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기룡산 꼬깔산 20191221 토
영덕 기룡산 꼬깔산 20191221 토 산하
나의 코스 : 용화1교하차-호반산책로 약 2.4km-강호정-사의당-삼휴정-꼬깔산-기룡산-묘각사-용화리
08:30 덕천동 탑승
10:10 용화교 하차
10:46 [강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 도로 표지판
10:49-56 강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삼휴당),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
10:55,11:01 [꼬깔산2.4](꼬깔산2.5)
11:02 [꼬깔산2.3]건너편 벽진이씨묘
11:09 오천정씨묘
11:11 (꼬깔산2.0)벽진이씨묘
11:35 (꼬깔산1.5)
11:45 급경사 밧줄
11:56 전망바위
12:04 [꼬깔산0.8, 하절1.6, 용화→]
12:13 [꼬깔산0.5, 하절1.9, 신선암1.3]
12:27-54 꼬깔산(736m), 삼각점 [기룡산3.3, 하절2.4, 아산정2.5]
12:51 꼬깔산 정상에 반대방향으로 온 A팀 선두 도착
13:29까지 A팀 25명 조우/기룡산 중간정도(바닥에 떨어진 기룡산1.7km)
13:34 (기룡산 1.0)
14:17 [기룡산0.2, 꼬깔산3.2...]
14:20-25 기룡산 정상(961m) [꼬깔산3.4, 묘각사0.9...]
14:40 바위 아래의 벤취, 불안한 위치
14:41 [기룡산0.3, 묘각사0.6]
14:56 [기룡산0.9]
14:57 묘각사산령각
15:02 묘각사극락전
15:05 기룡산 등산로 조감도, 묘각사주차장
[기룡산2.2]화장실 방향
15:46 [등산로입구100m]
15:50 반야교(묘각사3.5), 금강교
15:52 야옹정
15:54 용화리경로당, 버스주차장, 기룡산등산안내도
15:58 산행 종료/도로공간, 대형주차장 없음
16:36 후식 후 출발
19:00 귀가
오늘 안내된 코스는 주능선만 한바퀴 도는 약 12km의 구간이다.
기룡산(騎龍山)의 이름에 의상대사의 묘각사 창건설화가 스며 있다는데 묘각사를 지나치게 된다.
등산로의 트랙을 보니 제법 가파르다. 많이 찾지 않는 산이라 낙엽도 많이 쌓여 있을 것을 예상하는데....
산행 코스는 줄이고 주변의 문화유산을 찾는 덤의 코스로 약간 수정하고 5명이 동행했다.
나를 포함한 6명이다.
영천호의 상부에 해당하는 용화교에서 하차하였다.
산방버스는 용화길로 들어가서 1km 지점 부근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한다.
우리 팀은 영천호반의 둘레길을 약 2.5km 정도 걸으면서 호수의 풍경을 보고는 강호정이 있는 곳에 잠시 멈추어 오천정씨의 무덤이 있는 곳을 보았는데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무인석까지 있는데, 처사....
여기에서는 두문동72현의 이야기로 변명이 가능할 듯하다.
앞의 솔숲 건너편에는 묘역이 너르다. '오천정씨하천세적지지(烏川鄭씨夏泉世蹟之地)' .
여기까지 확인한다면 일행이 불편할 것 같아 포기했다.
복원문화재이기는 하나 모두 오천정씨의 흔적들이다.
종택을 비롯한 정자 등이다.
도로변의 강호정, 조금 들어가서 하천재, 오회공종택, 오회당, 조금 떨어져서 사의당, 삼휴정이 차례로 있었다.
거의 문이 잠겨 있어 안내문과 밖에서 보고 오는 정도.
삼휴정까지 갔다가 나오면서 우측으로 꼬깔봉 2.5km 안내가 있다.
삼휴정에서 거리가 멀지 않을 '충노억수의묘'를 찾을까 했는데 함께 한 일행들이 등산이정표를 보고는 한참이나 올라가 버렸다.
자세한 안내가 없어 예단할 수는 없었지만 '충성스런 노비'의 묘가 아닐까.
어느 스토리텔링에서 나왔지만 전쟁에 나간 사람이 키우던 말과 함께 가서 포위된 장군을 구하려고 싸웠던 이야기로 전하는데...
다음지도를 보고 '사의당과 강호정'은 찾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다음지도의 오류였다.
