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원동면 '중리동산', 밀양 삼랑진 '까치머리봉(시루봉)' 20210319 금
양산 원동면 '중리동산', 밀양 삼랑진 '까치머리봉(시루봉)' 20210319 금 솔로(R,K)
코스 : 중리마을회관-궁둥이바위-마당바위봉(333)-중리동산(388)-까치머리봉(시루봉239)-검세리,작원관지-작원잔도길/자전거길-중리마을/용연,용정(용샘), 마을회관 <12.8km/6:35>
07:25 가출
08:25 중리하차
08:34 들머리
08:50 102m봉, 잠복호/시멘트시설
09:03 궁둥이바위
09:15 장척산, 석룡산, 신어산 조망
09:35 338m봉
09:39 334m봉,마당바위산, 돌탑, 산길삼거리
09:45 까치머리 조망, 능선 험로가 이어짐
09:54 바위 점프구간
10:08 전망 바위에서 휴식
10:20 톱니바위/ 좌측에 고릴라바위 전망대
10:32 중리동산(388m), 천태산, 천태호, 천태사 조망
10:26 373m봉(네이버지도)에서 까치머리방향으로
10:43 까치머리 조망
10:46 험로 이어짐
11:00-11:35 까치머리 앞에서 휴식, 간식
11:35 까치머리 좌 접근 시도 위험, 우로 회전
11:55 까치머리 정상(시루봉239m)
12:05 내려와서 우측 돌아 보고
12:07 줄친 경사로 조금 내려서다가 올라가서 트랙 따름
12:23 작원관 최초터 조망
12:42 철계단 횡단
13:02 작원터널 위 무덤
13:07 터널위 횡단, 검세리로 이동
13:15 작원관지 돌아보고
13:31 검세리 지하통로
13:40-13:50 정자에서 휴식
14:05 철로 터널 옆 수직 암장의 총안(?)
14:07 작원잔도 흔적
14:21 정자에서 휴식
14:51 중리자전거쉼터
14:54 중리 연꽃데크공원
14:58 용샘
15:01 중리마을회관/종료
승차하여 가야진사로 이동
가야진사 휴식, 조망
원동역으로 이동 식사
17:03 귀가
GPX트랙 파일 첨부 :
이 코스는 국제신문의 안내에 따랐다.
근교산&그너머 <1218> 양산 시루봉~작원잔도
천태산 최고 산길, 떡 시루 닮은 암봉…낙동강 조망 끝판왕
경남 양산과 밀양 경계에 솟은 천태산(630.9m)은 천태암산이라 불렸는데 이는 크고 작은 바위가 태산같이 포개어진 바위산에서 유래했다. 천태산은 영축산(1081.1m) 천성산(920.7m)과 함께 양산 3대 명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 보니 천태산은 안태리 안태호, 행곡리에서 금오산(766m)과 연계하는 밀양 삼랑진 쪽 산길보다 용당리 천태사, 비석골, 당곡마을, 내포리 함포마을 등 양산 원동에서 오르는 산길이 더 다양하다.
시루봉(239m)~작원잔도(鵲院棧道) 산행 코스
시루봉은 헌걸찬 바위 봉우리로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다 해서 삼랑진에서 불리며, 원동과 강 건너 김해에서는 노적가리를 뜻하는 노적봉(露積峰) 또는 노적바위로 부른다. 아직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데다 바위산이라 안전에 유의해야.
작원관은 낙동강 가의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를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던 곳, 임진왜란 때는 밀양 부사 박진 장군이 배수진을 치며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패한 장소. 경부선 철길로 인해 작원관은 199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 작원잔도는 작천잔도라 불리는데 원동 중리마을에서 삼랑진 작원(까치원 혹은 깐촌)마을에 이르는 낙동강가 벼랑길을 말한다.
중리마을회관에서 돌아 나와 주차공간/산길 입구~송씨 묘~102m봉~궁둥이바위전망대~장씨 묘~333m봉~암릉~고릴라 얼굴전망대~시루봉 갈림길~시루봉전망대~시루봉 정상~검세터널~작원마을~작원관지~작원양수장~작원관 최초 터~작원잔도 옛길~중리마을 자전거 쉼터~중리마을회관 <원점회귀>
<약 10㎞/5시간 내외>
도착후 마침 버스가 들어왔다가 바로 나간다.
