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성주-합천 만물상-칠불봉-가야산 20191106 토

benel_jt 2019. 11. 16. 23:13

성주-합천 만물상-칠불봉-가야산 20191106 토 산하


코스 : 백운동-만물상능선-상아덤-서성재-칠불봉-상왕봉(우두봉)-우미정-석조마애여래입상-해인사-주차장


07:30 덕천에서 버스 탑승
09:34 정인홍 묘소 앞
19:44 백운동 주차장 하차
09:50 백운동 출발
09:57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앞(만물상탐방로입구)
10:09 심장안전쉼터
10:22 계단
10:23 심장안전쉼터(첫휴식)
10:28 <해발740m>
10:31 [서성재2.4, 백운동탐방지원센터0.6]
10:34 심장안전쉼터
10:37 계단
10:54 <해발900m>쉼터 [서성재2.0, 백운탐방센터1.0]
10:56 난간,계단
10:59 계단
11:03 [서성재1.7, 백운탐방센터1.3]
11:09 계단
11:13 <해발990m>
11:20 계단난간
11:26 계단
11:32 [서성재1.2, 백운탐방센터1.8]반석포토존
11:35 난간
11:38 계단 하강
11:41 <해발1040m> 계단, 뒤돌아보면 온갖 모양 바위
11:53 계단
11:54 [서성재0.7, 백운탐방센터2.3]
11:58 정상부 조망
12:05 난간, 능선 조망
12:06 [서성재0.4, 백운탐방센터2.6] <해발1140m>
12:10 상아덤 안내판
12:19 서성재 <해발1110m> [상왕봉1.4, 칠불봉1.2, 백운탐방(만물상3.0),(용기골)2.6]
12:44 목계단, 좌우 산죽
12:46 성터, 성돌이 이어짐
12:56 [상왕봉1.0, 칠불봉0.8, 서성재0.4, 백운3.0]
13:04-09 <해발1270m> 계단, 조망, 사진
13:20 [상왕봉0.5, 칠불봉0.3, 서성재0.9, 백운3.5]
13:27 <해발m1390> 계단
13:31 계단 끝, 정상부 암능선 [상왕봉0.2, 칠불봉0.05, 서성재1.2, 백운3.8]
13:33 칠불봉, 삼각점, 백리향, 능선조망
13:46 <해발1400m>[상왕봉0.1, 칠불봉0.2, 해인사3.9, 백운4.0]
13:49-14:04 상왕봉(가야산 우두봉)<해발1430m>조망판, 우비정
14:07 <해발1400m>[상왕봉0.1, 칠불봉0.2, 해인사3.9, 백운4.0]
14:11 봉천대 [상왕봉0.2, 해인사3.8]
14:20 계단, 바위 조망
14:22 <해발1370m>
14:28 [상왕봉0.6, 석조여래입상(보물264호)0.05]
14:29 석조여래입상
14:32 [상왕봉0.6, 석조여래입상(보물264호)0.05]
14:41 <해발1135m>
14:51 <해발1010m>
15:01 <해발890m>
15:05 [상왕봉2.1, 해인사1.9]
15:11 <해발810m>
15:15 [상왕봉2.6, 해인사1.4]
15:20 <해발770m> [상왕봉2.8, 해인사1.2]
15:28 <해발590m> 데크 계단
15:36 토신골 탐방로 입구
15:37 [해인사0.1, 상왕봉4.0, 용탑선원0.1]
15:41 가야산해인사일주문 [상왕봉4.2, 치인주차장1.5, 대장경테마파크7.1]
15:49 김영환장군팔만대장경수호공적비
15:50 [상왕봉46, 해인사0.4, 치인주차장1.1, 대장경테마파크6.7]
15:57 [상왕봉4.9, 해인사0.9] 성보박물관
16:07 주차장 도착













가야산 만물상 트랙 파일 : 합천_성주_가야산_2019-11-16_09-48-33.gpx, Tr가야산20191116.gpx











들머리 백운동에 있는 '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 한 번 보고 갈 법한 곳인데 ....


