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수원 광교산 비로봉 부근에 김준용 장군 전승비

benel_jt 2015. 4. 8. 08:40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지정일 : 1977. 10.13

이 비는 병자호란(1636년 인조4년 12월~1637년 1월)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金俊龍, 1586-1642)장군의 전승지에 비모양으로 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김준룡은 원주 김씨로 1609년(광해군 원년)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격전을 벌인 꿑에 청 태종의 매부이자 후금 태조의 사위이며 적 장수였던 양고리(楊古利, 楊古里, 백양고라) 등을 사살하였다. 김준룡 장군은 1792년 정조대왕 때 '충양공(忠襄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장군 전승 사실을 새기라고 했다고 한다. 암반에는 새로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 큰 글씨를 새겼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亂公提湖南兵)과 근왕지차살청삼대장(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써 놓았다. 이는 '충양공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라는 것과 함께 병자호란 때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 곳에서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자연석에 새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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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의 .양고살재.는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박의'장군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양고리를 죽인 곳은 이곳인데, 박의의 고향이 그곳이라 그 곳에 양고사래라고 붙인 건 좀 의아했었다.

하기야 지금인들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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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光敎山)

'너무도 분통이 터집니다'


체부 종사관(體府從事官) 김광혁(金光爀)을 인견할 때에 동부승지 한형길(韓亨吉), 주서 이석(李晳), 기사관 김진(金振)이 입시하였다. 김광혁이 아뢰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는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해 10월에 하직 인사하고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로 내려가서 군기(軍器)를 모두 검열하고 순행(巡行)하여 장흥(長興)에 이르렀습니다. 12월 17일에 변란(變亂)을 듣고 병사(兵使)와 상의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25일에 직산(稷山)에 도착해서 감사와 상의하니, 감사가 ‘감사와 병사가 모두 있지 않으면 도내의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어서 우려할 만한 일이 많으니, 도내로 가서 책임지고 조발(調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마침내 여산(礪山)으로 물러가서 양향(糧餉)의 운송을 관리하였으나 끝내 효과가 없었고, 삼남의 군사가 계속해서 패몰(敗沒)하여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들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죄가 만번 죽더라도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밤낮으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원문 빠짐 -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삼남의 군사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당초에 감사는 순행하고 병사는 병영(兵營)에 있어서 16일에 - 8, 9행 원문 빠짐 -

상이 이르기를,

“- 원문 빠짐 - 광교산(光敎山)에 머무른 지가 며칠인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29일에 진을 치고서 6일에 접전(接戰)하였는데, 접전하는 날에 적이 전영(前營)의 허술한 곳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지탱하지 못하여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위쪽의 형세가 매우 험준하였기 때문에 이곳의 방비를 그다지 엄밀히 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이곳으로 엄습(掩襲)할 줄을 몰랐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그 형세가 매우 험준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서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전(大戰)이 끝나는 날에 우리 군사가 많이 죽었는데 적은 곱절이나 더 죽었습니다. 이때에는 아무리 친한 부자(父子) 사이라도 서로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영(中營)에는 적이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니, 이 군대를 수습하면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일 상대하여 싸우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겨 군사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잘 처리하지 못하여 군사를 궤멸시키는 데 이르렀으니 죄가 많긴 합니다. 하지만 일이 급박하다는 것을 몰라 물자를 미처 실어오지 못했으므로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영(右營)의 군대는 감사가 직접 거느리고 산성(山城)으로 들어갔지만 이처럼 얼마 남지 않은 군대로는 또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신이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서 감사에게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물러가는 바람에 그 군사들도 마침내 흩어졌습니다. 신이 감사와 상의하기를, ‘이 군대가 비록 흩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수습해서 재차 전진하려고 하였습니다. 중영의 군졸이 겨우 3200명이었는데 대부분 상처를 입어 쇠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번 패한 뒤에 병사(兵使)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유지경(柳持敬)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그 군대를 거느려 감독하게 하고서 다음 날 새벽에 떠나려 하였는데 그날 밤에 변란이 일어나자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그 수삼 일 전에 난군(亂軍)들이 매일 봉우리 꼭대기에 모여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고 게다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뜻밖에 그날 밤에 포성(砲聲)이 한 번 나자 사방의 군사들이 일시에 일제히 호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군관(軍官)과 장관(將官)을 시켜 - 원문 빠짐 - 진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창자를 조사해 내고자 밤새도록 순라(巡邏)를 도니, - 원문 빠짐 - 다 도망갔습니다. 다음 날 보니 난전(亂箭)이 지붕에 가득하고 각 고을의 발막(撥幕)이 모두 - 원문 빠짐 - 불측한 말을 많이 하면서 인가(人家)에는 들어가지 않고 모두 산골짜기에 모여서 그 행하는 바 - 6, 7행 원문 빠짐 -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관고(官庫)를 분탕질하여 어찌할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 원문 빠짐 - 수습하기 어려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구(金溝)에 있으면서 전진할 계획을 세웠는데,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을 듣고서 즉시 해산시켰습니다.

