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산 산행 20190330 토
봉화 청량산 산행 20190330 토 산하
코스 : 청량교-금강굴-장인봉-선학봉-하늘다리-자란봉-뒷실고개-연적봉-탁필봉-자소봉-경일봉갈림길-탁립봉-오마재터널-입석-청량정사-청량사-선학정-청량폭포-퇴계선생시비-상가대형주차장
청량산은 옛부터 불교의 흔적이 산 전체에 남아 있던 곳으로 봉우리들도 그 명칭이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 등과 같이 불교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1544년 중종39) 당시 풍기군수이던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한 후 열두 봉우리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명명하게 되었으며 6.6봉이라고도 한다.
이후 퇴계 이황은 이를 청량산육육봉이라 부르며 주자(朱子)의 중국 무이산(武夷山)과 연결시켜 청량산을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았다.
이 때부터 청량산은 '불가의 사'에서 '유가의 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10:56 청량교 하차, 사진 몇 장 찍고...
11:04 청량문 앞 좌측으로 산행들머리 [장인봉2.8]
11:13 [안내소0.3, 장인봉2.5]
11:25 (버려진 이정표에 안내소0.8, 하늘다리, 장인봉1.8)
11:31 금강굴(金剛窟)
11:37 여여송(如如松)
11:39 할배할매송
12:18~22 전망쉼터 [안내소2.0, 장인봉0.6]
12:30 긴 급경사철계단,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12:46 계단 끝 위 전망처, 노송
12:48~51 청량산 정상 장인봉(丈人峯870m), 삼각점(869.7m)
장인봉(丈人峯)은 청량산에서 가장 크고 긴 봉우리로 옛날 명칭은 대봉(大峯)이었으며, 주세붕이 중국 태산(泰算)의 장악(丈岳)을 모방하여 명명하였다고 한다.
12:55 하강 급경사 철계단
12:59 폭포갈림길 [장인봉0.3, 청량폭포1.5, 자소봉1.6, 하늘다리0.5]
13:02 선학봉(仙鶴峯) [장인봉0.4, 하늘다리0.4]
13:12~14 청량산출렁다리
13:21 뒷실고개,청량사갈림 [자소봉0.7, 하늘다리0.5, 청량사0.8]
13:30 [장인봉1.5, 자소봉0.6]
이 사이에 핸드폰이 꺼짐으로 연적봉(硯滴峯,846.2m) 기록 없고 지체함
지난 가을에 축융봉에서 오면서 꼴지에다 지쳐 오르지 못한 연적봉이었기에 꼭 올랐는데 하필 여기서 미루었던 폰 업그레이드가 된 것이다.
화면과 아이콘들이 바뀌어 쉽게 적응 되지도 않을 정도다.
믿지 못해 미룬 업그레이드가 여기서 이 시각에 되다니...
ㄱㅇㅂ님의 카메라로 정상 인증은 했지만 아쉽다.
13:55 탁필봉(卓筆峯,820m)
14:00~04 자소봉(紫霄峯,840m) 연대(連臺:현재 청량사 5층석탑 앞)의 북쪽에 위치하여 옛 이름은 보살봉(菩薩峯)이었다.
14:07 청량사갈림 [경일봉1.2, 장인봉1.6, 탁필봉0.2, 청량사0.9, 응진전1.4]
14:08 바로 아래 이정표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옴
14:10 [자소봉-오마도터널로 이어지는 길, 거리표시 없음]
자소봉 지나서 왼쪽으로 꺾었는데 선두의 2명이 마주쳤다.
14:19 오르막 계단 [자소봉0.4, 오마도터널3.0]
조금 지나서 다시 한 명이 마주 지났다.
이후의 길은 험하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다.
14:30 경일봉(擎日峯)갈림길 [경일봉0.4, 오마도터널2.6, 자소봉0.8]
경일봉(擎日峯)은 지난 해 거쳤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작은 봉인 금탑봉(金塔峯)은 지난 해에 못간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금탑봉(金塔峯)이 일명 치원봉(致遠峯)으로 청량사 동남쪽에 위치한다.