심장안전쉼터가 몇 곳 보인다. 첫째 쉼터는 지나지만 다음 쉼터부터는 약간씩 휴식을..

이정표를 보니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서성재까지 3km

거대하고 기묘한 바위들이 많지만 아직은,..

능선에 성곽처럼 쌓인 돌담을 지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 줄줄이 오르고...

이 반석에서는 모두들 한 번 씩 인증을 하고는 지난다.





계단에서 뒤로 돌아보는 이 위치가 가장 기묘한 모습을 연출한다.

사진의 중앙 아래 쪽에는 불상같기도 하지만, 위쪽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인데..앞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을 마주하고 있다.

바위들마다 이름을 붙일만한 모습들을 하고 있어 만물상이라고 한 것 아닌가.



상아덤(嫦娥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산56-2
가야산은 대가야(大伽倻)의 시조설화가 서려있는 산으로 예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이름높은 산이다.
이 곳 상아덤은 달에 사는 미인의 이름인 상아(嫦娥)와 바위(巖)를 지칭하는 '덤'이 합쳐진 단어로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신 이비가지(夷毗訶之)가 노닐던 전설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최치원이 저술한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는 하늘의 신 이비가지와 이곳 상아덤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어여쁜 옥동자를 낳게 되는데, 첫째는 아버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어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 이름하였다.
둘째는 어머니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달과 같이 갸름하고 흰 편으로 뇌질청예(惱窒靑裔)라 이름하였다.
이 두 형제는 자라서 형 뇌질주일은 대가야(현 고령)의 첫 임금인 이진아시왕(伊珍阿䜵王)이되고, 동생 뇌질청예는 금관가야(현재 김해)의 첫 임금인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상아덤은 기암괴석의 봉우리로 가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물상(萬物像)능선과 이어져 있어 최고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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嫦 : 항아 항, 항아 상
1. 항아(姮娥: 상궁이 되기 전의 어린 궁녀를 이르던 말)
2. 상아(嫦娥: 달에 사는 미인 이름)
3. 여자(女子)의 자(字)
a. 항아(姮娥: 상궁이 되기 전의 어린 궁녀를 이르던 말) (상)
b. 상아(嫦娥: 달에 사는 미인 이름) (상)
c. 여자(女子)의 자(字) (상)

娥 : 예쁠 아
1. 예쁘다
2. 아름답다
3. 여자(女子)의 자(字)
4. 미녀(美女), 미인(美人)
5. 항아(姮娥: 상궁이 되기 전의 어린 궁녀를 이르던 말)


상아덤



서성재(西城岾)
경북 성주군 수륜면과 경남 합천군 가야면을 이어주는 고개(岾)로 과거 가야산성(伽倻山城)의 서문(西門)이 위치해 있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가야산성은 칠불봉에서 발원한 용기골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져 있는 상아덤, 동성봉(東城峰)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이 넓으며, 외부 노출을 방지해 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과 불과 14km 거리로 전쟁시 수도 방어의 요충지였으며, 왕이 이동할 때 머무르는 이궁(離宮)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성재에는 현재 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으나 10m가 넘는 넓은 공터와 허물어진 성벽의 규모를 통해 문지(門址)가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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岾 : 땅 이름 점,고개 재
1. 땅의 이름
2. 절의 이름
a. 고개 (재)
b. 재 (재)

岾 : 재 재
1. 〚國字〛 국음은 “재”. 재. 길이 통하여져서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칠불봉 건너편 성주 방향으로 벋은 능선,

칠불봉에서 가야산 우두봉 방향










우비정(牛鼻井), 가야산 꼭대기에 있는 우물



오늘 동행했던 2명 모두 닉네임을 고향의 지명으로 한 사람들이다. 호계(울산), 서중(진해?)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입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민머리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많이 닳고 손상되었다. 머리에 비하여 왜소해진 몸은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이 든다. 좁아지고 각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쪽에서 비스듬히 흐른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다가, 허리 부근에서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 앞으로 들었고, 왼손은 내렸는데 두 팔은 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 불상은 신체 비례의 불균형, 평면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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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陜川海印寺石造如來立像]

