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구절산 철마산 20210306 토
고성 구절산 철마산 20210306 토 솔로(R&LK)
코스 : 고성 동해면 동해주유소-208m-봉화대318m-401m-구절산(구절령565m)-대한바위-철마령(생태터널)-301m-철마산(396m)-397m-수양산(419m)-영양천씨세천비,임도삼거리,정자휴식식사-응암산(392m)-매암산(432m)-시루봉(407m)-284m우회-87m-도로저개면계단-우두포정류소/산행종료 <14.2km/6:05>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버스가 와 있는데 도중에 손 들어 세웠더니 동해주유소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데 10여분 후에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차가 온다고 버스기사가 친절히 알려준다.
여기 버스는 알림이 필요 없으며 매 한 시간 마다 짝수시간과 홀수시간에 맞추어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을 운행한다고 한다.
15분 정도 지나 반시계방향으로 진행하는 버스를 만났다. 버스 대기시간이 예상보다 길지 않아 다행.
구절산 GPX트랙 파일 첨부 :
동진교를 지나 한국의 아름다운길이라는 해안길을 달려 들머리 방향으로 이동한다.
동진교는 고성의 동해면과 창원의 진동면의 머릿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 아닐까..
고성내산리고분군[固城內山里古墳群]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고성읍 동쪽 적포만(赤浦灣)을 바라보는 작은 구릉지에 성산(城山)을 배경으로 하여 대형고분 28기가 있다. 광복 이전에는 100여 기에 달하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있었다고 전하나 뒤에 주변이 전답으로 개간되면서 많이 훼손되고 현재는 대형분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28기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모두 도굴하여 겨우 유구만 보존되고 있는 셈이다.
내산리 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120호로 지정되었으나, 지정당시에는 유적의 성격과 범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며 보존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최근까지 도굴이 행해져 왔다. 이에 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97년부터 연차발굴 조사계획을 수립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다. 그 결과 65기의 중소형 봉분을 갖춘 고분군의 현황이 파악되었으며 발굴조사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고고학적 성격의 일단이 파악되었다.
60호분은 소로(小路)에 연(沿)한 상태여서 봉분의 가장자리가 파괴된 상태였고, 고분 상면에 일부 석재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조사결과, 봉토는 경사면을 수평으로 정지하고 축조되었는데 잔존봉토의 크기는 12.5×8.2m이며, 봉토 중앙에 1기의 횡혈식석실이 동서장축(N43°E)으로 놓여 있었다. 석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을 이루고, 연도는 서쪽으로 열린 양수식(兩袖式)이며, 개석은 모두 결실된 상태였다.
석실의 규모는 바닥을 기준으로 길이 4.1m, 폭 1.6m이며, 잔존높이는 1.14m이다. 석실 동단벽(東短壁)에는 2매의 장대석을 이용하여 ‘ㄴ’자형의 부장칸을 조성하였다. 석실의 북편은 자갈층을 그대로 시상대(屍床臺)로 하였으며, 남편에는 판석 2매를 횡으로 놓아 관대(棺臺)를 조성하였다.
연도는 서쪽 단벽의 중앙에 폭42cm, 높이 96cm의 문주석(門柱石)을 세우고 이에 연결하여 벽석을 쌓았다. 폭은 88cm이며, 길이는 200cm이다. 연도입구에서는 2중의 굴광선이 확인되었는데, 외측선(外側線)은 최초 매장시의 흔적이며, 내측선(內側線)은 추가장시 연도 입구의 상층이 다시 굴토된 흔적으로 추정된다.