대체로 이 도(道)의 군사가 - 원문 빠짐 - 국가에 보탬은 없이 서로 이끌고 난리를 일으켜 곳곳이 다 그러했으니, 인심의 불선(不善)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호남의 인심은 본래 다른 지방에 비해 자못 악하여 위엄으로 두렵게 할 수도 없고 덕으로 감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습속(習俗)의 악함이 예로부터 그러했으므로 이번 군병에 대해서는 진실로 꾸짖을 것이 못 됩니다. 출신배(出身輩)들도 모두 흩어져서 영상(嶺上 노령산맥 이북) 사람들이 호복(胡服)으로 갈아입고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전주부(全州府)는 본래 큰 고을이어서 마을의 번성함과 물력의 풍부함이 도내의 최고일 뿐만 아니라 실로 팔도의 제일입니다. 그런데 부윤 오단(吳端)이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영상을 왕래하면서 보살피지 못하다가 적(賊)이 이산(尼山)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달려왔는데 그날 밤에 난이 일어나 여러 곳의 공해(公廨)가 모두 불탔으며 각 창고의 쌀과 밀가루를 멋대로 훔쳐 냈습니다. 대동목(大同木)과 포보(砲保)의 가포(價布)가 100여 동(同) 정도뿐만이 아니었는데 조금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매우 애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에 탔는가, 훔쳐 갔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모든 관사(官舍)가 다 불에 탔고 그 나머지 잡물(雜物)은 모두 가져갔으며 감영(監營)에도 저장된 재물이 많았지만 모두 보전되지 못하였습니다. 애석한 것은 오래된 문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서울에 혹 간직된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주에는 없었습니다. 신이 오단에게 명을 전하여 도망가지 말고 속히 들어와서 수습하게 하였지만 부중(府中)의 하인(下人)이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었고 겨우 아전 한 명과 관노(官奴) 하나를 찾아서 문서를 만들어 힐문하였는데, 미처 난이 진정되지 않아서 곧 이런 일을 하였기 때문에 난군(亂軍)이 두려워하여 또 소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가까스로 수습한 수백의 곡식을 또 재란(再亂) 때에 잃어 내외의 여러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실로 수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김제(金堤)의 변란에 대해 구인기(具仁墍)의 말을 들으니, ‘관아에 나와서 직무를 보는 날에 무뢰배들이 뜻하지 않게 떼 지어 먼저 무기고로 들어와서 보관되어 있는 활과 화살을 모두 - 원문 빠짐 - 화약(火藥)과 연환(鉛丸)을 모두 흩어 버리고, 다음에 관청으로 들어가서 먼저 장독을 부수고 - 원문 빠짐 - 쌓아 둔 재물을 멋대로 빼앗아 가므로 혹 변을 당할까 두려워서 부득이 도망 나왔습니다.……’ 하였습니다. - 6, 7행 원문 빠짐 -