<보물 제264호> 해인사.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불신에 비해 머리가 커지는 등 신체 비례가 맞지 않고, 선각의 딱딱한 옷주름 표현에서 통일신라 9세기 불상의 양상을 보여준다. 높이 2.1m

보물 제264호 / 1963년 01월 21일 지정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해인사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264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불상은 2.1m의 크기이며,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와 대좌가 결실되었고 무릎 아랫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이다. 목도 부러졌으며, 전체적으로 박락이 심한 편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 조성에 관한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으로, 원래는 상당히 입체감이 있었던 불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불상이 갖추어야 할 종교성은 충분히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은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 나온 부분)와 후덕하게 보이는 양 볼과 턱, 어깨까지 닿아 있는 귀 등에서 원만한 상호(相好 : 얼굴)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의 앞면보다 옆면의 폭이 상대적으로 길어진 조형이다.

머리에 비해 좁아 보이는 어깨, 장방형의 돌을 간략하게 다듬은 듯한 불신(佛身 : 불상의 몸)의 모습, V자 형태의 딱딱한 법의(法衣 : 불상의 옷) 주름 등에서 불상이 형식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인(手印 : 손 자세)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을 옆으로 내려 뜨렸다. 박락이 심하여 법의의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서 V자 문양이 배꼽까지 내려오다가 W자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시대 718년에 조성된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 조성된 후,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했던 것이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불두(佛頭 : 불상의 머리)의 모습과 허리를 강조하는 등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불상 조형을 계승하고 있지만,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어깨, 선각(線刻)화 되어 가는 법의 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간취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상호의 원만한 표정이나 법의의 주름 형식 등을 계승하고 있으나, 머리에 비해 좁아진 어깨, 경직화되고 간략화된 법의 주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수도 경주(慶州)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9세기에 지방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陜川海印寺石造如來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버스를 타고 백운동으로 들면서

작은 안내판 하나 있는 '정인홍 묘소'를 지난다.

 

누구 하나 기억해 주는 이도 없는 곳이 되어버린 곳.

이것이 정치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허망함을 느낀다.


광해군의 정치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켜온 국방과 외교의 힘을

서인 일당은 무너뜨린다.

결국은 나라가 망하기까지 서인의 농단이 이어졌던 것 아닌가. 



반정

그 이름은 좋았지만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맞게 되고

지키지 못하는 나라로 만들어

결국은 매국노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만동묘를 보면서

중국황제를 섬기던 그들이 부르짖던

비도불행

남에게만 강조하고

자신들은 백성과 나라를 팔아먹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의리실천과 구국운동을 중시한 정인홍

목차
(1) 머리말
(2) 비타협적 강경 노선과 붕당정치의 출현
(3) 의병활동과 구국활동


(1) 머리말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5~1623)은 중종30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태어나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김우옹과 함께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실제로 강우학파(江右學派)를 이끌었으며, 남명의 의리실천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다. 24세 때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으나 명종 당시 과거장의 타락과 과거가 명리를 탐하는 것이라 하여 대과는 치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조식의 처사적 처세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등극하자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새롭게 등장하였고 처사들의 천거가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 선조6년(1573) 5월 선조가 왕명으로 유일(遺逸)의 천거를 명하자 그는 이른바 ‘오현사(五賢士)’로서 서경덕의 문인 이지함(李之函), 조식의 문인 최영경(崔永慶), 이황의 문인 조목(趙穆), 이항의 문인 김천일(金千逸)과 함께 천거되어 6품직에 제수되었다. 46세 때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출사하여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서인들마저도 그의 공정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선조22년(1589) 그의 나이 5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동서분당의 최대비극상황인 기축사화(己丑士禍; 정여립의 난)가 발생하여 1,000여 명이나 되는 선비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 때 최영경 · 이발(李潑) 등이 처형되고 그도 삭탈관직되었다.

