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기산면 평복리 깃대봉 관호봉 20220308 (화)
칠곡 기산면 평복리 깃대봉 관호산 20220308 (화) (R)
코스 : 평복1리 - 동천박선생신도비 - 174봉 - 332봉 - 깃대봉(310) - 354봉 - 평죽갈림봉 - 평죽봉(320)왕복 - 방화봉(317)왕복 - 큰재만당골 - 배석재 - 332봉 - 삼우봉(315) - 관호산(328) - 죽전봉(305) - 삼주아파트샛문앞 - 반상골노인회관 - 지하도 - 호국의 다리(구 왜관철교) - 북부버스정류장 - 왜관역 <15km/4:50>
시간별 이동 경로
시각/경과시간/위치
9:20 0:00 평복교
9:25 0:05 박씨신도비
09:46 0:26 173.5봉
10:10 0:50 바위
10:19 0:59 331.5봉
10:33 1:13 삼각점
10:35 1:15 깃대봉(310)정상
10:54 1:34 354.4봉
11:10 1:50 평죽봉(320) 정상
11:41 2:21 방화봉(317.1)정상
12:13 2:53 큰재만당골
12:18 2:58 배석재(삼주아파트1.5km)
12:27 3:07 332봉
12:36 3:16 삼우봉(314.6)
12:45 3:25 관호산아래재4거리
12:56 3:36 관호산(326)정상
13:14 3:54 헬기장
13:16 3:56 죽전봉(305),산불초소
13:17 3:57 이정표 [삼주아파트 1.32, 비룡산 5.59, 배시기재(배석재) 3.07, 성모병원 1.00]
13:35 4:15 삼주아파트쪽문(산불초소1.32,비룡산6.91)막힘
13:43 4:23 관호3리반상골 경로당
13:48 4:28 칠곡교회앞 지하통로 횡단
13:49 4:29 호국의다리
14:00 4:40 왜관북부버스정류장
14:08 4:48 왜관역
교통편 : 화명-왜관 0716-0850
왜관역 - 평복1리 / 택시 4.1km/7,100/탑승시간 d0900-0910/경북12바5115/0549710417
왜관역 - 화명 : 1502-1645
고도표를 보아도 크게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코스다.
GPX 트랙 파일 첨부 :
평복1리 입석의 측면에 기록된 '3.1운동 독립만세마을' 안내
정면은 우측의 작은 사각형 내에 있는 모습이다.
광복회 칠곡군 지회가 2019년11월에 세웠다.
그 당시 회장이 바로...김ㅇㅇ 아냐??
-----
이 비에 새겨진 이름들은 7명이다. 왜 그럴까.
장상흠, 박수병, 박수환, 지하수,
권군필, 김동술, 김봉근 뒤의 3명은 디지털문화대전에서 검색 결과 미확인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장상흠[張尙欽] 1895년 12월 20일에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평복동[현 기산면 평복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던 4월 9일, 평복리 마을 청년들과 동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체포, 태(笞) 90도(度)형 받음.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1919년 3·1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칠곡군에도 인동과 북삼·약목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장상흠은 기산(岐山) 지역에서 지하수(池夏洙)와 함께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같은 해 4월 9일 밤 9시 쯤 마을 청년 12명이 동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지하수 등 6명이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장상흠은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 받고 공소(控訴)하여,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태 90도를 받고 풀려났으나 장독(杖毒)으로 1년 만에 순국하였다.
박수병[朴洙丙] 1894년 5월 9일 칠곡군 약목면 평복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던 4월 9일, 평복리 마을 청년들과 동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체포, 태(笞) 90도(度)형 받음.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칠곡군에도 인동과 북삼·약목면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지하수(池夏洙)와 함께 기산(岐山) 지역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9일 밤 9시쯤 청년 12명이 마을 동산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주동자 지하수 등 6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를 하여,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박수환[朴洙煥] 1896년 11월 22일에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던 4월 9일, 평복리 마을 청년들과 동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체포, 태(笞) 90도(度)형 받음.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칠곡군에도 인동과 북삼·약목면에서 사건이 일어나자, 지하수(池夏洙)와 함께 기산(岐山) 지역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4월 9일 밤 9시쯤 청년 12명이 마을 동산에서 만세시위를 하고 지하수 등 6명이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控訴)를 하여,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지하수[池夏洙] 1889년 2월 10일에 칠곡군 약목면[현 기산면] 평복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던 4월 9일 평복마을 청년들을 선도하여 동산에서 독립만세 고창, 체포, 징역 6월형.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칠곡군에도 인동과 북삼·약목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지하수(池夏洙)는 인근 마을 청년들에게 기산(岐山) 지역에서도 호응하자고 역설하였다.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먼저 마을의 청년들부터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4월 9일 밤 9시쯤 청년 12명이 마을 동산에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이 일로 지하수 등 6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控訴)하였으나, 12월 13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림은 평복1리의 다른 이름이며, 삼우실은 평복2리의 다른 이름이다.
대한의사운암권영달공유적비/자 성칠, 호 운암
1919년 기미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갑자년(1924)에 향년 34세로 세상을 떠난 분이라
비문의 머릿글이 대한의사였던 것.
일제의 뼈를 꺾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의 회복을 삼창했다고 한다.
그 젊음의 패기를 지금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걸까.
침묵이나 아부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돌이 되거라
소리지르는 돌이....
아쉽게도 이 비의 주인공의 이름을 디지털문화대전에서 검색 결과 확인 못함
이 비석이 들머리가 된다.
이 비석은 함양박씨의 가족묘역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 가계의 것이리라
'동천박선생신도비'
신도비의 내용을 볼 겨를 없이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넘어간다.
이후 만나는 대부분이 함양박씨의 묘이다.
