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함양 남계서원, 연화산 20190830 금

benel_jt 2019. 8. 30. 23:45

함양 남계서원, 연화산 20190830 금 솔로/권, 류, 강


코스 : <사근산성추모사당-망북정-남계서원-청계서원-구천서원-일두정여창고택, 기념관-중식-승안사지석탑, 불상-일두정여창묘소-화산서원까지는 차량이동>


화산서원-수동중학교-굴다리-나무계단-철탑-사근산성-연화산정상(444.1m, 삼각점,산불초소)-화산서원


차량이동 : 해운대-세연정-덕천-군북,의령-생초-수동-원평사거리-사근산성추모사당-남계서원-일두정여창고택-승안사지-화산서원-생초-원지-생비량-대의-의령-덕천...해운대


07:30 덕천동 출발
10:00 사근산성추모사당
10:14 망북정(藍溪 林希茂1527.8.21-1587.9.3)
10:39 남원양씨제각(네이버지도의 근산성 위치)
10:57 남계서원(灆溪書院) 灆물 맑을 람,남
11:07 청계서원(靑溪書院)
11:37 구천서원(龜川書院)
11:30 정씨고가(주차장만 넓게 자리 잡았는데..)
11:46 함양개평마을<일두정여창고택>
11:56 일두홍보관
12:00 일두종택
12:07 함양 풍천노씨대종가
지곡의 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승안사지로 이동
13:07 승안사지 입구 <춘수정과 정민수>
13:11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불편한 입장/망으로 막아 둔곳을 넘어
13:25 승안사지 삼층석탑
철문열고 산으로 이동하여
13:28 일두 정여창 묘소
계획보다 1시간30분이 늦어져
승안산 코스는 줄이고 수동 화산서원으로 이동
13:50 화산서원(華山書院) 심원문(尋源門)...
13:58 차를 화산서원주차장에 두고 연화산으로
14:04 수동중학교-초등학교 사이길
14:09 시멘트포장길 거쳐 거함대로굴다리 아래로
14:10 연화산등산안내도, 좌측으로
14:11 목재긴계단
14:20 철탑, 작은계단
14:44 좌측 아래 갈림길, 능선으로 진행(무덤 우측으로 길)
14:46 복원한 사근산성 길게 능선에 보임
14:51 미륵골 갈림/입구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음
성곽따라 길이 있음. 성곽 좌측 1m 정도에 계단 이어짐
14:57 성곽 벗어나 좌측 산길, 성곽길도 이어짐
14:59-15:07  연화산정상(444.3m삼각점, 정상석에는 443m), 산불초소, 사위조망 양호
15:19 교향마을 이정표
15:21 미륵골 이정표
15:48 우측 약간 위로 미타사지 이정표가 보임
15:53 마을 도로 끝의 펜션, 성곽돌 이용한 듯한 축대
16:02 거함대로 교량아래
16:07 수동초등학교
16:13 화산서원 원점회귀 산행 종료
수동면에 목욕탕 검색해서 찾았는데 방앗간이 있고, 주변에 물었더니 수동에는 목욕탕이 없단다.
의령에서 목욕탕 이용 후 저녁 식사하고 귀가 덕천에서 하차하고
21:10 정도 귀가

경비 : 도로비 10,000원

중식비 28,000원/지곡 7,000×4

목욕비 12,000원/의령 동남탕3000×4

석식비 38,000원/8000×4+6,000

유류비 50,000원/약400km

총계 138,000원

일인경비 35,000원/나머지 2,000원 경로할인








망북정-사근산성주모사당에서 화산서원까지





연화산 GPX파일 첨부 : Tr함양연화산201908301358.gpx. 함양수동_연화산2019-08-30_13-58-28.gpx


1.  망북정

망북정, 남계 임희무()와 관련된 정자, 나주임씨 도정공파,


망북정기(望北亭記)
남계(藍溪)선생(林希茂1527.8.21-1587.9.3)이 벼슬을 마치고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따뜻한 봄 서늘한 가을 이곳에 올라와서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님 계신 곳을 향하여 예를 갖춰 절하며 經書와 道義를 강론하고 몸소 행한 경험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이 땅을 망북대(望北坮)라고 불렀으며 이곳의 자손들이 대 옆에 정자를 짓고 望北亭이라 현판을 달았다.
望北이란 두 글자는 공이 시종일관(始終一貫) 지켜온 신조다.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극진히 효도하고 공직에 나가서는 국가에 봉사하며 옳은 것은 권하고 그릇된 것은 간하여 못하게 한다.
나라에 나가서는 가정을 잊고 임금을 섬김에 전념함이 공의 본 뜻이다.
공이 충의의 집안에 태어나서 선조들이 끼친 덕을 이어받아 정자를 후세에 전하니 임(林)씨의 가정에서 그 의미가 뻗어내림이 영원할 것이다.
공의 후손 기택(璣澤) 형택(馨澤)이 이렇게 쓴다.
을묘(1915)년 중추절(仲秋節)에



정면은 서쪽이다. 2시방향이 북쪽, 오래된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바로 아래는 사근산성추모사당이 있다.

