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문경 도장산 제2차 탐방 20190824 토

benel_jt 2019. 8. 25. 00:09

문경 도장산 제2차 탐방 20190824 토 산하


기답지라 코스를 약간 수정했다.

이전에 못보던 회란석(廻瀾石)과 폭포들을 챙겨보았다.

廻瀾石에서 건너 올라가는 길은 흔적은 있지만 가파르다.

곳곳에 밧줄이 있지만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하산길에 폭포 세 곳을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여유로운 산행이었던 날이다.


10:46 쌍용휴게소
10:42 용바위전망대(회란석廻瀾石)
10:50 도하
11:04 석문
11:10 밧줄, 연속
11:20 밧줄
11:23 밧줄 위험
11:41 밧줄
12:26 암릉 위험
12:40 작은 원형 헬기장, 이정표[심원사, 도장산, 우복동]
12:52 [도장산, 화북중, 우복동]
12:53 옛명품소나무 도난 위치
13:36 [회란석2.4, 헬기장0.7, 서재3.7, 도장산0.2, 심원사3.1]
13:39~13:48 도장산정상(827.9m), 삼각점(828.5m)
14:36~14:44 심원사
14:47 [심원사경내0.2, 도장산1.8, 주차장1.1]
14:53 제1폭포
14:56 [(심원사0.5/15분거리), 도장산3.2/2.4, 주차장0.8]
14:58 [도장산3.9/2시간 소요, 쌍용폭포0.9]
14:59 폭포 입구
15:00 제2폭포
~15:27 계곡탁족
15:34 [심원사0.8, 주차장0.4, 쌍용폭포0.1]
15:38 쌍용폭포 감상
15:42 [심원사0.8, 주차장0.4, 쌍용폭포0.1]
15:51 도로변주차/산행 종료


쌍용계곡 대형표지판 앞에서 마무리
17:00 출발하여 화북에서 우복동 향토사적비와
동천암(오장비)을 보았다.


20:15 덕천동 하차
20:40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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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산을 계획했다고 했을 때 아쉬웠지만 미답 코스를 찾을 생각을 하고 회란석을 기점으로 할 생각을 굳혔다.
39명 중에 2명은 먼저 내렸다.
갈령에서 한 명, 화북보건소에서 한 명,
화란석에서 거의 20여명이 내려버렸다.
처음에는 3~4명만 동참할까 했었는데 주력이 그 쪽으로 가 버린 셈이다.
시간은 넉넉히 주어 5시간 20분 정도 잡았다.
더운 날씨에 산행 시간이 늦어질 걸 감안한 것이다.
나는 역시 마지막이 되었다.
정상에서 트랙 역순을 따를까 하다가 바로 심원사로 가는 능선길이 열려 있어 내려갔는데 오르는 길에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양호하다.
이 길로 오른 다른 팀도 있었는데, 올라 오기에는 약간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심원사 앞으로 바로 떨어져 편하다.
먼저 번에 보았던 초라한 집이 아니고 기와를 얹어 제대로 된 절집이 형성되었다.
대웅전 뒤편에 삼성각이 있었다.
보통 절에는 그 곳이 산신각의 위치였을텐데..
삼성각이다.
아마도 이 사찰의 창건주 원효대사와 도반인 의상조사, 윤필대사 두 분을 합한 삼성각인가 짐작이 된다.

그런데, 삼성각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라 당각(칠성,독성,산신) 즉, 귀신이 있는 곳이란다.


심원사 대웅전 아래의 요사채에 문한짝 크기와 비슷한 인쇄물이 걸려 있다.
윗부분은 '심원사'라는 제목인데 거의 연혁에 버금가는 이야기이다.
아래부분은 개운조사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동천암'의 이야기일 듯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동천암'의 안내글에는 개운조사가 아니라 봉래 양사언이라고 했다.
개운조사(開雲祖師)의 속성은 김씨로 상주에서 태어났고,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외가인 양(楊)씨가에 의탁해서 살다가 9세 때에 외숙부내외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치른 후 봉암사 등을 거쳐 개운사로 오게 되고 여기서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하면 양사언의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지나치다 이런 글을 읽고는 때로는 기억해둔다.