상이 이르기를,

“금성(金城)에는 별장(別將)이 없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있긴 하지만 마침 - 원문 빠짐 - 군병이 있으나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가 적과 동모(同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원문 빠짐 - 신이 그 군대에 말하기를, ‘사태가 수습된 뒤에 마땅히 형추(刑推)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영하(嶺下 노령산맥 이남) 여러 고을 사람들은 만약 대가(大駕)가 조금 늦게 환도(還都)했다면 필시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영광 현감(靈光縣監) 송몽석(宋夢錫)은 재직 중의 치적(治績)이 도내에서 최고이고 군대를 조발(調發)할 때에 극진히 무휼(撫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성을 포위하고서 사방에서 방포(放砲)하면서 불측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송몽석이 비록 난리에 죽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놀라 중병을 얻었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비일비재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필시 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잘 다스렸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그가 정사를 하는 데에 병폐는 조금도 없고 인자함만 지나쳤으니, 이것이 그의 병통이었습니다. 나주(羅州) 고을은 지역도 크고 사람들도 사납지만, 목사 오준(吳竣)이 상당히 잘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놀란 뒤부터 성 안이 모두 비고 태수(太守)만 남았는데, 밤마다 관아 안에 화살을 비 오듯이 쏘면서 옥문(獄門)을 부수고 중죄수(重罪囚)를 모두 빼냈습니다. 강진(康津) 사람들도 그 잘못을 따라 해서 군대를 조발할 때에 병방(兵房)을 죽이고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위협하여 수령이 손을 쓸 수 없었으니,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본도에 감사가 없어서 조정의 명령을 소통하여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비록 도내에 있으면서 호령을 하긴 하였지만 모든 징수하는 것들이 하나도 시행되지 않았고, 신을 객(客)이라고 여겨서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망하는 마음을 많이 드러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감사가 내려간 뒤에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조금 그쳤다고 하지만 인심의 불선함이 이러하니, 모두 군법(軍法)대로 시행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먼저 진정시키고서 그중에 두드러진 장관(將官)에게만 형률(刑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수령을 안정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끝내 난민(亂民)이 되어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주동자를 다스리는 일을 이미 시행하게 했다.”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이것은 신이 올 때에 이시방(李時昉)을 만나서 이미 알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란이 생긴 곳은 몇 고을인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전주ㆍ김제ㆍ익산(益山)ㆍ태인(泰仁) 등 여섯 고을인데, 수령을 쫓아낸 곳은 세 고을뿐이고 정읍(井邑)은 관곡(官穀)만 잃었고 민가는 온전합니다. 그리고 영하로는 나주와 강진(康津)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두 고을은 어떠한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옥문을 부수고 죄수를 빼앗아 갔으며 야경(夜警)에게 방포하면서 수령을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보고하여 신으로 하여금 진정시키게 하였지만 신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은진(恩津) 이상도 적의 진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관사도 망가지지 않고 고을도 모두 온전하되 잃은 것은 관곡이었는데, 적이 물러난 뒤에 거의 3, 4백 석(石)은 수습하였다고 합니다. 이 고을은 겨우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이산(尼山)과 공주(公州)는 더욱 형편없어 온전한 관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산 수령은 민가에 의지하여 지내고, 공주 목사는 객사(客舍)에서 지내 - 원문 빠짐 - 촌락(村落)도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천안(天安)은 관사가 모두 불에 탔으며 읍내에 6, 7집밖에 남지 않았는데, 태수가 끝내 멀리 피하지 않아서 가까스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 원문 빠짐 - 앞으로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위(振威)도 그러해서 여기에서 수원(水原)까지 시체가 길에 줄지어 있어서 호서와 경기가 더욱 참혹하게 화를 입었습니다. - 6, 7행 원문 빠짐 -

