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산막이옛길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 20200118 토
괴산 산막이옛길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 20200118 토 산하
코스 : 산막이주차장(대형)-등잔봉-천장봉-삼성봉-좌측급경사지하산-임도-연화협구름다리-수월정-산막이옛길-주차장
역시 홀로 산행이 정답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10:43 산막이주차장
10:56 조각공원
11:02 고인돌공원
11:06 소나무출렁다리
11:12 연화암, 전망대
11:15 등산로 입구
11:53 등잔봉
12:43 한반도전망대
12:48 천장봉
13:00 [산막이마을1.5, 등잔봉2.0]
13:12 삼성봉
13:43 임도/여기까지 거의 급경사로 길이 불편함
13:57 연하협구름다리(연장134m, 폭2.1m)
14:01 다리 건너 갈론마을 [갈은구곡1.8, 산막이마을1.4, 충청도양반길출렁다리0.2]
14:26 삼신바위
14:32 노수신적소(수월정)
14:48 연꽃바위
14:56 가재연못, 물레방아
15:05 꾀꼬리전망대(구 고공전망대)
15:07 괴산바위
15:10 얼음바람골
15:16 앉은뱅이약수
15:19 여우바위굴
15:20 매바위
15:21 호랑이굴
15:23 연화암/11:12 통과했던 원점
15:27 정사목
15:37 에어건(먼지털이)
15:45 화장실/산행 마침, 세수하고 주차장 도착하니 15:58
모두가 후식중이다. 늦은 하산에 대한 불만 섞인 표정들인가...
시작부터 도착까지 5시간05분이 걸렸다.
2012.6.6보다 코스는 늘렸고, 시간은 단축되었다.
그래도 늦다고 투정 섞인 표정들..
역시 홀로 산행이 정답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산막이옛길 트랙 파일 첨부 : 괴산_산막이옛길2020-01-18_10-41-25.gpx,
Tr괴산산막이옛길20200118.gpx
2020-01-18 1041괴산 산막이옛길__20200118_1041.gpx
구산선생신도비...노구산은 고려시대인물이다. 아마도 노수신의 조상일까..
노수신은 이 부근에서 귀양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고 해배되어 영의정까지 지낸다.
우람선은 구립27일부터 2월29일까지 운항을 중단하고 있다.
아마 결빙 때문인 듯하다.
'활 쏘러 오세요.' 가고 싶었는데...나중에 사진을 자세히 보니 입구에 '휴업'이라고 안내판을 세웠다.
설마 폐업은 아닐테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저게 '붕어섬', 세마리의 붕어가 남진하고 있다.
가운데 둥글고 뾰족한 바위 봉우리가 비학봉이다. 여긴 탐방 구간이 아니다,
여기서 보니 붕어 세마리는 포구에 정박한 선박처럼 보인다.
넘어가서 되돌아 본 천장봉
삼각점이 있고 정상표지는 코팅지에 있는데 고도가 표준 고도가 아니다.
삼성봉의 정상은 너른 터가 있는데, 이 연리목이 대표적인 캐릭터라고 보아야할까..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면 구름다리가 모양을 드러낸다.
정상에서 여기까지는 매우 급한 경사면이다.
거꾸로 올라가기는 힘이 들 듯하다
갈론마을입구, 연화협구름다리를 건너니...
' 문간공 소제 노선생 유적비'
수월정
노수신적소[盧守愼謫所]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문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괴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거처하던 곳이다. 그는 1543년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시강원(侍講阮) 사서(司書)를 지내면서 독서당(讀書堂)에뽑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와 연루되어 파직되고순천·진도·괴산 등에서 약 20여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후 다시 등용되어 이조판서·대제학등을 거쳐 1573년에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지내고 1585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노수신은 이곳에서 1565년부터 1567년 유배생활을 마감할때까지 거처하였는데 그후에도 수월정(水月亭)이라는이름으로 보존해 오다가 1952년 괴산댐을 만들면서 현재의위치로 이전하였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물림집이다. 대청(大廳) 1칸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로 띠살문이 달린 1칸짜리 방이있고 툇간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건물 정면에는 맞배지붕을올린 1칸짜리 대문이 있고 대문을 기점으로 건물을 따라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수신적소 [盧守愼謫所]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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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외척세력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물러났던 사림들이 다시 정치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은 대윤과 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립을 하게되었다.
소윤의 실권장악과 정치음모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 역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문정대비를 위시한 소윤측에서는 대윤측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문정대비도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되면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대윤인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고 대윤이 정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芑),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 岏)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을사사화의 발생과 경과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나숙(羅淑)·나식(羅湜)·정희등(鄭希登)·박광우(朴光佑)·곽순(郭珣)·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양재역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을사사화의 결과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1498년(연산군 4)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다.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약해졌으나, 후에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림파는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朋黨)을 형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을사사화 [乙巳士禍] (두산백과)
정치하는 자들은 고금이 다름이 없다.
그저 조직폭력배나 같다.
길 옆에 왼쪽으로 올라가는 이 계단길은 천장봉에서 바로 내려오는 그 길이다.
괴산댐이 보이기 시작한다. 1957년생이다.
약수터 앞의 정자
산막이옛길 주차장이 한산하다.
구랍27일부터 오는 2월29일까지는 유람선이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관광객이 줄어서 일 것 같다.
자연환경과 조형물들, 스토리텔링을 접목시켜 상품화에 성공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등잔봉,천장봉, 삼성봉은 지도에 표기도 되지 않은 산이다.
그러면서도 산꾼들이 이 산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산악회의 상품가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괴산의 35명산 소개에도 포함되지 않는 산이다.
오르면서 좌측에 보이는 군자산이나 탐방허용되지 않는 비학산 등에 비하면 야산에 불과할까.
그래도 밟고 걷기에는 좋은 산이다.
삼성봉에서 연화협구름다리로 바로 이어주는 급경사 비탈길은 무시하면 구르기 쉬운 곳이다.
내가 2012.6.6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정도의 산이라면 한 번 더 올만한 곳은 아니고 관광으로 한 번 다녀갈만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아닌가.
만일에 다시 한 번 찾게 된다면 들머리 조각공원 옆의 활터나 한 번 찾아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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