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백화산호국의길 20101101 목

benel_jt 2018. 11. 1. 21:24

백화산호국의길

20101101 목 뉴한사랑

반야사주차장-반야사-문수전-만경봉-헌수봉-옥동서원-백옥정-임천석대-반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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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7 백화산반야사 일주문
11:01 반야사호랑이조망, 배롱나무
11:09 문수전
12:09 돌탑봉/만경봉
12:51 헌수봉
12:59 갈림길(헛갈리기 쉬운 길, 우측으로 가야 옥동서원으로 갈 수 있다.)
km/5암봉, 위험구간, 암봉 지나면 내리막이 위험, 길은 능선으로 나 있는데..
13:59 마을[백옥정0.63, 임천석대 3.62, 반야서옛터.98]
14:00 [호국의 길, 백옥정] 산쪽으로 안내하고 있다.
14:02 옥동서원
14:03 서원주차장, 백화산 호국의 길, 천년옛길 안내도
14:14 백옥정 [옥동서원0.5, 임천석대3.23]
14:18 옥동서원 갈림길
14:28 데크구간, 구수천2탄구간 : 물탕골~방성재
14:36 징검다리 [백옥정1.4, 임천석대1.84, 옥동서원1.81, 반야사옛터3.2]
14:41 구수천3탄구간 : 방성재~송골
14:43~14:55 밤, 약초, 영농단지, 사유지
14:50 회양목 군락지, 구수천4탄구간 : 송골~보광골, 명소 : 난가벽(欄柯璧)
14:54 옛길 물 건너는 곳, 수봉리~가야사 옛터(0.2/5',3.6/1:16')
14:55 출렁다리
15:02 [백화산입구←2.5, 저승골↖1.4, 반야사옛터→1.7]
15:04 난가벽 詩
15:07 구수정(龜水亭) ..'귀수정'이라고 읽어야 하나, 구수천팔탄이라 부르니 구수정이...
15:08 부처바위
15:10 임천석대 詩 [난가벽 0.4/10', 반야사옛터 1.2/25']
15:11 진불암옛터[한성봉 정상↗2.7/2:30']
구수천5탄구간 : 보장골-전투갱변, 명소 : 임천석대
15:15 징검다리 [백옥정3.64, 반야사옛터0.86]
15:18 구수천6탄구간 : 전투갱변~저승골
15:21 징검다리(세월교)
15:23 옛길 물 건너는 곳
15:24 구수천7탄구간 : 구수천~명경호
15:27 반야사옛터, 경북상주 비 [임천석대3.8/2',→충북영동]
15:33 문수전이 보이는 아랫길
15:38 너덜(호랑이 모양)
15:39 반야사 호랑이 안내판
15:44 고목나무, 징검다리(건너면 반야사 입구), 건너지 않고 반야교로..
15:53 반야교 앞에서 산행종료, 탁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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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천팔탄(龜水川八灘)은 봄철에 야생화가 좋은 곳으로 알고 있는데, 산행을 겹쳐서 함께 동행하면서 구수천 팔탄을 답사하는 셈 치고 갔다.
반야사와 문수전은 재작년(2016.8.4)에 주행봉 갔다가 백화산을 빼고 다녀왔다.
백화산은 2011.11.5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구수천팔탄을 먼저 탐방한다는 계획이 바뀌어 산행을 먼저하게 되었다.
위로 올라가면서 보니 구수천팔탄이라 부르는 곳을 흐르는 석천의 건너편 백화산이 점점 낮아 보이는 듯하다.
주변의 산들을 조망하면서 오르는 길은 고도차가 심하지 않으니 비교적 잘 올라갔다.
돌탑이 있는 망경봉까지는 보통 정도의 난이도라고 할까.
헌수봉에서 지나 다음에 보이는 작은 두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에 매우 험하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고도를 낮추면서 앞에 백옥정이 보이는데 우로 돌아서 길이 좋은 곳을 따라 마을로 내려서면 바로 옥동서원이다.
옥동서원은 문이 닫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바깥만 보고 지나서 백옥정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고 제2탄의 팻말부터 보면서 칠탄의 팻말까지 확인했다.
아마도 제1탄은 백옥정 앞에, 제8탄은 반야사 앞에 있을 것 같다.
구수천팔탄은 백옥정 부근에서 부터 반야사까지의 여울을 말한다. 그 중에 명소는 난가벽, 임천석대가 유명한데, 아쉽게도 저승골은 들어갈 시간이 되지 않았다.
몽고군을 저승골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고려의 승병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인데...
대부분이 몽고군을 격퇴한 역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임천석대는 고려말의 악공 임천석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두문동 72현의 이야기와 통하는 역사다.
고려의 패망으로,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은둔해 있다가 임천석대에서 벼랑에 떨어져 목숨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망경산도 이 사건과 이어지는 것 같다.
당시의 서울은 개경이었으니 임천석이 개성을 바라보면서 한을 달래던 산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임천석 뿐이랴..
야생화가 필 때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다.
반야교 부근에 나오니 월류봉 둘레길이 이어져 있다.
이 길도 좋을 텐데...
올갱이탕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귀가하니 20시였다.
만일 기차를 이용하여 개별 산행을 한다면 23:22에 구포에 도착할 것 같다.
15:51에 황간에서 승차하면 18:21에 구포 도착이니 적당하다.



 






백화산반야사일주문, 문수전



반야사에서 보는 호랑이 모양의 너덜, 삼층석탑과 배롱나무






만경봉(망경봉을 잘못 푝한 것이 아닐까...)정상, 헌수봉 정상



건너편의 백화산정상과 주행봉 정상 사이의 능선, 헌수봉에서 내려가면서 가장 험ㅎㄴ 구간인 것 같은데...