정자 뒤로는 사근산성의 흔적 일부인 듯하다. 이 길로 가면 연화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2. 사근산성추모사당







사근산성 추모사당
1380년 고려 우왕 6년 8월
왜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삼남지방을 유린한 후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군사요충지인 사근산성을 침략하였다.
고려에서는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을 비롯한 9명의 장수들이 군사 500여명과 함께 사투를 벌였으나 장수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裵彦), 그리고 함양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전사하고 500여명 군사는 전멸하고 말았다.
패자지성(敗者之城)이라 역사의 뒤편으로 물려 지난 630년 간 사근산성은 폐허로 방치되어 왔으니.....

<비문 중에서 발췌>



올라오는 길은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는 길인데 주차장은 대형이다.

네이버 지도에서 확인한 위치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바로 위에 망북정이 있다.


3. 남계서원




네이버지도의 '근산성'이라는 위치가 있어 찾아갔더니 너른 비탈이 있고 남원양씨 제실이 있다.

남계서원의 직원에게 문의 하니 아마도 인쇄과정에서 '사'자가 감취어진 모양이 아닌가 하는데...




함양 남계서원 [咸陽灆溪書院]
〈함양 남계서원〉. 사적 제499호.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전사청·명성당·양정재·보인재·애련헌·영매헌·풍영루·묘정비각·고직사 등이 있다.
건립시기·연도 : 1552년(명종 7)
규모(면적) : 4,810㎡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499호
문화재 지정일 : 2009년 5월 26일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있는 조선전기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사적.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전사청(典祀廳)·명성당(明誠堂)·양정재(養正齋)·보인재(輔仁齋)·애련헌(愛蓮軒)·영매헌(詠梅軒)·풍영루(風咏樓)·묘정비각(廟庭碑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라 하며,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이 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후,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編)』·『고려사(高麗史)』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 4500여 평, 대지 6000평, 임야 1.5정보 등이 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https://blog.naver.com/kcs022/221396643939
개암선생의 갓과 문집
<남계서원 창건 당시 시련 받던 이야기>


풍영루




남계서원(명성당), 뒤에 사당이 있는데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



4. 청계서원



청계서원(靑溪書院)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99-1
경암 문화재자료 55호(1983.7.20 지정)
1495년 건립된 청계정사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김일손 선생이 무오사화 때 피체되었던 곳으로 이후 훼철되었다.
고종 광무 10년에 유림들이 상의하여 이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1915년 복원을 시작하여 1921년 청계서원으로 개원하였다.
사당과 강당인 애락당, 동서재, 취도문 등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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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청계서원의 대청마르 안쪽의 애락당(愛樂堂)..풍류악일 터... 풍류를 사랑하는 집이라는...



구천서원[龜川書院]
건립시기·연도 : 1701년(숙종 27)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효리마을
1701년(숙종 27)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맹지(朴孟智)·양관(梁灌)·표연말(表沿沫)·강한(姜漢)·양희(梁喜)·하맹보(河孟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 훼철되었다. 그뒤 후손들이 불망계(不忘契)를 조직, 구천재와 유허비를 세워 헌례(獻禮)를 올려오다가, 1983년 복원하고 양홍주(梁弘澍)를 추가배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5. 개평한옥마을(일두정여창고택)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정육을(鄭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佰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佰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는 정여창의 묘소가 승안사터 오른쪽 산 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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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鄭汝昌]
이칭별칭 : 자 백욱(伯勗), 호 일두(一蠹), 시호 문헌(文獻)
출생 - 사망 : 1450년(세종 32) ~ 1504년(연산군 10)
대표관직(경력) :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현감(安陰縣監)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정육을(鄭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濫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일두집(一蠹集)』
『점필재집(佔畢齋集)』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허암유집(虛庵遺集)』
『리평사집(李評事集)』
『래암집(來庵集)』
『동계집(桐溪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잡록(海東雜錄)』
『대동기문(大東奇聞)』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한국유학사』(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7)

