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논산 천호산, 돈암서원 20191008 화

benel_jt 2019. 10. 9. 19:41

논산 천호산, 돈암서원 20191008 화 솔로


코스 1: 개태사지-용화사()-개태사(고려태조어진,개태사지삼존불)-천호산-송불암-연산사거리

(택시로 이동 : 연산사거리-사계 김장생묘소 경유-휴정서원 하차)


코스2 : 김장생묘소-휴정서원-영사암-논산신풍리마애불-고정산-백제군사박물관-황산루-충장사-계백장군묘-충곡서원갈림길(시간관계로 충곡서원은 통과)-돈암서원






개태사-천호산-김장생묘소-백제군사박물관,계백장군묘-돈암서원 트랙 : 2019-10-08 1107__2논산개태사천호산 돈암서원__오룩스.gpx



개태사 천호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Tr논산 개태사 천호산201910081107.gpx



돈암서원 김장생묘소 트랙 파일 첨부 : Tr논산-돈암서원201910081451.gpx



동행 : (강,권,류,임)

교통 : 기차, 택시, 버스/(기차는 오후에 파업 관련하여 10분, 88분, 2시간 정도 지연운행)

코스 1: 개태사지-용화사()-개태사(고려태조어진,개태사지삼존불)-천호산-송불암-연산사거리

(택시로 이동 : 연산사거리-사계 김장생묘소 경유-휴정서원 하차)


코스2 : 김장생묘소-휴정서원-영사암-논산신풍리마애불-고정산-백제군사박물관-황산루-충장사-계백장군묘-충곡서원갈림길(시간관계로 충곡서원은 통과)-돈암서원


돈암서원에서 논산역까지 택시로 이동하려다 버스만남

논산-서대전 무궁화호로 이동

서대전역-대전역 버스로 이동

대전-부산 열차 예약했는데 파업관계로 지연되어 역무원과 상담하니 먼저오는 차로 내려가라면서 동대구까지 가는 차를 타라고 하여 일단 동대구까지 가고,

동대구에서 어느 열차든지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탄다..부산역에 도착하니 21:35 정도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일단 이동, 서면에서 마지막 지하철 타고 이동

늦어도 23:40 정도면 귀가하는 계획이었는데, 01:00에 귀가 하였다.


논산역까지는 계획했던 시간과 거의 맞았지만 열차를 이용하여 귀가하는 늦은 시간에 파업으로 엄청난 불편을 겪은 날이다.


본래 계획은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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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과 개태사 연계 천호산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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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강,권,류,임(모두 70세 이상으로 철도는 경로 적용)

<교통편 계획>
▶▶06:00 화명역<부산역05:45>
▶▶09:10 대전역네거리 정류소 202 또는 2002 버스탑승
▶▶10:50 두산아파트 한 코스 앞의 삼진이파트 하차
계룡 개인콜 웹 검색
▶▶11:15 개태사지 하차
코스 : 개태사지-개태사지석조-천불사-개태사-등산로입구<1.5km>
-이정표-삼거리-이정표-천호봉기점-천호산(371.6m)-대목재-이정표-로프-삼거리-우측,월은사방향-월은사삼거리에서 좌로-연산삼거리휴게소방향, 도로만나면 1km 도보(수락리에서 오는 304,305번 버스 만나면 도중 승차?, 아니면 연산3리연산구사거리 정류소까지 1km 이동)

