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꽃봉산을 찾아 공개바위 재탐방 20170713 목

benel_jt 2017. 7. 14. 14:26

공개바위 재탐방
20170713 목 무척


코스 :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꽃봉산-공개바위갈림길-공개바위-법전암-임도-가현교


지난 해 담쟁이를 따라 갔던 공개바위,
이번에 무척에 소개를 했는데 같은 코스는 하산길이 너무 더울 것 같아서 다른 코스를 가려고 국제신문의 코스인 함양 엄천교 코스를 소개했다가 급히 바꾸어 지난 해의 코스에 약간 변화를 주었다.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보여주고 가려는 생각에 꽃봉산을 경유하려는 계획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정천익목화시배지 안내비가 있어 그 곳도 덤으로 챙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석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단지 방곡리에서 시배를 했었다는 것 뿐이다.
뜨거운 볕에 걸어서 학살터보존비가 있는 곳까지 보여주고 갔는데 바로 올라간 팀도 있었다.
하기야 무척에 어울리지 않는 이벤트일지도 모르겠다.
'본래 산행하면서 그런 것 볼 시간 없어요'라고 하던 팀었으니까...

산행의 자료로는 종이지도보다는 네이버의 지도와 GPS 수신을 활용하여 등로를 찾았다.
그런데 들머리에서 얼마되지 않아 등로가 좌측으로 바뀌면서 길이 가파르고 힘들었다.
도로 내려와서 정상 노선을 찾으려다가 앞선 대원들의 뒤를 따르다 보니 계속 올랐는데 후답자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좋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조망이 좋은 곳에서 함양 쪽의 법화산, 삼봉산, 백운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공개바위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어야 하는데 이정표도 없다.
어찌된 것일까.
GPS로 확인하고 내려섰다.
정상적으로 찾았다.
등로에 힘들어 불평 섞인 생각들을 표현하던 이들이 모두들 탄식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단지 이걸 보려고 온 것이니까.
갈림길이 있어 법전사로 가는 길이 약간 오르막이다.
GPS 확인하고 길을 정했다.
바로 법전사였다.
입구의 거대한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고 물을 마시고 임도로 내려갔다.
가현교까지 도착하니 4시간30분이 걸렸다.
시간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어쨌던 시간을 더 주었으면 욕심을 부린 사람들이 더 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3시까지 하산하라고 했는데 와불산 방향으로 갔다가 3시에 공개바위에 있었던 이들이 있었으니...
와불산을 가을에 한 번 탐방 기회를 가지겠다고 했는데...
버스는 가현교에 주차하지 않고 후진하여 내려가서 마을회관 앞의 정자에 있었다.
가현교 다리 아래서 탁족을 하고 내려갔으니 20분 정도 더 걸린 셈일 것 같다.
어제 복날이라고 삼계탕을 후식으로 준비했기에 한 그릇 먹고는 다른 날보다 일찌기 귀가할 수 있었다.
가을에 함양독바위 코스를 한 번 탐방하도록 해야겠다.



처음 계획했던 코스 지도

산청함양사건추모관 정문

민수호님이 찍어준 인증


정천익의 목면시배지 안내, 그런데 방곡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서 세운 것일까

민수호님께 물어봐도 근거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재원님이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스스로가 정천익의 후손임을 밝힌 셈이다.


우리 고장의 문화재 이야기
이 고장 산청은 무명(木綿)의 발상지로서 온 나라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입힌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옛날에는 우리 나라에 무명(木綿의 중국발음)이 없었으므로 가난한 백성들은 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살아야 했다.
그러던 차에 고려 공민왕12년 3월에 사위인 좌정연(종6품) 문익점 선생이 33세 때 사신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붓대통에 감춰온 목면씨를 공민왕 13년(1364년 갑진년) 봄에 장인인 고려 전객령(정3품) 치사관(致仕官, 종신명예직) 정천익 선생(71세)께서 단성 배양마을  집에 처음 씸어 배양에 성공하고 씨아와 물레를 창제하고 개량 베틀도 처음으로 만들어 비로소 무명베 한 필을 짜서 이웃에 전하고 이를 온 나라에 펴서 백성들이 따스한 무명옷을 입게 하여 겨울 추위를 막았을 뿐 아니라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다운 의생활 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하였고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정천익 선생이 목면을 처음 심어 배양에 성공한 이 고장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사적 108호 '목면시배유지'를 국가 문화재로 지정하고 사적관을 세워 그 공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목면공 퇴헌 정천익 선생의 설단과 신도비가 그 부친이신 고려 의조상서 양천 정유 선생의 설단과 효우사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양천 선생은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형제투금 설화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어 있는 우리 나라 효우의 표상으로 추앙 받는 분으로서 우리 후생들이 본받아야할 우리 고장의 자랑이다.
2007.1.31
회헌 정천익 선생 사적 보존회장(23세손) 정재원 삼가 세움


방곡마을 주민 희생 터
여기는 1951년 2월 7일 방곡마을에 살던 주민 212명이 일부 국군의 총칼에 집단 희생되었던 곳으로 당시 산청군(가현, 방곡), 함양군(점촌, 서주) 지역에서 일어났던 네 곳의 집단 희생터 중 하나이다.
이날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아침 10시경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주민들을 끌고 나와 이곳 논바닥에서 학살하였다.
이처럼 방곡마을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주민이 212명이나 되었고 후에 이곳 논바닥에서 나온 유골이 80kg 들이 쌀가마로 여섯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당시 3발의 총탄을 맞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정재원(남,7세)이 그 때의 일을 전하였다.
2011.5

'방곡리 사건 현장

함양쪽에서 바라 본 공개바위

산청쪽에서 바라본 공개바위

공개바위의 전설

산청 방곡리 공개바위
경상남도 기념물 제266호(2007.9.6)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176-1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해발 755m의 야산에 있는 공개바위는 원래 흙 속에 묻혀 있었으나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ㅈ벼이 흙이 떨어져 나가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모두 5개의 육면체 바위가 석탑 모양으로 쌓여 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2.7m이고, 둘레가 12.4m 정도이다.
인공적인 5층탑을 방불케하는 이 기념물은 25~30˚정도 옆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오래 전부터 '한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관광객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다.
옛날에 지리산 마고할미가 공기놀이를 하다가 그 공깃돌 5알을 쌓아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공개바위라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공개'는 '공기'의 경남서북부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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