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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조만강의 왜성/죽도왜성, 농소왜성, 마사왜성 20210123 토

benel_jt 2021. 1. 23. 20:24

낙동강, 조만강의 왜성/죽도왜성, 농소왜성, 마사왜성 20210123 토 솔로(R)

 

강수량이야 어떻하든 종일 비 예보가 되어 있는 날이다.

포항의 곤륜산을 준비했는데, 아침에 갑자기 변경한 코스로 가까운 곳을 선택한 것이

거제의 장목면에 있는 3개의 왜성을 답사하려다 더 가까운 죽도왜성, 농소외성, 마사왜성으로 변경.

순서는 좀 어지럽지만 농소왜성을 먼저 찾았다.

다음에 죽도왜성, 거제를 포기하는 대신 마사왜성을 찾는 걸로 했다.

 

 

 

 

죽도왜성 :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 823 일대

 

 

죽도왜성터 일부를 밟고..

가락 죽도왜성

 

죽도왜성-낙동강 하류일대 온갖 행태의 노략질 거점

  •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1598)의 산물인 죽도왜성은 서낙동강을 끼고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강서구 가락동 오봉산(五峯山 : 47.5m)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왜군들의 군사 목적으로 이용되긴 했지만 낙동강 하류 일대 수로(水路)를 장악하면서 온갖 행태의 수탈과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왜성은 15931, 가토 기요마사 제2군에 배속된 왜장 나베시마가 평양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패배하고 그해 6,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이후 김해로 이동하여 7월경에 축성(築城)이 시작되었다.

    오봉산 중앙 산정에 본성을, 서쪽 산정과 동남쪽 나즈막한 봉우리에 지성부(支城部)를 각각 축조하였다.

    임진왜란 전개과정을 수록한 문록(1593) 2727일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전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베시마에게 죽도왜성 지성에 병력 5,000명을 상주시키고, 병량과 철포 200정을 비롯한 병량미 7,500석을 창고에 쌓아 두되 병량은 토목공사가 완성되어 병사가 들어오는 시점에서 10개월분을 계산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때문에 당시 죽도왜성은 지성 구간부터 축조가 이루어졌으며, 낙동강 수로와 마주보고 있는 구포왜성과 인근 농소왜성(김해 주촌면), 마사왜성(김해 생림면)등이 낙동강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죽도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포함한 67개월의 전쟁 기간에 걸쳐 한 번도 성을 비우거나 포기한 적이 없는 대규모의 왜군이 주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도왜성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 중 대표적인 것이 15951월 웅천왜성(창원시 진해구 소재)에서 7일간 진행된 명나라와 왜군 간의 강화회담이다.

    이때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던 이시발(李時發 : 1569~1626) 강화회담 접반사가 되어 회담장인 죽도왜성과 웅천왜성을 방문하고 적의 실정을 정찰한 장계 내용을 보면 당시 죽도왜성의 현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선조실록(1595) 282월조에 정월 12일에 밀양을 지나 죽도의 진영에 있는 소장(小將)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 곳에서 잤다. 그 진영의 기지는 넓이가 평양 정도나 되었는데, 3면이 강에 임해 있으며 목성으로 둘러쌓고 토성으로 거듭 쌓은 다음 안에는 석성을 쌓았으며, 높고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그 규모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만하다. 크고 작은 선박들은 성 밑에 줄지어 매어 있었는데, 그 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에게 붙어있는 우리 백성들은 성 밖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짓고 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다라고 하여 죽도왜성 주변의 자연환경과 왜군의 군사력 실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같은 해 11월 훈련주부 김경상의 서계에는 적의 수효는 대개 78천 명이다. 김해부 성중의 왜인 등이 죽도에 모여 있고 오직 수조왜(收租倭) 23백 명이 있을 뿐이며, 장수는 유여문으로 죽도를 출입한다. 객사에는 석성을 쌓아 장수가 들어가 살고 밖은 우리나라 사람과 왜적이 서로 뒤섞여 살고 있으며, 집은 6백여 호이다 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미뤄보면 죽도왜성은 군사목적 뿐만 아니라 김해부 읍성과 같은 낙동강 연안 지방의 군현치소(郡縣治所)를 접수하고 주변 마을을 점령하여 세수(稅收)를 조달하는 등 낙동강 수로를 통한 내륙지역의 보급로 확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록(1595)46월에 왜군은 강화회담을 통하여 경상남도 일대의 제성을 철수키로 결정하고, 그해 7월부터 3차에 나누어서 실시하게 된다.