동벽은 현재 최대 7단이 잔존하는데 석실바닥으로부터 약 114cm이다. 동벽의 부장칸은 도굴되어, 파수부완(把手付椀) 1점과 개배편만 남아 있었다. 남쪽 피장자의 발치에서 토기뚜껑,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개배 세트(Set), 단각고배 등의 토기류와 1쌍의 청동제 발찌가, 동편에서는 꺾쇠, 철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북쪽 피장자의 주변에서는 꺾쇠 4점, 철도자 1점, 금제이식(金製耳飾) 1점, 유리옥류(琉璃玉類)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북편에 여성이 매장되고 남편에 남성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64호분은 주변이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어서 봉분이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조사 결과, 봉토의 축조는 낮은 경사면을 ‘L’자형으로 파내고 축조되었는데, 1기의 횡혈식석실이 동서장축(N72°E)으로 놓여있었다. 석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을 이루고, 연도는 서쪽으로 열린 양수식이며, 벽석은 거의 결실된 상태였다.
석실의 축조는 석실보다 약 30cm 크게 토광을 만들고, 생토암반층에 부정형의 점판암을 면을 맞추어서 네 벽을 쌓아 올리면서 적갈색사질점토로 뒷채움을 하였다. 바닥은 생토암반층에 점판암의 석재를 깐 뒤, 그 위에 흙을 깔아 정지한 후, 잔자갈을 2∼3겹 촘촘히 깔았다. 석실의 규모는 바닥을 기준으로 길이 4.3m, 폭 1.5m이며, 내부에서 7∼8단의 벽석이 그대로 무너진 상태로 확인되어 원래의 높이는 약 1m 전후로 추정된다.
연도는 서단벽의 중앙에 크기 70×20cm의 장대석을 양쪽에 뉘어 놓고, 그 위에 벽석을 쌓았다. 폭은 95cm이며, 길이는 100cm이다. 바닥면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강돌을 촘촘히 깔았다. 연도에 퇴적된 토층에서 추가장시 연도를 폐쇄했던 폐쇄석의 상면석재를 제거한 후, 다시 재폐쇄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연도 외부 바닥층에 깔린 자갈의 윗면에 쌓아올렸던 막음석 1개가 인위적으로 빼내진 흔적도 확인되었다.
북쪽 피장자의 머리쪽과 발치에서 개배 세트, 대부완(臺附盌), 유공광구소호, 단경호(短頸壺), 기대(器臺) 등의 토기류가, 중앙부에서는 철제대도(鐵製大刀) 1점과 철족(鐵鏃)과 철부(鐵斧) 등이 출토되었고, 남쪽 피장자의 머리쪽에서 금제이식 1쌍과 중앙부에서 유리옥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석실의 남서모서리에서는 연질옹(軟質甕)과 청동방울 1점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북편에 남성, 남편에 여성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어 60호분과 차이를 보인다.
64-1곽은 64호 주실의 북쪽으로 2.7m의 거리에 위치한 소형 석곽으로, 주실(主室)과 평행한 동서장축(N76°E)을 이룬다. 석곽은 풍화암반층을 굴토한 후 적갈색점질토를 다져 벽석과 함께 뒷채움하여 조성하였다. 바닥은 풍화암반층의 생토면에 3매의 괴석을 횡으로 놓아 관대(棺臺)와 부장칸을 조성하였다. 벽석은 거의 파괴되어 남북 양벽의 1단만이 잔존하는데, 석곽의 길이는 1.8m, 폭 0.6m이다. 벽은 치석되지 않은 장방형의 할석을 길게 동서방향으로 세워 네 벽이 평평하도록 축조하였다. 석곽 동편으로는 부장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관대 주변의 남편과 북편에는 관대를 고정시켰던 것으로 추정되는 칸막이 돌이 각각 1매씩 잔존하고 있다. 토층조사에 의해, 주실과 거의 동시기에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석곽 동편 부장칸에서 장경호와 연질옹이, 남벽 관대 바깥에서는 개배 세트와 청옥 등 유리제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65호분 역시 봉토의 절반 이상이 멸실되어 있었으며, 조사 결과 석실의 절반 정도가 결실된 횡혈식석실분이다. 규모와 축조수법이 64호분과 유사하다.