네이버지도는 확대해 보니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이버지도에는 '충노억수의묘'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을 말하지도 못하고는 따라온 일행을 따라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2.5km 안내판에서 100m도 되지 않는 작은 능선에서 잠시 건너 수 십m의 위치에 묘역이 있어 확인해 보니 벽진이씨다. 벽진이씨의 묘 중에 도로변에 석물이 제법 있는 묘가 1기 있었다.
조금 올라가다가 쉼터 의자가 있는 곳을 조금 지나 길이 가팔라지기 직전에 벽진이씨묘가 있고 가족인 듯한 두 분이 있길래 '충노억수의묘'에 대하여 물었으나 알 수 없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친의 묘소를 찾은딸과 사위인 듯하다.
여기서부터 오르는 길은 가팔라 힘들었었다.
괜히 따라왔다는 불평 섞인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시간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되돌아 나가 자양면 소재지를 지나 신선암 방향으로 올라가면 좋을텐데...
일단 600m 고지의 주능선에 오르면서부터 길이 약간 편하다.
그렇지만 낙엽이 많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꼬깔봉에 힘겹게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나니 용화리에서 출발하여 낙대봉, 기룡산을 거쳐 마지막 봉우리인 꼬깔봉에 도착했다.
기룡산에 올라 가면서 반대편으로 오는 A팀을 모두 만났다.
기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모현산과 면봉산, 보현산의 천문대, 면봉산의 기상레이더가 길잡이가 된다.
팔공산 방향은 구름에 막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기룡산에서 낙대봉 방향의 능선은 본래 포기한 바, 묘각사 방향으로 하산한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찰은 많으나 의상대사의 창건 사찰은 많이 볼 수 없었는데 이곳이 창건설화가 남아 있어 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하산길은 지그재그다. 급경사이기에..게다가 낙엽이 어찌나 많이 쌓였는지 무릎까지 사각사각 올라온다.
900m 하산길에서 처음 300m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낙엽의 높이도 많았었다.
묘각사는 잘 다듬어져 있고, 극락전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용화리로 이어지는 좁은 협곡이었다.
등산로 외에는 별다른 안내가 없었지만 전해져오는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가 있는 탱화가 있었다.
높은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 오면 주차장이 있다.
내려가는 길은 꼬불꼬불 새을자를 그리며 가는데 주차장이 두어 곳 보인다.
묘각사에서 3km 내려가면 본래의 등산로 초입이 있고 그 옆에 저수지의 제방이 보인다.
여기서 500m를 더 내려가야 용화리 마을의 반야교, 금강교가 있다.
마을회관까지는 좀 더 내려가야하는데
우리 버스는 마을회관까지 오지 않고 500m 정도 아래의 공터에 세웠다.
16:00까지 하산하라고 했는데 3분의 여유...
빠른 사람은 1시간 30분이나 앞서 내려 왔다.
후식 후에 16:30 출발 하려고 했는데 7분 정도 지연되었다.
귀가 시간 19:00...
기룡산 트랙 파일 첨부 : ,
Tr영천꼬깔봉기룡산.gpx
2019-12-21 1012 기룡산 꼬깔봉__20191221_1012.gpx
이학로애국지사추모비, 옆에는 벽진이씨토동에서 살았다는 유허비인 듯한데 世葬이나 世居가 아닌 다른 글자..? 정奠
그렇다면 전 奠으로 보자. 백호시집의 망녀전사에 나오는 제사 奠으로 쓴 것이다.
'벽진이씨토동세전유허비'
정할 전/제사 전, 멈출 정
1. (터를)정하다(定--)
2. 제사(祭祀) 지내다
3. 제물(祭物)을 올리다
4. 지상에 안치하다(安置--)
5. 두다
6. 드리다
7. 바치다
8. 제사(祭祀)
a. 멈추다 (정)
b. 머무르다 (정)
c. (음식을)저장하다(貯藏--) (정)
장사(葬事)지내기 전(前)에 영좌(靈座) 앞에 간단(簡單)히 술ㆍ과실(果實) 등(等)을 차려 놓는 일
이학로[李學魯]
한말 영천 출신의 의병.
이학로(李學魯)의 본관은 벽진(碧珍). 1867년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이정봉(李禎鳳)과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학로(李學魯)는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며 조·일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8월 1일을 기해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산청군 덕산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부대의 부장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18일에 향도인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에는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에 사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소각하였다.
그 후 서병희는 스스로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원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 10월 11일 구마산 주재소 일경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학로는 1910년 이후까지 지리산, 가야산 등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이학로의 묘소는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선산에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후손들이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학로 [李學魯]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산행 중에 벽진이씨의 묘소가 몇 기 보였다.===
강호정
다음지도와 네이버위성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 묘역의 위쪽 좌측 바깥이나 우측 바깥에 있는 묘 1기가 '충노억수의 묘'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오천정씨 하천 세적지비
오천정씨는 지금 영천정씨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연천정씨는 연일정씨, 오천정씨로도 불린다는 말이다.