▶▶14:40 연산사거리/택시(버스 탈 경우 하차 지점에 중앙분리대가 있어 이동 시간이 소요됨)
▶▶15:00 택시로 김장생묘소 경유-휴정서원 하차-영사암-논산신풍리마애불-고정산-계백장군기념관-백제군사박물관-계백장군묘소-충곡서원지,충곡서원-돈암서원-17:30
(택시타고 연산역 14:59-15:39이 막차, 거리는 짧지만 해당 안됨)
▶▶ 택시로 논산역/8.77km/14'/10,200원
▶▶ 논산역 기차 / 논산역-서대전<2,000원>-신탄진역 <2,700원>
17:36-18:12-18:25 ▶ 시간 불가능/빨리 마치면 가능
18:37-19:12-19:26 ▶ 20:00-23:17 이 연결이라면 서대전역이 나을 것
19:21-19:55-20:10 ▶ 이 시간에는 부산행 없어 서대전 하차하여 이동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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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서대전-신탄진 // 신탄진-화명<12,200>-부산역<13,100>
17:36-18:12-18:25 ▶ 18:12-19:57 ktx,연결불가, 서대전 하차 이동 후 19:43-22:54 대전여유
18:37-19:12-19:26 ▶ 20:00-23:17 / 신탄진에서 30분 여유<신탄진-구포12,400>
19:21-19:55-20:10 ▶ 20:14-23:17화명/11,600-부산역23:36 / 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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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전까지의 계획은 거의 차이 없이 맞아 들었으나 기차 파업 사태로 귀가 에 문제가 발생한 점이 아쉽다.


실제 이동 시간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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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화명역<부산역05:45>
▶▶09:10 대전역 하차
▶▶09:23 대전역 네거리 정류소 202
▶▶10:24 계룡시 삼진아파트 하차
▶▶10:45 간단 조식 후 택시 이용
▶▶11:05 개태사지 하차
코스 : 개태사지-개태사지석조-용화사-개태사-등산로입구<1.5km>-이정표-삼거리-이정표-천호봉기점-천호산(371.6m)-대목재-이정표-로프-삼거리-연산삼거리휴게소방향, 도로만나면 1km 도보-연산3리연산구사거리 정류소
▶▶14:40 연산사거리/택시타고 김장생묘소 경유-휴정서원 하차
▶▶15:00 택시로 김장생묘소 경유-휴정서원 하차-영사암-논산신풍리마애불-고정산-계백장군기념관-백제군사박물관-계백장군묘소-(충곡서원지,충곡서원 패싱)-돈암서원-17:30
(택시타고 연산역 14:59-15:39이 막차, 거리는 짧지만 해당 안됨)
▶▶ 택시로 논산역/8.77km/14'/10,200원
▶▶ 논산역 기차 / 논산역-서대전 18:37-19:12 <2,000원> 10분 연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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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23:17화명/11,600-부산역23:36 / 12,500
이 열차에 파업 관련 심각한 연착 사고 발생, 전투적 상황 발발
동대구까지 가는 무궁화호 탑승하여 동대구 하차 후 이어서 내려오는 SRT로 부산역까지 이동, 피난 열차 같은 느낌
지하철 갈아 타면서 귀가, 예정보다 정확히 1시간 늦었다.

부산역 도착은 예정보다 15분 정도 조기 도착
<부산역 23:24, 지하철1,2호선, 귀가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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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은 돈암서원을 염두에 둔 산행이었지만 돈암서원은 이동 순서상 마지막이 되어 어둠이 깔릴 무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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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교통비용>
기차 부산역-대전역 1명 왕복
기차 화명역-대전역 3명 왕복
47300×2=94,600원
기차 논산-서대전 4명 편도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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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합계 102,600원

택시
계룡 삼진아파트앞-개태사지 10,000원
연산사거리-사계묘소경유-휴정서원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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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합계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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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비 총계127,600원/4=31,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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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시내버스 3회 탑승은 개별 카드 사용
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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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開泰寺]


시대 : 고려전기
건립시기 : 936년(태조 19)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400-2,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전승기념으로 세운 사찰이다.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자 했던 상징적인 장소로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유명하다.

