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거칠봉 선인봉 사선암 산행 20181004 목
무주 거칠봉 선인봉 사선암 산행
20181004 목 한마음
코스 : 두길교-북릉- 거칠봉 - 선인봉- 삼각점봉 - 한재 - 944암봉 - 895암봉 - 사선암 - 무풍승지방문자센터 - 철목리입석
11:23 두길교 [벌한마을3.7, 방재마을1.3]
두길교를 건너면 바로 우측으로 잠수교가 있고 시멘트 포장길을 한참 지난 다음 우측으로 능선을 찾아 오른다. 신선길은 같은 고도로 직진으로 이어지는데 이 곳에 신선길 안내도가 있고 우리는 우측으로 올라간다.
11:54 (592m/트랭글)
12:10 (749m/트) 능이버섯 재배지 경고문
12:26 (851m/트) 비비추, 단풍취, 미역줄나무
12:54 (1031m/트) 억새, 헬기장
13:02 (1045m/1043m트,큰절봉) 구절초
13:29 거칠봉 (삼각점1178.3m/정상목1182m)
14:00 헬기장
14:16 (1112m/네이버지도, 삼도봉, 1119m/트)
15:08 삼각점(1056m)
15:11 국립공원 표지 이어짐, 미역취, 며느리밥풀, 투구꽃, 은대난초씨방
15:28 갈림길 주의(우측으로) 천남성, 배초향
16:02 오래된 삼각점(원기둥형)
16:28 사선암(10분간)
이 사이에 이정표가 하나 더 있어야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16:41 [약수터0.1, 철목마을방문자센터2.8]
16:53 임도이탈 [사선암0.6, 철목마을(방문자센터)2.2]
17:04 고목(올라오는 임도 끝)회차지, 참취,쑥부쟁이, 달맞이꽃..
17:07 차단기, 사과 과수원
17:15 신기마을회관
17:14 [사선암2.5, 철목마을방문자센터0.3]
17:22 休무풍승지 방문자센터
17:23 산행종료
B팀을 덕유산휴양림 앞에 먼저 내려주고, 직진하여 돌면서 두길리로 이동하여 17:30분까지 산행 종료 예고하고 두길교 앞에서 하차하면 바로 이정표와 지도가 하나 있다.
신선길 이정표와 함께 안내가 있지만 우리는 거칠봉(居七峰)을 항하여 두길교 건너 바로 우측의 시멘트길을 따라 오르다가, 신선길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산으로 오르는데, 금새 길이 가파르다.
이정표도 거의 없는 능선으로 오른다.
선답자의 기록 GPS의 도움으로 길을 찾아 간다.
능선에 오르면 길은 조금 순한 편이다.
뒤로 돌아보면 지난 한더위에 찾은 무주 백운산이 위용을 자랑한다.
그 날은 더위에 엄청난 체력소모가 있었는데 오늘은 시원한 날씨에 좀 나은 편이다.
지도를 보니 거칠봉까지 가면 약 삼분의 일은 가는데, 힘의 소비는 절반 이상인 것 같다.
선인봉에는 임도1.4km와 헬기장 1.1km만 안내되어 있어 헛갈리게 되어 있다.
거칠봉과 사선암 등의 안내는 아예 없다.
무심코 직진하다가는 임도1.4km 방향으로 빠지게 된다.
오는 방향에서 좌측으로 떨어져야 사선암 방향이다.
거칠봉을 오르고 선인봉을 가는 동안 줄곧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능선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갔는데...
두 능선 사이가 벌한마을이 있는 골짜기다.
사선암의 안내글에서 보니 벌한마을은 백제 땅, 철목리는 신라땅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선인봉까지는 무난한 산길이다.
선인봉에 산불초소가 있을만큼 조망은 좋다.
전망대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덕유산 능선이 멀지 않다.
향적봉이 제일 높게 보이고, 단풍으로 유명한 적상산은 우측으로 떨어져서 보인다.
사선암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우측으로 대덕산, 초점산 방향을 조망하고 내려간다.
이 길은 암릉이 약간 있는 편이다.
능선을 따라 국립공원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영역표시 외에는 의미를 느낄 수 없을 정도다.
거리와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를 확충해 주면 좋겠다.
바위군을 만나면서 조망이 좋은 곳에 서서 되짚어보는 길이 눈에 들어 온다.
거칠봉이 높다랗게 막아선 듯하고, 우측으로 오른 방향의 경사진 능선이 보이며 그 뒤로 무주 백운산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능선의 우측은 철목리 방향이고 좌측은 벌한마을 방향인데 벌한마을이 백제땅이고 철목리가 신라땅이라는 설명은 이해하기가 좀 곤란하다.