영천호의 주변 도로가 '포은로'라고 하는 것은 포은 정몽주의 고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천호의 남쪽의 '임고면 포은로 447(양항리 462)'에 있는 임고서원이 바로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553년(명종 8)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 다시 지었으며, 이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장현광(張顯光), 1727년(영조 3)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영천 강호정
강호정(江湖亭)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정자 건축물이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당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양쪽에는 각 2칸의 방이 있고, 가운데 1칸이 마루로 꾸며져 있으며 화려한 난간을 설치하였다. 뒤에는 2채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는데, 그 마당을 통해 정자로 오르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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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江湖亭]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경북유형문화재 제71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로지정되었다. 정재종이 소유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대장으로 전공을 세운정세아(鄭世雅)가 1599년(선조 32) 창건하였다. 원래는지금의 용산동(龍山洞)에 있었으나, 영천댐 건설공사로인해 1977년 3월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이 대청, 좌우 협간(挾間)이 방이며 앞면에 퇴를 두어 마루를 넓게 쓰도록 하였다. ‘자호정사(紫湖精舍)’라고 씌어진 편액과, 정세아의 시(詩)를 포함한 시액(詩額) 15점이 걸려 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명예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언덕에 정자를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호정 [江湖亭] (두산백과)
하천재부비각[夏泉齋附碑閣]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재실(齋室)과 비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3호. 하천재는 오천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義公)정세아(鄭世雅)장군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인조 15)에 건립한 재실이다.
강의공은 임진왜란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1976년 영천댐 수몰로 인해 자양면 용산리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하천재는 추원당(追遠堂)을 중심으로 하여 一자형 건물 4동이 튼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추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는데 좌우측 온돌방의 쪽마루는 한 단 높게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신도비각은 추원당의 좌측 후면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각의 주위에는 방형(方形)의 토석담장을 두르고, 정면 중앙에는 협문을 두어 출입하게 하였다. 비각은 단간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4면의 처마밑에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천재부비각 [夏泉齋附碑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
경북유형문화재 제72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정수번(鄭守藩)이 그의 셋째아들인 호신(好信)을 분가시키기 위해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건립한 주택이다. 정수번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영천·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아들이며, 의번(宜藩)의 아우이다. 묘우(廟宇)는 효종(孝宗) 6년(1655)에 세웠다.
본래는 정세아가 조정에서 수여하는 모든 명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자양(紫陽)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선조 32년(1599)에 현 용산동(龍山洞)에 창건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을 정씨종택이라고도 불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정수번의 창건인지 확실하지 않다.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종택은 자연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세운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이다. 팔작이라도 보기에는 맞배지붕에 눈썹지붕을 단 형식이다. 중앙의 2칸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1칸씩 방을 들였다. 좌측 1칸은 부엌이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회공종택 [五懷公宗宅]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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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2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에 있는 조선후기 정호의 형제 관련 주택. 시도유형문화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인조 2년(1624)정호의(鄭好義) 형제가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라 전한다. 안채와 사당이 현존한다.
1997년 3월영천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자양면 삼구동(三龜洞)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안채는 정면5칸 측면 1칸의 ㅡ자형 평면이다. 향우측에서 부엌 1칸, 방 1칸, 대청 2칸, 건너방 1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에다 좌우로 가적지붕을 설치한 영천지방 특유의 지붕구조를 하였다. 삼량집이며 홑처마이다. 대청이 연등천장이 되면서 방의 벽체가 대들보 아래까지 설치되게 되었는데 벽중깃을 굵게 써서 세 개 간주(間柱)세우듯 눈에 뜨이게 세웠다.
원래가 안채로 쓰던 건물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앞퇴가 없는 질박한 구조이나 낮은 담장을 둘러 일곽을 따로 형성하는 예의는 존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회공종택 [五懷公宗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회당[五懷堂]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포은로 1611-15[성곡리 78]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 / 지정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정석현(鄭碩玄)이 건립한 정자.
정석현[1656~1730]의 본관은 영일, 자는 지원(志遠), 호는 오회당(五懷堂)이며, 삼휴정(三休亭) 정호신(鄭好信)[1605~1649, 자 덕기(德基)]의 손자로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이형상(李衡祥)·정중기(鄭重器)·정간(鄭榦) 등 당시 명망있는 선비들과 교우했다. 집 밖에 오회당이란 별서를 지어 오형제들과 친모했다. 저서로는 『오회당일고(五懷堂逸稿)』가 전하며 현 오회당 뒷산 선산에 묘소가 있다.