개태사(開泰寺)는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최근 법당 등을 복원한 개태사 구역과 원래의 개태사지로 구분된다. 개태사지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이 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공양보살상은 두부가 결실되어 있으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형상이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개태사 북쪽에 위치한 개태사지는 태조 사후에 정비된 지역이다. 개태사지는 불전지와 진전지로 구분되며 중앙에는 출입시설이 있었다. 주요 출입구가 진전지와 불전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두 사역(寺域)은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개태사지는 출토된 막새를 통해서 조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출토된 기와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꽃술대가 시문된 수막새 기와이다. 이 기와는 954년(광종 5)에 창건된 충주 숭선사지 초창기 기와와 매우 유사하다. 충주 숭선사지를 비롯하여 청주 흥덕사지, 안성 봉업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문양의 막새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막새기와가 출토된 지역은 954년을 전후한 시기인 광종 재위 전반기에 창건되거나 중수된 사찰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따라서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 역시 광종대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검이 항복을 청한 장소는 당시 고려군 지휘부가 주둔했던 왕건의 숙영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바로 마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특히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이곳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개태사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한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1383년(우왕 9)에는 왜구 천여 명이 내륙으로 들어와 보은을 거쳐 개태사를 경유해 계룡산에 웅거하였으며, 창왕 즉위년에는 개태사에 침범해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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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


이칭별칭 : 삼한통일전쟁(三韓統一戰爭)
발생·시작 일시 : 936년 9월
관련장소 : 일리군(一利郡), 일선군(一善郡), 황산군(黃山郡), 탄령(炭嶺)
관련인물·단체 : 견훤(甄萱), 신검(神劍), 박술희(朴述希), 왕순식(王順式), 유금필(庾黔弼), 박수경(朴守卿), 효봉(孝奉), 덕술(德述), 애술(哀述), 명길(明吉)


936년(태조 19)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지방에서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


선산(善山)의 옛 이름이 일리군(一利郡)이므로 일리천(一利川)은 구미시 인동면에 위치한 낙동강 지류로 비정하고 있다.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와 후백제만이 대적하고 있었다.
당시 후백제의 상황은 견훤(甄萱)이 고려에 투항하고 아들 신검(神劍)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936년 6월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후백제의 신검을 칠 것을 청하여 태조가 이에 응해, 먼저 태자 무(武: 뒤의 혜종)와 장군 박술희(朴述希)를 보병과 기병 1만 명과 함께 천안부(天安府)로 보냈다. 천안부는 후백제군이 추풍령을 넘어와 김천(金泉)과 선산을 거쳐 군위(軍威)와 칠곡(漆谷) 일대로 진출하는 루트를 방어하는 거점이었다.
9월에는 태조 자신이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부에 이르러 합세해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두 나라 군대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고려군은 마군(馬軍) 4만 명, 보병 2만 3,000명, 기병 9,800명에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명 등 총 8만 7,500명으로후삼국시대 삼국의 쟁패과정 중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참가한 장군은 명주대광(溟州大匡) 왕순식(王順式),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김철(金鐵)·홍유(洪儒)·박수경(朴守卿)·견권(堅權)·박술희·긍준(兢俊)·공훤(公萱) 등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장수 이름만도 38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의 중요성을 알 만하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동원은 견훤의 요청에 따른 역자징치(逆子懲治)의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서 그 목적이 후백제의 멸망에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후백제는 고창전투(古昌戰鬪) 이후 후삼국 주도권의 상실과 그 만회의 실패, 운주전투(運州戰鬪)에서의 패전과 운주(홍성) 이북 지역 상실, 정변에 따른 후유증, 견훤의 고려귀부, 신라의 고려에의 투항·병합 등으로 대내외적 조건이 악화일로에 처해져 있었다. 특히, 견훤의 참전은 후백제군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갈등도 야기시켰을 것이다.
또, 신검에 의해 금강(金剛)이 제거되면서 전주(全州) 지역의 호족(豪族)들도 후백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은 광주(光州) 지역 호족에 기반을 둔 신검보다 전주지역 호족을 외척으로 둔 금강을 지지하였다. 지방 호족들이 이탈하면서 후삼국 성립 이후 우위를 지켰던 후백제는 군사력 면에서도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후백제의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이 싸워보지도 않은 채 항복하고 오히려 태조에게 “신검이 중군(中軍)에 있으니 좌우로 협공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신검을 공격할 계책까지 진언하였다는『고려사』의 기록에서 당시 고려군의 강력한 병세에 위압된 측면도 있지만, 신검정권에 대한 후백제의 호족과 장군들의 반발도 알 수 있다.