중리마을회관, 마을은 종료 후에 둘러보고..
강건너편은 도요리, 높은 산이 무척산, 중앙에서 약간 좌로 희미하게 무척산고당봉과 이어진 봉우리들이 보이고
오봉산, 토곡산, 천태산의 비석봉줄기가 차례로 다가온다
중앙에서 약간 우로 평평하다가 솟아오른 곳이 있는데 평평하게 보이는 곳은 신어산인 듯 한데, 튀어오른 부분이 서봉인가 했더니, 약간 시비가 있었으나, 지도와 방위로 비교복기해 보니 신어산 서봉이 확실시 된다.
보는 방향이 매우 바뀌었는데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운데 솟아오른 봉우리가 마당바위봉이며 양쪽 능선의 길이 만난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궁둥이바위가 보이지만 아래 자전거길에서 보는 모습보다는 별로..
바로 옆에서 보는 궁둥이 바위는 한짝만 보이는 정도, 미끈하던 모습은 사라진 것 같다.
가운데부분이 108m봉이고 우측 골짜기의 마을이 중리마을이다. 좌 금동산, 우 석룡산, 그 사이에 보이는 산이 신어산이 분명하다. 여기서 서신어산 12.7km, 신어산 12.1km로 우에서 좌로 배치되어 있다.
돌탑이 있는 마당바위산 정상(333m)
여기서 건너편의 고릴라바위와 중리동산을 보는 느낌은 아찔하더니 역시 길도 험하여 바위를 타는데 힘들게 한다.
앞에 보이는 산이 바로 중리동산, 정상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약간 아래 좌측으로 고릴라얼굴바위인 듯
중앙이 까치머리(시루봉), 우측 9부능선에 고릴라얼굴바위 강 뒤쪽으로 삼랑진,
마당바위산에서 중리동산방향으로 가는 능선은 거의 기다시피 한다.
여기를 점프하는 정도면 아직 무릎이 괜찮으시다는 뜻..ㅎ
아직도 고비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신기한 바위는 챙겨 담고
톱니바위
중리동산..홀로 오기에는 너무 조심스러운 곳이다.
중리동산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면 곧 이어 능선으로 내려선다.
급경사라도 바위구간이 아니면 좀 편한 정도..
위에서 내려다 본 까치머리
저 나무를 타고 내리기도 하고, 이쪽 바위를 타기도 했는데...
바위의 좌측부분으로 안내 되어 있어 시도하다가 되돌아 나왔다.
좌측 아래로 갈까 했는데 급경사 벼랑이 더 위험하다.
우로 돌아가니 편한 길이 있다.
이해하기 힘든 위치의 화장실, 안내를 보았지만 이건 염소의 집이 아닐까. 염소의 흔적들이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만든 임시화장실이라는 생각은 정상에서 내려와서 우로 돌아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맨 꼭대기 부분에서...
까치머리 정상부
박월등산학교OB회에서 개척한 코스 소개도, 위에서 포인터 한 곳이 보이던데....
작원관 최초 터..지금 기찻길 옆의 약간 너른 터, 이 외에는 별다른 터가 없다. 자전거길에서는 안내를 못보았다.
콘크리트 구조물의 정체는..6.25의 낙동강 전선과 연관.. 내 생각은 아닌 듯.
작원관 최초 터가 내려다 보인다.
밀양 작원관지(密陽 鵲院關址)
밀양 작원관지(密陽 鵲院關址)는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鵲院關)이 있던 곳.
검세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의 동·서와 남북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작원관(鵲院關)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소 기능과 왜적을 공격에 방어하는 기능,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기능을 하였다. 즉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는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작원관 터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산으로 오르는 느낌으로 길이 이어진다.
자전거길에서는 이것을 볼 수 없다.
