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망일봉 남망산 20200829 토
통영 망일봉 남망산 20200829 토 솔로(R&L)
코스 : 원문생활공원-원문공원(해병대통영상륙작전기념관)-미늘삼거리-화삼교회-선촌-세자트라숲-이순신공원-망일봉-기상대-청마문학관-남망산/하산 후 택시로 원문생활공원
해병대기념관, 해병전적비, 3.1운동기념비, 열사비,충혼탑,
6.25때 해병대가 북한군을 크게 물리친 통영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곳이기도 하며,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이 전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07:30 화명동 승차/남양산 경유/동마산IC-
10:00 원문생활공원 도착
10:10 산행 시작
10:22 [미늘2.3...]좁은 산길 따라 해병대기념관 입구로
10:31 6.25전승기념비(오래된 비석)
10:34 삼일운동기념비
10:35 삼열사비
10:36 해병대상륙전적비
10:45 충혼탑
10:46 장갑차 등 옥외전시물, 기념관은 휴관
10:55 월남참전기념탑
11:06 [미늘2.3...]
11:43 통영아로니아농장/농장으로 나오기까지 길이 잡초가 많아 불편
12:15 미늘고개 버스정류소/상삼마을(미늘)입석
12:35 화삼교회
12:36 선촌 미월-미늘 입석
12:38 세자트라숲 안내목-세자트라숲
13:25 솔밤시길, 데크계단/2,3부능선의 해안길
13:28 전망데크/앞에 소나무가 가려 전망 불량
13:31 토영이야~길, [이순신공원1.0, 세자트라숲0.5]
13:35 해변으로 내려서는 계단
전망대에서 기와여 조망, 매섬등대와 붓돌여는 보이지 않음
13:45 해변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데크계단
13:48 해군 위령탑
13:58 학익정
14:00-14:17 이순신공원
망일봉 직등하려다 첫 지름길 통과 후 다음 임도에서는 포기하고 우로 임도 따르다 산길 이동
14:25 임도에서 지름길 등산로 이정목 따름
위쪽 임도에서 이맂러리 탐색하다가 포기하고 우로 이동
14:46 임도 이탈 후 산길, 임도와 나란히 우측으로
14:56 산길삼거리 [망일봉0.7, 이순신공원0.6, 세자트라숲1.0]
15:11 망일봉, 정자, 삼각점
15:33 통영기상대
15:37 청마문학관/임시휴관
16:05 남망산/통영시민문화회관-충무공동상-수향정-열무정-조각공원-공원입구-
17:00 산행종료
택시로 원문생활공원(₩6,000)으로 이동
18:57 김해 '450℃고등어' 식사 후
21:00 귀가
망일봉 남망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6.25전승기념비의 이면 기록 내용
보라 저 아름다운 하늘과 산과 그리고 바다를...
이곳 원문(轅門)고개는 이들에게 뻐치려는 공산 마수를 무찌른 전승의 땅이다.
단기 4283년(1950) 9월 우리 해병대와 향토방위대와 경찰은 물밀듯 들어온 공산군을
이 곳 고개에서 끊어 피와 목숨을 바꾸어 우리 고장을 구해 낸 것이다.
단기 4294년(1961) 9월 일
3.1운동기념비
삼일운동 시기에 이 고장 지사 30인의 이름을 돌에 새겨 1972년에 남망산공원에 있던 것을
1991년이 되어 이 곳 삼도수군통제영의 관문인 원문(轅門)언덕에 옮겨 세운 것이다.
삼열사비
통영의 삼일만세의거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의혈열사가 계셨으니
고채주, 이학이, 허장완님이 이들이시다.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고채주, 이학이 열사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허장완열사의 묘소와 묘비는 용남면 화삼리에 남아 있다.
1997년 11월 통영시에서 묘비를 이곳에 옮겼다.
[건립취지 및 유래]
1950년 8월 3일부터 10여일동안 우리 해병은 진동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침공에 대항하여 싸웠다. 또 귀신잡는 해병이란 신화를 남긴 대대 규모의 해병대는 해군 함정 7척의 지원 아래 8월 17일 장평리에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2일만에 통영을 탈환 실지회복의 선봉이 되었다. 호국의 충성과 임전무퇴의 투혼이 불타는 용사들은 이로부터 9월 20일까지 북한군 제6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격파하고 그들의 허망된 남침야욕을 분쇄함으로써 무적해병이란 또 하나의 장을 기록하였다. 이제 그때의 함성과 포성은 사라졌으나 우리 해병이 몸바쳐 지킨 유훈과 해병혼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비문내용]
여기는 적전상륙의 효시가 된 곳,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실지회복의 첫 개가로 겨레와 함께 감격을 나눈 곳, 그날의 총탄은 멈추었고, 포성은 잠들었으나, 충무의 바다와 원문고개에 피어난 호국의 충혼이여! 해병혼이여! 영원하라!
[참고사항]
통영지구 전투는 킨 부대의 반격작전이 방어작전으로 전환된지 3일 후인 8월 16일이었다.
그 동안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던 통영읍에 약 1개대대의 적 병력이 침입하자 해군본부에서는 바로 그 무렵 킨 부대 작전에 참가한 후 진해에 집결해있던 해병대 김성은 부대장에게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에서 거제도를 노릴것으로 판단되는 적을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통영을 침공했던 적은 킨 부대의 반격작전 때 미 해병5연대에 의해 점령 당하고있던 고성 지구로부터 내도한 북괴군 7사단의 일부 병력이었다.
그런데 명령에 따라 2척의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그날 밤 10시경 진해 군항을 출항했던 김성은 부대장은 그 이튿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지도 동쪽 기슭에 이르자, 그 동안 자신이 새워놓은 복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먼저 2개조의 정찰대를 운용하여 통영 시가지 쪽과 거제도 서해안 쪽의 적정을 살펴본 그는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다. 그가 작명의 변경을 요청했던 까닭은 불과 기백명의 적은 병력으로 거제도의 긴 서해안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다는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를 비롯한 수 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에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김성은 부대는 이튿날 새벽 통영 시가지를 감제하는 시가지도쪽의 망일봉(148고지)을 선제 점령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하는 가운데 총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통영의 적을 독안에 든 쥐처럼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작전계획을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명의 변경을 승인받게 된 김성은 부대장은 P.C-703호와 소해정 504,901,320,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는 가운데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 계획대로 그 이튼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선제 점령하여 한발 뒤늦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고,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지원받고, 그 다음날 (19일) 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그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다.
충혼탑(무전동)
6.25 전쟁 후 11년만인 1961년 남만산공원에 충혼탑 건립.
1992년 6월 통영시민문화회관을 건립함으로써 2011년 이곳으로 옮겼다.
위패봉안실에는 1330위의 전몰용사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2011년 현재)
선촌(미월→미늘)
삼도수군통제사가 매일봉 야경을 나와 계룡산 위에 달 뜨는 광경을 보고
미월(아름다울美, 달月)이라 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미늘로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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