결과

태조는 대장군 공훤에게 명해 곧바로 후백제의 중군을 치게 하고 3군이 일제히 전진해 공격하니 후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후백제군은 지휘부가 무너지면서 내분이 발생하여 자멸에 이르렀다. 장군 흔강(昕康)·견달(見達) 등을 비롯해 3,200명이 포로가 되고 5,700명이 전사하였다.
신검은 패잔병을 이끌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영동-금산을 거쳐 논산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고려군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으로 진입하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진군해 주둔하였다. 탄령은 탄현(炭峴)으로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 대전 동쪽의 마도령, 금산군 진산면 숯고개 등으로 보고 있다. 신검은 부여와 대전, 영동 등에 배치된 병력을 규합하여 고려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와 저하된 사기를 감안하여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문무관료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리천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운명을 건 일대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가 참패하고 멸망하면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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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돈암서원(論山 遁岩書院)
사적 제383호(1993년 10월 18일 지정)
면적 : 5,548m2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좌표 : 북위 36° 12′ 32″ 동경 127° 10′ 49″좌표: 북위 36° 12′ 32″ 동경 127° 10′ 49″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은 사계 김장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연혁

논산 돈암서원은 1634년(조선 인조 12)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건립하였다. 1659년(효종 10) 및 1660년 (현종 1)에 두 번의 사액을 받았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 1688년(조선 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조선 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1871년(대한제국 고종 8년)의 전국적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1881년(고종 18년)에 이르러 숲 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배향 인물 :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문화재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 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유경사(遯岩書院惟敬祠)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양성당제영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돈암서원 책판 :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9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이곳 논산 돈암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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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金長生]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예학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워 조선 중기 예학과 성리학의 거두가 되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역임하여 요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영향력이 매우 커서 인조 초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이며, 호는 사계(沙溪).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며,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아들은 신독재 김집(金集)이다.


활동사항

김장생은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였으며,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서 덕행군자라 일컬어졌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1581년(선조 14)에는 아버지를 따라 종계변무의 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돈녕부참봉, 순릉참봉, 평시서봉사 등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다가 동몽교관과 인의를 거쳐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공을 인정받아 종친부전부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1596년(선조 29) 연산으로 낙향하여 거듭 내려지는 관직을 거절하다가 다음 해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로 조정에 나가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였으나 곧 병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파천하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고 난이 평정된 뒤 임금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원자보도의 일을 다시 맡기도 하였다. 중요한 정사를 논하는 13가지의 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1626년(인조 4)에는 이이와 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건립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남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화의가 이루어지자 강화도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학문과 사상

김장생은 송익필, 이이, 성혼 등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송익필의 영향을 받았던 예학 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아들인 김집에게 계승시켰고 이후 조선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다. 김장생의 예학은 양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주장하였던 예론의 이론적 배경은 이이의 이기설(理氣說)로서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하였다.

김장생이 활동하던 당시는 당쟁과 이괄의 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였다. 또한 여러 방면에 누적된 폐단으로 개혁이 필요하였으며, 민생 회복이 절실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전통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김장생은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하였다.

김장생은 예를 실천하기 위해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두 예에 맞게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으며, 『근사록』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김장생이 주장하는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이다. 가정·사회·국가에서는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필요하고 바르게 서야 하는데 그것의 근간이 통(統)이며 이러한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후에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장생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이 있으며, 송시열을 비롯하여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이후원(李厚源)·신민일(申敏一) 등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모두 김장생 문하의 제자들이다.