그의 나이 5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창의장(倡義將)으로서 왜병을 물리치고 성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왜군들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았다. 63세 때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창의가 전무한 상태였지만 오직 그만이 창의 모병하고 성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에 협력하였다.

그는 선조41년(1608) 저위문제(儲位問題)를 싸고 대북 소북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자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 등을 탄핵했지만 도리어 선조의 미움을 받아 영변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귀양가는 도중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니 귀양이 해제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그는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광해군 초년 1609년 임해군의 옥사에서는 할은론(割恩論: 토역지론(討逆之論))을 주장했으나 후에 계축옥사때와 폐모논의에는 전은론을 내세웠다. 그는 77세(1611)때 의정부 우찬성을 제수하자 사직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출처문제를 거론하며 그들의 문묘종사가 불가함을 논핵하였다. 이 상소문 때문에 이황의 문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이름을 성균관 학적부에서 삭제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퇴계학파와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79세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에 대한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는 상소를 두 차례나 올렸으며, 81세 때 폐모논의에 전은설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합천으로 내려가 인조반정으로 죽을 때까지 도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인조원년 ‘대북파의 영수로서 폐모살제론(廢母殺弟論)의 배후조종자’라는 무고 날조된 모함을 받아 89세의 나이로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후 그는 285년 간 역적으로 취급되다가 1908년(순종2년) 신원(伸寃)되어 복작(復爵)되었다. 그의 저서는 내암집 15권이 있으며, 1911년에야 그가 신원 복작된 후에야 나오게 되었다.

일찍이 신채호(申采浩)는 정인홍을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적 경륜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전기를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계획했으나 탈고하지 못했지만, 우리 나라 구국의 인물로 을지문덕 이순신과 더불어 그를 꼽았고 그의 외적방어와 정치에의 혁명정신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1)


(2) 비타협적 강경 노선과 붕당정치의 출현


우리 나라 붕당은 남명 조식편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동서 분당은 선조 8년(1575) 조식의 문인인 오건(吳健)이 맡았던 이조정랑(吏曹正郞)의 후임문제를 놓고 조식과 이황의 문인인 김효원(金孝元)과 훈구 척신 출신인 심의겸(沈義謙; 명종비 인순왕후(明宗妃 仁順王后)의 동생)이 반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김효원이 김계휘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자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문객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그 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을 이조정랑으로 천거하는 자가 있자 이번에는 김효원 편에서 척족에게 정랑을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동서붕당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장령 정인홍이 가장 심하게 의겸을 모함하고 질투하여 탄핵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3년전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의 난)때 정철(鄭徹)과 유성룡(柳成龍)이 위관(委官; 재판관)이되 옥사를 다루었는데, 강경파인 정철은 엄하게 다스리어 1,000여 명이 관련되어 화를 입었으며, 이발 · 이호 · 배유양 · 유몽정 · 최영경 등이 처형당하고, 정개청 · 정언신 · 정언지 · 김우홍 등이 유배되었으며, 노수신 · 정인홍 등은 파직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인세력이 꺾이게 되었으며 전라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전라도 출신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임란 발생 당시 세자저위(世子儲位) 문제로 정철 등 서인정권이 물러나자 정철의 추죄문제로 강온양파가 대립하여 동인정권은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이후 강경파인 정인홍 등은 온건파인 유성룡을 축출하고 집권하자, 기축옥사의 책임을 물어 정철과 성혼(成渾)을 추죄하면서 정인홍과 서인과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 후 선조 35년(1602) 정인홍이 대사헌에 임명되고 정권이 북인에 넘어가자 정경세 등의 유성룡세력을 몰아내고 성혼의 추죄, 최영경의 신원조처를 취했다.

