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대성산 정취암 / 둔철산 산행 들머리

benel_jt 2016. 5. 15. 19:13

絶巖懸淨趣
山川一望通
萬壑白雲起
扣門淡塵跡


절암현정취
산천일망통
만학백운기
구문담진적

기암절벽에 달린 정취암은
산천이 한 눈에 들어오고
골짜기에 흰 구름 펴오르는 곳
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찌든 마음 맑게 씻긴다



ㅇ 아래의 연혁은 정취암에 안내된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성산 정취암 연혁
경남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927-2번지
전통사찰 제83호(1973년 10월 30일 등록)

정취암(淨趣庵)은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의 기암절벽(奇巖絶壁) 사이에 자리한 절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金剛)에 버금한다 하여 옛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新羅 神文王) 6년(丙戌,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丈六金身;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瑞光)을 발하니 한 줄기는 금강산(金剛山)을 비추고 또 한 줄기는 대성산(大聖山)을 비추었다. 이 때 의상조사(義湘祖師)께서 관(觀)해 보시고 두 줄기 서광을 좇아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淨趣寺)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에 계시던 의상스님께서는 도리천(忉利天)의 길상천녀(吉祥天女)가 올리는 공양을 드셨는데, 어느 날 원효(元曉)대사께서 방문하신 후부터 천공(天供) 드시는 것을 그만 두셨다고 전(傳)한다.
당시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계시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琢磨)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정취암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 중기 기록에는 정취사(正趣寺)로 사명(寺名)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서 구한말(舊韓末) 사이에 조성된 불화(佛畫)에는 정취암(淨趣庵)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淨趣庵)은 정취관음보살(淨趣觀音菩薩)을 본존불(本尊佛)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유일의 사찰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이같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정취보살상(淨趣菩薩像)을 우리 나라에 처음 모신 것은 신라 헌강왕(憲강王) 2년(戊寅, 858년) 굴산 범일선사(屈山 梵日禪師)가 낙산사에 봉안했었다.
고려 고종(高麗高宗) 41년(甲寅, 1254년)에 명주성(溟州城)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夜別抄) 10인과 사노(寺奴)인 걸승(乞升)이 정취보살상을 땅 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 각유선사(祇林寺住持 覺猷禪師)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神寶)이니 어부(御府;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御府)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3년(甲午,1354)에 화경, 경신(華敬, 景信) 두 거사(居士)가 정취사(正趣寺)를 중건한 후 어부(御府;궁궐)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淨趣菩薩像)을 정취사(正趣寺)로 이운(移運)하여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또 이 무렵 설화로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얽힌 구미호 설화와 문가학의 역모사건은 당시 원나라를 추종하던 보수 세력과 공민왕을 따르던 개혁 세력간의 갈등관계가 설화로 각색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같은 사건들은 정취사(正趣寺)가 당시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로 부터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주요한 거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취암(淨趣庵)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高僧衲子)들의 요결처(了結處)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古岩 大宗師)께서도 한 때 주석(主席)하시며 정진(精進)하였다.
또한 수많은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정취관음보살(淨趣觀音菩薩)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보문속질행해탈(普聞速疾行解脫)을 성취하였으며, 정취관음보살(淨趣觀音菩薩)께서 나투시는 최고(最高)의 성지(聖地)이다.
그러나 무상살귀(無常殺鬼)를 그 무엇인들 막을 수 있으리요. 조선 효종(朝鮮 孝宗) 3년 4월 26일(壬辰,1652) 화마(火魔)가 진동(震動)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한 모든 전각(殿閣)이 전소(全燒)하였으며, 이 때 정취보살상(淨趣菩薩像)도 함께 소실(燒失)되어 창건(創建) 이래 가장 큰 비운(悲運)을 맞았다.
당시 정취암에서 정진하시던 봉성당 치헌선사(鳳城堂 致憲禪師)께서 효종(孝宗) 4년(癸巳, 1653)에서 9년(戊戌, 1658) 사이에 화주를 구하고 사재를 내어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木彫觀音菩薩坐像;정취관음보살상)은 효종(孝宗) 5년(甲午, 1654)에 소실된 정취보살상(淨趣菩薩像)을 재현하여 조성하였다고 전(傳)한다.
봉성당 치헌선사(鳳城堂 致憲禪師)는 정취암(淨趣庵)의 중창조(重創祖)로 이후 평생을 정취암에 주석하시면서 큰 법력으로 중생들을 안위(安爲)케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가피의 명성이 전하여지고 있다.
사(師)의 생몰연대(生歿年代)는 전하여지지 않으나 입적(入寂)하신 기일(忌日)은 음력 11월 20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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