저술 및 작품

1583년 처음으로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와 관련된 저술들이 있다. 또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전서』가 전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장생의 사후 조정에서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문원(文元)의 시호를 내렸다. 1717년(숙종 43)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사계유고(沙溪遺稿)』가 간행되었다.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약 10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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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金集]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출생 - 사망 : 1574년(선조 7) ~ 1656년(효종 7)

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 데 힘쓰는 학문)보다는 경전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1610년(광해군 2)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653년(효종 4)좌참찬을 거쳐 이듬 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이이(李珥)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이 있고, 편저로는『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83년(고종 20)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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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宋浚吉]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출생 - 사망 :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대표관직(경력) : 내시교관,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사헌부집의,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조선후기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송세영(宋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송응서(宋應瑞)이고,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송준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송시열을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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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우재(尤齋), 시호 문정(文正)
출생 - 사망 : 1607년(선조 40) ~ 1689년(숙종 15)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송시열의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기·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

이(理)·기(氣)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不相離]·분리성[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송시열은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 관점)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

예를 들면 이·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는 이·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動)과 정(靜)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밖에 형(形)과 기(器)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기·도(道)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송시열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心卽氣]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

또 송시열은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性]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情)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리파(主理派)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송시열은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송시열의 수양론(修養論)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養氣]’이었다. ‘정의를 모으는 일’은 곧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서 송시열은 이것을 ‘정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로 압축되었다.

송시열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송시열은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정치사상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원리를 『대학(大學)』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송시열은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 만물의 조화나 변화, 특히 인간 사회의 모든 변화)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는 주장을 정치 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송시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

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 공사를 억제하며, 공안(貢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 안정과 국력 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北伐)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 철학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 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송시열은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했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尹鑴)는 『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儀禮)』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儀禮)』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獨對]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송시열이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 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民兵: 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송시열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송시열의 사회사상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또 실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먼저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송시열은 또 서북 지방(평안도·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송시열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 정책은 양민의 생활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송시열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 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문장과 서체

송시열은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 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송시열의 교유관계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형제들,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 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송시열의 저술

송시열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송병선(宋秉璿)·송병기(宋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宋子大全)』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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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癸丑獄事] (칠서지옥(七庶之獄)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역사적 배경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파를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 및 그 측근에 박해를 가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양갑(洋甲),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치의(致毅),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경준(耕俊),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치인(致仁), 서얼 허홍인(許弘仁) 등이었다.
이들은 허균(許筠)·이사호(李士浩) 및 김장생(金長生)의 서제 경손(慶孫)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컬었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며 연명으로 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이 거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黨與)를 맺었다. 그리고는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을 가탁(假託)해 전국에 출몰, 화적질을 하였다.
그러던 중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저질렀다. 결국 이들은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되었다.
이 때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闓)·김창후(金昌後)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박응서가 비밀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


경과

박응서는 이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저격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군자금을 비축,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거짓 고변하였다.
호걸의 기개가 있어 괴수로 지목된 서양갑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이 심한 국문을 받다가 죽자, 수창자(首倡者)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며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모의에 가담했다고 거짓 자복하였다. 그 밖에 사건에 연좌된 서얼 대다수는 불복한 채 죽었고, 박치의는 도망하였다.


결과

이로써, 이 사건에 연좌된 종성판관(鐘城判官) 정협(鄭浹),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7대신 및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 서인의 수십 명이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수금되었다.
또,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남인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이 옥사를 빌미로 1618년 인목대비마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후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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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바탕체 부분은 모두 네이버 통합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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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현상을 보는 듯 하다.



<당일 일정>

 