이 때 서인으로서 우율(牛栗)의 고제인 이귀(李貴; 인조반정의 원훈)가 정인홍을 탄핵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남명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게 되고 광해군의 즉위 후 남명학파의 기세가 신장되고 정인홍은 산림에 묻혀 있으면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여러 후궁 소생 가운데 가장 인물이 출중했던 공빈(恭嬪)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자신은 의주로 몽진하면서 전란의 수습이나 왕권의 행사를 세자인 광해군에게 일임하였다. 광해군은 이른바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무능하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 부왕 선조를 대신하여 임진왜란을 끝내 이긴 전쟁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왜란이 종식된 후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키운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죽고, 선조35년(1602) 선조는 후취인 인목계비(仁穆繼妃)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당시 소북파의 영의정 유영경이 선조의 의중을 헤아리고 또 자신의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여 영창대군을 다시 세자로 삼고자 한 일이 벌어졌다. 이 때에 시골 합천에서 후진양성에 몰두하고 있던 정인홍은 ‘일단 세자로 책봉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던 광해군을 폐할 수 없다’는 소를 올렸다.3) 그는 선조41년(1608) 유영경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도리어 선조의 미움을 받고 영변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가는 도중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풀려나서 광해군의 정책 수행에 관여하게 되었다.

유영경을 참하라는 정인홍의 탄핵상소는 이제까지 그가 제출했던 상소와는 다른 성격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의 상소는 대체로 다른 학파나 다른 정파를 공격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였지만 유영경 탄핵상소는 국법질서와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심의겸을 비판한 것이라든가 이언적과 이황등의 비판, 그리고 정철과 성혼 등의 탄핵, 유성룡에 대한 비판 등이 전연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붕당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정치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당파싸움의 길을 열어준 것만은 숨길 수 없다.

사실 그는 곽재우 등과 함께 다른 붕당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특히 그는 국왕에게 군자당에 대한 변별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곧 대북을 은연중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광해군 초기에는 대북 외에도 여러 붕당이 혼재해 있었으나 점차 대북 일색으로 바뀌게 되고 그들에 대한 견제 세력이 없어짐에 따라 폐모살제론까지 나와 결국 반정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그의 독선적이고 강경한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유영경에 대한 탄핵은 당시 정치 실권자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선조의 미움을 자초한다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도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의 장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결연하게 맞선 행위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대신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광해군의 능력을 인정하여 광해군이 즉위하는 것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또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와 병이 위독하여 승하하기 직전 광해군에게 두 번이나 선위교서를 내렸다는 점은 선조도 광해군의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한 것인데, 그것의 번복은 공인으로서의 군주의 처사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또한 그는 선조를 부추겨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그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음모집단을 묵과해서는 국가장래에 커다란 누가 될 것이라는 우국충정과 정의감에서 유영경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그는 유영경이 척분을 이용하여 정권을 좌우하게 되자 그의 스승인 남명이 명종대에 척신정치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하였던 것처럼 척신정치의 재현에 대한 배척의 의도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그가 우국충정과 정의감에서 유영경 등에 대한 탄핵 상소를 했다는 긍정적 평가의 가능성은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수 백년간 묻혀버리고 말았으며, 그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불행하게도 왜곡되어 버렸다.


(3) 의병활동과 구국활동


15세기 후반부터 서세동진에 따라 유럽의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신흥상업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와 때를 맞추어 도요또미(豊臣秀吉)가 일본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국내를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대륙침략을 꿈꾸어 대마도주 소오(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과 수호하도록 명하자 소오는 조선에 일본과의 수호를 하고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서신에 오만무례한 문구가 들어 있어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도요또미는 그에게 다시 교섭을 요청하도록 하고 그것이 안되면 침략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선조23년(1590) 도요또미의 저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일본에 보냈다.

이듬해 3월 통신사편에 보내온 도요또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들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조정에는 동인세력이 강했으므로 김성일의 의견을 쫓게 되었다.

도요또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원정군을 편성하여 선조25년(1592) 4월에 15만 대군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범케 했다. 왜군은 3군으로 나누어 서울을 향하여 물밀듯 쳐들어왔다.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막도록 하였으나 호적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평정한 바 있는 이일(李鎰)은 상주에서 대패했고 역시 같은 전공을 세운바 있는 신입(申砬)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왜군이 쳐들어 온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하자 서울의 인심은 극도로 동요되었고 선조는 몽진했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 근왕병을 모집케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이 때 인심은 이미 정부로부터 이반하여 모병에 응하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피난 가는 길을 막고 욕하는 자까지 있었다.