건너편은 도요리
되돌아본 모습의 까치머리
철계단은 횡단. 다른 방법이 없다.
내려다 보면 아찔하다
1979년 만든 것 같은 산당?
가파르기가 아찔함
이 쪽 능선은 길이 묵어 막힌 것 같다. 등산로는 저쪽 능선으로 가서 작원관지로 내려 온다.
검세리에는 옛집이 거의 없다.
개나리, 역시 꽃은 아름다워..
터널 위의 길을 통과해서 철길 건넘, 검세리로...
작원터널 위 횡단 통로
검세리의 자전거교실, 자전거 대여 뿐만 아니라 보트도...
복원한 작원관
위는 위령탑
이 부근의 우측에 처자교가 있다.
처자교(處子橋 처자다리) : 낙동강으로 흐르는 검세리 지천 위에 쌍무지개 형태로 세워진 석조 다리(쌍홍예교)다.
4대강사업 때 발굴되어 2012년 8월3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81호로 지정
2028.08.17 자전거 타면서 본 까치머리
철길 옆의 이 수직벽은 안내가 없다. 자세히 보니 자연석 위에 덧붙인 시멘트와 자갈의 흔적, 그리고 아치형의 문이...
경부선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길이 441.7킬로미터의 복선 철도이다. 1899년에서 190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해방 당시의 영업구간은 580킬로미터였으나, 그 후 노선 정리를 통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되었다.
철도 공사 기공식은 서울과 부산에도 각각 따로 열렸는데, 북부기공식은 1901년 8월 20일 서울의 영등포에서, 남부기공식은 9월 21일 부산의 초량에서 열었다. 1904년 12월 27일에 전 구간이 완통 되었으며 이듬해인 1905년 1월 1일 개통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관부연락선을 매개로 경부선과 일본철도가 연결되었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된 이후, 부산과 신의주를 직통하는 급행열차인 융희호를 1908년에 운행했다. 경부선, 경의선 연결 노선이 1911년 11월 1일부터 만주까지 직통 급행을 운행함으로써 이 노선은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국제선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경부선은 1939년 일본의 대륙 침략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복선화되었으며, 1974년에 서울과 수원 사이가 전철화 되었다. 2003년 4월에는 수원에서 병점까지가 복복선화 되었으며, 2005년에 병점과 천안 사이 구간의 복복선 전철화가 완료되었다. 2006년 12월에 경부선 전 구간 전철화가 완료되었다.
경부선은 경의선과 더불어 일본이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배제하고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설한 철도이다. 한반도를 동남에서 서북으로 종관하는 철도로 경의선과 연결되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제의 한국 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간선철도로서 기획되었으며, 이 종관 철도가 한국의 정치적 중심도시와 경제적 선진지역을 관통하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최대한의 병력과 물자를 만주에 집결시킬 수 있는 노선으로 선정했다. 즉 일본-한국-만주의 최단거리 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부선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간이역과 사람들), 2008.,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췌
아치형의 세 개의 문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이런 구조물은 물금의 황산잔도 부근의 철로 옆에도 있다.
내 생각으로는
저게 '총안'이 분명하다. 입구는 안전시설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맨 좌측의 것은 낙동강의 하류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우측 두 개는 정면을 향한 듯 하다.
1901년 8,9월에 기공하고 1905년 1월에 개통했으니 당시 기술로는 매우 급한 속도 아니었을까.
국제관계도 미묘한 상황이었다.
1900년에는 마산의 가포지역을 러시아에 조차, 부산의 영도 청학동은 러시아에 석탄 야적을 위해 내어주었으니,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을 세우고 철도 공사에 박차를 가했을 터,
낙동강은 물길을 따라 오는 적들의 접근로가 아닐까.
그래서 기관총 등을 거치할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 아닐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저 시설은 별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선로 보호를 위해 운영했을 수도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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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Russo-Japanese Wars , 露日戰爭]
1904∼1905년에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나 미국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일전쟁 [Russo-Japanese Wars, 露日戰爭] (두산백과)
작원잔도, 안내와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작원잔도(鵲院棧道 까치비리) : 천태산 자락 낙동강변의 벼랑길로 작원잔로(鵲院棧路), 작원천(鵲院遷), 작천잔도(鵲遷棧道), 작천(鵲遷)이라고도 한다.