06:03 화명역 기차
09:10 대전역 기차
09:23 대전역네거리 202 버스 승차
10:24 계룡시 삼진아파트 하차, 간편 조식
10:56 계룡택시호출 승차
11:05 개태사지 하차
11:06 개타사지 석조(開泰寺址 石措)
11:08 개타사지(開泰寺址) 문화재 안내판
11:21 삼거리 이정표(개태사역,장군약수터,왕건둘레길)
11:12 천불사 100m
11:15 약수사
11:16 연산 천호리 비로자나불 안내판(유형문화재 91호)
문이 잠겨 있어 다시 내려와 '용화사' 간판에 쓰인 전화번호로 연락하여 사람을 깨워..(010-6234-8360)
11:26 비로자나불/멸실된 불두를 붙인 게 나타남
11:40 용화사 입구 도로 입석
11:44 개태사 입석(護國宗刹 天護山 開泰寺)
11:45 개태사(開泰寺) 안내판
개운교-신종루-개태사(開泰寺)오층석탑-논산개태사석조여래삼존입상-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11:55
11:58 옹기샘
11:59 미술관
12:01 [천호산등산로입구, 천호산1.6, 황룡재4.9]
등로에 떨어진 밤이 수두룩하다.
12:08 삼거리[개태사방향, 개태사역방향, 천호산방향]
여기 개태사역 방향은 개태사지에서 '왕건길' 삼거리..
12:09 삼거리[개태사0.6, 선녀탕쉼터0.3, 왕건쉼터]
12:12 왕건둘레길 삼거리
12:22 능선삼거리 [개태사방향, 개태사역방향, 천호산방향]
등로에 도토리 알도 많음
12:33 예보에 없던 빗방울이 떨어짐
12:35 투구꽃이 만발, 많이 분포하지는 않고, 한 무리가 있다.
12:36 벤취 쉼터
12:40 주능선삼거리 [개태사1.1, 천마산방향, 천호산0.3]
12:43 [천마산3.88, 천호봉0.12, 수복동0.94, 개태사방향]
12:45 천호봉,천호산(386m) [벌곡방향, 천마산4.0, 개태사방향, 신계룡산4.3, 수복동0.89]벤취
13:01 삼거리[천호산0.5, 황룡재3.0, 화악리입구1.0]
13:11 [천호산1.2, 황룡재2.3, 양지서당입구1.0]
13:22 벤취쉼터
13:32 네거리 [천호산2.1, 황룡재1.4, 대목리0.5, 사격장0.6]
오늘 사격이 있다. 능선 우측에서 계속 사격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유탄 염려가 되어 약간 낮은 자세로 신경이 쓰인다.
13:41-13:54 정자 [천호봉2.4, 연산논공단지1.2, 벌곡(황룡재)1.1]
쉬는 동안 사격소리가 계속 가깝게 들림
하산길 계속 좋은데, 사격 소리가 멎지 않는다.
한 묘비에 '맨 위에는 십자가, 그 아래는 유인...'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다.
14:09 산길 끝나고 도로 만남 [연산, 벌곡, 천호산등산로]
14:11 도로 삼거리
14:16 송불암미륵불150m
14:18 송불암 미륵불 안내판
14:22 송불암 입구 도로
14:25 연산 황산벌 한우마을
14:34 연산개인택시(충남58바6149, 010-6638-8771, 사무실041-735-0900)
14:39 사계종가
14:40 김장생선생 묘소 안내문
14:48-14:52 휴정서원
14:53 탑정호 조망
14:54 삼거리[돈암서원-충곡서원, 탑정호생태공원,휴정서원]
14:58 [신풍리마애불0.3, 백제군사박물관2.8, 돈암서원4.0]
이정표가 산으로 향하고 있으나 임도가 편하다.
15:04 영사암
15:06 사각정자 [신풍리마애불20m, 휴정서우너0.5, 돈암서원3.7, 백제군사박물관2.5]
15:07 신풍리마애불, 안내판
15:12 [고정산정상0.3, 휴정서원0.6, 돈암서원3.5, 백제군사박물관2.3]
지도상의 정상은 여기로 나타는데...
15:14 [고정산정상0.2, 김장생묘소0.4, 돈암서원3.6, 백제군사박물관2.4]
15:17 [탑정호수변생태공원2.18, 박곡2리1.2]
15:18 고정산정상(해발145m), 벤취가 둘러 있고 원형의 작은 광장이 있다.
15:31 다시 삼거리[고정산0.3, 돈암서원3.5....]
15:35 솔바람숲길 안내판(고정산터널 위)
15:37 바위전망대
15:40 [돈암서원, 휴정서원 빙향만 표시]
15:43 백제군사박물관 야외전시장(탱크, 자주포, 국궁사대, 목책, 갑주무장말과 일반말 포토존, 전통놀이장
15:56-16:12 백제군사박물관 실내전시장
16:16 황산루
16:17 황산벌 전적지 안내판, 전적지 전망대
이 전망대는 토성처럼 작은 공간을 약간 노게 했을 뿐 앞의 수목 때문에 조망은 거의 기대 곤란하다.
차라리 능선을 이동하면서 우측을 바라보는 게 낫다.
16:26 충장사
16:32 계백장군묘
16:36 계백정/여긴 조망터라기에는 좀 모자란다.
16:37 네거리[휴정서원1.6, 돈암서원2.5, 박물관방향, 고정리방향]
16:44 [돈암서원1.9, 충곡서원2.1, 백제군사박물관정문0.6, 후문0.6, 휴정서원2.2]
16:48 정자/탑정호 조망, 물탱크
16:52 수락산(167m)
17:01 [충곡서원1.2, 돈암서원1.1, 백제군사박물관1.2, 휴정서원3.1]
17:03 [돈암서원1.0, 백제군사박물관1.5, 충곡서원1.2, 휴정서원3.1]
17:07 단양우씨묘역
17:09 [돈암서원0.5, 충곡서원1.7, 휴정서원3.6, 백제군사박물관2.0]
17:13 [돈암서원0.2, 충곡서원2.0, 휴정서원3.9, 백제군사박물관2.2]
17:16 돈암서원[충곡서원2.2, 휴정서원4.1, 백제군사박물관2.4]
17:17-17:31 돈암서원 <산앙루-안내판, 비석류-응도당-정회당-장판각-꽃담-유경사, 숭례사-돈암서원원정비-거경재-정의재>
17:38 한옥마을, 돈암서원 안내입석
버스와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택시 호출, 버스탑승
18:17 논산역08:37 열차가 10분 정도 연착, 서대전역 하차
버스로 대전역 이동
20:00 대전역 도착
대전역에서 확인하니 열차들이 줄을 이어 연착,
먼저 오는 열차 무조건 탑승 동대구역까지 가도록 안내 받음,

