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천을산 우산 고산 고산서당 20211127 토
대구 천을산 우산 고산 고산서당 20211127 토 솔로(K)
코스 : 고산농협 건너 정류소-공병 제5기 육이오참전 기념비-천을산체육공원-천을산(150,정자,삼각점)-우산(123)-도로, 농로 이동-저수지-고산(95)-대숲-등산로 폐쇄 수준으로 막힘-성동마을로 하산하여 좌로 도로 따라 고산서당-성동앞 정류소에서 종료<8km/3:30>
719번 버스/성동 앞-북부행정복지센터 정류소 하차-330m 이동하여 남매지/민물박사 매운탕 경산점 식사-도보로 남매지 서변-경산시청-경산역-성암산 들머리 주변-경산역
천을산 우산 고산 GPX 트랙파일 첨부 :
고산농협창고 건너 정류소(바로 직전에 2호선 고산역이 있다)에 하차하여 출발,
좁은 샛길에 들어서면 앞에 죽림사가 보이는데, 죽림사는 저쪽 울타리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다.
지도를 보고 예상한 바와 같이 이 길은 첫부분이 매우 가파르다.
이 부분이 고산초등학교 행정재산이라고 한다.
참전기념비 안내문//174명의 동기생들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도착하는 시각에 이 현충시설에 도착하여 비질을 하는 분이 있었다.
고맙기도 하다.
참전기념비라는 말 대신에 '이곳에서 자랐다'
고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는 말인가 싶다.
고산초등학교와 천을산은 떼어서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대구 고산초등학교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에 있는 공립초등학교로 1931년 개교하였고,
1945년 광복 전부터 있었던 유서깊은 초등학교로 22000명이 넘는 졸업생이 있다.
기념비의 사면에는 입대하게 된 이야기와 17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천을산 정상의 정자, 그 아래에 삼각점이 있다.
이 산에는 체육시설도 곳곳에 있다.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고모동산 이팝나무는 고모역 건너편의 길 고모 마을 아래쪽 부근이다.
천을산 정상 해맞이 동산
천을산 정상의 삼각점
전망대에서 해안, 안심 방향 조망, 중간에 높이 보이는 곳이 아마 환성산일까..
천을산의 북쪽은 그냥 낭떠러지다. 그래서 나무로 울을 친 모양이다.
또 전망대를 만난다.
정자가 있는 곳도 제법 높은데, 이름이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천을동봉 정도 될까.
우산으로 가기 위해 내려가는 길, 고도차가 크지 않아.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고산중학교로 내려가는 길이다.
고산중학교는 2003년 개교하였고, 16회 졸업까지 6400명의 졸업생이 있고, 입학은 19회였다. 학교홈페이지의 학교 연혁에 졸업 횟수에 오타가 있는데 16회를 165회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15회를 복사하여 붙이기 하여 수정하면서 실수를 한 것 같다.
그런데 11월 말이 되도록 그냥 있으니 이건 좀 관리가 부실하다.
하기야 나도 수없이 많은 오자와 띄어쓰기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산으로 가는 길은 공원길은 아니다.
우산 정상에는 이런 잠복호 시설이 남아 있고 정상표지도 없다.
우산에서 내려서는 길도 급경사. 바로 아래에 도로가 지나간다.
우산에서 마지막 내려오는 길이다.
앞은 약간 한산한 도로가 있다.
앞의 굴다리를 좌로 돌았다가 다시 교각 밑으로 우로 돌아야 징검다리를 밟고 건넌다.
징검다리라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자전거를 끌고 가기에도 불편이 없을 정도다.
건너편에 자전거길이 있으니.
성동 방향으로 간다.
고산 가까운 들자락에 통신시설이 하나 서있는 곳을 기준으로 우로 돌았다가 좌로 들면 고산길에 접어든다.
모산지, 고인 물이 맑지는 못하다. 못둑을 지나면 바로 산길이다.
모산지에서 바로 산길에 들면 이전의 산들보다 길이 뚜렷하지는 않다.
이쪽은 좀 나은 편이다.
정상 부근으로 갈수록 길은 잡초 덩굴로 등으로 거칠어진다.
지도상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적당한 등로가 없다.
반시계방향으로 180도 정도 돌면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이다.
정상 부근은 거의 잡초에 둘러쌓여 있다.
고산 길의 첫부분은 그런대로 뚜렷하다.
점점 길은 희미해진다.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돌로 쌓은 구덩이는 눈을 끌지만 알 수는 없다.
어린 시절에 우리 동네에 한 집 있던 땅집이라는 집의 모양 비슷하다.
들어가는 길은 약간 경사지고, 안쪽은 모가 적은 사각형이거나 원형.
바닥은 편평했는데, 지붕은 짚으로 엮은 원뿔기둥 모양이었다.