잔도길에 밀양시와 양산시의 경계/경계는 중리동산에서 이 쪽으로 이어져 있다.
되돌아 본 까치머리
중리마을의 연못
원동 중리마을 용샘
원동면 중리마을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가야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동래를 잇는 중요한 국도였다.
마을의 중심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우물물을 용샘이라 불렀다.
용샘의 유래는 우물에 용(龍)이 앉았다가 물을 마시고 잠시 쉬어 갔다고 용샘이라 불렀고, 예전에는 용샘에서 용신에게 제(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높여진 밭둑
주차가 되어 있는 마을회관 앞에서 산행은 종료...
양산 가야진사[伽倻津祠]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院洞面) 용당리(龍塘里)에 있는 신라시대 때의 사당.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김해시 상동면과 양산시 원동면 경계의 낙동강 동쪽에 있다. 원래는 용당리의 비석골에 있었으나 196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지역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가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왕래하던 나루터 가야진이 있던 곳으로,일명 옥지주라고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진에 있는 가야진사는 공주·웅진과 함께 사독(四瀆) 중의 하나인 남독(南瀆)인데, 나라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축(香祝)과 칙사를 보내어 장병의 무운과 낙동강의 순조로운 수운과 범람을 막기 위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도 향축을 보내왔으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양산군은 규모는 작아도 용신제를 지낼 때 양산군수가 항상 칙사가 되기 때문에 군수의 지위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지위가 높은 인근 고을 수령들이 평소 양산군수 앞에서는 쩔쩔매었다 한다. 이들은 용신제 때 봉로(奉爐)로 뽑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봉로는 향로를 받드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으로, 봉로는 향로가 아무리 뜨거워도 땅에 놓지 못하는데, 땅에 놓으면 역적 취급을 받는다.
현재의 사당은 1406년(태종 6)에 세워진 것이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또 기우제도 이곳에서 지냈으나 매년 봄에 가야진 용신제(경남무형문화재 19)를 지낼 때 함께 지낸다. 사당 안에는 제상과 머리 셋 달린 용(龍)을 그려 놓은 액자가 있다. 사라호 태풍 때 사당이 부서져서 복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산 가야진사 [伽倻津祠] (두산백과)
현재 위치는 2011년 정비된 것으로 계속해서 꾸며지고 있다.
이 나루터도 새로 만든 것이다. 앞에 용산, 비암산-사명산 갔을 때 용산이 산행 종점이었고 저 취수탑 앞으로 내려왔네.
오랫만에 왔나. 바뀐 게 많다. 이 앞을 자전거로 40회 지나갔는데..... 지난 해 3,4월 이 마지막이었구나.
가야진사 공원 입석 뒤로 천태산에서 이어오는 비석봉
토곡산 방향
가야진사공원 입구에서 360도 파노라마 영상, '가야진사공원' 표석이 좌우에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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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미답의 산이 남아 있었다.
양산 원동면의 중리동산은 밀양과 양산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자전거길에서 늘 바라보기만하고 궁금해하던 산,
시루봉으로 알려졌지만 나는 시루봉보다 '까치머리봉'으로 불러주고 싶다.
삼랑진 역에서 내려오다가 작원관지 부근에 있는 '처자교' 가까이 가면 영락없는 까치머리로 보이는 그곳, 그 때문에 옛사람들이 작원관의 작[까치鵲]을 붙인 것이 아닐까.
'시루봉'이라는 이름은 '떡시루'에서 나온 것이다.
외적들의 연속된 침략으로 삶이 피폐해지니 먹을 것도 없어지고, 온갖 사물이 먹을 것으로 보여 '시루'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보릿고개, 초근목피 등의 서글픈 이야기들이 생겨나도록 민생이 고달프니 돌덩어리라도 보고 먹을 것을 생각하라고 한 것이던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조용히 물러나서 그 잘못에 대한 벌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이 산이 그토록 험준할까 하는 생각은 미처 못했었던 것이 솔직함이다.
