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진평왕릉, 설총묘, 명활산성, 명활산, 힌등산, 영세곡산, 형제봉 20200709, 솔로 (K,R)
경주 진평왕릉, 설총묘, 명활산성, 명활산, 힌등산, 영세곡산, 형제봉 20200709, 솔로 (권,류)
코스 : [진평왕릉,설총묘 차량 경유] 명활성-명활산-253m봉(산성180m앞)-천고개-힌등산-서나무재, 위생처리시설-천군갈림삼거리-영세곡산-형제봉-임도-고개,이정표-노영지(저수지)-산업도로-불국사역앞
06:45 집에서 출발
07:10 300버스 탑승
07:28 금정구청앞 하차
(금정경찰서 약속할 경우 태광산업 하차 유리)
경부고속도로 경유, 경주IC, 보문길
09:11 진평왕릉 하차
09:30 설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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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명활성 하차, 산행 시작
09:50 명활산성 안내글, 명활산성
10:21 명활산(204m)
10:30 임도
10:37 임도이탈
10:57 산위의 명활성 부근에서 방향을 돌림
11:20 능선 우측 편한 길
11:39 등나무 넝쿨 숲
11:50 힌등산 아래 월성김씨묘/휴식(15')
12:06 웅덩이
12:14 힌등산(269m) 삼각점
12:24 웅덩이
12:26 편한 임도
12:32 차도-위생처리장 경유
12:44 천군동갈림길삼거리
12:48 차도 이탈
13:30 영세곡산(281m)
13:52 형제봉(290m)
14:00 임도
14:09 고개 이정표[월빌센터1.2, 코아루아파트1.0]
14:14 이정표[코아루아파트0.8, 웰빌센트1.5, 형산마을0.9, 약수터0.45]
14:52 삼각점(2007복구), 조망(아기봉?)
14:56 임도(공사구간, 묘역이장구역)
15:20 산길 끝, 농지/휴식
15:29 저수지, 물이 거의 없는 늪
15:32 도로 만남/산행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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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 삼거리에서 택시로 이동
15:59 명활성 입구, 차량 회수
남경주IC, 외동휴게소 경유
17:45 신해운대역
18:22 기차
19:06 화명역
19:45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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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도의 명활성은 180m를 앞두고 못가고 힌등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힌등산에서 하산한 후 차도를 걸어 이동한다
명활산 산행 GPX 트랙 파일 첨부 :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侯薛聰墓]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묘(墓)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원효와 요석궁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 경덕왕 때의 대학자이며 신라10현 중 한 명인 설총의 묘로 전해지고 있다.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예로부터 진평왕릉의 동쪽 보문리에 있다고 전해져왔다. 그 앞에 상석이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고 단순하나 보존은 잘되어 있는 편이다. 설총은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경주·순창설씨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홍유후설총묘 [傳弘儒侯薛聰墓] (두산백과)
명활산성[明活山城]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한 성곽. 산성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 960,000㎡. 사적 제47호.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실성왕 4) 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성방식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이다. 또한, 실성왕은 즉위하던 해인 402년에 왜(倭)와 화평을 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내는 등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왜인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왜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인이 이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수도인 금성(金城)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에 이 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475년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阿且城)에서 살해되고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이라든지, 죽령과 동해안을 위협해 오던 고구려의 직접적인 압력 등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았을 때의 둘레가 1,906보이며, 593년(진평왕 15)의 개축시는 3,000보였다고 한다. 지금 이 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몇 군데에서 자연석으로 깨뜨려 아무런 가공 없이 쌓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축조는 진평왕 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북형산성(北兄山城) 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 등에 대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활산성 [明活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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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산성(사적 제 47호)은 북쪽 해발 252m 산정의 '흰등山'과 그 서쪽의 '장군봉'을 두르면서 골짜기를 감싼 형태의 포곡식성으로 길이는 약 4.5km이다. 진흥왕(眞興王) 12년(551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명활산성작성비에 적혀 있다. 이 산성은 도성의 동쪽 수비를 담당하는 나성(성의 외곽)으로 나성 중에서는 처음 돌로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자비마립간 18년(475년) 1월부터 소지마립간 10년(448년) 1월까지는 임금이 거쳐하는 행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활산성작성비에 의하면 축성 당시의 높이는 10보였다고 하지만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며 기본적으로 직사각형으로 자른 돌을 이용하여 줄눈쌓기 하였으며 곳에 따라 높이 1.1m~1.8m, 너비 3m~3.7m 정도의 성벽이 확인되고 있다. 성벽 바깥 바닥부분에서는 성벽붕괴방지를 위해 바닥부분을 보충해서 쌓은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북쪽 성 외벽 아랫부분에서는 성 바깥 북쪽으로 약 13m 떨어진 지점에서 호안석축(호수나 하천 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돌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확인되었다. 북쪽 성벽 일부 구간에 한정하여 축조한 것으로 월성해자와 같이 물을 쓰기 위한 연못으로 보고 있다. 성내에는 문지 7개소, 수구문지 4개소, 건물터로 추정되는 대지 6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문지와 수구문지는 성벽이 붕괴되면서 덮이거나 파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건물터에도 초석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개소뿐이며 나머지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그 밖에 연못이 2개소 남아 있으나 현재는 매몰된 상태이다.