[네이버 지식백과] 정여창 [鄭汝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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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심성론

정여창
 
정여창(鄭汝昌 : 1450(세종32)~1504(연산군10))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백욱(伯勗)·자욱(自勗)이고, 호는 일두(一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본관은 하동으로, 증가정대부(贈嘉靖大夫) 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독서에 힘썼고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배웠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로 있던 서거정(徐居正)이 경연에서 진강(進講)하게 하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 동료들이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고 재산을 매우 공평히 나누었다 한다.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진산(晉山) 악양동(岳陽洞)에 들어가 섬진(蟾津) 나루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1490년 사정 조효동(趙孝同)과 참의 윤경(尹競)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해 겨울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어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4년(성종 25)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으며, 내외청(內外廳)을 두어 돈이 없어 시집가지 못하는 이들을 진휼하여 때를 놓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죽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일두집(一蠹集)』이 남아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자료들은 모두 정개청(鄭介淸)의 문집 『우득록(愚得錄)』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정황으로 보아 정여창의 글이라기 보다는 정개청의 글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통상 정여창의 글로 다루어져 왔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문집에 수록된, 이적(李勣)의 「행장(行狀)」을 포함한 3편의 행장을 참고할 수 있다.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士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은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훈구 대신들이 권세가 높아지고 재산을 모으면서 부정부패와 폐단이 일어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사림파는 3사(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무오사화의 원인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사림파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화(禍)를 입은 사림파

사림파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홍한(洪澣)·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한편, 이극돈·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어세겸(魚世謙)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라고도 한다.


고택 바로 곁에 일두홍보관이 있다.















일두고택홍살문


일두고택을 나와 개평마을의 명소, 명가들을 둘러보고..



함양 풍천노씨 대종가 등은 공사중이다, 일두고택도 공사중인데 아마도 마을 전체의 사적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것 같은데...


풍천노씨대종가[豊川盧氏大宗家]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4번지에 있는 풍천 노씨의 대종가.
지정번호 : 경남문화재자료 제343호
지정일 : 2004년 03월 18일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44-11(개평리 264)
개평마을에 풍천 노씨의 입향조인 송재 노숙동 선생의 고택으로 15세기의 집터이다. 종도리에 있는 기록을 통해 1824년(조선 순조 2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70여 년 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 퇴를 두고 팔작지붕이며 5량 구조이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약한 민흘림이 있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대문간채는 솟을삼문 형식이다.




승안사지로 이동하는 중에 본 것은...↓





6. 승안사지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승안사지 삼층석탑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약간의 불편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다.


7. 일두 정여창 묘소









8. 화산서원







화산서원[華山書院]
경남 함양군 수동면수동내동길 7-12(우)50022
지번수동면 화산리 1248-1
춘추 향사 봉행. 1860년 유림들이 발론하여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강서사를 건축하려고 발의 하였으나 고종때 서원 훼철령으로 건축하지 못하고,196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회헌 임대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화산사를 창건, 위패를 모셨다. 1988년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99년  회암 임종인, 남계 임희무 모심

임희무[林希茂]
자 언실(彦實), 호 남계(蘫溪)
출생 - 사망 : 1527년(중종 22) ~ 1577년(선조 10)
출신지 : 함양(咸陽)
본관 : 나주(羅州)
저서(작품) : 남계집
대표관직(경력) : 우승지, 군수

1527(중종 22)∼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언실(彦實), 호는 남계(蘫溪). 함양 출생. 아버지는 참봉 임각(林珏)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시민(權時敏)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오건(吳健)·배신침(裵愼忱)·노정(盧禎) 등과 교의가 깊었다.

1552년(명종 7)강익(姜翼)·정복현(鄭復顯) 등과 함께 함양에 정여창(鄭汝昌)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을 창립하였다. 1558년 문과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성균관학유·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좌승지·우승지와 순창·금산·밀양·울산·능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저서로 『남계집』 4권 2책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희무 [林希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9. 연화산
