    1차는 구포왜성 등 부산포 서쪽을 중심으로 약 10개성이었으며, 2차는 부산포의 동쪽 서생포왜성, 임량포왜성, 죽성리왜성 등의 3개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차 계획은 부산포, 죽도왜성, 안골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4개성이었다.

    이 시기에 양산왜성을 비롯한 구포왜성 등은 철수되었고, 죽도왜성은 1597년 정월 강화회담 결렬로 재침입(정유재란)할 때까지도 왜군이 잔류하고 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재 죽도왜성이 있는 오봉산 일대는 본성이 위치하는 주봉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이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47호로 관리되고 있다. 20047, 부산신항 배후도로 건설로 인해 왜성지 서쪽 지성구간 일부를 발굴조사하게 되었고, 이때 계단처럼 깎아내려가는 여러 개의 각(곡륜부)을 갖춘 전형적인 일본식 초기단계 왜성의 축조수법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됐다.

    죽도왜성은 남해안지역 30개소에 가까운 왜성 중에서도 본성과 지성이 온전히 남아있는 왜성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죽도·농소·마사왜성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을 함락한 뒤 밀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은 부산에서 언양(울산)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우리 3군은 김해를 거쳐 함안과 김천으로 속히 나아가야 합니다.”
임진왜란 발발 때 왜군 3군 수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참모한테 물었다. “나는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한테 황해도를 점령하라는 명을 받았다. 군을 움직일 때는 무릇 뒤가 든든해야 한다. 후방기지로 삼을 수 있는 전초기지가 필요하다. 김해는 어떤 곳인가?”
참모가 답했다. “김해는 영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도시입니다. 또 김해는 서낙동강을 끼고 있어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1592년(선조25년) 음력 4월19일 오전, 구로다 나가마사는 일본에서 1만여명의 대군을 태운 대선단을 이끌고 부산 다대포와 녹산을 통과한 뒤 서낙동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김해읍성(경남 김해시 동상동)에서 남쪽으로 5㎞가량 떨어진 죽도(부산 강서구 죽림동)에 상륙했다.
그는 곧바로 죽도에 진을 세우고, 불암창(김해 불암동) 공격에 나섰다. 불암창은 조선시대 낙동강을 통해 세곡을 모았던 조창이다. 왜군은 불암창 근처에 있던 조선군 정찰함을 빼앗은 뒤 불암창을 점령했다. 조선군은 수적 열세로 왜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김해읍성으로 후퇴했다.

곧이어 벌떼같이 모인 왜군이 김해읍성을 겹겹이 에워싼 뒤 공격했다.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유검은 서문에서 적과 직접 맞섰다. 4명의 의병장들도 김해읍성 각 성문에서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1434년(세종 16년) 석성으로 세워진 김해읍성은 성벽이 높고, 성곽 주위에 땅을 파고 만든 방어시설인 해자가 깊어 왜군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투는 이날 오후까지 계속됐다. 왜군의 파상공격에 읍성 주민들은 지쳐갔다. 화살 등 물자도 바닥을 드러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작은 읍성을 반나절동안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짜증이 났다. 참모가 계책을 냈다. “김해읍성 근처에 호계천이 흐릅니다. 물길을 막으면 읍성 식수원이 고갈될 것입니다.” 왜군은 호계천 상류를 막아 김해읍성의 물을 끊었다. 읍성 주민들은 갈증으로 괴로워했다. 이때 의병장 류식이 김해읍성 땅모양을 살핀 뒤 객관 마당에 땅을 파 우물을 만들어 주민들의 갈증을 풀어줬다고 한다.
이날 저녁, 왜군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이유검이 야간경계를 핑계로 성문을 열고 달아났다.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아와야 하겠소”라는 말을 남긴 채 서문을 열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지휘관이 사라지자 읍성 주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4명의 의병장은 “김해부사가 떠났지만, 우리 네 사람은 한 마음으로 읍성을 지키고자 한다”고 결의한 뒤 주민들을 다독여 전투를 이끌었다.
왜군은 밤새도록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 안으로 던지고, 공성전을 하는 척 함성을 지르며 읍성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 사이 왜군은 근처 논과 밭에 있는 볏짚과 보리이삭을 날라 김해읍성의 해자를 메워 성벽과 비슷한 높이까지 쌓았다. 읍성 주민들은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해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아침, 왜군은 김해읍성 동문 쪽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은 읍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왜군은 김해읍성을 지켰던 의병장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3명한테 항복을 권했다. 이들 3명은 끝까지 손에 쥔 무기를 놓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
의병장 송빈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후손이 어찌 선조를 배반하고 오랑캐에 항복하리오/ 힘은 다하고 성은 외로우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먼저 두 적장을 베어 충성을 다하리라/ 남의 절개 세울 것을 남이 어찌 권하리오/ 자네들은 이제 스스로 헤아리기 바라네/ 북쪽을 향해 백번 절하고 우리 임금님께 하직하노라”는 시를 읊은 뒤 왜군과 싸우다 숨졌다.
조선 조정은 1871년(고종 8년) 이들 4명의 의병장을 기리는 사충단(경남 기념물 제99호)을 김해읍성 근처에 세웠다. 해마다 음력 4월20일 이곳에서 이들 의병장을 기리는 제사가 열린다.
김종국 김해문화원 이사는 <의병사의 시원지 김해성의 전투>라는 학술지를 통해 “곽재우 장군은 김해읍성 전투가 끝나고 이틀 뒤인 음력 4월22일 의병을 일으켰다. 김해읍성 전투에 참여했던 4명의 의병장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라고 주장했다.

