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사전에서 '후박하다'는 말을 찾아보았더니 옛 시골 사람처럼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후박(厚朴)나무는 두툼한 껍질을 가지고 우리 나라 남부 지방에 자라면서 서민의 애환을 말없이 지켜볼 수 있었던 흔한 나무의 하나이었다. 나무의 껍질은 오래되어도 갈라지지 않고 매끄러워 나무를 보는 느낌이 편안하며, 벗겨낸 껍질은 후박피(厚朴皮)라 하여 한약제로 애용되었다. 덕분에 후박나무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인가 가까이 있는 후박나무는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손에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극형을 받고 모조리 죽어 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상당수가 후박나무로 만든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꽤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나무 이외는 큰 나무를 볼 수가 없다. 오늘 날 후박나무가 가장 흔한 곳은 울릉도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산에 붙어 살아가므로 감히 베어낼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리라. 울릉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유명한 호박엿이 옛날에는 '후박엿'이었다 한다. 만약 '울릉도 후박엿'으로 계속 전해졌었다면 울릉도에는 후박나무 구경도 어려울 뻔하였으니 호박엿으로 변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후박껍질을 넣어 약용으로 후박엿을 만들어 먹었으나 언제부터인가 호박엿이 되었다 한다.
일본목련을 흔히 후박나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나무이름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후박나무 껍질은 약제로 귀중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5년(1422) 3월22일조에는 <김을현, 노중례, 박연등이 들어와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향약인 단삼·방기·후박·자완 등은 지금부터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12년(1429) 4월21일조에는 절일사압물 노중례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중국 태의원 의사 주영중과 고문중이 우리 나라 향약을 검사한 결과 합격된 약제는 후박 등 열 가지입니다>. 세조11년(1465) 8월15일 중추원 부사 이변이 올린 글의 내용 중에 <신이 들은 것으로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이 가고 오는데, 평안도의 인마가 폐해를 받는 일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값은 헐하고 무거우니, 감초·후박·진피·건강·마황 등과 같은 물건을 실어 가지고 오는 말은 단지 2, 3필뿐이나 약짐은 많기가 3, 40척에 이릅니다'>라 하여 널리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후박껍질은 배가 부르고 끓으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체하고 소화가 잘 않되는 것을 낫게 하며 위장을 따뜻하게 한다. 토하고 설사하는 것을 낫게하고 담을 삭히며 기를 내리고 위장과 장의 기능을 좋게 한다. 또 설사와 이질 및 구역질을 낫게한다>하여 위장병을 다스리는 약제이었다.
남해안, 울릉도, 제주도 및 남부 도서 지방에 널리 자라는 상록활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20m, 지름 1m에 달한다. 나무 껍질은 갈라지지 않고 매끈하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우상의 잎맥이 있고 혁질로서 두꺼우며 타원형으로 표면은 광택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고 새순이 나올 때는 부드럽고 적갈색으로 독특한 모양을 나타낸다. 꽃은 원추화서가 잎 겨드랑이에 나며 많은 황록색의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열매는 다음 해 7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잎이 넓은 도난형이고 크기가 큰 것을 왕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 var. obovata)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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