동대구역에서 부산행 먼저 오는 것 탑승하여

23:25 부산역 도착



24:40 도착 / 귀가 예정보다 1시간 늦었지만 노숙은 면했다.





개태사지와 석조(石槽)




개태사지 일원..이 어느 곳에서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았을까...




개태사지 일원에 천호사,약수사, 용화사 등의 군소 사찰이 있는데 용화사에 석조공양보살상이 있다.

불두는 멸실되었던 것을 다시 만든 흔적이 보인다.

마치 왕건 앞에 무릎을 꿇은 신검 같은 느낌도 든다.

용화사의 간판에 인쇄된 전화번호는 없어진 번호인 듯, 옆에 매직펜으로 쓴 휴대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개태사역, 장군약수터, 왕건둘레길] 이 이정표의 왕건둘레길을 따르면 등산로에 오를 수도 있겠다.


용화사 입구 도로 옆의 안내석과 둘레길 안내판




도로변의 안내석과 입구의 안내문,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범종루가 일주문을 대신하는 듯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항복시킴으로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후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도 이 개태사는 관련이 있다.

강화천도를 생각했던 우왕이 왕건의 어진이 있는 이 개태사에 뜻을 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개태사지 오층석탑, 이 탑과 공양보살이 함께 있었으리라는 이야기..


개태사 오층석탑(開泰寺 五層石塔)
문화재자료 제274호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고려시대

탑은 부저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지다가 후에는 가람 배치상의 필요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 탑은 개태사지(開泰寺址) 제일 북쪽 건물지에 있던 것을 현 개태사로 옮겨 놓은 것이다.
1층의 탑신(塔身) 이하와 5층의 지붕돌[屋蓋石] 이상은 없어져 최근에 1층의 탑신과 기단부(基壇部) 및 보주(寶珠) 등을 새롭게 만들어 복원하였다.
지붕돌은 4단의 층급 받침에 약간 치켜진 처마를 지녔고, 네 귀의 반전(反轉)이 아름답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만이 올려져 있는데, 탑 앞에 있는 앙련(仰蓮)의 석재도 이 탑의 상륜부 부속석재로 보인다.
이 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불, 고려불상의 조각 수준이 신라불상보다 뒤떨어지는 건가..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論山 開泰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보물 제219호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고려시대