왜군 통치 김해읍성에서 주민 구한 권탁
1630년(인조8년) 김해 역사와 행정규모 등을 기록한 뒤 1929년 속간된 <김해읍지>에는 김해의 인물로 권탁을 꼽고 있다. <김해읍지>에는 “권탁은 경북 안동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의 한글 교서를 받들고 적진에 잠입해 100여명의 우리 백성을 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1593년 4월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 의병의 봉기, 조선수군의 활약 등으로 한양 이남으로 후퇴했다. 조선은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한글로 쓴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를 1593년 9월 전국 곳곳에 뿌렸다. <선조국문유서>에는 “왜군을 잡아오거나, 실정을 조사해오거나, 동포를 데리고 오는 공로가 있는 자는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과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권탁은 김해 수령을 맡겠다고 조정에 청했다. 당시 김해엔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죽도왜성과 김해읍성, 농소왜성 등에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권탁은 김해 근처 왜군이 세운 진지에 홀로 잠입해 땔깜을 구하러 온 백성들한테 말했다. “김해성의 장수 권탁이다. 전하께서 너희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할까 가련히 여겨 불러들이라 했으니 나를 따르라.”
백성들이 울며 답했다. “왜군의 종으로 일하기를 달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잡혀 있어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권탁이 계책을 일러줬다. “일본으로 건너갈 친척들을 배웅하고자 김해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청하니 함께 나가 배부르게 먹고 오자는 말로 왜군을 속여라.”
다음날 밤, 백성들은 가족들과 왜군 40여명을 권탁과 미리 약속한 곳으로 데려왔고, 권탁은 왜군을 베고 백성 100여명을 구했다. 하지만 권탁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593년 11월 숨졌다. 권탁은 1722년(경종 2년) 정3품 당상관(통정대부)에 해당하는 관직인 장례원 판결사로 추증됐다. 권탁의 후손들은 1836년(헌종 2년) 김해 흥동에 ‘선조어사각’(경남 문화재자료 제30호)을 세우고 권탁이 갖고 있던 <선조국문유서>를 보관했다. 국문학 연구의 중요자료인 <선조국문유서>는 현재 부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서낙동강의 전략적 요충지, 죽도왜성
부산 강서구 죽림동 823번지 일대에 있는 죽도왜성(부산시 기념물 제47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조선군 공격에 대비해 만든 왜성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임진왜란에서 100여명이 넘는 조선 도공을 납치한 것으로 악명 높은 왜장이다. 그는 납치한 조선 도공들의 기술력으로 자신이 다스렸던 일본 규슈의 아리타 지역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로 만들었다.