벌한마을에 군대를 주둔한다는 것은 낮고 좁은 골짜기에 있어서 적에게 모두 노출될 뿐 아니라 퇴로를 차단해 버리면 나갈 방법도 없어지는 곳이다.
차라리 완충지대였다면 모르겠지만...
백제군도 이 지역이라면 거칠봉을 차지할 것 같다.
사성암은 능선에서 보아 좌측으로 약간 내려서 있는 듯 해서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안내판이 있지만 능선의 반대방향에 있다.
물론 바위벽의 암각서들을 찾게 하려는 뜻도 있고 앞마당 같은 공간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사선암 안내문 외에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국립공원에서 사선암을 표시하여 안내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세 곳의 벽에 새겨진 암각서들을 보고는 줄을 잡고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올라 가니 바둑판에 새겨져 있고 제법 너른 공간이 있다.
해가 넘어가면서 거칠봉 방향은 그늘이 져서 잘 보이지 않고, 반대편의 민주지산 방향이 잘 조망되었다.
한참이나 조망을 즐기다가 내려서서는 길을 찾는데 능선을 따라가면 길을 잃게 된다.
바로 내려서야 철목리로 가는데, 조금 내려서서 외길에 들어서니 약수터 0.1km와 철목리 2.8km의 이정표가 하나 있다.
사선암 앞에 이정표가 있어야 철목리로 바로 찾아 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결국 한 팀이 능선을 따라가다가 돌아오게 된 건 이정표 탓도 있을 것이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면 약간 급경사로 지그재그 길을 따라 하산하게 된다.
산길이 끝나면 임도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측으로 약 200m/5분 정도 가면 이정표가 있고 임도를 이탈하여 하산길로 들어선다.
옥당골을 따라 1.6km/32'를 내려가면 새터, 신기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철목리의 방문자센터를 지나 철목교까지 가면 약14.4km/6:00/평속 약 2.6km가 소요된다.(빠르지 않은 속도)
올라가는 길에 시간이 좀 걸리면 하산길은 편한 편이다.
그래도 6시간이면 만만한 길은 아니다.
거칠봉, 일곱의 신선이 거하던 곳인가.
선인봉, 신선들의 봉우리
사선암, 네 명의 신선이 노닐던 곳
모두 신선들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신선길을 만들어 관광객을 끌려고 하는데, 한 번은 꼭 찾을만한 곳이다.
거칠봉 위치 보기
지도에 나타난 벌한에서 사선암의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재도 역시 좌우의 길은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인 것 같다.
램블러와 트랭글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항상 램불러의 거리가 약간 더 나온다.
들머리부근
들머리에 있는 마을 종합안내도,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시멘트길이 나 있다. 그 길로 올라간다.
시멘트 길이 지나면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아 능선을 목표롤 오른다.
큰절봉은 서래야표 방식이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고도 정도만 표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서래야님께 감사드릴텐데...명칭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건 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역까지 올라오는 길은 산행의 절반의 체력을 소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워낙 가파르게 올라오는 길이라..
능선만 밟으면 길은 좀 편한 편이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거칠봉의 정상 표지는 나무기둥이다. 플라스틱 표지판은 어느 산악회의 작품인 듯 / 삼각점의 좌표와 고도 표시.
능이재배 안내판, 등산로의 좌측으로 상당한 거리에 줄이쳐져 있다.
선인봉 정상의 안내문
선인봉 정상의 표지는 통신시설에 자리를 내어준 아래쪽의 이정표에 걸려 있다.
선인봉 정상의 산불감시시스템 / 부근에 비비추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선인봉에서 바라보는 향적봉과 적상산
선인봉 정상 전망데크에서의 조망판, 덕유산 향적봉과 적상산을 조망할 수 있는 방향이다.
사선암을 찾아가는 능선은 면경계이기도 하지만 국립공원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 50~100m 정도마다 시멘트로 만든 오래된 국립공원 경계표석이 있는데 누워버린 것도 더러 있다.
거리와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로 좀 바꾸었으면 좋겠다.
사선암의 안내판
안내판에서 우로 돌면 먼저 이시발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다.
이시발[李時發]
의병·독립운동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애국지사이자 교육자.
이시발(李時發)[1865~1934]의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간설(艮雪)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서 태어났다. 1896년(고종 3) 2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무주에 들렀을 때 항일 의사(抗日義士) 유완무(柳完茂)와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김구를 보호하였다. 당시는 김구가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형 집행 전 고종(高宗)의 특명(特命)으로 풀려난 후 삼남 지방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김구가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유완무와 함께 김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김구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하였다. 다만 그때는 김구가 이미 탈출한 후로서 이시발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김구를 지키고자 하는 이시발의 마음은 그만큼 대단하였다.