김광혁이 아뢰기를,

“김준룡(金俊龍)은 비록 패배하였지만 처음에는 힘써 싸워서 - 원문 빠짐 - 중죄(重罪)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마침내 사적인 편지를 써서 신에게 보내 - 원문 빠짐 - 신이 그 편지를 도로 주며 ‘처음에는 비록 힘써 싸웠으나 이미 패배하였으니, 마땅히 대명(待命)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사적인 편지를 쓴단 말인가?’ 하고 말하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은진(恩津)에 이르러서 그의 보장(報狀)을 보니, 또 전의 일을 말하였기에, 신이 ‘현재 대죄(待罪) 상태에 있는데 지금 어찌 감히 관인(官印)을 찍어 공무를 행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서 물리치고서 받지 않고 그로 하여금 공주로 뒤쫓아 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의 행방을 모르니, 필시 신이 대답한 말 때문에 겁을 먹고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신임 병사가 갔을 때에 마땅히 인신(印信)을 교부(交付)해야 하였는데 그의 행방을 몰라 찾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바닷가로 도망가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비록 힘써 싸웠으나 그 마지막이 이러하니 그 미혹됨이 너무도 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 지방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에 왜적을 죽인 공이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지금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정홍명(鄭弘溟)은 변란을 듣고 즉시 왔는데 길이 막혀서 행조(行朝)에 도달할 수 없어서 마침내 감사 및 신과 함께 상의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켰습니다. 감사도 군기(軍器)를 주어서 특별히 도왔으며 승군(僧軍)도 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후원(後援)을 하고자 하였는데, 또 밤의 경보(警報)로 인해서 그들도 도망갔으므로 밤낮으로 애통해하며 울었을 뿐입니다. 대체로 노성(老成)한 사람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서 죽으려 하였는데, 연소한 사람들은 의분을 일으켜 분발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호남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이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국가에서 믿는 바는 오직 삼남뿐인데 호남 사람들의 행위가 지금 이러하니, 어찌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무지한 백성들은 진실로 꾸짖을 것이 못 됩니다. 아무리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학식(學識)이 없기 때문에 군부(君父)가 포위 상태에 있는데도 달려가 구원하게 할 수 없으니,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으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 사람들이 매우 가상하다.”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영남의 군대는 끝내 흩어진 자들이 없었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믿는 바는 양남(兩南)이 똑같은데, 이번 일에서 호남은 이러했으니 어찌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난민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망극한 화가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보고한 - 원문 빠짐 - 또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수령들은 부득이 피난한 자들일 뿐이니, - 10여 행 원문 빠짐 -

김광혁이 아뢰기를,

“신이 작년에 내려간 뒤에 여러 곳의 군기를 모두 점열(點閱)하니, 각 고을 사람들이 적간(摘奸)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 수리하였으므로 군물(軍物)이 모두 지극히 정밀하였는데 조총(鳥銃)이 더욱 정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군기를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모두 잃었고 진중(陣中)에 수송하다가 또 모두 잃어서 지금은 각 고을에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니, 매우 애석합니다. 패전한 군사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을 듯하지만 싸우지 않은 자들도 잃어버렸다고 하니, 이것은 일이 수습된 뒤에 추문(推問)할 수 있으므로 신이 또한 수령에게 이것을 말하고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 사람들은 본래 경박하고 진실하지 못하지만 사대부들은 자못 선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이와 같단 말인가?”

하니, 김광혁이 아뢰기를,

“사대부들 중에 나이가 많은 자들은 모두 경상(境上)에 모여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젊은이들 중에는 그런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교화가 밝지 못하여 사람들이 학식이 없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안방준(安邦俊)은 보성(寶城) 사람으로 70살의 늙고 병든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성으로 모집하여 앞장서서 향병(鄕兵)을 거느리니, 그 수가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늙고 병들어서 난리에 달려갈 수 없었으므로 경상에 와서 정홍명에게 의탁하고자 하였는데, 정홍명의 군대가 흩어지고 난 뒤라서 이 군대를 거느리고 단신(單身)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상에서 방황하며 끝내 큰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체로 지방의 풍속이 매우 악하여 인심이 불선하므로 비록 주창하는 자는 있지만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중영(中營)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에 - 원문 빠짐 - 포위하고 무도한 말로 무수히 꾸짖고 욕하면서 거의 죽일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 원문 빠짐 - 으로 흉악한 일을 행하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스스로 국사를 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 원문 빠짐 - 막아서 망치고자 하니, 너무도 분통이 터집니다.”

하였다. 마침내 물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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