축조과학
성벽은 25cm~55cm×20cm~45cm 크기의 화강석재를 약간 가공하여 단을 이루면서 줄눈쌓기로 내.외면을 쌓고 안쪽에 잡석으로 뒤채움(돌담 등의 틈에 잡석 등을 채우는 것) 하였다. 성벽 내측에는 너비 4m 내외의 통로(通路)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벽 순찰로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 외벽의 아랫부분에는 신라성벽의 특징적인 구조물인 너비 3m, 높이 3.64m 규모의 69~70도 정도 경사진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기단보축성벽은 성돌과 비슷한 크기의 형태가 가지런하지 않은 석재로 단면이 삼각형을 이루도록 면을 맞춰 쌓았다. 이 시설은 석축성벽이 돌의 무게 때문에 성의 아랫부분에 전달되는 압축력과 성벽 내면에서 밀어내는 압력으로 인하여 성벽이 쉽게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다. 기단보축 성벽이 확인되는 신라성곽으로는 보은 삼년산성, 대전 계족산성, 함안 성산산성, 창령 목마산성, 문경 고모산성, 용인 할미산성, 이천 설성산성, 여주 파사산성, 안성 죽주산성, 서울 아차산성, 파주 칠중성, 포천 반월산성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명활산성 - 성벽 붕괴 방지를 위한 기단보축(基壇補築)이 확인된 명활산성 (국립중앙과학관 - 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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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성을 찾아가는 길은 의외로 쉽다.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다가 보문호 앞 삼거리에서 감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명활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에서 산성까지는 100여 m. 여느 관광지와 달리 관광안내소도, 주차장도 없다. 더구나 명활성 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 주변이 산만하고 어지럽다. 찾는 여행객도 거의 없는 곳이라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다.
눈앞에 드러난 명활성은 잘 정돈된 모습이다. 다듬지 않은 돌을 차곡차곡 쌓은 것이 꽤 단단해 보인다. 약 50m만 복원해놓은 탓에 너무 짧은 느낌도 강하다. 본래 명활산 골짜기를 감싸며 쌓은 산성의 길이는 6km에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 성벽이 무너져 흙에 덮여 있어 산성다운 위엄은 볼 수 없다. 몇 군데에만 옛 모습이 남아 있는데, 발굴장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능선에 오르면 '이것이 산성이구나!' 하고 알 수 있을 만한 성벽이 나온다. 산성 아래로는 보문단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산성을 밟고 올라서니 '왜 여기에 산성을 쌓았을까?', '명활성이 중요한 곳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명활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제18대 실성왕 4년(405) 명활성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토성과 석성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다가 후대에 돌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신라 초기의 산성임을 말해준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바다에서는 왜적이 호시탐탐 노략질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에 산성을 축조했다. 그중에는 경주를 보호하기 위한 산성도 여럿 있다. 경주의 동쪽 관문에 쌓은 명활성은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 부산성 등과 함께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명활성이 경주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명활성의 중요성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명활전'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명활성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추정된다. 관청을 두어 관리할 만큼 명활성이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도 많다. 제19대 눌지왕 15년(431)에는 왜적이 이곳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했다. 제20대 자비왕 16년(473)에는 산성을 고쳐 쌓았다. 이는 자비왕 2년(459) 7월에 동해안에 침입한 왜적이 경주까지 쳐 들어와 월성을 포위한 적이 있었기에 수도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8년(475)부터 제21대 소지왕 10년(288)까지 왕이 명활성으로 들어가 거주했다. 당시는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번성한 때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죽고 백제는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신라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령과 동해안을 통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성으로 들어간 것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담, 난을 일으키고 명활성으로 들어가
명활성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 '비담의 난'을 꼽을 수 있다. 비담은 TV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존재감을 알린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연도, 부모 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선덕여왕 14년(645)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에 올랐으며, 647년에 선덕여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10일 만에 진압당해 구족이 멸문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을 뿐이다.
상대등이 된 비담은 정치 주도권을 놓고 김춘추, 김유신과 경쟁했다. 세력이 밀리자 선덕여왕의 실정을 이유로 염종 등 진골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왕실과 자신들의 위치를 불안하게 여긴 귀족 간 힘의 논리가 작용했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은 명활성에 웅거하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왕군은 월성에 집결해서 10여 일 동안 공방을 벌였다.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담은 선덕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에 김유신은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 뒤 김유신은 난을 진압하고 비담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비담의 난 이후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점차 후퇴하고,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등극하면서 강력한 신라는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했다.
성을 쌓은 내용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
명활성과 관련한 유물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66.8cm, 두께 16.5cm의 직사각형으로 된 명활산성작성비다. 1988년 8월, 명활성 내에서 포도농사를 짓던 농부가 성벽의 일부가 빗물에 드러나면서 모습을 보인 비석을 발견했다. 비의 전면에 9행, 148자로 된 글이 적혀 있다. 명활성을 쌓을 당시의 기록이다.
내용은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인명,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기간, 글쓴이의 인명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문을 통해 신라 진흥왕 때 관직과 직명을 비롯해 1개 집단 안에 3개의 분단으로 편제된 역 동원 체제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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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경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산성, 경주 명활성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흰등산을 둘러싸고 데뫼식 토성을 먼저 쌓았다가 나중에 북쪽의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 석성을 쌓아 이용하는데
석성은 둘레가 약 5.6km에 달한다. 이게 바로 명활산성이다.
자비왕18년(475)에서 소지왕10년(488)까지 국왕이 이곳에 옮겨 살았던 적도 있다.
선덕여왕 16년(647)에는 비담, 염종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월성에 유성이 떨어져 불안한 군사들을 위해 김유신이 불 붙은 연을 띄워 올려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일도 있다.
불국사역은 길을 건너 좌측에 100여m 정도 거리에 있다.
좌측으로 조금 가면 불국사 입구 삼거리다.
네비로 대충 보니 버스로 가면 1시간이 넘는다.
택시로 계산하니 15분 정도, 15000원 정도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택시비는 16800원이 나왔다.
귀가길에 목만 축이고, 해운대로 바로 갔다.
18:24에 출발하는 경전선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동 시간도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