선조가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들의 문적을 맡고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질렀으며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소진되었다. 왜군은 통일전쟁에서 익힌 병법과 조총이라는 무기를 통하여 파죽지세로 몰려들었으며, 우리의 육군은 거의 저항할 수 없었고, 오직 이순신이 거느리는 해군만이 승승장구해서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호남 진입을 막았다.

한편 전국 각지에서는 구국을 위한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령 창령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하였으며. 김천일(金千鎰)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로 왜군을 추격하고 강화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해 진주에서 왜병의 최후 보복공격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그리고 승려로서 휴정(休靜; 西山大師)과 그의 제자 유정(惟政; 泗溟堂)이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제자 처영(處英)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률(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휴정의 제자 영규(靈圭)도 승군 500여명을 거느리고 조헌의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의병장이 나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괴롭혔다. 전국적으로 창의한 의병의 활약은 산곡을 통한 유격전투등을 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또한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조27년에는 모든 의병을 파하고 김덕령(金德齡)에게 통솔하게 하였다.

이러한 초기 의병장들 가운데는 남명 조식의 문화생들이 많았다. 그것은 조식의 의리실천정신을 그 제자들이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인홍은 남명의 고제로서 남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그의 나이 58세 때) 5월 10일 그의 동문인 김면(金沔)과 함께 문인 제자들을 모아 합천 숭산동(崇山洞)에서 창의하였다. 그 후 김면은 독립하여 거창 · 지례 · 금산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그는 합천 · 고령 · 성주 등지에서 3,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과 매복 기습 등의 전술로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개산(開山)의 습격 · 안언(安彦)의 전승 ·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에서 전승 등을 통하여 왜군을 전멸하거나 격퇴하고 왜군이 약탈한 많은 귀중한 물건들을 노획하였으며, 악전고투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전승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보고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의병활동의 전공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선비적 기질과 강의(剛毅)한 성격을 알 수 있다.4) 그는 정유재란 때 아무도 창의하지 않았을 때에도 유일하게 그만이 의병을 모집하였다. 명나라 장수들도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전란 가운데 정인홍을 최고의 수훈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의병창의와 수훈의 결과로 영남의병장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이를 사직하는 봉사(封事)를 올려 조정신하들의 가치평가의 전도현상을 지적하고 그 개혁을 건의했다.


“아래 사람을 착취해서 윗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유능한 사람으로, 물건을 아끼는 사람을 우활한 사람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을 미치광이로 지칭하는 습관에 물든지 오래 되었다.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니 왜구가 쳐들어오는데 이르러도 알지 못하였다.”5)

정인홍의 이러한 강직성과 정의감은 그가 장령으로 있을 때의 행적에 관하여 동시대인인 이이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정인홍이 사헌부에 있으니 풍속과 정치가 정돈되고 규율을 엄숙하게 바로잡아 조정대신들도 두려워서 떨며 삼가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시중의 상인들까지도 모두 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은 밖에 내놓지 못하게 되었다. ···”6)

당시 다른 당파에 속했던 이이가 이러한 평가를 하였다는 것은 정인홍에 대한 객관적 평가로 간주된다. 선조실록에도 정인홍의 정의감과 강직성에 관하여 “정인홍은 비리를 탄핵하는데 있어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국법을 엄수하여 일시에 기강이 자못 숙연하였다”7)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인조 반정이후 정인홍에 대한 왜곡 및 폄하가 지속되어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결여되었으나 그의 우국충정과 선비정신에 입각한 의리실천정신 그리고 강직성과 정의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의병장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명나라에만 의존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자주국방할 것”을 역설한 것은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 정책의 밑바탕이 되었다8)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실천과 구국운동을 중시한 정인홍 (한국사상사, 2002. 2. 28., 이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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