멸실돼 가는 농소·마사왜성
김해에 있는 농소왜성과 마사왜성은 죽도왜성 방어를 돕는 지성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 두 왜성의 축성시기는 불분명하다.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 21번지 일대에 있는 농소왜성은 김해시가 보이는 낮은 구릉(해발 70m)에 자리잡고 있다. 농소왜성에서 남쪽으로 서낙동강의 지류인 조만강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이곳 앞까지 낙동강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농소왜성은 2001년 김해국도 대체구간 공사를 진행하다 발견됐다. 당시 학계는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의 왜성 일부를 확인했다. 농소왜성은 구릉 정상에 1곽을 중심으로 그 아래쪽으로 2곽과 3곽을 나란히 배치한 모양새이다. 현재 이 왜성의 1곽에는 무덤들이 들어서 있으며, 2곽과 3곽 추정 지역에는 밭이 있다. 1곽 북서쪽 모퉁이에서 석축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 팀장은 “멸실 직전 상태”라고 분석했다.
마사왜성은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 있는 작약산(해발 377m) 산등성 끝자락의 구릉(해발 80m)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왜성 서쪽 아래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으로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가 내려다 보인다. 마사왜성도 구릉 정상에 1곽을 중심으로 아래쪽으로 계단식으로 2곽과 3곽을 배치한 모습이다. 학계는 마사왜성과 농소왜성이 비슷하게 작은 규모의 진지 격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사왜성도 성터와 성문의 위치를 가늠해 왜성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눈에 드러나는 왜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작은 규모의 왜성 터는 사유지가 대부분이다. 정부나 지자체가 왜성 터를 방치해 점점 황폐해지고 있다. 남아 있던 왜성의 흔적도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왜성을 다음 세대에 교훈으로 남기려면 관할 지자체의 보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죽도왜성: 부산 강서구 죽림동 823 일대.
 - 농소왜성: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 21 일대.
 - 마사왜성: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 1 일대.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도움말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3802.html#csidx88f5213af4cefbdbd6299c71f5359af


한겨레신문에서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⑦ 죽도·농소·마사왜성..등으로 연재

 

 

농소왜성 :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21 일대

 

 

농소왜성터

 

마사왜성 :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기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 1 일대

 

마사터널과 머서왜성터

GPX트랙 파일 첨부 :

죽도왜성답사하고마사왜성으로.gpx
0.97MB
농소왜성답사후죽도왜성으로.gpx
0.32MB

 

 

가락동 국군묘지 안내판, 왜성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축대의 돌이 그 역사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국군용사 충혼탑
...

소위 김작지
상사 이대근
중사 강성도, 오영근, 정용학, 강태호, 배홍수, 박윤원, 양기환, 박찬조, 김종걸
하사 한을곤, 유봉진, 김덕조, 천용락, 김욱기, 이성식, 문위실, 김천식, 변종원, 김종갑, 신종호, 김문식
병장 주재찬
일등병 황의숙, 장세용, 박근영, 박장춘
이등병 김영태, 김행한, 황정관, 김봉국, 김판수, 최태규
무명용사 묘 5기.

 

6.25 동란 중 이 고장 출신의 전사자 39위의 충혼을 기림.

국군 용사 충혼탑, 1993.6.5 강서구청에서 건립

 

 

이 진지는 임진왜란이 아니라 무기가 개량된 일제시대의 것인 듯한데...
죽도왜성
이동 관계로 죽도왜성은 주곽 부근만 보고 내려가는데 대나무가 많이 보인다.
서낙동강변에 자전거길과 함께 공원화된 곳에 해창나루터의 정자

이 지역에 5000의 왜병들이 10개월을 사용할 군량과 장비들을 비축하라고 했으니 창고역할을 했을 터..

이 강나루에 수를 셀 수 없을만큼 정백해 있던 왜선들을 상상해 본다.

우리의 병선이 그 정도 준비 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무참히 당했을까.

 

가락오광대발상지

여기서 거제를 포기하고 다시 김해로 가서 마사왜성을 찾기로 한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라면 오늘의 동선이 잘못되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 때문에 급조한 코스라 그렇지만 오히려 잘된 것일까.

농소왜성을 먼저 가는 게 아니었는데...다시 그 쪽을 지나게 되었다.

 

 

농소왜성 올라간 공장안의 무덤길이 우측으로 보인다.
무덤이 있는 이 길은 가시덩쿨 등이 엉겨 길을 헤치면서 지나야 했다.
묘지는 그래도 길이 열리는데....공동묘지 같은 길을 올라가서
동쪽으로 서김해 방향의 임호산이 조망된다. 저 아래는 조만강이 흐르는데 옛날에는 물길이 되었겠지.
조망이 좋은 고지에 평탄작업을 한 곳이 이어진다
양쪽에 길이 있으나 임도가 보이는 서쪽 길을 선택한다.
이 쪽은 장유휴게소와 불모산 등이 조망된다.