옥동서원의 문 앞에서 현수막만 보고 가야해서 아쉽다.



옥동서원 주차장에서 호국의 길 안내판과 앞에 보이는 산의 끝 자락에 보이는 백옥정









난가벽은 구수천 4탄의 명소...

저승골의 이야기는 몽고병의 패전, 대몽항전의 승리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아래 글은 빌려온 글로 원본에 링크 되어 있음>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홍지가 금돌성에서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와 앞과 뒤에서 협공 당한 몽골군은 우왕좌왕하다 제4의 관인이 화살에 맞아죽고 군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백화산(白華山) 기슭 이 골짜기는 몽골군이 많이 죽었다 해서 그 후 '저승골'로 불려왔다.”'
구중서 소설 ’항몽전쟁- 참혹한 산하 2권‘의 한 구절이다.'
"몽고장수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황령사의 승 홍지(洪之)가 제4관인을 사살하고 사졸의 죽은 자도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十月戊子, 車羅大 攻尙州山城, 黃嶺寺僧 洪之, 射殺第四官人,士卒死者過半, 遂解圍而退)'
고려사에 기록된 '저승골'과 연관된 이야기는 이후 패퇴한 몽골군이 남하하며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었고,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몽골의 난이 있은 이래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고 하였다.'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저승골'에서 패퇴한 보복으로 여겨지며 '저승문', '저승골'에서 '저승폭포'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몽골군을 유인한 방향이고 초겨울 빙판을 이룬 '저승폭포' 부근에서 협공을 당해 아비규환을 이뤘으며 간신히 도망친 몽골군이 내를 건너자 건너편 '전투갱변'에서 매복하여 대첩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백화산 최고봉 한성봉은 원래 恨城峰인데 몽골군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가 물러가며 恨을 남긴 성과 봉우리에서 유래되고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하여 구전된 지명이다.
육군본부 간행 '고려 전쟁사'에도 '대승첩'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은 대첩 이후 고려가 몽골군에 항복하며 '반역의 장소'로 격하되어(?) 혹은 순수 민간인들의 항쟁이었기에 세간의 이목에서 사라진 듯하다.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鄭義善 記


http://blog.ohmynews.com/podoo/285143






구수정 앞이 임천석대다.

임천석은 고려말의 악사였단다.

두문동 72현과 뜻을 같이 한...


다음에 또 하나의 글을 인용한다.

그래도 살아있는 백화산을 감싸며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석천=구수천'은 오늘도 이어지고 그 안에 도도하게 역사는 흐른다. 전 대통령의 형이란 인간 하나가 대한민국에 살며 아직도 일본 이름으로 문패를 달고 있는 걸 보고 '저런 무리들이 활개 치는 나라가 정상인가?' 개탄하며. 십 년 전 무려 80년 가까이 해발 933의 명산이 지명도 일제에 빼앗기고 무명의 산으로 남은 걸 보고 시정을 촉구하다 길이 없어 자료 수집을 위해 향토 사학가가 되었다. 3-4년간 자로 수집 등 노력 끝에 2007년 12월 26일 지명심의를 거쳐 국토지리정보원에 '백화산' 지명이 새롭게 제정 고시되었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일제에 지명을 빼앗긴 근거가 부족하다는 논리가 비약한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일본 강점기 대정(大正) 7년=1918년의 지도와 소화(昭和) 3年=1928년의 지도에서 답을 찾았다. 앞의 지도에 있는 '백화산' 지명이 십년 후 지도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최고봉인 한성봉(漢城峰)마저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성을 포획하다.'는 뜻으로 포성봉(捕城峰)으로 개명하여 봉우리 지명만 80년간 이어온 것이다. (백화산 중턱에는 신라 무열왕이 백제 공략 때 진두지휘한 대궐 터와 4중으로 성을 구축한 금돌산성이 존재한다.) 일제란 이름만 들으면 혼(魂)이 비정상인가 모르지만 엄연한 팩트이니 다시 거론하지 말 것을 부탁하며 왜 지명을 빼앗을 만큼 백화산의 정기가 뛰어난지 역사 공부를 부탁하고 싶다.
http://blog.daum.net/podoo/13754727

상주 백화산 탄금대, 임천석대(林千石臺)에 관한 소고(小考)
얼마나 그 죽음이 장엄하고 처절하게 전해졌으면 '나라가 망함을 듣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수풀 사이로 새들이 슬피 울고 산하가 참담하였다.' 고 옛 선인은 詩로 남겼고 지평 김광우는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 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고 상소를 했을까? 역사의 파편을 모아 흔적을 쫒고 그곳을 찾은 십년. 아깝지 않다.

임천석대

백화산 구수천
난가벽 따라
보장골 탑벌 인근
저승골 건너편
고려가 망하자
새 임금 마다하고
거문고 타다
떨어져 죽은
임천석臺가
역사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절명사를 읊든
불사이군 충절의 넋이
오늘도 중모현 맴돌고
산새 한 마리
가지마라
가지마라
바람을 가르며
그날을 기리는데
잔 한번 올리지 못하는
안타까움
낭떠러지 아래
물가에만 머물고
와편 하나 터 머무는
진불암 옛 스님
독경 소리도 조용하다.

정조 대왕 이르길
천지사방(天地四方)
고왕금래(古往今來)
빛나는 장한 일이니
길이 남기도록 묘당에 품한 일
정조 실록에 전하건만
왕명도 어디 가고
여럿 앉을 돌대(石臺)만
세월을 삼키며
백화산 지킴이로 남아 있다.

시루를 층층 엎은
바위 사이로
이끼 무성하니
내일 모르고
오늘 알려는
세상사 어지러워
전설의 임천석
북 두드리며
거문고 안고
다시 또
하늘에서 뛰어 내린다.














징검다리가 아닌 보를 막아 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