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도

진안 천반산 산행지도

benel_jt 2016. 6. 2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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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반산(647m)]


○ 산행코스 : 섬계산장-천반산-전망대-말바위-성터-송판서굴갈림길-뜀바위-죽도-장전마을



천반산의 유래를 고찰해 보면 퍽 이채롭다.
첫째는 서쪽 산정 1천여 평의 분지가 하늘(天)에서 보면 마치 소반(小盤)모양이라는 설이다.
둘째는 이산 남쪽 가막리에 경주정씨가 400년 전에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마을 앞 냇가에 있는 ‘장독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복숭아 형상이라.. 즉, 천반낙도(天盤落桃)라는 점이다.
셋째는 천반, 지반, 인반의 명당 중에서 이 산은 천반(天盤)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기 때문이란다.

천반산

산 위가 소반같이 납작하다고 하여 이름 붙은 천반산은 남쪽 장수에서 흘러 내리는 장수천과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랑천이 파(巴)자 형으로 굽이쳐 흐르다 한머리 금강으로 거듭나는 것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의 명당 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천반의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이라 지어졌다한다.
천반산은 사방이 깎아지르는 듯한 험준한 지세 위에 정상은 약 1000여 평의 평지가 소반처럼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이곳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차별의 분수령이 되며 1000여 명이 참변을 당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 정여립(1546~1589)의 한이 서린 곳이다.
정여립(鄭汝立)은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 3년(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의 벼슬에 올랐다가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모악산 앞 제비산(현 김제시 금구면)에 머물면서 앞에 보이는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이곳 천반산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은 선조 22년 역모로 고변되자 아들과 함께 죽도에 피신하였다가 관군에 쫓기자 이곳에서 아들과 같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천반산에는 성터와 망루로 사용하던 한림대터, 집터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역사의 숨결이 담긴 곳이다.
또한 정여립이 군사를 조련할 때 사용했다는 거대한 돌솥이 묻혀있다는 설이 있으며 정여립이 훌쩍훌쩍 날아다녔다는 뜀바위와 단종 때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판서(宋判書)가 수도를 하였다는 송판서굴, 그리고 송판서의 부인이 살았다는 할미굴, 정여립이 군사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등이 있으며 앞에 보이는 육지 속의 섬인 죽도는 강기슭으로부터 100m에 이르는 암봉으로 솟아 있어 그 모양은 절경으로 푸른 송백과 하얀 모래사장의 조화가 한 폭의 산수화 같은 곳이다.







송판서굴(宋判書窟)
송판서굴은 바위굴 2개가 15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으로 쌍굴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큰굴의 깊이는 약 7m, 작은 굴은 약 5m 쯤 된다.
큰 굴은 장정 10여 명 정도가 쉴 수 있을 정도이며 바위틈에서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며 이 물은 약수로 위장병에 좋다는 전설이 있다.
굴의 주인공인 송보산(宋寶山) 선생은 연안 송씨로 아호는 퇴휴재(退休齋)이며 세종 20년(1438년) 도승지에 올랐고, 세종 31년(1449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1456년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현재의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여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먼저 낙향한 김남택과 교유하며 살았다.
그는 도학과 제자백가를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14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송판서는 세상의 죄악을 씻으려고 이곳에서 은거하여 수도하였으며 부인은 같이 입산하여 이곳에서 약 1.5km 떨어진 할미굴에 기거토록하였다고 한다.
또한 송판서가 이 굴에서 수도를 할 때 매일 세 끼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한다.
그 후 어느 여인이 식사를 날아 오는 것을 보고 송판서가 연유를 물었으나 천리 밖에서 왔다고만 하고 떠나갔다 한다.
송판서의 위패는 현재 장수의 월강사(月岡祠)와 진안 마령의 구산사(龜山祠)에 모셔져 있다.
또한 이 굴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죽도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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