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합동묘역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져 있는 까닭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 사이 국군 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 지역에서 주민 18명, 모두 719명의 주민이 학살되었다.
그 중에서 중유리, 대현리, 와룡이 주민 800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감금하고 군인, 경찰, 방위대 가족을 제외시킨 517명을 박산골에 끌어넣고, 총으로 잔혹하게 학살을 하여 나무로 덮고 기름을 뿌려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군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현장 접근을 못하게 막아 3년여를 방치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1954년 4월 5일에서 7일 사이에 박산계곡에 방치되어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려니 살은 녹아내리고 유골로서는 身元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큰 유골은 남자, 중간유골은 여자, 작은 유골은 소아로 분류하여 유족들의 애끓는 통곡 속에 화장하여 이 곳으로 옮겨 남자의 묘, 여자의 묘, 소아의 묘로 합동묘역을 조성하였다.
그 후 변영재 신원면장과 김희주 면의회 의장이 신도성 경남지사에게 진정을 하여 위령비 건립비로 50만환을 지원 받아 1960년 11월 18일 유족들과 면민 각계의 협조로 위령비를 제막하였다.
그런데 5.16 군사쿠테타 군은 유족회 간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잡아 가두고 새로 부임한 최갑중 경남도지사는 개장명령을 내려 거주지 공동묘지로 이장하라 하여 유족들이 부모, 형제 유골을 찾아달라는 요구에 묘역을 파헤쳐 뼈가루가 섞인 흙 한 줌으로 분배하였으며, 위령비를 철거하여 비문을 정으로 쪼아 땅 속에 파묻어 버리는 제2의 만행을 저질렀다.
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면서 왜곡된 역사는 조금식 제자리를 찾기 위해 1967년 8월 20일 파헤쳐진 묘역 천수나 피하게 복구를 하였고, 1988년 2월 15일 땅 속에 묻혀 있는 위령비도 파냈다.
윌여비 글자가 지워져 쓰러진 체 현장보존하는 것은 믿기지 않은 후대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기 위함이다.
(사)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월여산 산행 연계 거창사건추모공원 답사
20150117 토
산청IC에서 신원면방향으로 가다가 추모공원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900m 정도 더 가면 좌측으로 그 현장을 보존했다.
그 곳에서 하차하여 답사하고 되돌아와서 추모공원을 보고는 월여산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월여산은 몇 년 전에 원점회귀코스로 다녀 왔다.
그 때도 아쉬우믕ㄹ 남긴 곳인데 이 곳을 볼 기회를 가까스로 만들었다.
월여산을 다시 찾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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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1949년 6월 5일에 조직했던 대한민국 반공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성립 배경
이 단체의 성립은 일제강점기시기 친일 전향단체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1948년 12월부터 시행된 국가보안법과 관련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전향자들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 감시할 기관이 필요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사상 검사로 유명하던 선우종원과 오제도가 결성 과정을 주도했다.[1]
국민보도연맹증(앞·뒷면)
초대 간사장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의 조직부장 출신인 박우천이, 초대 회장은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공산주의 운동가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내려왔다가 전향한 정백이 맡았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주로 남로당원 등 좌익 인사들이 가입되었으나, 지나친 가입 독려탓에 좌익이 아닌 일반 농민들도 가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최근에는 10대인 중ㆍ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것이 밝혀짐에 따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 강제적 가입'으로 인해 많이 생겨났음이 밝혀졌다.[2]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은 지역마다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면책의 약속과 달리, 일단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가며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 불참하거나 달아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3]
보도연맹에는 남로당원이었다 전향한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활동 강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등이었다. 연맹원들은 지하의 좌익분자 색출과 자수 권유, 반공대회와 문화예술행사 개최를 통한 사상 운동 등 실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보도연맹은 반정부 좌익 세력을 억제하여, 이승만 정권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학살 배경
이 부분의 본문은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및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가담이나, 기타 부역행위를 우려하여 전국에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전쟁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 60만 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4] 경찰청 과거사 위원회는 경찰 전산자료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당시 최소 민간인 1만7천716명이 학살됐으며, 이 중 3천593명 이상이 보도연맹원이었다고 발표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등 민간단체들은 "6만명의 보도원이 학살됐다는 증언과 자료를 확보했으며 실제 희생자 수는 2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부 우익단체는 유사시 보도연맹 내의 위장 전향 좌익세력들이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부역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들을 대량학살한 이유는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보도연맹의 대표적인 전향인사로는, 1949년 체포된 후 전향하고,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이 되어 반공활동을 하다, 1950년 북한 보위부에 의해 총살된 정백을 들을 수 있다.[4][5] 그러나,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중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관리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6]
학살은 주로 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단)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다. 도시 인근의 야산이나 바다 혹은 폐광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학살 방법은 주로 총살형이었으며 이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녀자(야밤에 갑자기 밖으로 모두 모이라는 지시에 아무런 준비없이)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일제 순사출신의 군,경 간부는 소지하고 있던 일본도를 이용하여 참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거제, 통영 지역에서 참수된 시체가 강한 조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가로 떠밀려가 지역 신문에 기사가 난적도 있다.
전후 피해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진상 조사 요구가 받아들여져 1960년대 국회의 '양민학살사건 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정적이나마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5.16 군사정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전의 조사 내용및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가족 대표들을 국가 보안법으로 처벌하였다. 따라서 학살 피해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현재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에 관해 미약하나마 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참고자료
김현기 (2006년 12월 1일). 국민보도연맹. 국가기록포털. 2008년 4월 18일에 확인.
주석
1.이동 ↑ 강지웅 외 (2006년 9월 25일). 〈3. 헤어나지 못한 굴레, 레드 콤플렉스 - 잊혀진 대학살, 보도연맹 (이채훈)〉,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 한국현대사 미스터리 추적》. 서울: 해냄. ISBN 978-89-7337-771-8
2.이동 ↑ 보도연맹사건 '10대도 학살' 공식 확인돼
3.이동 ↑ 박헌영 평전, p499
4.↑ 이동: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0쪽
5.이동 ↑ 한지희 《역사비평 제 35호,》 중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학살,(역사비평, 1996년 겨울호) 302쪽
6.이동 ↑ 보도연맹 가입자가 무려 30만명 넘었는데, 이들 가운데 좌익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 가족 중 월북자나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있었으며, 평범한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나눠주거나 비료를 주는 조건으로 가입도장을 받아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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