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비봉산 형제봉 산행
20180308 목 한마음
비와 눈이 내리는 날의 구미 비봉산 형제봉 산행
산행 코스 : 선산보건소, 현충원-비봉산-영봉정-부처바위-갈등고개-형제봉-죽장사갈림길-죽장사-죽장동
거리/시간 : 9.6km/3:55
08:20 덕천동 탑승
10:26 눈길교통사고/반대편 차선, 청도화장실 간 사이에 버스 떠나는 해프닝, 휴대전화 필히..
11:16 수성IC 지나
12:21 들머리/
12:22 충혼탑, 홍살문
12:24 선산출신독립유공자 공적비
12:25 충혼탑, 출발점
12:39 정자, 비봉산공원 종합안내도
12:42 비봉산의 유래, 선산의 역사, 고장의 인물
12:47 [영봉정0.4/0.5, 충혼탑1.0]
12:55 영봉정
13:07 [영봉정-0.1, 선산보건소-1.5, 형제봉3.8, 부처바위2.0, 선산체육관0.6]
13:26 [영봉정-1.1, 형제봉2.8, 부처바위1.0, 청소년수련원0.7]
13:39 바위
13:45 [영봉정-1.9, 형제봉2.0, 부처바위0.2, 쉼터0.1]
14:00 분기점(부처바위)[충혼탑3.7,...]
2설/부처가 누워있는 형상, 갈려져 있는 바위들이 붙여진 형상
14:12 [부처바위-0.5, 뒷골(체육공원)1.6][임도0.1,형제봉1.1, 부처바위-0.5, 뒷골(체육공원)1.6, 휴양림(옛오솔길)1.2]
14:15 숲길따라 도보여행길 이정표...
14:30 [헬기장(513m)0.02, 형제봉(531m)0.8, 솔바람길....]
14:34 헬기장
14:56-15:00 형제봉, 비봉산정상(531m), 산불초소
15:15 돌탑
15:23 [형제봉1.3, 죽장사2.1, 이문삼거리3.2]
15:43 [죽장사0.6, 형제봉-2.6, 이문삼거리1.9]
15:47 [형제봉-2.6, 임도-5.9, 부처바위-6.5]?
16:00-07 죽장사,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영남동학창의 을미의병 한문출장군 피신지, 항일투사 한문석 은거지...
<약10km/4시간>
주초반부터 계속 목요일에 전국적인 비라는 안내가 있었는데도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니 아침에 나갈 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버스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
밀양까지는 비가 내린다.
밀양을 지나 청도휴게소에 도착하니 눈으로 바뀌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조금 늦었더니 버스가 가버렸다.
급히 대장에게 전화하니 청도IC를 지나고 있단다.
휴게소에서 지금 나가려는 차를 한 대 붙잡고 세워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뒤에 타라고 한다.
나이 지긋한 부부였기에 가능했을 것 같다.
예천으로 간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을 다하지도 못하고 급히 버스에 탔다.
조금 가다가 눈은 함박눈으로 바뀌고 차들은 줄줄이 늘어선다.
건너편의 차선에는 뒤돌아 서 있는 차가 있어 정체되고 있다.
경산을 지나면서 제 속도를 낸다.
예상대로라면 휴게소 시간을 포함해서 10:30이면 선산보건소 앞에 도착하여 산행이 시작될 것 같았는데...
버스에서 되돌아 가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산행 시간이 4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가는데까지 가 보고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
들머리에 도착하니 12시20분이다.
두 시간 가까이 정체 된 것이다.
그래도 4시30분 정도에는 거의 다 마쳤다.
다행히 멀지도 않고, 산길도 편하고, 게다가 하얀 눈이 덮어버린 세상을 보는 맛이 괜찮다.
아이젠을 착용했는데도 얼지 않은 눈이 기온이 올라가면서 녹아 여러 사람이 미끄러졌단다.
나도 한 번 미끄러져 엉덩이를 다 적셨다.
미끄러지면서 길 따라 1m 정도를 흘러 내렸으니...
오늘의 코스는 부산일보를 보고 잡았다는데 지난 주에 국제신문에서도 나왔다.
지난 번 채약산의 경우도 유후재를 버리고 초등학교로 하산길을 잡았던 부산일보는 죽장사를 버리고 능선을 따라 갔는데, 김대장이 죽장사로 잡아 국보 제130호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국제신문은 국보를 볼 수 있게 잡았으나, 하산길을 우리와 약간 다르게 첫번째의 죽장사 갈림길에서 내려오게 하여 다시 마을길에서 죽장사로 올라가게 하였다.
