 있던 수령들보다 한층 더 악랄하게 수탈을 일삼았다. 주민에게 이러저러한 누명을 씌워 잡아들였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거나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둔 것 등은 다른 부패관리들도 다 해온 짓이었지만, 그는 한술 더 떠서 필요도 없는 새 보를 쌓고는 가혹하게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관아가 있던 자리에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왼쪽에 향교가 있다.
조병갑의 탐학에 대한 고부 사람들의 분노는 1894년 1월 10일 봉기로 터져나왔다. 다음날 새벽에 고부 관아가 접수되고 조병갑은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달아났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헐어 양곡을 나눠주었으며 무기를 나눠 가졌다.
당시의 관아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이곳이 조병갑이 오가던 곳이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잡혀와 시달리던 곳이며, 농민들이 물세감면을 진정하기 위해 긴장된 걸음으로 들어서던 곳이며, 또 그날 횃불을 든 농민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곳이려니 되새겨볼 뿐이다. 초등학교 바로 옆의 향교 건물과 학교 뒤편에 남아 있는 고부읍성의 흔적이 고부의 옛날을 짐작하게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초판 1994., 개정판 13쇄 2011.,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신미원, 김성철, 유홍준)
[네이버 지식백과] 고부관아터(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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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터
정읍군 이평면 팔선리(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으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는 가운데,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보를 쌓고는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광산보 또는 예동보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렸다.
조병갑은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삼남지방에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를 감해달라고 관아로 간 농민들은 보세 감면은 커녕 매를 맞고 나왔다. 만석보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4년 1월에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만석보로 달려와 속 시원히 헐어버리고 말았다.
너르디너른 배들평야를 가로지르는 방죽 위에는 1973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만석보 유지비가 있다. 유지비 앞에 서면 앞뒤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아스라이 백산이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석보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초판 1994., 개정판 13쇄 2011.,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신미원, 김성철,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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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지[萬石洑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북기념물 제33호 / 1976년 04월 02일 지정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7-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의 상류 지점에 배들평 농민들이 설치하였다. 이 만석보는 예동보, 광산보라고도 불렀는데, 가뭄이 심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은 흉년없이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만석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1893년(고종 30)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만석보 바로 아래에 새로운 보를 일부러 쌓았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부역을시키고 남의 산에서 수백년이나 된 나무들을 마구 베어다 썼다. 첫해에는 세를 걷지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세라는 명목으로 보세(洑稅)를 징수하였다. 일두락(一斗落)에 상답(上沓)은 이두(二斗), 하답(下沓)은 일두(一斗)씩을 받아 현재의 이평면과 부안군 백산면에 700여 석을쌓아놓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나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은 피해를 입었다. 보세를 줄여 달라고 한 농민들은 관아에서 매를 맞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94년 1월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로 달려가 헐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3년 5월 11일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이곳에 2.5m의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건립하였다. 이평에서 신평리 쪽으로 2.8㎞ 정도가면 왼쪽 둑길 위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만석보지[萬石洑址](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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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白山,Baeksan]
전라북도 부안군의 백산면 용계리 동진강 연안에 있는 산이다(고도:47m). 백산면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산으로 전체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는 삼국 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여지도서'(고부)에 "백산은 군북 3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지형도'(김제)에는 백산 동쪽 동진강 하도가 뱀의 꿈틀거림처럼 직강공사 이전의 심한 곡류하천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산록에 위치한 용계리(龍溪里)는 백산의 모양이 마치 백룡이 물로 들어가는 형국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산면, 백산장, 백산초등학교 등 관련 지명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산 [白山, Baek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김기혁, 손희하, 김경수, 권선정, 김순배, 오정준, 이경한, 최원석, 최진성, 강지영, 박철웅, 안영진, 정암, 조정규, 오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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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농민전쟁 1차 기병 때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던 백산은 높이가 47m로, 다른 지방에서라면 산도 아니라 할 만큼 나지막하다. 그러나 사방이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에 펼쳐진 수십 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와, 관군이 어느 쪽에서 접근해오더라도 금세 알아챌 수 있는 대단히 유리한 지형이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곧장 고부를 들이치고 3월 25일에는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소식을 듣고 가까이서 멀리서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오는 사람으로 백산은 말 그대로 인산(人山)을 이루었다. 그들이 서면 온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또 앉으면 손마다 쥔 죽창이 빼꼭하다고 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지도부는 각지에서 몰려든 그들을 본격적 군대로 재편성했고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과 정백현을 임명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등 편제를 갖추었다. 또한 지도부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 등 4개 항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또 일반 백성과 하급 관리들에게는 동참을 권하는 격문을 발표했고 3월 26일경에는 '보국안민'이라 적힌 기를 앞세우고 전주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당시 농민군은 산을 둘러가며 토성을 쌓았는데 지금도 산 중턱을 돌아가며 둥글게 쌓은 토성의 흔적이 군데군데 있다. 원래 이곳에는 마한 시대 토성자리가 있었다. 산 중턱에는 그날 농민군의 신나는 몸짓인 듯 각종 들풀이 무리무리 서서 바람에 설레는데, 뒤편에 채석장이 생겨서 점점 산을 파먹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백산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백산은 낮다. 그러나 백산은 갑오농민전쟁의 성지로서 그 어느 산보다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초판 1994., 개정판 13쇄 2011.,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신미원, 김성철,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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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승산 산행정보/월간산 2018.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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