14:34 이정표가 4분 전의 거리와 같은 표시, 경일봉만 없고..
14:36 축융봉(祝融峯) 거쳐 오는 A팀 선두그룹의 4~5번 만남
14:40, 14:45 이어서 만남 [자소봉1.4, 오마도터널2.0]
14:52~53 A팀의 주류 7~8명 만남
14:54 [오마도터널1.5, 자소봉1.9]
15:05 [오마도터널1.0, 자소봉2.4]
15:10 A팀 후미 만남, 뒤에 2명이 있다고..
15:12 [오마도터널0.6, 자소봉2.8] A팀 맨 후미 2명 만남
오마도는 말이 5마리가 나란히 서서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어져 있다고 전해진다.
지금 도로처럼 수백 km 단위는 물론 아니었을텐데...
처음 상상으로 능선에 만든 길일까 생각하고 이 길을 왔는데, 오마도터널의 이름을 보고는 지금 포장된 그 길이 오마도였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이 정도 위치에 오니 능선의 길이 오마도가 될 것도 같았다.
청량산 도립공원 안내도에 실제로 이 구간을 오마도라고 표시하고 있다.
물론 1km도 되지 않을 정도의 짧은 거리 아닐까 싶다.
15:19 [오마도터널0.3, 자소봉3.1]
이곳 이정표가 약간 능선을 비켜 있어 능선을 이탈하여 아래로 가면서 트랙과 달라 의아했지만, 도로 사진에서 터널 건너편의 시설이 있어 방향을 그대로 유지.
15:29 도로에 내려섬, 길이 아닌 곳으로,,약간 경사 급한 곳
바로 앞이 예상했던 곳보다 약간 아래쪽이다.
15:30 터널앞 정자, 화장실, 물티재 등산로 입구.
15:32 [입석1.88, 산성입구 1.4, 남면제2안내소 0.92, 청량성곽순환길] 터널 건너 있는 오마도터널 등산로 입구. 그러니까 터널 양쪽에 등산로가 있는데 저쪽이 필요 시설이 있는 곳이다.
15:50 산성입구[오마도터널1.7, 입석0.4, 선학정1.3]
[축융봉2.0, 공민왕당1.6, 산성0.3]
[입석0.4, 퇴계사색길3.3, 오마도터널1.5, 남면제2안내소2.45]
15:54 입석, 도로 이탈, 청량사1.3km, 원효대사 구도의 길
16:03 [청량사1.0, 하늘다리2.5, 응진전06, 김생굴1.1, 자소봉2.0], 응진전, 김생굴은 지난 가을에 갔기에 청량사로 직행
16:17 삼거리[청량사0.2, 입석1.0, 경일봉0.8, 응진전0.4]
16:18 청량정사(淸凉精舍), 오산당(吾山堂)이라고도 한다.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이라 한다.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陳)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16:21 설선당
16:22 일소당,
하산 시간 관계로 석탑과 유리보전은 조망만하고 범종각을 거쳐 하산길로..
16:23 [선학정0.8....]
16:34 청량산청량사일주문
16:37 선학정
16:48 청량폭포[안내소1.0, 선학정0.9, 입석1.8]
17:01 퇴계선생시비
17:04 안내소
17:06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예던길안내판을 보고..
여기서 오마교까지 1.2km, 오마도터널과는 다르다.
여기서 낙동강시발점까지 9.1km가 안내되어 있다.
한 번 다녀올만한 코스 아닌가..
17:11 주차장에서 산행 종료
화장실에서 잠시 세수하고 나오는데 강한 찬바람에 비와 진눈개비까지 너무 기온이 떨어졌다.
18:00까지 하산 계획이었는데 후미가 약간 늦어졌다.
어두워지고 기상도 악화되고 하산길의 코스가 위험구간이라 걱정했지만 모두 무사 귀가했다.
내가 역방향으로 진행한 이유가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제 청량산은 어느 정도 답사한 편이다.