이시발은 이후로도 김구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 가고자 노력하였다. 김구가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 이시발은 유완무와 함께 만주로 들어가 학교를 세운 후 조국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유완무가 두만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살해되며 성사되지 못하였다. 학교 설립의 일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시발은 곧바로 고향 무주로 내려와 머물렀다. 이때 조정에서 이시발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경상도 상주(尙州)의 옥산 서원(玉山書院)과 충청도 금산(錦山)의 학암 서원(鶴岩書院)의 서원장(書院長)을 지내기도 하고 또 선비들과 대덕산방(大德山房)이라는 유계(儒禊)를 조직하는 등 구학문을 수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발 [李時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암벽면에는 4명의 선비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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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로[權喆魯]
조선 후기와 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오포(午圃).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권사도(權思道)이다.
권철로(權喆魯)는 백남(柏南) 하현(河鉉), 석치(石痴) 이해교(李海敎), 운파(雲坡) 하재만(河在晩), 권철규(權喆奎), 권대형(權大衝) 등과 함께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후인들이 계(契)를 만들어 그들의 덕(德)을 흠모하면서 본받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교유를 맺었던 사실은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 있는 사선암(四仙巖)에 '수계현각(修契懸刻)'이라는 각자로 새겨 두었다고 한다. 전북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고문서 가운데 권철로의 활동 상황을 보여주는 6점의 문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권철로는 정사년 3월, 기미년 3월, 신유년 2월, 계해년 10월, 계유년 11월, 을해년 11월 등 여섯 차례에 걸쳐 무주의 여러 유생과 함께 성주에게 상서를 올린 것으로 나온다. 상서의 내용은 풍동면 지산리에 사는 신덕경(申德景)의 처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시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행을 감영(監營)에 알려 정려의 특전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신덕경은 신덕필(申德弼)로도 나온다]. 상서를 올린 정사년, 기미년, 신유년, 계해년, 계유년, 을해년은 각각 1857년(철종 8), 1859년, 1861년(철종 12), 1863년, 1873년(고종 10), 1875년으로 추정되는데, 권철로의 생몰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활동 연대가 대략 19세기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 단서는 장복추(張福樞)[1815~1900]의 문집인 『사미헌집(四未軒集)』에 실린 「권씨 표열비기(權氏表烈碑記)」로, “무주(茂朱) 풍동 거사(豐東居士) 하재만(河在晩)의 아들 범(範)이 족형의 계비(繼妃) 권씨(權氏)의 포열장(褒烈狀)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라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 하재만이 바로 권철로와 교우를 나눈 사람이다. 하재만과 권철로, 장복추 등은 거의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므로 권철로의 활동 시기 또한 장복추가 활동하였던 19세기 후반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고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1. 「을해년 최종림 등이 수령에게 올린 상서」[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번호, 고03224]
2. 「신유년 권유도 등이 성주에게 올린 소지」[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번호, 고03229]
3. 「정사년 권유도 등이 성주에게 올린 소지」[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번호, 고03230]
4. 「계유년 권유도 등이 성주에게 올린 소지」[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번호, 고03232]
5. 「계해년 권유도 등이 성주에게 올린 소지」[전북 대학교 박물관 소장 번호, 고03233]
[네이버 지식백과] 권철로 [權喆魯]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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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하현 [河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개항기 무주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백남(柏南). 조선 전기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이며, 취은공(醉隱公) 하형도(河亨道)[1606~1678]의 8세손이다. 생몰년이 미상이나 8대조 하형도가 17세기 사람이니 개항기 정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이 집안이 무주에 들어온 것은 하형도의 아버지 하위국 때이다.
하현(河鉉)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학문에 심취하여 책을 놓지 않았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책을 즐겨 읽었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시(詩)를 본받아 기본으로 삼았다. 검소함과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서울을 출입하면서 거칠고 누추한 옷을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주자(朱子)가 ‘경(敬)’ 자를 조목으로 깨우침을 가르친 경재잠(敬齋箴)과 아침저녁으로 읽고 깨우치게 하는 숙야잠(夙夜箴)을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않도록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적성지(赤城誌)』속지(續地)에는 하현의 문집이 있다고 나오지만 전하지는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현 [河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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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만[河在萬]
개항기 무주 출신의 유학자이자 자선가.