우리의 선택이 표준이 될 것 같다. 산행 거리나 시간이 나같은 사람에게는 알맞다.
들머리 비봉산 부근에는 야은 길재와 하위지의 시조를 비롯하여 이우의 한시 칠언절구, 현대시 몇 수가 게시되어 있었다.
비봉산은 표지도 없고 볼 게 없다고 안내되어 포기하려다가 되돌아 잠사 올라가 보았다.
눈과 구름이 짙어 부처바위 갈림길을 찾는데 약간의 혼란이 있어 50m를 더 가서 봉우리에서 돌아 내려왔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일 정도로 하산 무렵에는 하늘이 개었다.
죽장사지 오층석탑 옆에 동학 관련 조그마한 기념비 같은 것도 있었다.
일기 예보에 15:00 이후에는 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맞은 것이다.
죽장동의 정자 옆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는 동안은 비도 눈도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귀가길은 차가 거침없이 달릴 수 있었다.
눈이 없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을 기회가 있을지...
충혼탑
비봉산 정상(122.2m)
영봉정
부처바위, 눈이 쌓여 돌아 보지는 않고 ...
능선 옆의 웅덩이, 아무런 안내도 없고 줄만 쳐 있다.
눈의 무게에 늘어지는 가지
눈에 발이 빠질 정도다.
형제봉 정상(532.1m, 정상석에는 531m)
산불초소
돌탑봉
죽장사지 오층석탑 (국보 제130호)
선산 갑오동학농민전쟁역사
여기는 혁명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네...
아침에 구미로 가는 동안 청도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눈이 펑펑 썯아지더니 도로가 정체되어 2시간이나 늦어졌는데
거의 청도 경산구간이 걸음 속도인 것 같았다.
그런데 건너편 하행선 도로에 트럭 한 대가 뒤로 돌아 서 있다.
되돌려서 가야 하는데 운전자는 내려서 수신호로 알리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차량들이 좀 멈추어 트럭이 뒤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선일 것 같다.
대형트럭 기사가 돌려라는 사인을 하고 있는데도 못하고 있는 걸 보니 움직일 수 없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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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
야은 길재
이맹전
단계 하위지
김종직
김응기
정붕
박영
박운
김취문
황기로
고응척
장현광
최현
박록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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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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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吉再]
이칭별칭 :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출생 - 사망 : 1353년(공민왕 2) ~ 1419년(세종 1)
본관 : 해평(海平)
조선전기 :『야은집』, 『야은속집』, 『야은언행습유록』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길원진(吉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63년(공민왕 12)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고, 1370년상산사록(商山司錄)박분(朴賁)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을 배우며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지내며 비로소 학문의 지극한 이론을 듣게 되었다.
1374년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하여 그 해 가을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1387년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이듬 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되었다.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 해 봄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상을 행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으며,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저서로는 『야은집(冶隱集)』과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으며, 그 밖에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해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재 [吉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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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전[李孟專]
이칭별칭 : 자 백순(伯純), 호 경은(耕隱), 시호 정간(靖簡)
출생 - 사망 : 1392년(태조 1) ~ 1480년(성종 11)
본관 : 벽진(碧珍)
조선전기 승문원정자, 거창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생육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선산출신. 이군상(李君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원수 이희경(李希慶)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이며, 어머니는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승(呂克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436년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뒤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여 시국이 소란해지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이 90여세에 죽었다.
1781년(정조 5)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고, 또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는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맹전 [李孟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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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河緯地]
이칭별칭 : 자 천장(天章), 중장(仲章), 호 단계(丹溪), 시호 충렬(忠烈)
출생 - 사망 : 1412년(태종 12) ~ 1456년(세조 2)
조선전기 집현전부제학, 예조참판, 세자우부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하윤(河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하지백(河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하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위지 [河緯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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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이칭별칭 : 자 계온(季昷), 호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출생 - 사망 :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조선전기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경상남도 밀양 출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사예 김숙자(金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1462년 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감찰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쳤으며, 1476년(성종 7)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하여 문장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훗날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非道)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김종직이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유두유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一善誌)』·『이존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김종직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종직 [金宗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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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20km 금오산(976.5)
남서32km 황악산(1111.3)
동11.5 청화산(701)
동11.4 냉산(694)
북서11.2기양산(704.7),수선산(682.5)
서13.1백운산(617.7,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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