'함양박씨'와 '칠곡', '동천'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는
나중에 웹 검색으로 찾은 자료를 아래에 첨부한다.
알고 보니 지난 2월 12(토) 도고산과 이어지는 영암지맥을 거쳐 산행할 때
하산지점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효자박씨려각'을 확인해보지 못하고 지난 일이 생각난다.
바로 그 효자 이야기인 셈이다.
박구[朴矩]
조선 전기 칠곡의 효자.
본관 : 함양(咸陽)
호 : 동천(東川)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는 함양박씨,
성주군 선남면 오도종마을에서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입향한 송천(松泉) 박철산(朴鐵山)의 후손,
개성부윤 박원택(朴元擇)이 아들.
가문은 당상관의 현관무장(顯官武將)을 배출한 명문이었으나 대대로 청빈하여 가세가 곤궁.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땔감과 돗자리를 짜 팔아 병환으로 고생하는 어머니께 효성을 다 했다.
13세 때 어머니의 병환을 보살피느라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을 지나가는 걸인이 보고 구걸한 쌀을 보태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여막(廬幕)을 지어 3년간 시묘(侍墓)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그 후 벼슬이 당상관까지 이르렀으나 사후(死後) 연산군 때 모함을 받아 자손들은 칠곡군 기산면 등지로 피신을 나와 살게 되었다.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성리.
중종 때 비로소 신원(伸冤)되어 효자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게하고 “三年居慮 一不到家”의 어필(御筆)을 하사해 널리 포양(褒揚), 명종(明宗)은 매년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 정려각과 묘소는 성주군 선남면에 있고 흥효제와 신도비는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있다.
주능선의 산길은 무난하다
깃대봉 직전의 332m봉
307.8m 삼각점
왜관 411번, 307.8m 삼각점
여기가 깃대봉이다.
깃대봉 정상부에 있는 묘 1기
기미년 4월 9일에 그 투사들이 올랐던 봉우리가 이 깃대봉이었을까..
아니면 마을 동쪽의 관호산이었을까.
그렇지도 않으면 내가 밟은 곳,
밟지 않은 곳일 수도 있으려나.
깃대의 이름 때문에 추측해보는 것이다.
동산을 동쪽이라면 관호산도 유력한 후보지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북서에서 남동으로 흘러 내리는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이 양방향으로 나 있으니
그럴 법도 한 이야기다.
깃대봉, 등산지도에서는 310m로 표기,
깃대봉에서 가야할 354m봉이 앞에 높게 막아서고 있다.
354m봉
무전방으로 평죽봉이 숲에 가려 보인다.
악간 거친 길이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평죽봉, 지도에는 320m로 표기되어 있다.
철탑있는 곳에 방화봉이다/317m
거친 길을 왕복으로 이동해야 한다.
주능선으로 올라 오면 다시 길은 양호하다.
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지도상의 큰재만당골이다
하늘에는 헬기의 왕래가 잦다.
산불이 난 곳을 다녀오는 것 같다.
곧 배석재까지 이어진다.
저 앞의 산길은 관호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역까지 나 혼자 걸었다.
평복마을로 하산하는 길
사실 역까지는 이 길이 더 멀다.
단지 평지라는 이점이 있다.
이 길은 반대편으로 내려 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이 길이 오히려 편한 길이다.
구미쪽에서 왜관으로 연결되는 버스가 제법 다니고 있다.
삼주 아파트까지 약 4.5km 거리다.
배석재에서 약 500m 정도되는 거리다.
깃대봉 방향의 능선보다 매우 순하다.
삼우봉 314.5m, 좌로 약간 비켜 있어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일단 올라서면 바로 진행하여 경로를 이탈할 우려도 있다.
앞에 보이는 관호산
관호산 정상부의 교통호 설치물들이 보인다.
2018.12.5에 다녀온 관호산둘레길의 산을 백포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을 관호산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평루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 정상인가.
지금 지도를 보니 그곳을 백포산(109m)로 표기하고 있다.
헬기가 날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불로 인해 하늘길도 비상상황이다.
미군 헬기도 이번 산불진화에 나섰다고 한다.
산불초소가 있는 죽전봉(305m)이다.
이 초소에는 매우 젊은 남성이 경방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지나간 R도 그를 보았는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았다고 하는데,
내가 접근할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끄기야 했지만 이게 우리 나라의 현실인것 같다.
지금도 산불을 진화하느라 수고하는 이들이 있고
산불로 집을 잃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군인이나 공무원이나 위정자들 모두 얼마나 해이해 있는지 알만하다.
선관위의 해이함은 정말 절정에 달했다.
치밀한 사전 계획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닌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배석재에서 삼주아파트가 약 4.5km였는데 거의 다 온 것 같다.
초소 부근의 길은 바닥에 판초 같은 게 깔려 있다.
길은 선명하다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한다.
길은 트랙을 따라 잘 내려 왔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막혔다.
트랙은 아파트 옆의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성모병원 방향은 경사가 급하기에 삼주아파트 방향으로 잡았는데, 아파트 철망 문앞에 이정표가 있으나 들어갈 수 가...
다른 길 안내도 없었다.
희미한 발자국들이 마지막의 산비탈길을 지나 밭을 경유해서 나갔다.
칠곡군에서는 하산길을 바꾸어 안내해 주었으면 좋겠다.
밭에서 밖으로 나가니 내일이 20대 대통령선거일이라 선거홍보물들이 붙어 있다.
아파트의 관리를 위해서 행한 조치이겠지만 뒷맛이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도로를 횡단하면 곧 호국의 다리로 이어진다.
호국의 다리로 명명된 이 다리는 육이오 때 폭파되었던 다리다.
왼쪽의 산은 작오산이다.
왜관북부버스정류소
왜관역에서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