전국의 요소요소에 새겨 적은 글들이 근거도 희박하면서 꾸며댄 건 없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세상에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서 기록으로 전해지며 꾸며진 것들이 없지 않으니....

심지어 방송까지도 그렇지 않았던가....






도장산 GPX데이터 파일 첨부 : 문경_도장산2019-08-24_10-45-20.gpx, Tr문경도장산201908241045.gpx











회란석(迴瀾石)



앞의 저 바위를 잡고 뛰어 넘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발을 벗고 적셔야 할 듯하다.

아니면 조금 더 내려 40m 정도 거리에 있는 징검다리처럼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출입을 금하는 쪽이다.



이 방향에서 오르는 길은 상당히 험하지만 밧줄이 쳐져 있기도 하다.













속리산 방향 조망

건너편 시루봉 방향 조망, 좌로는 월악산 영봉이 보이기도 한다.












도장산의 도난 당한 명품소나무가 있었던 자리 부근이다.














도장산 정상(827.9m), 삼각점(828.5m)








심원사의 모습이 바뀌었다. 일주문의 모습은 이전의 것을 지키고 있는데...



입구의 요사채에 붙여 놓은 안내문에 연혁과 개운조사 이야기가 있다.

개운조사의 속성은 김씨이며, 상주출신이고, 나중에 외가인 양씨(楊)가에 의탁해서 살았다는데

'동천암'의 양사언도 역시 양(楊)씨이다.


심원계곡의 첫째 폭포



둘째 폭포는 쌍폭이다.




쌍룡폭포를 조망하는 박.., 옆의 바위는 마치 휴시하는 강아지의 모습...



이정표에 100m 표시가 있다.

그런데 그 때는 이조차 볼 수 없을만큼 시간에 쫓기는 산행을 했으니..

다리를 건너서 산행을 종료하고,...


귀가길에 잠시..;동천암





초서로 음각된 이 글자를 '동천'으로 읽기는 쉽지 않다.


동천암(洞天巖)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쌍용계곡으로 흐르는 병천 도로 옆 도장산 서쪽 자락에 있다.
다섯 길이나 되는 자연석이 엇비슷 누웠는데 거기다 동천(洞天)이라고 초서로 음각하여 속칭 오장비(五丈碑)라고도 한다.
글씨의 길이는 975㎝이고 바위의 길이는 980㎝이다.
일필휘지한 이 글씨의 길이와 바위의 둘레가 똑 같아 신기하기도 하다.
이 글씨를 새긴 사람은 송문흠(宋文欽)인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31~1586)이 썼다고 한다.
일설에는 1809년 상주시 개운리 출신의 개운화상 개운화상이 썼다고도 한다.
동명(洞名)이 없음은 이곳이 우복동이라 천장지비(天臧地秘)한 승지(勝地)라서 함부로 밝힐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많으며, 이곳은 바로 하늘과 통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동천암(洞天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 : 가야산락도<안빈낙도>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ise43&logNo=90122079174






[한정(한정)
움막에 한정하다
한가할 한
고요할 정]

이라고 전해 받았는데...

'窩움집 와'를 닮았다.

窩閒靜의 약어인가...

閒과 閑은 같은 음, 같은 뜻이다.