오마도터널에서 축융봉 구간, 공민왕당에서 입석 구간, 금탑봉, 시간 관계로 오늘 포기했던 공민왕의 친필이라는 유리보전의 현판을 비롯한 몇 개의 보물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봉화 청량산 GPX 트랙 파일 첨부 : 봉화청량산201903301101.gpx
김생(金生)과 청량봉녀(淸凉縫女) 설화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지 9년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김생의 글씨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의 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였다.
그래서 굴 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켜고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공부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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縫 꿰맬 봉
1. 꿰매다 2. 바느질하다 3. 깁다(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매다) 4. 옷 솔기(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지을 때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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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서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절벽이 솟아 푸른 강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산구곡(陶山九曲) 중 제9곡인 청량곡(淸凉曲)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소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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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金剛臺)
청량사 동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금강대는 청량사 입구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좌우로 갈라져 또 하나의 비경을 이룬다.
금가애에 오르면 산발치를 감싸안고 흘러가는 낙동강으 ㅣ모습을 볼 수 있다.
금강대 주위에는 금강굴이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淸凉寺 瑜璃寶澱殿)
오늘날에는 청량사의 유리보전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연대사(蓮臺寺)의 부속건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경내의 부속건물을 비롯한 대소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와 3년(663) 원효대사 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구전될 뿐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건물이 오래되고 무너져 1755년 산 입구로 이건되었고, 이 때 그 터에 불전 하나가 홀로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남아있었다는 불전 하나가 유립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이건된 후 다시 폐사되어 터만 남게 되었고 청량산의 사찰은 유리보전을 중심전각으로 하는 청량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유리보전은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증.개축하였다고 전해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에 주심포계(柱心包系)와 절충한 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공포(拱包)는 외1출목내출목의 형식으로 내부는 판상(板狀)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불단에는 삼존의 좌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큰 보 밑에 간주(間柱)를 세워 후불벽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주불인 약사여래좌상은 건칠불(乾漆佛)로 알려져 있으며 유리보전 현판의 글씨는 공민왕(恭愍王)의 친필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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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유래
청량산은 원래 수산(水山)으로 불렸다.
왜 수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리적 요인에서 그 연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낙동강이 산 앞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퇴적암으로 형성되어 이 산에 물이 별로 없어 그 반대급부로 수산으로 명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때 퇴게 이황도 도산서원의 위치를 정할 때 고심한 적이 있는데 청량산에 물이 없다는 이유로 서원을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로 정했다고 한다.
청량산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최초의 문헌자료는 '동문선(東文選)이다.
동문선에는 고려시대에 국사(國師)로 활동했던 천인(天因)의 시가 실려 있다.
천인은 치원암(致遠庵) 주지가 자신의 시를 보여주면서 청량산 고사(故事)를 기록해 주기를 요청하자 이에 화답한 시(致遠庵主以詩見示 仍以請予紀山中故書 次韻答之)에서 청량산을 수산으로 명명했다.
청량산의 옛 이름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발견된 관련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998년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수산청량사(水山淸凉寺)'로 추정되는 명문기와(산청량山淸凉이라는 명문이 새겨짐)가 수습되었다.
그러면 수산에서 청량산이란 이름으로 변경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도출해 내기는어렵다.
다만 청량산과 관련된 문헌과 출토유물들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볼 쁜이다.
다행히 구한말에 출간된 청량산 관련 지리지에서 '수산'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어 연대 비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1년에 출간된 역사지리지 '오가산지(吾家山誌)'에는 '청량산은 재산현(才山縣)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수산이었다. [淸凉山 安東邑誌 在才山縣南 古名水山]'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주세붕을 필두로 조선중기부터 출간된 수많은 유산록을 살펴보면 수산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고 모두 '청량산'으로 통칭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있다.