농소교 아래는 조만강이 흐른다, 여기서 죽도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이 방향의 마사왜성을 간 건 순서가...

마사왜성지를 찾기 전에 고개를 넘기 직전 마사터널이 있다. 이전에 몇 차례 자전거로 지날 때에도 볼 수 없었는데....

 

한림면에서 마사리로 넘어가기 전에 터널이 있다. 320m 길이로 옛 철길 터널을 이용한 관광 효과..

자전거가 힘을 적게 들이고 지날 수 있다.

보행자도 지날 수 있고,

여기는 와인터널과 달리 입장료는 없다

마사터널 내부, 옛 기차길이다.
320m를 지나면 마사리 쪽에 조성된 공원, 휴게실, 주차장, 화장실이 있다
터널 천장에 비친 조명...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거 아닌가

마사터널을 걷고 차로 고개를 넘어 터널주차장에 세우고. 마사왜성을 지번을 보고 확인해 본다.

아무런 표지는 없는 게 농소왜성과 마찬가지다.

앞쪽에 보이는 터널은 지금 기차가 다니는 곳이다.
마사왜성의 끝부분으로 보이는 방향의 산은 아마도 밀양의 종남산인 듯 하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산쪽으로 오르는 겅사진 시멘트 포장길을 지나면 좌측에 집이 있고, 50여m 더 가면 폐축사가 있다.

그 집의 주인인 듯한 분의 말에 이쪽에 산으로 오르는 길은 없단다.

마사왜성에 대한 정보는 아는 게 없다고 한다.

일단 없는 길을 개척하여 오르기로 하는데, 그리 높지 않으니 부담은 없다.

음나무 가지들이 날카로운 가시들로 위협하지만 헤치고 오른다.

오르면서 우측으로 낙동강의 낙동철교, 삼랑진대교방향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오르내린 흔적이 약간은 보이지만 역시 길은 아니다.

그래도 이 산의 유실수 재배를 위한 길이었던가 산을 등고선 그리듯 나선형으로 임도의 흔적이 보인다.

경사진 곳을 계속 걷는 부담은 확실히 줄여주었다.

정상부 평탄지의 철조망
능선 상부는 공간이 제법 있는 편이다.
산을 깎아 평탄작업을 한 곳이 제법 넓은데 포크레인 같은 것으로 파낸 것 같다.

여기는 망초가 말라 있는 망촛대와 비슷한 크기의 도둑놈갈구리가 자라 있어 헤치고 나가야 한다.

평탄작업 구역 외곽에 철조망이 쳐져 있다.

 

 

다음 봉우리 쪽으로 가니 낙동강 물이 바로 아래로 보인다.

강변쪽은 매우 가파르다. 이만해도 충분한 성의 기능은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는 동안에 왜성 특유의 축성 흔적을 별로 볼 수 없었다.

2km 정도의 북북동 방향으로 밀양강의 하구가 있다.

밀양강과 낙동강, 낙동강 하류 방향의 세 물이 만나는 곳이라고 삼랑진이라고 했다는데...

수운이 중심이었던 옛날에는 교통의 요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군사적 요충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기

 마사왜성은 주요한 목이 아니었을까.

여기보다 4km 정도의 하류에 있는 무척산 아래 도요리에 임진왜란 때 피란하여 입향했다는 그 ㅇ씨의 입향비는 그 신뢰성이 부족하다.

하기야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들이야 상당수가 진실이 왜곡된 것들 아닐까 하는 생각도 버릴 수 없다만...

 

 

새집이 하나 보인다

위치로 보아 성지의 내부에 있다.

사람이 자주 다닌다면 여기에 새집을 지을 수 없었을텐데...

 

 

성터가 있을 산에서 내려서니 바로 낙동강이다.

저 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조운선의 길이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동안에는 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변공원은 김해드론연습장이다.
작약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마사리의 들판으로 가로질러 마사터널 입구의 주차장으로 회귀.
보리인 듯한 작물의 싹이 올ㄹ라오고 있는 들판
가는 길목 밭둑에는 도꼬마리 열매가 많이 보인다.

 

주차장 바로 아래에 벧엘교회, 건물이 목조인 듯..
레일바이크와 와인터널은 유료다. 옛 철길을 이용한 시설이다.
무척산 신어산이 멀지 않은 곳이다. 작약산은 바로 앞에 있다.

뒤로는 삼랑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