단정하면서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옷자락 등 전반적으로 조각의 선이 굵고 강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의 굳건한 기상이 드러나 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중앙의 본존불(本尊佛)은 신체가 원통형으로 처리되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정수리가 큼직하며, 얼굴은 둥근 역삼각형이나 큰 눈에 비해 코와 입은 작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손 모양은 중생을 보호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같은 수법이나 어깨와 가슴 등은 좀 더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단정하면서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옷자락 등 전반적으로 조각의 선이 굵고 강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의 굳건한 기상이 드러나 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



전각이 육각형인가... 고려 태조 왕건 어진



금동대탑을 돌려달라는...

올라가는 길가에 옹기샘이 있다.


미술관을 지나면 천호암 가는 길에서 좌로 울타리 따라 간다. 곧 이정표가 보인다.






요소요소에 이정표는 잘 되어 있다.




맑음으로 예고된 하늘에서 비가 약간 뿌린다. 능선의 일부는 잡초가 제법 자랐다.




천호산 정상에는 별다른 표지가 없어 보인다.









유탄이라도 가까이 떨어질 듯한 사격장의 총소리가 정자에 앉아 쉬기조차 편치 않다.

도로를 만나면 산길은 끝난다.






송불암과 유래


소나무와 불상, 송불암





천호산 코스를 마치고 택시로 돈암서원 코스로 이동, 친절한 연산개인택시





사계 종택이 있는 문앞이 주차장이다. 바로 옆이 묘역이라 멀지 않은 곳이다.

고정상 정상에서 400m 정도의 거리에 있어 고정산 정상으로 가다가 내려와도 좋을 듯하다.



휴정서원



여기도 길 안내는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양사암, 시묘살이 한 곳 치고는 화려하다.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빼앗긴 절이었던가.



논산 신풍리 마애불




지도상의 고정산 정상과는 약 300m 정도 벗어난 위치다. 중간에 사계묘소 가는 길이 있다.







여기가 고정산터널 상부다. 솔바람숲길 안내도가 있다.




황산벌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다. 그 때도 저 바위에 어느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 보았을까.



군사박물관의 야외전시장과 국궁 사대와 표적판




목책과 철갑기마.. 우측은 일반말









백제군사박물관에서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충곡서원은 패스하게 되었다.





황산루와 황산벌전적지 안내판. 저 뒤로 황산벌이다. 루각의 위치가 남향이라 그런가.

조금 뒤로 해서 북향으로 지었다면 황산벌을 조망하기 좋고 의미도 클 것 같은데...

전망대는 작은 언덕인데 수목에 가려 조망은 10% 정도 뿐이다.






충장사




계백장군묘소



계백정, 작은 정자 앞에 암반이 있고 아주 작은 개울이 있다.








이 정자는 탑정호가 조망 된다.

조금 더 지나면 수락산 정상 167m




등산로에서 충곡서원까지는 1.2km, 왕복 2.4km, 약 1시간 소요된다면 기차시간에 늦어 패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야 돈암서원에 도착한다

울 밖에서 잠시 옅보고.. 입구의 산앙루
































돈암서원 옆에 민속마을이 있다.

앞 도로는 중앙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어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날만한 작은 굴다리를 지나야 한다.


건너편에 돌아가서 택시나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먼저 도착하여 논산역으로 이동하였다. 연산역이 가깝지만 이 시간에 열차가 없다.



18:37에 타야하는 기차를 10분 전에야 도착했다. 아슬아슬

09:10에 나온 대전역을 11시간이 지난 20:10 정도에 도착하여 파업으로 인해 동대구까지가는 기차와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번갈아 타면서

자정 전에 부산에 도착하지만 모두들 집에 도착한 시각은 01 시가 가까와진 시각이었다.


서민들의 발을 인질로 삼은 파업에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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