따라서 천인의 시와 앞서 기와편의 번와연대를 문헌자료와 더불어 종합해 보면 청량산으로의 명칭 변겨은 고려말에서 조선존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仍 인할 잉
1. 인하다(因--: 어떤 사실로 말미암다) 2. 그대로 따르다 3. 기대다 4. 따르다, 좇다 5. 거듭하다 6. 슬퍼하다 7. 거듭 8. 자주, 누차 9. 이에 10. 오히려 11. 슬퍼하는 모양 12. 칠대손(七代孫)
予 나 여/줄 여, 미리 예
1. 나(=余) 2. 주다(=與) 3. 하사하다(下賜--) 4. 승인하다(承認--) 5. 허락하다(許諾--), 용서하다(容恕--) 6. 인정하다(認定--) 7. 팔다 8. 매각하다(賣却--) 9. 함께하다 10. 함께
a. 미리 (예) b. 먼저 (예)
산행들머리의 청량교 앞 청량지문
들머리부터 급경사로 치고 오른다.
벼랑길이 아니면 급경사 철계단으로 이 길을 하산지점으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금강굴(金剛窟)
금강대 뒤편 장인봉 서쪽 낙동강 위에 있다.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비바람을 면할 수 있다.
그윽하고 고요하여 독서하며 수양할 수 있는 장소로 적격이다.
퇴계의 급문제자였던 성재(省齋) 금난수(琴蘭秀)가 1566년 한 달간 이 굴에서 공부한 바 있으며, 정안(靜安)이라는 승려가 수도하며 머물렀다.
'금강암(金剛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구들장과 기와가 남아 있다.
1579년 청량산을 유람했던 '갈봉(葛峰) 김득연(金得硏)의 기록'에서 당시 금강굴과 금강암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험로를 거듭 지나 마침내 금강굴에 도착하니 굴에 조그만 암자가 있고 암자 밑은 절벽이었다. 시렁처럼 얽힌 바위가 곧 기와지붕을 대신하였고 층계구름이 고요히 일었다. 여기는 바로 정안(靜安)이라는 승려의 거처였지만 돌아갈 시간까지 있을 수 없어 내려왔다. 바위 끝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먼 곳을 바라보니 벼랑이 갈라진 곳에 한 줄기 물이 철철 흘러 아래로 빙 둘러 내려가서 더욱 이 암자의 빼어난 경관을 도와주었다.'
<금강굴(金剛窟)>
금난수(琴蘭秀)
靜安今安在(정안금안재) 정안이 지금은 어디 있는고
庭戶餘行迹(정호여행적) 뜰 안에 행적만 남아 있구나.
客到爛柯秋(객도난가추) 도끼자루 썩는 가을 나그네 오니
忘歸日慾夕(망귀일욕석) 돌아갈 길 잊고서 날이저무네
여여송(如如松)
이 소나무는 낙동강에 인접한 금강대 위 절벽에 곧게 뻗어 있는데, 거센 풍파에 굴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독야청청한 이 소나무의 모습은 불교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변함없이 뿌리가 깊으면서 흔들림이 없다.[여여부동(如如不動)]'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한다.
홀로 금강대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여여송의 자태는 '금강대(金剛臺)'의 이름과도 어울린다.
할배할매송
옛날 청량산에 약초를 캐며 비록 자식을 없으나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병들어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약초를 캐러 간 할머니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할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참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금강대 절벽에 매달려 이쓴 할머니를 발견하고 할아버지는 힘에 부쳐 막 떨어지려는 할머니 손을 겨우 잡았으나 결국 노부부는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늘도 이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노 부부가 떨어진 자리에는 그들의 모습을 닮은 애틋한 소나무 한 쌍이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 직전의 계단은 아찔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철계단에 질릴 정도다.
청량산의 정상 장인봉, 명필 김생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정상 표지석이다.
사진 하나 장 찍는 동안 일행들은 벌써 저 위로 오른다. 여기서 청량폭포로 하산하는 길이 갈린다.
강풍과 저온에 신속히 통과한 하늘다리, 아래 계곡을 보면 아찔한데...
연적봉 사진은 빌려오고.. 그 후에 복구되어 사진을 남긴다.
자소봉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여기서 부터 이 팀과 헤어지고 홀로 달린다. 목표는 오마도터널 방향
경일봉, 오마도터널 방향이 막혀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오마도터널 방향으로 잡았다.
경일봉은 되돌아 와야 하기에, 지난 해의 답사로 대신하고..