석실은 풍화암반층을 평평하게 정지(整地)하고 적갈색점질토로 뒷채움하면서 점판암과 냇돌을 이용하여 벽을 함께 쌓아올려 축조하였다. 동서장축 방향(N89°E)이며 석실의 잔존길이는 170cm, 폭은 약 140cm이다. 연도 쪽의 벽은 완전히 결실되었고, 나머지 세 벽이 1∼2단 남아 있다.
바닥의 시상석(屍床石)은 석실의 네 벽을 조성한 후 그 안에 맞추어 깔았는데, 크고 작은 점판암을 고르게 깐 뒤, 사이사이의 틈새에는 크기 약 0.5∼1cm의 잔 자갈을 채웠다.
64호분의 예로 미루어 주변에 소형 석곽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석실 동남모서리에서 철부 2점, 철겸(鐵鎌), 철족 일괄, 동편에서 철정(鐵釘) 일괄, 서편에서 장경호 등이 출토되었다.
주구는 64호분과 65호분 사이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서편으로는 64호분-1곽의 서편 끝부분에서 시작하여 동남편으로 갈수록 점차로 폭이 넓어지다가 남편의 자연경사면으로 경사를 이루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시작되는 주구의 폭은 대략 1.1m 정도를 이루다가 점차로 폭이 넓어지면서 최대 약 4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5m에 이른다. 주구는 암반층을 반원형으로 굴착하여 배수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석열은 고분군의 북동편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데, 부정형의 할석을 약 45∼50㎝ 폭으로 풍화암반 바닥 상면의 황갈색사질다짐층상에 조성되어 있어 고분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표토층하 약 25cm부터 70cm 깊이까지 경사를 이루면서 동편으로 연결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축조성격을 알 수 없다.
주변에서 발견된 토기조각을 조사한 결과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에 연결해서 서남쪽에는 같은 시기의 양촌리고분군과 산성이 있고, 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양촌리고인돌도 인접한 곳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성내산리고분군 [固城內山里古墳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성 내산리구분군 앞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산. 아마도 철마산, 수양산 이려나..이쪽으로 벋은 능선을 보니 가까운 쪽이 수양산일 듯 하다.
차를 다시 이동하여 동해주유소로 들어간다. 가면서 우측에 조그만 산 하나가 있는데 '성산'이다.
언제 만들었으며 누가 이용했을까.
답사한들 알 수 있으랴마는 지나치기는 아쉽기만하다.
동해주유소(고성 동해면 내곡리 1658-1/동해면 동해로 961) 양해를 구하고는 임시로 차를 주차해 둔 곳이다.
구절산까지 3.8km/내걸음으로 2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다.
동해주유소 한 모퉁이에 주차를 하고 산행 시작 09:50
정상 가까이 가도록 길은 거의 잘 다듬어져 있다. 정상 직전은 고도를 급히 높이면서 바위도 조심스럽게 타고 가야 한다.
생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워 봄을 전한다.
10:38 고성 곡산봉수대
고성 곡산 봉수대 (固城 曲山 烽燧臺)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내곡리 산 52-2 외5필지, 구절산의 북서쪽으로 벋은 주능선의 서봉(316m/318m)에 있으며, 세종 7년(1425) 이전에 쌓아 올렸고, 고종 31년(1894)에 없앴다. 서북쪽으로는 당항만과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철마산성, 남쪽으로는 거류산성과 일정거리를 두고 인접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봉수 노선은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근본 노선인 직봉(直烽)을 중심으로 연결되었는데 직봉 사이에는 중간의 신호가 전달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직봉으로 전달되는 작은 갈래인 간봉(間烽)이라는 보조 노선을 두었다. 곡산봉수대는 간봉(연변봉수)으로, 봉수대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거나 국경 초소로부터 각 마을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천왕점봉수대(경남 고성군 대가면 양화리 산 1-1)와 마산가을포(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요장리 산 60)의 봉수대에 신호를 연결.
천왕점 봉수대는 다섯 갈래의 직봉 중에 경상도의 동래에서 경북, 충북, 경기도를 거쳐 중앙봉수로 연결되는 제2로에 포함되었는데, 남쪽으로는 통영 우산 봉수와 동쪽으로는 고성 곡산 봉수와 연결된다.