閒 <한가할 한, 사이 간>





삼성각(三聖閣) <산신, 독성, 칠성> 아래글 다음백과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2XX43500026

우리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라 때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다섯 산, 곧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을 오악(五岳)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주재하는 제사를 올렸으며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산신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조선 전기로 올라가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사원의 규모 유지와 발맞추어 불교 이외의 신앙들을 흡수해 들일 때 수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미 수나라 때에 천태산 국청사에 가람의 수호신으로 산왕각(山王閣)을 두었고 당대에는 산지가람에 산왕을 다투어 봉안하여 도량의 외호를 기원하였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경우도 보다 이른 시기에 산신 숭배 신앙을 사원에서 수용해 들였을 것이다.
산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 호랑이의 위력을 당해낼 짐승은 없다. 그래서 산신은 곧잘 호랑이와 같은 양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의 위세도 많지만 사람을 보호하고 덕을 주는 존재로 비친 경우도 많다. 이렇게 호랑이와 산신을 나란히 그린 것이 산신탱이다.
허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인상의 산신이 비스듬히 선 소나무를 배경으로 인자한 표정으로 엎드린 호랑이를 기대고 앉아 있다. 쌍상투를 튼 두 동자가 천도(天桃)를 받쳐들고 있다. 구도가 간단하고 세부 묘사도 치밀하지 못한 데다 색조도 적록(赤綠) 주조에 청색이 섞여 일반 불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산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탱화의 주인공에 나반(那畔)존자가 있다. 독성각에 봉안되어 독성탱(獨聖幀)으로 불리는 이 탱화는 빈두로(賓頭盧) 존자라고도 부르는 나반존자가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에 있는 천태산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부처가 열반에 든 후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천태존자라고도 한다. 수도하는 형상으로 인해 기도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자주 찾는 전각이기도 하다. 역시 조선 후기에 사원의 한 구성 요소가 된 독성탱은 산신탱·칠성탱과 합쳐 삼성각(三聖閣)이라 이름 붙인 전각에 함께 봉안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 비불교적 성격을 지녔던 것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도하는 수도자의 맑고 고결한 인상이 친근한 산수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탱화이다.

산신과 독성과 나란히 칠성이 봉안된다. 칠성(七星)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말한다. 밤하늘에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일곱 별자리로서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였기에 칠성은 별들의 대표이자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모두 지배하는 하늘의 주재신으로도 여겨졌다. 이를 수용해 들인 불교에서는 칠성이 천재지변을 관장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신으로 생각되었으며 난리와 질병도 다스리고 자식의 생산에도 힘이 미치는 것으로 여겼다. 도교에서는 또한 사람의 수명을 이 북두칠성이 관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후사를 잇고자 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바람은 이 칠성신을 불교에 수용해 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당대에 칠성을 맡는 도교의 칠원성군(七元星君)을 7여래로 변용시키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하여금 이들을 주재하도록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북두칠성연명경(北斗七星延命經)』에서는 일체중생의 중죄를 소멸하는 것이 북두칠성의 위신력이고 대소 생명이 모두 북두칠성의 소관이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전을 읽고 공양하면 지옥에서도 극락으로 구제되고 살아서는 질병을 없애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며 자식을 만들어주고 모든 재난을 없애준다고 설한다.

치성광여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양 협시로 하여 각각 북두칠성의 굽어진 끝쪽에서부터 탐랑성(貪狼星)·거문성(巨門星)·녹존성(祿存星)·문곡성(文曲星)·염정성(廉貞星)·무곡성(武曲星)·파군성(破軍星)의 칠성에 해당하는 운의통증(運意通證)여래, 광음자재(光音自在)여래, 금색성취(金色成就)여래, 최승길상(最勝吉祥)여래, 광달지변(廣達智辨)여래, 법해유희(法海遊戱)여래, 약사유리광(藥師瑠璃光)여래의 7여래를 거느린다. 여기에다 북두대성과 칠원성군과 삼태육성(三台六星) 28수(宿)까지 등장하는 큰 무리를 이룬다. 해와 달과 별을 통솔하는 치성광여래는 불교에서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칠성신을 봉안한 칠성각(七星閣)은 대체로 조선시대에 들어 사원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본당보다 조금 높은 사원 뒷켠의 한적한 곳에 산신각과 함께 자리잡은 칠성각은 그래서 사람들이 본디 소망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오히려 마음 편하게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칠성탱은 위쪽에 좌우 협시를 거느린 여래를 두고 아래쪽에 제왕의 복장을 한 성군(星君)을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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