이것도 그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옛 집터?
아니면 물을 모아두었던 웅덩이?
물웅덩이가 되기에는 여건이 맞지 않는 편이다.
여기가 지도상의 고산 정상부다.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고, 좀전에 바로 아래서 보았던 그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는데 저 웅덩이에서 제거한 걸까.
고산서원을 찾으러 왔다가 덤으로 거친 고산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내려가는 길에 그 돌담 웅덩이를 다시 한 번 보고 간다.
물 웅덩이는 아닐 것 같다.
고산 정상에서 내려와서 막힌 등산로, 이 농장이 막아버렸다.
결국 우회하여 길을 뚫었지만....
길도 없는 길을 트럭과 승용차가 올라와 있는데 자기 농장의 관리를 위해 온 듯하다.
잡목을 헤치고 지나간다.
다음지도의 등산로와는 다른 길의 흔적을 따라 헤쳐나가는 수 밖에 없다.
스산한 대밭 옆의 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이미 지정된 길은 포기한 셈이다.
묘역은 깨끗한 편이다.
그런데 들어갈 길조차 탱자나무로 막혀 있다.
성동이 마을길에 내려섰지만 아직도 바로 갈 길이 있을까.
마을에서 좌로 돌아 산의 북측 벼랑 옆으로 난 묘도가 있어 올랐지만 여전히 가시덩굴과 잡초가 막아 진입을 불허.
서원 방향으로 길이 있을까 보았지만 도저히 진입할 수 가 없어 좌로 돌았더니
묘도와 이어지는데 길은 또 잡목으로 막혔다.
알리바바의 바위문을 여는 주문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주문으로는 맹탕이다.
바닥에는 잘 익은 탱자들만 수두룩하다.
고난의 가시밭길인가.
위리안치의 형을 가할 때 주위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지.
결국 산에서 내려오는 한 주민을 만났는데
서원으로 가려면 마을길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산길은 결국 핯하책인 셈이다.
옷에는 '도둑놈의 갈쿠리'가 번식을 위해 발악이다.
탱자 한 알을 주웠다.
사자성어 하나가 떠오르기에 높이 들어 보았다.
귤화위지
귤화위지[橘化爲枳]/귤이 탱자가 됨
(橘 : 귤 귤, 化 : 화할 화, 爲 : 될 위, 枳 : 탱자 지)
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되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 고사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안영(晏嬰:晏子는 경칭)은 중국 역사상 드물게 보는 명 재상(宰相)이다.
세 명의 왕(靈公·莊公·景公) 밑에서 재상을 지냈지만 절검(節儉)과 역행(力行)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재상이 된 뒤에도 밥상에는 고기 반찬을 올리지 않았고 아내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고, 조정에 들어가면 임금께서 묻는 말에 대답하되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품행을 조심하였다.
또한 유창(流暢)한 달변(達辯)과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도 유명하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해, 초(楚)나라의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하였다.
초(楚)나라 영왕은 인사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나라에는 사람이 없소? 하필 경(卿)과 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낸 이유가 뭐요?"
안영의 키가 작은 것을 비웃는 말이었다.
초나라 왕은 당시 제나라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이런 심한 농담을 함부로 해댔다.
안영은 서슴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그 까닭은 이러하옵니다. 우리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즉,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보내고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오게 된 것이옵니다."
안영의 능수능란(能手能爛)한 말솜씨에 기세가 꺾인 영왕은 은근히 부아가 끓어올랐는데, 마침 그 앞으로 포리(捕吏)가 제나라 사람인 죄인을 끌고 가자 영왕은 안영에게 들으라고 큰소리로 죄인의 죄명을 밝힌 다음,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을 잘하는군."
안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로는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嬰聞之 橘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영문지 귤생회남즉위귤 생우회북위지)].
잎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과실의 맛은 다릅니다.
[葉徒相似 其實味不同(엽도상사 기실미부동)].
그러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물과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所以然者何 水土異也(소이연자하 수토이야)].
지금 백성들 중 제나라에서 나고 성장한 자는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나라로 들어오면 도둑질을 합니다.
초나라의 물과 땅이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성인(聖人)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오. 과인(寡人)이 오히려 부끄럽군요."
제나라 출신의 죄수를 안영에게 보여 줌으로써 안영의 명성을 눌러 보려던 초왕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 탱자가 많은 것은 무슨이유인고...
고산서당[孤山書堂]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城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이다.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이곳에서 강학한 바 있으므로 150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당 뒤편의 옛 사당터에 이황과 정경세의 강학유허비(講學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3량가(三樑架)로, 막돌 덤벙주춧돌 위 정면 가운데 1주(柱)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으로 세운 간결한 민도리집 형식이다.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 명종 때에 지방 유생들과 윤희렴(尹希廉)이 재실을 짓고 이황에게 재호(齋號)를 청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라고 한 친필을 받았다.