함양 사근산성[咸陽沙斤山城]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산 60
사근산성이 자리한 원평리에는 이전에 사근역원(沙斤驛院)이 있었기에 사근산성이라고 불린다. 산성은 해발 443m 연화산(蓮花山)의 능선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연화산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국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라북도 남원으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방면과 전라북도 장수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입지하였을 뿐 아니라, 동·남·서쪽의 세 방향이 남강(南江)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새로, 남해를 통해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변천
산성은 1380년(우왕 6)에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들에게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혈전 끝에 함락된 뒤 조선 성종 때 보완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 뒤 왜구는 함양을 거쳐 단숨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가 남원 인월역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격파되었다. 이 때에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두 장수와 사졸 500여 명이 이곳에서 전사하여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보아,이 산성은 늦어도 고려 말에는 축성되어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동국여지승람』에는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사근역 북쪽에 있다. 둘레가 2, 79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 안에 못이 세 군데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오래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6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내용
성벽은 대부분 능선을 따라 바깥쪽 벽만에만 돌을 쌓는 편축(片築)의 방식으로 길고 네모난 돌을 ‘품(品)’자형으로 쌓았다. 다만 바닥 부분쪽에는 네모나거나 길고 네모난 다소 큰 돌을 쌓았던 반면, 위로 올라갈수록 얇고 길면서 네모난 돌과 두께가 넓은 돌을 일정한 규칙이 없이 번갈아 쌓기도 하였다. 아마도 여러 차례 보완하거나 고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평열을 맞추기 위한 1열 축조, 2열 축조 기법도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2열 축조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5m 내외이고, 최대 잔존 높이는 4.4m 정도이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 돌더미로 쌓여 있거나 1m 안팎의 밑부분만 남아 있지만, 동북쪽 골짜기에는 원래의 모습을 갖춘 일부 성벽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다만 자연스럽게 봉우리들을 감싼 채 쌓여 각루, 치, 망대 등 특별한 시설이 없어도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성 안에서는 건물터와 문터가 확인되었고, 지름 14m 정도의 둥근 석축연못도 발견되었는데, 대체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아래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터는 남문만 명확하게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너비 2.5m, 길이 6m 정도이다. 산성의 정상부 쪽에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둥근 석축이 남아 있지만 성벽과는 다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은 물이 일정 정도 차면 넘치도록 일부 구간이 절개되어 있어 이채롭다. 산성 아래의 북쪽 물가에는 정여창(丁汝昌)을 향사(享祀)하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마안산성(馬鞍山城)이 가까이 보인다.

특징
발굴조사 결과, 성벽의 너비는 4∼9m로 편차가 매우 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지형에 따라서 편축에 의한 뒷채움 너비를 달리 했기 때문이다. 곧 능선의 암반에 쌓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폭이 좁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은 너비가 넓다. 서쪽벽 일부에서는 길이 8m 정도로 바깥쪽 벽면의 받침 부분을 보강하여 쌓은 흔적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단 보축의 단면은 직각삼각형인데, 바깥쪽 벽의 받침 부분 암반을 계단 모습으로 깎아내고 안쪽에 흙과 막돌을 다져 넣고서 바깥쪽 경사면을 돌로 쌓아 만든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을 비롯하여 창녕 목마산성(牧馬山城), 거창 거열산성(居列山城), 거제 폐왕성(廢王城) 등 신라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사근산성은 고대 산성의 축성 기법이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특히 7세기 경 신라 산성의 축성 기법이 잘 나타나고 있어, 7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의 각축전이 심하게 전개되었던 이 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남해안을 통해 영남과 호남 지방에 출몰하였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대표적인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둘레 한바키를 두 장의 파노라마로 대신한다



6km도 안되는 산길을 내려서니 차로 올라와서 볼까 했던 그 길의 끝에 있는 집이다. 마치 사근산성터를 활용하여 지은 집인 듯하다



거함대로의 교각을 지나서 하산한다.



차를 세운 화산서원으로 원점회귀...



건너편에 있는 마안산성은 다음 기회에...


함양 마안산성 [咸陽馬鞍山城]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함평리에 있는 옛 산성.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경남기념물 제173호
1997년 12월 31일 지정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함평리 산 3, 24-1, 24-2
크기 : 면적 218,611㎡, 성벽 높이 2m, 길이 50m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마안산(507.8m) 9부 능선상에 내탁(內托)하여 축조된 퇴뫼식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함양군 산천조(山川條)〉에 ‘鞍岾山在郡北三十里山上有古石城(안점산재군북삼십리산상유고석성)’이라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축조연대 및 유래는 알 수 없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훼손이 심해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이전에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접한 사근산성(沙斤山城)과 황석산성(黃石山城:사적 322) 등을 고려한다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은 붕괴되었으며, 조금 상태가 나은 남벽은 40×20㎝ 크기의 자연석으로축성한 높이 2m, 길이 50m 정도이다. 폭 2m의 서문지(西門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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