본관은 진주. 자는 자범(子範), 호는 운파(雲波). 조선 초에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河演)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하진규(河鎭圭)이다.
하재만(河在萬)[1832~1909]은 1832년(순조 32)에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에서 태어났다. 기상이 높고 엄숙하였으며, 강직하고 씩씩하면서도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게 지내 우애의 본보기가 되었다. 학자로서도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필법이 뛰어났는데, 왕희지(王羲之) 서법에 능하였고, 학문은 송대의 대학자 주돈이(周敦頥)와 정호(程顥), 정이(程頥)의 정주학(程朱學)을 계승하였다. 병(丙)·무(戊)[연대 미상] 두 해에 흉년이 들자 곡식을 내어 구휼하였다. 고을 관아에서 하재만의 행실을 여러 차례 추천하여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1909년(순종 3)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적성지(赤城誌)』지(地)(무주 향교, 1957)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국역 적성지』천(天)(무주 문화원, 1999)
『무주 군지』중(무주 군지 편찬 위원회, 2004)
[네이버 지식백과] 하재만 [河在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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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교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찾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유학자 이석균의 처부로 나타난다.
이석균(李鉐均)
1855년(철종 6)∼1927년. 일제강점기 유학자이다. 자는 공윤(公允), 호는 소암(小庵) 또는 서주노민(西周老民).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김천시(金泉市) 구성면(龜城面) 상좌원(上佐院)이다.
증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이기수(李基遂), 조부 이원구(李源求), 부친은 나사(羅沙) 이준성(李浚性)이다. 외조부는 하빈이씨(河濱李氏) 진사 이시근(李時根)이다. 처부는 야로송씨(冶爐宋氏) 관악(觀嶽) 송인확(宋寅濩), 흥양이씨(興陽李氏) 이해교(李海敎)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두뇌가 명석하였다. 장인 송인확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장복추(張福樞)의 문인이다. 그는 평생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고, 구국을 위해 애국 운동에 참가하였다. 또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최종적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이황(李滉)의 이기설에 입각해 성리학을 재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영남지방 유생들이, 1881년(고종 18)에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릴 때 공사원으로 선정되어 참여하였으며, 곽종석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서명 운동에 참여하는 등 구국(救國)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장례는 사림장(士林葬)으로 치러졌다. 시문집 『소암선생문집(小庵先生文集)』이 있는데 석판본 10권 5책이다. 둘째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 사이에 1남 이현규(李鉉珪)가 있다.
맨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공장구지소(四公杖屨之所)'라는 각자가 있고, 그 좌측에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
四公杖屨之所
사선암의 안내글로 보아서는 화랑 사선 즉 '영랑, 술랑, 남랑, 안산'의 이름이 거명될 갈 기대했는데, 조선말기~일제강점기의 선비 4명의 이름이 기명되어 있다.
아마도 '영술남안'을 모델로 삼은 것일까.
이 시기에 바위에 새긴 글들 중에 곡성 동악산 도림사계곡, 청계동계곡 등의 암반에 새긴 각자들의 모습이 기억에 이어지는데, 그 중에 귀에 익은 지사 매천 황현의 이름도 있었지.
도림사 계곡의 구곡은 九谷이 아니고 九曲이다.
사선암은 밧줄을 잡고 오르는데 발디딜 곳이 있어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위에 올라가서 바둑판도 보고 조망도 즐긴다.
바둑판 앞에 앉은 모습고 바둑판
바로 옆의 바위도 웅장하지만 거리가 떨어져 있다./ 건너편에는 지나온 거칠봉 정상
북쪽을 돌아보면 영동의 민주지산 능선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각호산, 민주지산, 삼도봉
그리고 동쪽의 초점산, 대덕산 방향도 산을 돌아오면서 볼 수 있었던 조망이 좋은 산이다.
사선암 아래의 이정표는 깔끔하다.
칠목마을의 방문자센터가 세운 것인가..
방문자센터는 탐방지원센터가 아니다.
거칠봉을 지나, 선인봉에 이르렀을 때 사선암으로 향하는이정표가 없다.
그 곳에서 질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선인봉에서 좌측으로 하산해야 한다.
사선암으로 가는 능선길은 단순할 것 같으면서도 갈림길이 몇 곳 나온다.
이 산에서 GPS의 도움이 없으면 길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다.
GPS를 사용하고도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사선암에서 하산하는 길은 능선이 아니고 바로 내려서는데
철목리로 가는 이정표는
내려서고나서야 있다.
여기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자주 있는 이정표인데 조금만 더 친절을 베풀면 안되었을까 싶다.
철목(哲目)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가 있었다.
하산지점이다.