일단 바위가 많을테니 장갑은 약간 두꺼운 것으로 선택했다.
장갑은 적중한 셈이다.
내리막이 거칠다고 했지만, 내리막 못지않게 2부능선 부근으로 가는 길 또한 좋은 길이 아니다. 토끼나 제대로 갈 수 있을 길이다.
두 발을 함께 딛기가 쉽지 않을만큼 좁은 길이며, 좌로 기우뚱하면 저 아래 철로 옆에 가서 떨어질 것 같다.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국제신문의 시그널이 촘촘히 붙어 있지만 그래도 길 찾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중리동산을 나홀로 찾아갈 생각이 있었으나, 이 산을 홀로 가는 것은 말리고 싶다.
국제신문은 '시루봉(까치머리)'에 주안점을 두고 능선을 이어 내려가게 했는데, 중리동산이 바로 지척에 있고, 고도차도 심하지 않으니, 그곳을 다녀오게 잡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주변 조망도 훨씬 넓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까치머리에서 우측으로 작원관지로 가야하는데, 바로 내려가는 길이 뚜렷하게 보이고 밧줄까지 매어져 있다.
그러나 그 길도 만만한 길은 아니다.
검세리 작원터널 밑의 굴다리에서부터 중리마을의 굴다리까지는 철로에서 탈출할 틈이 없도록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그렇다면 까치머리에서 내려가는 좋아보이는 길은 어디로 빠지는 것일까.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한가지 방법은 철길 아래의 작은 수로 굴다리가 있는데 바로 강으로 이어진다.
다행히 물이 적다면 조심해서 제방둑이 있어 나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오늘은 나오면서 보니 그 정도의 틈이 보이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시올라가서 능선으로 가든지, 우리의 계획처럼 검세리나 중리 방향으로 나가는 길 뿐이다.
검세리 길은 보이다가 말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를 반복하니 피곤하기도 하다.
좁은 급경사지의 비탈길을 이어 가는 것도 적은 긴장은 아니다.
짧은 거리임에도 피로도가 높은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 아닐까.
다리가 길지 않은 나같은 사람은 바위를 잡고 오르내리는 일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보람은 있었던 길이다.
까치머리에서 내려와서 검세리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강쪽의 아래가 조금 넓어진 곳이 보였다.
아, 여기가 '작원관'의 본래 위치였구나.
바로 까치머리봉 아래가 아닌가,
까치봉의 머리부분이 바로 이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까치머리봉이다.
검세리에 옮겨진 작원관지를 돌아보면서 임진왜란 초기에 밀양부사 박진의 작전구역을 더듬어 보았다. 준비가 되지 않은 군대는 수적열세, 장비의 열세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조선군은 그만큼 안일했더란 말인가.
검세리에서 자전거도로를 따라 회귀하면서 보는 '작원잔도'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이 생긴다.
이 길을 자전거로 수 십 차례나 지나면서 보아도 '작원잔도'를 이렇게 안내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어 주는 결과일 뿐이다.
이 길은 경부선이 개통되던 1905년이나, 공사중이던 1901년부터의 역사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원추암이라 불렀다는 사건을 엮어 이걸 옛 잔도라고 평가해 버린다는 게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일까.
먼저 기록한다고 '정사(正史)'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놀음에 지나지 않음이리라.
새로 만든 기찻길이 영남대로를 덮어 버리니 이런 것이라도 대신 만든 것이 아닐까.
이것을 자료로 제시한 이들에게 저 위의 콘크리트 시설물을 설명해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작원관의 최초 터라는 위치가 맞다면, 길을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길 자체가 이미 잔도아닌가.
이걸 만들기 위해 공사 인부들의 작업로로 만들었다면 이해할만하다.
차라리 이 잔도는 1900년 이후에 기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민초들에 의한 작업 구간이어야 설명이 된다고 본다.
아니면 일제가 조롱하듯 만든 길일까.
실족하여 익사하는 사건이라면 이보다 넓은 길이라고 없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