당시 구도라고 쓴 편액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5년(선조 38)에 중건하였다.
1607년(선조 40) 정경세가 대구부사로 있을 때 강회를 열었는데, 이때 당(唐)의 도독(都督) 이성삼(李省三)도 수강하였다고 한다.
1690년(숙종 16)에 서원을 창건하여 고산(孤山)이라는 원호(院號)를 사용하고, 이황과 정경세를 배향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강당과 동재 및 서재를 건축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문루를 세우고 연안인(延安人) 김재구(金載久)가 기문(記文)을 택하였다.
1822년(순조 22)에는 위패를 잃어버려 개조하여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된 이후 1879년(고종 16)에 지방 유림들을 중심으로 강학계를 조직하여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다.
1964년에 중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산서당 [孤山書堂] (두산백과)
충의추모비 아랫 부분에 보니, 임란창의, 이인좌의 난 때 동학난 때 활약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충의추모비 옆이 고산서원이고, 뒤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와 옛서원의 사당이 복원되어 있다.
이름 붙인 나무 / 이황 나무, 정경세 나무
이황[李滉]
저서 : 심경후론, 역학계몽전의,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자성록, 송원이학통록
대표관직 : 단양군수, 풍기군수,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이황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이황을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이황은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이황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이황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였으며,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게 답해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하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大學經)』 1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이며,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 이황은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상훈과 추모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 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 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이황을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황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이황의 생시(生時)와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되어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9년 126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이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 뿐이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해 이황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이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황이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이황을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야마사키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이황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이황을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 없이 이황을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주자가 작고한 뒤 ……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황 [李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퇴계 이황[退溪 李滉]
출생 - 사망 : 1501년(연산군 7년) ~ 1570년(선조 3년)/조선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선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이 살아간 16세기는 조선 지성사에서 볼 때 사림(士林)의 성장기로 규정할 수 있다. 계속적인 사화를 겪는 과정에서 사림의 학문은 성숙하고, 학문하는 과정의 치열성은 사림의 세를 전국적으로 확장하게 만든 것이다. 사(士)란 성리학을 전공하여 그 이념을 자기화하고 실천하는 선비이며, 사림이란 선비의 복수 개념이다. 이들은 선비로서 수기(修己)하고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어 치인(治人)하는 것을 정로(正路)로 삼았다. 그러나 이황이 19세 되던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그의 평생을 소극적인 처세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황의 처세를 파악하고 그 학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성리학이 조선에서 자리잡는 과정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왕조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학(國學)으로 삼고 성리학적 이념을 국시(國是)로 천명했지만 새로운 외래 사상인 성리학을 소화하여 자기화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했다.
호학(好學)의 군주인 세종대왕은 부왕인 태종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안정된 왕권을 기초로 문치(文治)를 하기 위한 연구소, 즉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국가에서 학문을 진작하고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세종 사후 단종을 폐위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 사실에서 보이듯이, 아직 학문적인 이해가 미흡한 상태에서 이질적인 사상 간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성리학을 자기화하여 의리를 지킨 원칙주의자 그룹과 세조에게 추부한 현실주의자 그룹으로 노선 분립을 했다. 왕권 강화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세조에게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인 성리학을 추구하는 집현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당유학(漢唐儒學)이나 불교를 복구하려는 조치가 나온 것도 이 시대에 여러 사조가 혼재하면서 검증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퇴계 이황 [退溪 李滉]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정옥자)
정경세[鄭經世]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예론에 밝아서 김장생 등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다.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경세 [鄭經世] (두산백과)
이황과 정경세의 강학유허비(講學遺墟碑)
마을 앞에 큰 공사가 있다.
깊게 파 낸 바닥은 바윗돌이 깔려 있어 힘든 공사가 될 것 같다.
성동1교를 지나 경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버스가 자주 있는 편이다. 일일 99회 운행하는 980번 버스와
89회 운행하는 719번이 있는데, 719번을 타고 남매지 앞의 북부행정복지센터에서 하차하여
남매지에서 식사와 남매지 둘레를 반바퀴 정도 돌아볼 생각이다.
남매지의 잔잔한 물에 바친 산그림자를 보니 수면이 거울 같다.
남매지의 전설
조선시대 아버지의 빚을 갚고자 부잣집 종으로 들어간 오누이가 빚을 갚지 못하자 첩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에 동생은 돈을 얻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원급제를 하였는데, 누이는 그 사이 정절을 잃을 지경에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귀향한 동생은 충격에 빠져 연못 속으로 빠져들었다.
후에 마을 사람들이 이 둘을 기리기 위해 남매지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출처] [경산 가볼만한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