계속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약간 헛갈리는 곳은 역방향 설정한 GPS트랙으로 확인하고..
산... 더러 보던 표지석 같다. 마주 오는 A팀의 주류를 만나고..
터널 300m 앞에서 능선을 타지 않고 내려가다가 길이 약간 혼란했지만
바른 길은 앞 능선으로 붙어야하는데, 터널 너머의 정자가 있는 곳을 찾아 내려섰다.
도로에 내려서니 터널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바로 앞의 정자와 안내도..
남면 쪽의 터널 입구에서 터널 내부의 벽화들을 보고 청량사 방향의 터널로 나왔다.
양방향 모두 등산로 입구가 있지만 저쪽 편에 화장실, 정자 등의 휴게시설이 있다.
이쪽편에도 계단이 있어 오를 수는 있다.
처음에는 이 방향으로 내려올 계획이었는데...
여기서부터 주차장까지는 약 5km 정도 되는 거리다.
하산종료 시간까지는 약 2시간30분 정도 남았다.
바로 도로를 따라 하산하면 1시간이 조금 더 걸릴까...
공민왕당이나 청량사를 거쳐가기로 했는데 공민왕당은 거의 축령산 정상에 가깝다.
그래서 청량사로 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산성입구에서 공민왕당의 안내문만 챙기고...퇴계사색길로 갈까 하다가 계속 도로를 따른다.
도로 가운데 버틴 입석, 바로 앞이 청량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1.3km를 홀로 걷는 동안 사초, 산괴불주머니, 봄맞이, 냉이, 제비꽃 등을 보고,,,
청량사가 가까워지자 그 앞의 연화봉, 향로봉이 보인다.
청량사 200m, 바로 앞이 청량정사다. 오산당이라고도 한다. 순조32년(1832) 창건, 퇴계의 후학들이...
청량의진의 조직으로 의병항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면서 저 앞에 보이는 유리보전까지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혹시나 '내려갈 마음 착한 차'가 있을까 기대하다가 결국 끝까지 걸었다.
선학정, 이곳 주차장이 청량사에 가장 가깝다.
청량폭포
퇴계선생시비
미내 개울을 건너며 산을 바라보다
굽이 굽이 맑은 여울 여러 번 건너서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맑은 여울 높은 산 숨었다 다시 나타나
끝없이 바뀌는 모습 시상을 북돋우네.
여러 벗과 청량산에 노닐기를 언약하고 말 위에서 읊다.
산에 살아도 산이 깊지 못함을 아쉬워 하여
이른 새벽 밥먹고 떠나 다시 찾아간다.
눈에 가득한 웃봉우리 나를 맞아 기뻐하며
두둥실 높은 구름 모양 지어 맑은 시상을 돕네
무불경(毋不敬)
무불경은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
예기(禮記)의 '곡례(曲禮)'에 '사람이 몸을 수양함에는 언제나 공경치 않음이 없어야 하고 명확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덕이 절로 쌓여져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案民哉]'라고 하였다.
무자기(毋自欺)
무자기(毋自欺) 즉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은 선(善)을 좋아 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마음을 단호하게 가져 '마음 속에 진실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 '성의(誠意章)'에 나오는 말로서 주희(朱憙)는 이것을 성의(誠意)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이해하였다.
'어리석고 속된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지적한 의미가 내포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사(思無邪)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시경(詩經) 300편을 한 마디 말로 정리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詩三百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하였다.
쉽게 말해서 사무사는 생각에 사사로움이 없는 바른 마음을 일컫는다.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르면 모든 삼ㄹ에서 바름을 얻게 될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무불경(毋不敬), 무자기(毋自欺), 신기독(愼其獨)과 함께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이다.
청량지문에서 예던길 안내판을 보고, 다음 저길을 따라 낙동강시원지까지 걸어볼까...
주차장에 다가가서 전화하니 17명이 도착했단다.
시간도 제법 남아서 잠시 세수하고 갔는데, 그 새 찬바람과 비가 쏟아져 ...
남은 이들이 걱정이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기상은 악화되고, 하산코스는 험악한데...
조금 늦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