오회당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로 영천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영천시내에서 임고면을 통과해 영천댐으로 올라가면 자양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소재지 직전 100m에 좌측으로 난 산길을 올라가면 문화재 이전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오회당은 문화재 이주단지 통로 중간쯤인 오회공 종택 다음에 있다.
오회당은 정석현이 만년에 오형제들과 친목과 여생을 함께 즐기기 위해 집 앞에 별서로 건립한 정자로 1725년(영조 1)에 건립했다. 문화재청과 여러 문헌에는 1727년 관찰사 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정석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지만 정석현은 1730년에 죽었기 때문에 그 추측은 맞지 않다. 아마도 후대에 중건년대를 오해한 것은 아닌지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오회당서(五懷堂序)’에 따르면 오회당은 정석현이 살아 있을 때인 1725년 건립하고 오형제들간의 친목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오회당의 당호는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常棣) 편에 나오는 ‘형제공회(兄弟孔懷)’라는 어원에서 인용되었다고 『영천의 누정』에서 밝히고 있어 더욱 신빙성이 있다. 그 후 영천댐 공사로 인해 수몰됨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지기 전인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
오회당은 문화재 이주단지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오회공 종택 옆에 북동향에 있다. 배치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난 사주문을 계단을 통해 들어서면 전면에 ‘一’자형 정자가 독립 배치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우측에 대청마루방 두 칸을 두고 좌측에 온돌방 두 칸을 드린 편당형이다. 특히 대청마루방 우측에 반 칸의 퇴를 두고 좌측 방 측면에 반 칸의 마루 없는 퇴를 두어 독특한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맞배지붕의 측면에 풍판을 달지 않고 가적지붕을 덧붙인 공간을 퇴로 활용한 것이다. 건물 전면에는 쪽마루를 두었는데 대청칸과 온돌방칸의 쪽마루 높이가 다르다.
창호는 청방간에 외여닫이문을 두고 대청 전면에 쌍여닫이 굽널세살문, 후면과 측면에 쌍여닫이 판문을 두었다. 방의 전면에는 쌍여닫이세살문을 두어 건물의 정면 방과 대청 그리고 측면의 청퇴간으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방의 배면과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두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구조는 평평한 대지에 네벌대 자연석기단 위에 건물전체에 방주를 세워 삼량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주 상부에는 간결한 소로수장으로 꾸몄다. 지붕은 맞배지붕의 양 측면에 가적지붕을 덧대어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오회당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보존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정면 온돌방 우측칸 상부에 ‘오회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대청에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오회당은 지붕형태가 영천 지역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가적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평면 또한 측면에 반 칸의 퇴가 형성된 것은 독특한 구조로 건축적 가치가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회당 [五懷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의당[四宜堂]
요약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경북유형문화재 제74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1732년(영조 8)에 정중호, 중보, 중락 등 4형제가 형제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즐기는 장소로, 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자양면(紫陽面) 용산동(龍山洞)이었으나, 영천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게 되어 1977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의당 [四宜堂] (두산백과)
삼휴정[三休亭]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정호신(鄭好信)이 건립한 누정.
경북유형문화재 제75호 / 1975년 08월 18일 지정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635년(인조 13)에삼휴(三休) 정호신이 학업을 위해 지었다. 정호신은 임진왜란 때 영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조부 정세아(鄭世雅)가 살던 이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학문에 정진하였고, 그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라는 시를 지었다. 이로써 삼휴당이라는 당호가 생겼다.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다락집으로 건물의 전면에만 난간을 시설하였으며 기둥 가운데 다섯 개만 원주(圓柱)이고 나머지는 육축(陸築) 위에 초석을 놓고 평주(平柱)처럼 세워져 있다. 평면은 중앙에 2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 2칸에 반 칸의 전퇴를 두고 각각 1칸 반 크기의 방을 배치했다. 영천댐 건설 공사로 수몰 위기에 있어 1977년 3월에 지금의 자리로옮겨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휴정 [三休亭] (두산백과)
이 이정표 때문에 일행들이 바로 산으로 가 버렸다.
'충노억수의묘'를 아직 찾아보지 못했는데....
다음지도로 추측해 볼 때 아마도 저 앞의 묘역의 위쪽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다음지도에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다음지도에 의하면 강호정과 사의당이 해발 320~340m 사이에 위치해 있다.