바위 잡고 오른 끝 부분..수고하셨습니다.
구절산 정상은 바위가 많은 편이다. 산불초소가 있다, '구절령'으로도 불리고 있다.
구절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좋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흐리고 찬바람에 눈발까지 살짝 비치며 기온차가 심해 남겨 두었던 핫팩의 도움을 받았다.
구절산 정상에는 세갈래의 길이 있다. 보통의 등산객은 폭포암 방향에서 많이 올라 왔는데...
건너편의 남서 방향으로 거류산, 벽방산이 이어진다.
보조시설이 이어지는 이 암릉, 지도에서 '대한바위'라고 등록되어 있다.
현지에서는 아무 곳에도 '대한바위'를 읽지 못했다.
대한바위에서 뒤돌아 본 구절산 정상
생태터널을 통해 바로 통과하면 빠른 길을 굳이 내려온 것은 이 길을 한 번 보고,
안내문이 있을 법한 입간판에 마음이 끌렸는데, ㅎㅎ 이런 수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내용을 읽을 것이요...
철마산성은 철마산 정상에서 불 수 있다.
고성 철마산성 (固城 鐵馬山城)
고성 철마산성(固城 鐵馬山城)은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산성이다.
(동해면 장기리 산 1번지)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1호 '철마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성은 철마산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성으로서 소가야시대에 쌓은 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철마산은 고성평야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서쪽을 제외한 동남북 3면이 바다에 둘러 쌓여 있고, 특히 북쪽으로는 임진왜란때 전적지로 유명한 당항포만이 자리할 정도로 남해안을 관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성은 자연 암벽사이에 산돌을 이용하여 외벽을 받쳐 쌓은 내락수법을 취하고 내벽쪽은 평평한 성내의 도로처럼 평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성벽자체는 곡선을 이룬다.
임진왜란때 화살의 방패로 사용하기 위해서 철마 수십마리를 만들어 성내에 세워 두었으며, 왜적이 침입하면서 모두 운반해 갔으므로 인근 주민들이 다시 석마를 만들어 후환을 방비했다고 하며, 현재는 산중턱에 석마 1필이 남아 있다.
철마산 동쪽에 내산리 고분군, 양촌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성은 가야시대부터 축조되어 왜구방비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잔존부분의 규모는 높이 3m, 둘레 250m 정도이다.
좌로 보이는 산이 수양산인 듯 하다. 600여 m를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
나무가 가려 있는데 옛날에는 어땟을지 전망대로서의 가치는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정상부에 직경 20m 정도의 돌담이 낮게 흔적만 남아 있다.
등산지도에 응암산(392m), 바위군이 모여 있는데 그냥 지나칠만한 곳이다. 여기다 굳이 응암산이라고 이름 붙일만할까.
삼각점이 2개다. 매암산(432m), 응암산의 큰집이라고 할까.
중앙이 거제의 가조도, 옥녀봉, 우측은 어외도, 좌측의 희미한 곳이 칠천도..
시루봉(407m)은 전망이 좋다. 남서쪽으로 얼마 전에 다녀온 면화산, 망재가 보인다.
춘원포와 조선수군의 회복불가에 가까운 패전의 현장이 보인다.
전해오는 원균의 목없는 무덤, 지금은 도로 공사로 깎여나가 버린 곳이 되었다.
도로 개설로 인한 절개지로 내려 좌로 비켜 계단을 밟고 하산한다
내려오자마자 만난 저 버스는 잠시 타다가 내렸다.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는다는데...
우두포 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리며 짐을 정리하고... 반대편으로 진행하는 차를 탔다.
가룡마을회관, 실제로 여기가 종점인 셈이다. 구절산 주변으로 한바퀴도는 동해면의 고성버스는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한시간마다 교대로 온다. 즉 배차시간이 1시간인 셈이다.
여기서 버스를 내렸다. 우리 차가 기다리는 곳이다.
고성 버스 기사들은 친절하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