터무니 없는 위치라고 판단했지만 일단 답사는 할 계획으로 잡았다.
강호정의 위치를 확대하니 사의정이 바로 위에 있었다.
답사 결과 위치를 위와 같이 수정해야할 것이다.
네이버지도에는 '충노억수의묘'에 대한 정보가 없다.
거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는...
아마도 좌측 아래의 동그라미 부분이 그 묘소 아닐까. 삼휴정에서 직선으로 60m 정도인데..
아니면 우측 위의 위치라면 200여m 정도다. 이 경우라면 묘역으로 가는 게 쉬울 듯.
묘역은 영천정씨의 세장산...
정상 바로 아래의 이정표
기룡산 정상(961m)
기룡산[騎龍山]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에 있는 산.
기룡산(騎龍山)[961.2m]은 영천시 자양면 용화리·용산리·성곡리·충효리와 화북면 정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운주산(雲柱山)·보현산(普賢山) 등과 함께 자양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기룡산 산지의 동·서·남 방향은 험준한 산지로 마을이나 농업 지대가 발달하지 못하였지만, 북쪽 방면의 해발고도 300m 이하 지대부터는 경사가 완만해져 과수원과 밭농사를 행하고 있다.
기룡산이라는 명칭은 기룡사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 절을 짓자 동해 용왕이 대사에게 설법을 구하고자 말처럼 달려왔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기룡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기룡산 지역은 기반암이 화산암이므로 경사가 급한 험준한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단애(斷崖)[수직 혹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암석 사면]가 발달하였고, 애추 사면(崖錐斜面)[산지 사면을 따라 애추로 이루어진 사면]이 30° 이상의 급사면을 유지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기룡산에서는 고립 구릉, 산록 완사면, 하안 단구, 하식애(河蝕崖)[하천의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절벽], 관입 암맥 등의 지형 관찰이 가능하며, 식생은 산지낙엽활엽수림으로 신갈나무군락·소나무군락·굴참나무군락이 발견된다.
기룡산 정상에서 남쪽 3.3㎞에 있는 꼬깔봉과 연계하여 능선을 이을 수 있으며, 남쪽에는 영천호가 있다. 6·25 전쟁 당시 영천전투의 작전 지역이었는데, 북쪽의 기룡산에서 시작된 능선을 따라 서남쪽의 봉화산과 유봉산(遊鳳山) 일대 주변으로 전략을 펼쳐 위기를 극복한 전투지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룡산 [騎龍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상에서 바라본 보현산(좌)과 면봉산(우)
구 정상석은 바위 위에 있다.
낙엽의 깊이가 무릎까지 올라온다
처음 만난 묘각사의 산령각(산신각)
묘각사[妙覺寺]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기룡산(騎龍山)에 있는 사찰.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동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하였다. 설화에 따르면, 창건 당시에 동해 용왕이 의상에게 법을 듣기 위하여 말처럼 달려왔다고 해서 절이 들어선 산이름을 기룡산(騎龍山)이라 했다고 한다. 용왕이 달려와서 의상에게 법문을 청하자, 의상이 법성게(法性偈)를 설하였더니 문득 깨닫고 승천하였다. 용왕은 하늘에서 감로(甘露)를 뿌렸는데, 이 비로 당시 극심했던 가뭄을 해소하고 민심을 수습했다고한다. 이에 의상은 묘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묘각사라 하였다.
고려 때와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1644년(인조 22) 요사채를 지으면서 중창하였다. 1760년(영조 36)에 삼성(三性)이 중창하였고, 1889년에 법당을 중수, 1994년에 진광(眞光)이 산신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산신각·요사채가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오른쪽에 지장보살을 모셔 두었다. 요사채는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오랫동안 법당역할을 해온 건물이다. ㄷ자 양식으로 조선 중기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99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에 들어가 아미타삼성전을 복원하고 관세음보살상도 새로 제작하고 있다. 이 절의 부근은 예로부터 불교신앙지로 널리 알려졌다. 절의 뒷산은 보현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현산이며, 산 아래에는 용화동·삼매동·정각동 등 불국정토를 나타내는 마을 이름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묘각사 [妙覺寺] (두산백과)
선묘의 원력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
하산길 우측으로 A팀의 들머리와 운용지 제방이 보인다.
흙과 돌로 쌓은 집
반야교
야옹정(野翁亭) 자양면 용화리
익재 이재현의 11세손 야옹공 이영갑의 우모지소(㝢慕之所)에 세후손들이 세웠다.
용화리 경로당 앞의 산행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